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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트워크 마케팅...

 중학교 시절부터 친한 친구와 오랜만에 밥 한 숟가락했다.  이 친구는 내 친한 친구들 중 가장 수학을 잘하고 좋아하는 친구여서 항상 신기하게 바라봤던 그런 녀석이었다. 아침부터 수학의 정석을 피고 집에 갈때 까지 하루종일 공부를 하던 기억이 있다.

 

 문제는 그런 친구가 흔히 말하는 명문대 재학도 포기하고 네트워크 마케팅 즉, 다단계를 시작했다. 내가 군에 가있을 때 시작했다는 얘기를 들었으니 1년이 조금 넘은 듯 하다. 처음엔 믿지 않았는데 주변 친구들이 나에게 전화를해서 그 친구가 요즘 계속 전화를 하는데 아무래도 낌새?가 이상하다. 그러니 너가 한번 알아봐주라는 연락을 몇번이나 받은 후에 알게되었다. 네트워크 마케팅을 하고 있다고.

 

 옷도 항상 수수하게 어머니가 사다 주시는 옷만 입고 범생이 안경에 수학 공부만 하던 녀석이 양복을 빼입고 머리에 왁스도 바르고 교대 인근에 거리를 활보하며 다니고 있었다. 그 친구는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이 일을 하면서 많이 변했다. 소심했던 성격도 고쳐지고 이성을 대하는 것이 힘들었는데 지금은 그런 것도 없어지고 사람들 앞에서 항상 자신감이 넘치고 부모님께 하는 일에 대해서는 말씀드리지 못했는데 일단은 아들이 멋지게 하고 다니니까 보기 좋다고 하신다며....

 

 문제는 네트워크 마케팅에 구조상 자신에 밑에 사람을 두어야 하기에 온갖 친구들에게 전화를 해서 한 번 들어봐라. 다단계라고 다 같은 다단계가 아니다. 내가 하는 건 조금 다르다. 우리는 튼튼한 회사다. 절대 물건을 사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등등의 썰을 풀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 만난것도 하도 보자고 한 번 얘기나 들어달라고 해서 어디 한번 진지하게 들어나 보자고 해서 갔다. 문제는 이 친구와 얘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어떤 세련된 여성분이 자리에 합석을 하더니 친구의 회사 동료인데 반갑다며 인사를 하더니 사무실와서 한번 설명을 들어보라고 계속 권유를 하고 은근슬쩍 말도 놓더니 여자친구는 있냐 여기 예쁜 사람들 많으니까 잘 해보라는 등등 아무튼 나에게는 별 흥미없는 이야기들을 늘어놓더니 내가 미동이 없으니 이번에는 멋지게 차려입은 남자 한 분이 등장해서 또 계속 비슷하고 똑같은 얘기들을 늘어놓았다.

 

 안타까웠다. 난 소중한 친구 얼굴이나 오랜만에 한 번 보고 밥이나 한 숟가락하고 하는 일 얘기나 조금 들어주고 뭐 내가 도움이 못 되어서 미안하지만 어쨌든 너가 즐거워하니 밑지지나 말고 잘 되길 빈다 정도에 얘기를 해주려고 했었는데 이 친구는 나를 '고객'으로 나를 본 것이다. 이 친구가 네트워크 마케팅을 통해 성격이 밝아지고 말도 조리있게 하게 되고 붙임성도 있어져서 그런 부분을 긍정적으로 생각했었는데 씁씁했다.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해줬다. 내가 학교를 다니면서 집회에 가고 흔히 말하는 빨간책 읽고 혼자 뜨거워져서 열내고 다닐때 내가 너에게 같이 했으면 좋겠지만 만약 할 수 없다면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응원해주고 지지해줬으면 좋겠다. 이런 얘기를 하지 않았나? 이와 마찬가지로 나는 너가 하는 네트워크 마케팅을 같이 할 수는 없지만 어찌되었건 너가 열심히 하고 있는 일이니 잘 되기를 응원한다. 나중에 서로 도움이 될 수 있는 부분이 있으면 돕고 살자. 이런 얘기를 나눴다. 

