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그리스, 델피, 디오니소스 극장, 비극을 생각하다.

그리스, 델피, 디오니소스 극장, 비극을 생각하다.

그리 오래 있지 못한데다가 마지막 여행지인 그리스에서는 무척 아쉬움이 많다. 몇가지 이야기가 있겠지만, 우선 비극에 대해서 이야기를 잠깐하자. (그리스 문명, 그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인상 등은 다음 글이 가능하다면 쓸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내가 많은 비극에서 등장하는 신탁의 장소인 델피(델포이), 그리고 오늘은 아크로폴리스 옆에 디오니소스 극장에 다녀왔기 때문이다.

델피

아테네에서 버스를 타고 세시간 정도 걸리는 델피는, 아폴로 신전의 신탁으로 유명하다. 소포클레스가 쓴 오이디푸스에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신탁을 받은 곳도 여기다. 오이디푸스의 아버지 라이오스가 죽게 된 것도 델피 신전에 신탁을 받으러가다가 오이디푸스를 만났기 때문이다. 아이스퀼로스의 아가멤논 연작에도 델피가 소재로 사용된다. (모두 신화의 이야기.)

델피에 다가가면서, 아, 그리스인들이 왜 이곳에 신탁의 장소, 아폴로 신전을 지었는지 조금씩 느낄 수 있다. 낮은 구릉들만 있는 평원에 혼자서 우뚝 솟아있는 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정상 쪽에는 구름까지 끼어있다. 산으로 버스가 오르자, 높은 절벽과 깊은 계곡(물은 없지만)이 펼쳐진다. 마침내 도착한 델피는, 그 장소 자체가 장관이다.



델피를 신성하게 만드는 것은 사람이 만든 신전 이전에 그 산과 계곡이었던 것이다. 자연이 만든 숭고함이다. 절벽에 걸려있는 신전에서 바라보는 전경은, 마치 하늘에서 지상을 바라보는 것같은 느낌을 준다. 신성한 장소라는 곳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걸 알게 된다. 하늘과 땅의 중간지대. 그리스인들이 이 곳을 신의 말(言)이 내려오는 곳이라고 생각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 사람들은 태양과 이성의 신인 아폴로를 예언의 신으로도 생각해서 신탁을 받았다. 현대의 우리들의 관념으로는 잘 이해가 되지않는 일인데, 예언은 이성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폴로는 운명의 신들과는 불화하면서도 예언을 관장한다. 그것은 그리스 사람들이 미래를 아는 것은 (비록 신탁이라는 종교적 형태로 표현되지만) 알 수 없고 변덕스러운 운명이 아니라 이성을 통한 예측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같다.

하지만, 그러한 신탁이 운명을 어찌하지는 못했던 것같다. 신화의 내용에서, 사람들은 신탁을 듣고 운명을 바꾸어보려고 하지만 결국은 제자리 걸음을 하고 마는 이야기가 많다. 비극의 주인공 오이디푸스도 그런 경우인데, 신탁은 운명의 아이러니를 더욱 강조한다.

오디이푸스는 신탁을 통해서 미래를 알았으면서도, 그리고 그 자신이 매우 현명한 사람이었으면서도 운명을 피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가 운명 앞에서 파멸하는 이유는 사소한 기질 상의 단점(길가는 노인--아버지--를 살해한 성급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고귀한 성품(진실을 끝까지 대면하고자하는) 때문이다. 위대한 인간의 파멸은 비극의 극적 효과를 극대화시킨다.

디오니소스 극장

다음날 오후에 간 아크로폴리스 아래에는 디오니소스 극장이 있다. (같은 티켓으로 입장할 수 있다.) 극장을 찾느라 더운 날씨에 좀 헤메서 기진맥진해서 도착했다. 이렇게 찾은 극장은 규모가 큰 것은 아니지만, 정말 감격스럽다. 바로 이곳에서 위대한 비극들--소포클레스, 아이퀼로스, 에우리피데스의 작품들이 공연되었던 곳이구나. 별이 빛나는 밤에 여기 객석 어디선가는 아리스토텔레스도 위대한 극작가들도 비극 공연을 관람했겠지.



땡볕 속에서 객석이 잘 보이는 좋은 자리를 잡아 앉는다. 비록 무너진 극장이지만, 수천년 전 공연된 비극의 감동이 남아서 울리는 것같다. 이곳에서 비극경연대회가 열리고, 비극이 초기형태로부터 완숙한 형태(아리스토텔레스가 이제 비극은 완성되었다고 말한)까지 꾸준히 창작되었다.

시간을 견디는 것

비극경연대회는 사라지고, 그리스 문명도 쇠락하고, 돌로 된 극장마저 무너졌지만, 비극은 시간을 견디고 남았다. 지금도 그리스 비극은 세익스피어와 함께 가장 위대한 비극으로 평가받는다. 평가가 문제가 아니라 작품 자체가 주는 감동은 말할 수 없이 크다.

그 비극들은 단지 슬픈 이야기가 아니다. 윤리적이며 철학적이고, 예술적 감동을 준다. 비극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위대함이 드러나는 예술형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눈물짜는 신파와는 다르지만 더 오래 남는 슬픔을 전하고, 또 단지 눈물 흘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슬픔을 ‘사고’할 수 있게한다.

알 수 없는 운명과 불화하고 그 때문에 파멸하더라도 위대한 인간들이 위대하다는 점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 운명--Fortuna여신--의 것은 그녀에게, 그러나 나의 영혼의 일은 나에게. 아폴로--태양과 이성--도 알 수 없는 운명의 장난이 어떤 미래를 불러오더라도.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