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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중

아렌트는 망명 유대인의 자살 충동을 분석하고, "(그들은) 싸우는 대신에 또는 어떻게하면 저항할수 있을지 생각하는 대신에, 친구나 친척의 죽음을 바라는 것에 익숙해져버렸다"고 진술했다. 그 때문에 그들은 "누군가 죽으면 이제야 그 사람이 완전히 어깨의 짐을 벗었구나 하고 쾌활하게 생각하"곤 한다. 결국에는 "자신도 얼마나마 어깨의 짐을 벗을 수 있길 원하게 되고, 그래서 실제로 자살하고 만다"는 것이다. "이 표면상의 쾌할함과는 정반대로 그들은 항상 자신에 대한 절망감과 싸운다. 그리고 결국 일종의 자기 본위로 죽음을 선택한다"고 말했다.

(...)

톨러나 벤야민이 '투쟁하는 대신' 자살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가혹하며 사실에 반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단지 내 나름대로 이 싯점에서 그녀의 심정을 헤아려보자면, 그녀는 어래도록 지속될 절망적인 투쟁을 각오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것은 인류가 이제까지 역사에서 경험한 바 없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 사악함과의 투쟁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더욱 망명 유대인들의 자살에 동정과 공감을 표명하지 않고, 그것을 '일종의 자기 본위'라고 말한 것이 아닐까?

(...)

'저 사람은 이제야 완전히 어깨의 짐을 벗었다'고 생각하는 것, '자신도 조금이나마 어깨의 짐을 덜 수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 즉 아렌트는 자신 안에서도 조짐이 보이는 절망과 자살에 대한 충동에 저항했던 것은 아닐까. 나는 그런 고난한 삶과 거기에 내재한 죽은 자들에 대한 통한의 정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30-33쪽)

 

 

'이해'에 대한 간절한 욕망, 그것은 소년 시절부터 변함없이 쁘리모 레비의 생애를 관통하고 있다. 과학정신은 파시즘에 대항하기 위한 무기였다. 그는 비합리적인 정신주의에 대한 경멸과 혐오감을 통해 파시즘에 의한 부식으로부터 자신의 혼을 지켰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아우슈비츠라는 이해할 수 없는 역(逆)유토피아의 세계에 던져졌을 때, 역유토피아를 지상에서 실현한 '독일인'을 '이해'하고 싶다는 욕망으로 이어져갔다. 싸워 이기기 위해서는 그 상대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욕망은 생환한 우에도 증폭되었다. 그것은 생명을 위토롭게하는 욕망이었다.

(61쪽)

 

 

'인간이라면 이렇게까지는 할 수 없을 것'이라는 통념, '인간이라면 여기까지 추락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기대, 그것들이 가차 없이 배반된 장소가 아우슈비츠였다. 거기는 '인간'이라는 척도가 철저하게 파괴된 역유토피아였다.

살아남은 극소수의 사람들은 "강제수용소의 지옥조차 소멸시킬 수 없었던 인간성"의 증인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 자신이 '아우슈비츠 이후'의 시대에서 '인간'의 척도이기도 한 것이다. 그들은 지상에서 현존한 역유토피아의 살아 있는 증인일 뿐만 아니라, '인간'이나 '문명'과 같은 관념이 파괴된 후에 다시금 '인간'이라는 척도를 재건하는 역할을 짊어진 사람들이기도 하다.

(156쪽)

 

 

 

이탈리아 유대인은 19세기 중엽의 국민국가 형성과 보조를 같이 하여 중세적인 신분 차별에서 해방되면서 이딸리아 국민으로서 사회에 통합되었다. 바꿔 말하자면, 이탈리아에서 유대인의 신분 해방과 이탈리아 국민화는 거의 동의어였다. '동화 유대인'으로 태어나 자란 쁘리모 레비에게 단테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로 상징되는 '이탈리아 문화'는 바로 자신이 가진 이탈리아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를 이루는 기초였다. 그렇기 때문에 파시스트의 반유대 조치라는 촉매에 의해 이탈리아 사회에서 '불순물'로 색출되어 배척되어가는 과정에서 오히려 '야만적인 파시즘'에 대한 '문명적인' 이탈이아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가 강화되어갔다고 생각된다. 게다가 그 아이덴티티는 단순히 한 민족 한 국민으로서의 아이덴티티가 아니라 인문주의 내지 계몽주의의 맥락에서 '보편적인 인간'으로서의 아이덴티티로 연결된다. 이런 의미에서 레비가 가진 이탈리아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는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는 데 대단히 큰 힘이 되었다. 단테의 [신곡]을 암송하는 장면은 그것을 상징한다.