 

 

 이 친구는 중학교 시절 다른 친구들에게 따돌림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그 이후에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과 거에 경험이 이 친구를 위축들게 했고 주변에 친구가 많지 않았다. 대학에 가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이런 와중에 다단계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운동의 핵심이 '사람'에 있듯 다단계의 핵심도 '사람'에 있지 않은가?

이들에 짜여진 기획된 '친절'함에 이 친구는 쉽게 스며들 수 밖없었던 것이다. 계획되었든 어찌되었든 수 많은 사람들과의 대인관계와 세련된 양복 한 벌이 이 친구에게는 달콤했을 것이다.

 

 내가 조금 더 잘 해줬더라면... 내가 다른 친구들을 독려해서 이 친구가 상처를 극복하도록 옆에서 도왔다면...

이 친구가 그 비정한 이윤만이 전부인 네트워크의 세계에서 벗어나서  인간의 삶이 주인이고 전부인 새로운 네트워크 세계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약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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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개월을 돌이켜보며...

 드디어 5개월간에 알바 생활을 마쳤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마트에서 알바를 마쳤다고 하는 표현이 맞을것이다.

군을 전역하고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나볼 계획으로 무작정 시작했던 아르바이트가 이렇게 길어질줄은 몰랐다.

돈이라는게 모으려고 하면 할수록 모이지 않는다는 것을, 사람에 욕심이란 끝이 없다는 것을, 연장 수당이 얼마 되지 않지만 그래도 한푼이라도 벌어보려고 잠 몇시간 줄이고 일해도 끝이 없다는 것을 몸소 배웠던 시간이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했다. 직장생활 즉 '돈'을 벌기 위해 현장에서 매일 출근하고 반복된 업무와 사회생활에서의 인간관계 그리고 퇴근하는 이 생활이 굉장히 지긋지긋하고 인간을 병들게 한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연영석 동지에 '간절히' 곡에 나오는 가사처럼 '우리가 일하고 싶을때 일하고 일한만큼만 받는 세상'을 간절히 원하게 되었다.

 

 10년을 넘게 일해도 월급은 제자리인 단지 언제든 다른 사람으로 쉽게 대체할 수 있고 이 나이에 나같은 사람을 어디에서 받아주겠냐며 자신에 숙련 노동을 애써 쑥쓰러움과 겸손으로 표현하시는 아주머니들... 관리자라는 이름으로 팀장이나 점장과 일하시는 아주머니들과 알바들 사이에서 무수히 쏟아지는 갈등을 다 해결도 못하는 '직원들' 강요된 두꺼운 화장과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하루 종일 '고객님'들에게 상품을 파는 것 이상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노동을 하고 있는 여성노동자들... 하루 종일 그 넓디 넓은 매장을 쓸고 닦고 냄새나고 더러운 화장실과 흡연실을 청소하지만 그 아무도 그/녀들을 봐주지 않는 청소 노동자들... 

 

 07년 뉴코아-이랜드 투쟁을 통해 나의 삶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내가 곧 '노동자'임을 깨닫게 해 준 곳이었다. 자본이 얼마나 야만적이며 더러운 것인지, 그렇기에 노동자가 힘을모아 저 자본을 변혁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우리가 일하고 싶을 때 일하고 일한 만큼 받는 세상을 건설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2011년 그 당시와 상황이 달라진 건 없었고 그것을 몸소 느꼈다. 정말 가야 할 길일 멀다는 것을 또 한번 깨달았다. 그리고 내가 5개월간 있던 공간에서 그 어떤 변화도 아니 변화의 싹도 키워내지 못하고 이렇게 몸만 쏙 빠져나온 내 자신이 너무도 부끄럽다.

