원장 칼럼 2011/12/01 11:08

후기: 마리아의 도전

 

은총을 가득히 입으신 마리아여, 기뻐하소서.

주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마리아께 나신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하느님의 모친 되신 마리아여

이제와 임종시에 우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사용자 삽입 이미지

 

 

 

팔레스타인의 마리얌이 당신에게 문안합니다.

"살람 알레이꿈."

전쟁의 소식으로 흉흉하던 2007년 어느 날, 노트에 끄적인 그림.

 

 

 

 

1. 개신교 형제자매들께

  사실 우리 개신교인들에게 성모송은 친숙하지 않은 텍스트 입니다. 어떨 때는 '천주교가 이단인 이유'의 대표적 증거가 되기도 하는 것이 성모송이지요. 저도 기독교인으로 산 시간의 대부분을 그렇게 생각하며 살았던것 같습니다. 천주교를 '우상숭배 이단'으로 부르는 것은 참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부를 수록 제가 개신교인인 것이 자랑스러워 졌으니까요.

 

  그랬던 저의 앞에 갑자기 막시밀리아노 콜베라는 인물이 나타났습니다. 그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보며 저는 제가 주님으로 고백하는 예수를 떠올렸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데에는 걸림돌이 있었지요. 콜베가 바로 성모신앙으로 유명한 사람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저는 두가지 정도의 선택가능한 문항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콜베가 '성모신앙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멋지게 따랐다고 생각하는 쪽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성모신앙으로 인하여' 예수의 충실한 제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쪽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저는 열심히 웹서핑으로 콜베에 대한 자료들을 살펴보고 천주교 서점에서 책들을 뒤졌습니다. 그러고서 내린 결론은 후자였습니다. 콜베가 건강상의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선교를 향항 열정을 포기 하지 않게 한 힘, 그가 수용소에서 예수처럼 남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게 한 힘…. 그 모든 것이 성모신앙과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그 때 저는 개신교인의 프라이드보다 중요한 것은 콜베를 통해 말씀하시는 예수의 음성을 듣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저는 이것이 '내려놓음'의 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서, 저는 여전히 일말의 회의를 가진 채로 성모송 묵상을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콜베가 느낀 그것을 조금이나마 맛보고 싶었던 거지요. 묵상의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성모송은 옛 성도들과의 연대로 저를 초청했고, 그 연대 안에서 흔들리지 않는 희망을 경험하게 했습니다. 바로 그 체험 안에서 콜베신부 또한 기쁨으로 자신의 생명을 내어줄 수 있었던것 아닐까요.

 

  연대와 기쁨, 이것이 성모송이 개신교인의 정체성을 가진 저에게 던져준 도전이었습니다. 제 글을 통해 여러분들도 이 도전의 목소리를 들으셨는지요. 못 들으셨다면 그것은 성모송의 문제가 아니라, 제 글의 문제였을 것입니다.

 

 

2. 가톨릭 형제자매들께

  동방과 서방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가톨릭 전통(정교회, 천주교, 앵글로-가톨릭 성공회)에서 성모송은 가장 보편적인 기도문 중 하나입니다. 특별히 서방교회 전통에 속한 천주교와 성공회는 매일 반복하는 묵주기도에서 성모송을 암송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성모송은 마치 '밥'과도 같습니다. 그 밥을 먹고 막시밀리아노 콜베도, 로메로 주교도, 도로시 데이도, 테레사 수녀도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으로 자랐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밥이란게 그렇지요. 소중한 만큼 그 소중함을 잊기도 쉬운것 같습니다. 저는 이런 질문을 던져 봅니다. 왜 같은 밥을 먹고 있으면서 우리는 콜베만큼, 로메로만큼, 테레사만큼 자라지 못하는 걸까요. 밥이 부족했던 걸까요 아니면 밥을 먹는 방법에 문제가 있었던 걸까요. 저는 성모송 묵상을 통해 이런 고민을 여러분과 나눠 보고 싶었습니다. 밥 비유를 계속 써 보자면, 밥을 요리하는 다른 방법을 한번 시도해 봤다고 하면 될까요. 누구든 저의 요리를 맛있게 드셔 주셨다면, 저는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3. 다른세계를 꿈꾸는 '동지'들께

   세상의 높은 곳에 서서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참 자주 절망을 경험하는것 같습니다. 몇년 전 대추리에서, 광화문 사거리에서, 그리고 얼마전 용산에서 우리는 국가의 권력이란 것이 실재하는 것이고, 또한 그것의 물리력이 아주 강하다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그런 현장에서 우리는 무력감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무력감의 반복은 우리의 동지들을 '전향'의 길로 이끌기도 합니다.

 

   기독교의 역사도 어쩌면 무력감과의 긴 싸움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을때, 자신의 동료가 사자의 먹이로 사라져 갈 때, 불타오르는 가족의 신체를 보았을 때 예수의 추종자들은 말할 수 없는 무력감과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지배자들이 원했던 반응이었을 것입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지배자들이 원하는 반응을 거부하기 위한 시도들로 가득합니다. 그것들이 성공적이었든 아니든 간에 그런 과거가 있었다는 것은 우리를 외롭지 않게 해 줍니다. 저의 묵상 글에는 우리가 어떻게 현재의 투쟁(글을 쓰던 당시에는 용산이 '현재'의 사건이었습니다)에 임할 때에 무력감과 절망감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담겨 있습니다. 물론, 저의 고민은 짧고 엉성합니다. 그러나 저의 신앙이 여러분의 싸움에 힘을 실어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저는 행복합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독자분들께 주님의 평화가 넘치시기를 기도합니다.

 

요한 드림.

 

 

2009.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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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01 11:08 2011/12/01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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