(162-3쪽)

 

 

 

레비는 토리노를 '진정한 고향'이라 생각했고, 그곳으로 다시 살아 돌아왔다. 아메리의 경우는 고향인 빈에서 자신을 길러준 '독일 문화'가 바로 '독일 문화'의 자식인 그를 손바닥 뒤집듯이 바깥 세계로 추방해버렸다. 아메리는 전후에도 오스트라아에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고향과 그 사이에는 영원히 서먹서먹함만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

그러나 나는 레비의 경우에도 고향으로 살아 돌아올 수는 있었지만, 그 고향 아니 고향이라기보다 아우슈비츠 이후의 '세계'자체가 이미 예전과 같지는 안핬으리라고 생각한다. 일단 '불순물'을 분류하고 배척한 전력이 있는 사회가 또다시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는 없다. 그 의 아이덴티티가 근거한 서양문명은 나찌즘이라는 괴물을 낳아 자기 붕괴에 임박해 있었다. '저편'에서 살아 돌아온 그의 눈에는 '이편'의 세계에서 한없이 진행되는 수복 불능의 균열이 잘 보였을 것이다. 틀림없이 그 광경은 아프도록 신경을 건드리며 그를 한없이 불안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172쪽)

 

 

 

이런 사상의 희생자들은 멸시당하고, 굴욕적인 대우를 받고, 들볶이고, 노예로 혹사당하다 못해 아예 살육되었다. 그 각각의 장면에서 그들은 '같은 인간인데 왜?'라고 낮은 목소리로 신음했던 것이다. 근원적인 물음이다. 굴욕이나 고통과 함께 몸 안에 새겨진 이 근원적인 물음이 그들을 움직였고, '같은 인간'이라는 척도를 재건하는 어려운 위치로 그들을 내몰았다.

차별하는 자에게 '같은 인간'이라는 관념은 그냥 단순한 표어 정도로 처리할 수 있는 것이지만, 차별받는 자에게는 자신의 육체나 정신을 지키는 투쟁의 근거이며 무기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피해자 측은 언제나 가해자를 포함한 새로운 보편성의 틀을 재구축하는 역할을 짊어지게 된다. 그것이 인류의 역사를 관통하는 변증법이다.

(183쪽)

 

 

 

"옆 사람에게서 빵 4분의 1 조각을 빼앗기 위해 그의 죽음을 기다리는 것은, 그것이 자신의 죄가 아니더라도, 가장 야만적인 피그미(Pygmy, 아프리카 원주민의 한 종족)나 가장 잔인한 새디스트보다도, 사고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의 규범에서 벗어나 있다." 쁘리모 레비의 말이다. 나찌 인종주의의 희생자였던 그의 입에서 '야만적인 피그미'라는 말이 나왔다는 사실에 복잡한 생각이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다.

(...)

쁘리모 레비는 나찌즘과의 싸움을 '문명' 대 '야만'이라는 대립 구도로 파악했던 측면이 크다. 레비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이탈리아 저항운동의 유서]의 서문을 쓴 아뇰레띠도 파시즘을 "야만이며 문명과는 거리가 먼 잔혹한 것"이라고 형용한다. 당시의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레지스땅스 운동 자체가 전반적으로 유럽중심주의적 발상을 취했으며, 파시즘이나 나찌즘을 서구 '문명'에 대립하는 '야만'이라고 파악했다. 대부분의 유럽 지식인이 그렇듯이, 쁘리모 레비 또한 적어도 [아우슈비츠는 끝나지 않았다]를 쓴 시점, 전쟁이 끝난 직후 그가 아직 젊었을 때는 자기 내부의 유럽중심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듯하다.

(...)