 

 내일이면 이들은 또 다시 반복된 삶을 살아 갈 것이다. 여전히 일에 쩔어 담배에 쩔어 스트레스에 쩔어 살아 갈 것이다. 그려면서도 집에 있을 가족을 위해 노후를 위해 조금 더 안락한 삶을 위해 조금 더 편안해 질 때까지 조그이라도 젊을 때까지만 참자고 혼자 되뇌이며 그렇게 살아 갈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혼자 유럽으로 여행을 가면 되는 건가? 그건 아닌 듯 하다. 지겹게 반복되는 삶에서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이 저 자본에서 그/녀들을 구해야지 않겠는가? 그러기 위해 노동자 문화가 절대적으로 있어야 한다. 노동자에게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하다. 자본의 논리가 아니라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는 것 이를 위해 함께 힘을 모아야한다고. 책을 통해 서로에 삶을 나누고 지금 여기에서 매 순간순간이 행복한 삶을 살아가도록 하고 싶다. 자신이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는지 뒤를 한번 돌아보게 하는 그러한 책, 시도 읽고 그림도 보러 가고 악기도 하나씩 배워서 합주도 하고 합창도 하고 함께 모여 주말엔 등산도 하고...

 

 5개월에 시간이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내가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지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었던 시간이었다. 그렇기에 너무도 소중했던 시간이었다. 이제 고단한 일도 정리가 됬으니 명절에 푹 쉬고 본격적으로 밀렸던 책들을 하나 하나 읽고 정리해야겠다. 일 할땐 책이 읽고 싶고 한창 배우고 있는 기타도 치고 싶고 그랬는데 간사한 내 몸뚱아리가 과연 정말 그렇게 움직여줄지 모르겠다.

시원섭섭하면서도 뭔가 찜찜하고 안타깝고 부끄럽고 가을이 오는 것 같아 외롭기도 한 그런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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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더 이상 이용하지 말아라!

지루하게 진행되던 공방전이 드디어 끝이 났다.

물론 '주민투표'는 더 이상 학생들이 기본적으로 누려야 할 권리로써의 무상급식에 성격을 벗어난지는 오래되었기에 어찌보면 이제부터 시작이라 하겠다.

 

 보수 진영은 이번 선거 결과로 앞으로 벌어질 대선과 총선을 앞두고 큰 고비를 겪게 되었기에 최대한 '주민투표'의 영향력을 최소화하는데 전력을 다 할 것이다. 또한 자유주의 개혁 새력에 맞서서 대중들에게 최대한에 시혜적 복지를 주장할 것이다. 이미 '복지' 담론이 없이는 정치판에서 어떤 이야기도 할  수 없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그렇기에 보수 진영은 최대한으로 대중들에게 시혜를 베풀것이다. 

 

 자유주의 개혁 세력은 이번 선거를 계기로 '무상' 시리즈와 '복지' 담론을 선점하게 되었다. 또한 야권연대 또한 힘을 받게 될 것이다. 선거가 끝나고 30분 후에 벌써부터 다음 서울시장 재보궐선거에서 누구를 후보로 내새울 것이냐? 야당이 공동후보를 내므로써 대중들에 결집력을 이끌어내고 이를 바탕으로 대선과 총선까지 승리로 가져가자는 분석과 함께 김칫국을 한 사발 들이키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분석은 대부분의 주류언론이 갖고 있는 생각과 전혀 다를 것이 없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의무교육을 받는 학생이 급식 또한 의무적으로 무상으로 받아야 하는지? 또 무상으로 무료 급식을 받게 된 결정이 얼마나 중요한 지? 어떠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빠져있다.

 

주민투표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교육의 주체인 학생들에 의견은 반영이 되었는가? 반영하려고 노력이나 했는가?

제도권 교윽을 거부하고 학교를 다니지 않는 10대 청소년들에 권리는 반영할 수 없는 것인가? 등에 담론은 하나도 없다. 오로지 시장, 교육감, 정당, 언론인, 교수 등 사회적 문화적 자본을 갖고 있는 이들에 의견만이 존재했다.

 

이렇게 위선적이고 권위적이고 시혜적이고 주체를 대상화 시키는 '주민투표'가 참으로 안타깝게 느껴진다.

국가와 정부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의무교윽을 시행하고 있기에 의무교육을 받는 주체들이 학교라는 공간에 있는 시간동안 무상으로 급식을 하는 것이 얼마나 대단할 일이기에...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인데...

징병제를 하고 있는 국가로써 군인에게 밥을 의무적으로 주는 것과 학생들에게 밥을 의미적으로 주는 것이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기에?

 

문제는 '무상급식'이 아니라 무상으로 교육을 받을 권리 아니 의무적으로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으니 당연히 무상교윽을 시행하고 학생의 80%이상이 대학을 가는 우리 사회에서 대학교육까지 무상으로 시행하며 대학이 사회적 권력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교육의 장'으로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입시제도를 폐지하고 대학을 평준화 하는 것. 이러한 논의가 진행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무상 교육'과  '입시폐지 대학평준화'를 실현하기위해 노력하지 않는 야권이라면 이들에 대통합논의를 굳이 귀담아 들어줄 필요가 있겠는가?

교육의 주체인 학생들에 의견이 반영될 수 있는 그런 교육의 현장은 언제쯤 올 것인가?

이 사회에 어른들은 언제까지 청소년을 대상화하고 시혜를 베풀려고만 할까? 본때를 보여줘야 하나

우리를 대상화하지 말라고. 우리를 이용하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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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모든 시는 산재시다

나의 모든 시는 산재시다

세계 산재노동자 추모의 날을 맞아

                                                                                 송경동

 

산재추방의 날에 읽을

시 한 편 써달라는 얘길 듣고

멍하니 모니터만 보고 앉아 있다

또 뭐라고 써야 하지

무슨 말을 할 수 있지

 

잘린 손가락과 발들을 위로하면 될까

강압으로 목과 허리에서 탈출한 디스크 추간판들을 위로하면 될까

모든 부러진 뼈, 찢어진 눈, 터진 머리, 이완된 근육

닳아진 무릎, 손상된 폐를 위무하면 될까

압사, 추락사, 감전사, 질식사, 쇼크사, 심근경색, 유기용제 중독으로

하루에 여덟 명씩 일수 붓듯 착실하게 죽어간다는

모든 산재 열사들을 추모하면 될까

 

식당 아줌마, 중국집 배달부, 퀵 서비스, 가사 노동

모든 비공식부문 노동자들에게도

180만 특수고용 노동자들에게도

영세농민에 불과한 농업 노동자들에게도

산업폐기물이 된 노령인들에게도

산재보험을 적용해달라고 간구하면 될까

산재 민간감시원을, 산재요양 기간과 적용 범위를 좀 더 늘려달라고

산재 주무기관을 좀 더 민주화시켜달라고 청원하면 될까

 

산재추방의 날에 읽을 시 한 편을 써달라는 얘길 듣고

멍하니 모니터만 보고 앉아 있다

사무직 노동자들은 산재가 없을까

써비스직 노동자들은 산재가 없을까

전문직 종사자들은 산재가 없을까

내 아내에게는 내 아이에게는 산재가 없을까

사랑하는 사이에는 산재가 없을까

신체가 늘어지거나 부러지거나 잘리는 것만이 산재일까

비정규직으로, 실업으로 쫓겨나는 것은 산재 아닐까

쪼들리는 삶으로부터 오는 모든 정신의 훼손과 관계의

파탄은 산재가 아닐까

 

나의 모든 시도 실상은 산재시다

내가 외로움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모든 형태의 산재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이 세계의 대한 항의다

내가 자연을 그리워할 때 그것은

모든 조화로움으로부터 쫓겨난

근본적인 산재에 대한 항변이다

 

보라, 저 거리에 나온 모든 상품들도

불구의 몸으로 산재를 앓고 있다

보라, 저 거리에 선 모든 나무들도

팔다리 잘리며 산재를 앓고 있다

보라, 저 들녘 강물의 모든 실핏줄들도

검은 가래에 막혀 산재를 앓고 있다

보라, 저 하늘 위에서 내리는 모든 눈도 비도

산재에 물들고 있고, 보라

저 하늘의 오존층도 우리의 폐처럼

숭숭 구멍 뚫리고 있다

 

이 모든 산재를 보상하라고

우리는 말해야 한다

이 모든 산재를 지속가능한 상태로 되돌리라고

우리는 요구해아 한다 누구에게? 저 자본에게

우리의 잘린 손가락과 발가락을 모아

닳아진 무릎 뼈와 폐혈관과 혼미해진 정신을 모아

배부른 저 자본에게 우리는 요구해야 한다

이윤이 중심이 아니라

건강과 안전과 평화와 연대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가장 악독한 산재, 이 눈먼 자본주의를 추방해야 한다고