다만 나는 쁘리모 레비에게 '문명'을 전적으로 부정하라거나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등의 요구를 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나는 아우슈비츠의 '야만' 세계에서 온갖 균열 속에 있는 '문명' 세계로 생환해온 그에게서 이 '문명' 세계의 자기 모순을 짊어지고, 새로운 보편적 문명의 구축이라는 난제의 무게를 견뎌내어 일어서는 동시대인의 모습을 보게 된다.

(192-4쪽)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은 여기에서 아렌트가 주장한 바가 독일이라는 정치 공동체의 성원, 즉 '독일 국민'의 정치적 책임을 면책할 수 있다고 오독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아렌트는 그후에 쓴 [집단의 책임]이라는 논문에서 '죄'와 '책임'의 개념을 명확히 구별한다. 그녀는 "우리 전부에게 죄가 있다"라는 호소가 현실에서는 실제 죄를 지은 자를 무죄방면하는 데 일조할 뿐이었다고 말한다. '죄'는 법적 개념이며, "엄밀한 의미에서 개인과 관련된다." 그와 다르게 정치 공동체의 선원이라면 누구나 짊어져야 할, 정치적 의미에서의 '집단적 책임'이 있다. 바꿔 말하면 '독일인'이라는 집단 중에서 '죄'를 지은 개인은 있지만 '독일인' 전체에 '죄'가 있는 것은 아니다. '독일인 전체의 죄'라는 생각은 오히려 죄를 지은 개인을 은닉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독일 국민이라면 누구나 독일이라는 정치 공동체의 행위에 '집단적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런 '집단적 책임'을 면할 수 있는 사람은 난민이나 망명자 등 '국가가 없는 사람들'뿐이다.

그런데 태연하게 '독일인'임을 수치스러워하지 않는 독일인이과 만났을 때 한나 아렌트는 뭐라고 말했을까? 흥미로운 문제다.

(211-2쪽)

 

 

 

아우슈비츠에서 해방된 지 20년 이상이 지나 유령처럼 나타난 뮐러, 정직하고 무기력한 평균적인 독일인인 그는 '과거의 극복'을 말하는 한편, I.G. 파르벤을 변호하고 유대인이 학살된 사실은 "몰랐다"고 한다. 부나에 있을 때조차 유대인인 레비에게 "왜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느냐?"고 물은 인물이었다. 말살의 위협에 노출된 강제수용소의 수인이 매일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측의 사람에게 자신이 왜 불안한지 설명하기를 요구받는 것이다. 게다가 상대는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그런 부조리르 전혀 "모른다"고 한다. 그런 인물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까?

(...)

지금에 와서 독일인들은 '독일인'이란 것이 실체가 없는 관념에 불과하다고 해명한다. 죄는 '독일인' 전체가 아니라, 히틀러나 아이히만 그리고 그밖의 특정한 개인에게 있다고 목소리 높여 주장한다. 혹은 죄는 '독일인'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에 있다고 무거운 어조로 설교한다.

그런 언급 하나하나는 너무 자주 들어서 진절머리가 날 정도며, 너무도 당연한 말이다. 하지만 누가 누구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인가. 독일인 중에서도 예외적으로 나찌즘과 싸우느라 희생을 무릅쓴 극소수의 사람이 있는데, 그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한다면, 피해자의 귀에 그것은 책임 회피를 위한 수사로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만약 책임 회피가 아님을 증명하려면, 상상할 수조차 없는 역유토피아를 지상에 불러온 그들의 '전통, 관습, 역사, 언어, 문화의 총체'를 독일인들 스스로가 히 흘릴 정도의 노력으로 해부하고 개조해가야 하지 않겠는가.

(227-9쪽)

 

 

 

쁘리모 레비 같은 아우슈비츠의 생존자도 김학순 할머니 같은 과거 '위안부'들도 모두 이 폭력의 세기에서 살아남은 귀중한 증인이다. 하지만 증인들은 자기 자신의 이해를 초월하고 표현 가능성을 초월한 경험을 증언해야만 한다. 이해 불능의 경험을 이해하고, 표현 불능의 상황을 표현하고, 전달 불능의 상념을 전달한다는 본질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부조리하게도 증인들에게 부과된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증인들은 부당한 의심과 무관심한 시선에 둘러싸여 고립된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2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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