모든 스트레스의 근원인 착취와 소외의 세계화를 막아야 한다고

모든 사랑스런 관계들을 파탄으로 내모는

이 불안정한 세계를 근절해야 한다고

 

산재추방의 날에 읽을 시 한 편 써달라는 얘길 듣고

멍하니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다

자본주의를 추방하지 않고

산업재해 없는 세상이 올 수 있을까

생각하면 이렇게 간단한데 그것이 왜 이다지도 어려울까

나와 우리가 진정으로 겪고 있는

가장 엄중한 산재는 이것이 아닐까

더 이상 희망을 말하지 못하는

다른 세계를 꿈꾸지 못하는

이 가난한 마음들, 병든 마음을

 

 가장 엄중한 산재는 더 이상 희망을 말하지 못하고 다른 세계를 꿈꾸지 못하는 가난한 마음이지 않느냐. 이 ‘말’이 나를 부끄럽게 했다. 지금에 내 마음이 병 들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희망 버스’를 통해 많은 대중들이 너와 내가 함께 미약하지만 ‘운동’을 하고 있구나, 혹은 그래도 아직 희망은 있구나, 등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연대의 에너지를 ‘희망 버스’를 통해 확인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나는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조금에 여유 ‘돈’이 있는 편이 낳겠다 싶어서 ‘일’을 시작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뭔가 답답하고 무엇을 위해 ‘일’을 하고 있는지 어떤 벽에 갇혀 있었다. 그런 나에게 송경동 시인은 질문을 던졌다. 너에 마음은 병들어 있다. 아니 지금 우리는 병들어 있다. 우리에 꿈과 희망마저 앗아간 저들에게 산재를 요청하고 막아내야 한다고.

문제는 현실에 벽을 뛰어 넘기가 쉽지 않다. 아니 뛰어넘고 나면 후회하며 살 것 같아서 두렵다. 보통 환자들이 병원에가 가서 의사에게 진찰을 받거나 사진을 찍어보고 병이 확인되면 치료를 시작하지 않는가? 나에겐 송경동 시인이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으로써 내 병을 확인했다. 문제를 치료를 시작해야 하는데... ‘활동가’로써의 삶은 병을 가장 근본적으로 나게 하는 수술이 될 것이다. 문제는 그 수술에 후유증이 겁이 난다. 그리고 다른 방법은 ‘출판인’으로써 의 삶이다. 그 길은 수술에 대한 후유증도 비용도 부담이 없는 그런 삶이지만 평생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근본적으로 ‘병’을 ‘야만적인 자본’의 시대를 끝낼 수 없다.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다. 물론 꼭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사고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고 잘못된 판단이다. 하지만 뭔가 근원적인 해결책은 아니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시’는 나에게 질문을 던지게 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지침이 되고 새로운 상상력이 되어준다. 조지 오웰이 말했듯 어떤 ‘책’이든 정치적이지 않은 것은 없다. 예술이 문학이 정치적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 자체로 이미 정치적이지 않은가?

나도 시인이 되고 싶다. 예술가가 되고 싶다. 해방에 상상력을 읽고, 쓰고, 그리고, 말하고 싶다. 

이 시대 모든 노동자, 여성, 장애인, 소수자 들과 함게 해방에 '문화'를 꿈꿈고 싶다 

내 ‘글’ 과 '상상력'이 야만의 시대를 끝내는 데 주춧돌이 되었으면 한다.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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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꿈을 담아 누구에게 비행기를 날렸니?

과연 저 아이는 어떠한 꿈을 담아 비행기를 날렸을까?

입시지옥에서 탈출하는 꿈?

아니면 다음 모의고사에선 한 등급만 더 오르기를 바라는 꿈?

사귀던 친구에게 차마 말로는 못해 글로 담아 보낸걸까?

 

난 저 나이에 어떤 꿈을 꾸며 살았었지?

불과 몇 년전에 일인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는 10대에 청소년에게 '입시 지옥' '경쟁' 말고는

우리에게 ' 좋은 대학' 이외에는 어떠한 희망도 꿈도 꿈꾸지 못하게 했던 것 같다.사용자 삽입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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