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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안]비정규직조직화 전략세우기

민주노총 서울본부에서 진행한 "미조직비정규직노동자 조직화를 위한 서울지역 조직역량강화교육"의 일환으로 진행한 교육 교안. "미조직비정규직 노동자 조직화 전략 세우기"라는 주제.

비정규직 전략조직화 사업을 각 조직에서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에 대해서 진행한 교육과 실습이다. 보통 노동조합의 사업계획 세우기 교육과 유사하지만 다만 미조직비정규직노동자 전략조직화 사업이라는 영역에 특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교안은 전반적으로 일종의 짜집기다. 앞부분, 노조가 처한 외부적인 조건 도식은 민주노총 교육에서 가져온 것이다. 두번째 부분 노동조합 활동의 일반적인 사업도식은 논란이 될 수도 있겠지만, 경영학의 조직관리론 쪽에서 비영리기관 조직관리 도식을 가져온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타당성 있는 측면이 있다. (특히 조직자원 영역에서 지속적인 학습을 강조하는 부분 등)

세번째 부분은 이 교육의 첫강의로 진행된 철폐연대 김혜진 집행위원장 강의와 민주노총의 전략조직화 사업에 대한 정의에 비추어 고려해야할 사항을 도식에 맞추어 다시 정리한 것이다.

이렇게 짜집기이기는 하지만 몇가지 강조하려고 했던 부분은 있다.
우선, 앞서 말한 것처럼 조직의 자원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는 지속적인 학습과 구성원의 팀웍(단결력이라고만 말하기에는 더 있는)이라는 점. 지속적인 학습은 또 하나 강조하려고 한 내용인 '조직의 목표설정'과 관련되어 있다.

조직의 목표설정을 특히 강조하려고 한 부분. 비정규직 조직화를 왜 하냐는 것을 질문하려고 했던 것이다. 단순히 조합원을 몇명 늘리자는 취지라거나 혹은 남들 다 이야기하니까 하는 당위가 아니라 어떤 운동적인 의미가 있는지를 물어야한다는 점을 강조하려고 했다. 그래야만 비정규직 조직화가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의 일환이라는 점을 상기하고, 또한 그런 측면에서 어떻게 사업을 해야할 지 사고할 수 있다. 조직화 사업의 모든 측면에서 그 (운동적이고 정치적인) '목표'가 구체적으로 녹아나야한다.

진행을 하다보니 더 세부적인 사항을 고려해서 보완해야할 지점들이 있다는 생각이다. 시간적으로도 불과 3시간 정도에 진행하기는 힘들다. (조직별 토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직진단이나 사업전략세우기와 같은 각종 실습 교육에서도 조직을 어떻게 만들고 운동할 것인가라는 쟁점을 반영해야한다는 점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아래는 교안 파일 링크.
교안 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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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여름



그 해 여름
(2006) / 121분/2006-11-30

작년에 개봉했던 영화인데 뒤늦게 보았다. 작년에도 11월말에 개봉했으니, 여름이 배경이기는 하지만 겨울에 보는 게 적당한 것같기도 하다. 조금 더 영화와 거리를 둘 수 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는 해도, 영화는 관객 대부분이 갖고 있을 각자의 '그 해 여름'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그래, 바로 '그 해 여름'이었다.

사실, 영화는 좀 어설픈 점들이 없지 않다. 1969년의 농활이라는 설정도 그렇거니와, 시대적인 배경을 생각해볼 때 영화에 나오는 방식으로 대학생들이 농민들을 만나는 설정도 어색하다. 그리고 서울에서 온 대학생이 농촌의 처녀를 사랑하게 된다는 설정은, 도시-농촌, 지식인-무지자의 차이를 남성-여성으로 환유하는 불편한 구도다. 사건의 전개는 어쩌면 상투적이기도 하다.

여튼, 진부한 얘기는 이 정도로 하고,

영화는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봄날은 간다>의 상우/유지태)라는 질문에 대해서, "어떤 사랑은 변하지 않아"라고 말한다.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헤어지더라도 말이다. 그 마음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다시 만나지는 못하더라도 정인(수애)처럼 혼자서 편백나무 잎을 세상 어딘가로 열심히 보내는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모든 사랑은 변한다"" 혹은 "어떤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라는 서로 상충되는 두 가지 주장들이 가능할 것이다. 어느 쪽이 되든 절망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뭐, 어느 쪽이든 좋은 사람도 있겠지만 말이다.

이런저런 어설픈 틈새들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살아있는 건 거의 두 명의 주연 배우 덕분이다. 특히 (그리 예쁘다고 할 수는 없는) 수애라는 배우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도 없었더랬는데 영화를 보면서 아주 깊은 매력이 있는 배우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흔한 미모보다는, 다른 종류의 매력이 있다. 좋은 배우를 좋은 연기로 만난 것같아 좋다.


영화를 보려고 떠올렸던 건, 영화와 별 상관은 없지만 제목은 같은 노래 때문이다. 새로산 MP3플레이어에 놓을 노래들을 고르다가, 한동안 잊고 있던 곡을 다시 듣게 되었다. '펄스데이(Pearl's Day)'의 '그해 여름'이라는 곡이다. 우연찮게도 이 영화에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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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대한민국 병원 사용설명서


대한민국 병원 사용 설명서
강주성 지음 / 프레시안북

 

 

책을 쓴 강주성씨는 참 독특한 사람이다. 사회운동과는 거리가 먼 생활인이던 그는 백혈병 환자가 된 후 우리나라 의료체계의 모순을 온몸으로 경험한 사람이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자기몸 하나 간수하기도 급급했을 텐데, 그는 동료 환자들과 함께 이 모순에 싸우기 위해 집단적인 힘을 모았다. 다행히 병을 고친 그는 이제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이는 한국의 보건의료 체제와 맞서 싸우기 시작한다. (지금은 '건강세상네트워크'라는 보건의료운동 단체에서 일한다.)

 

그래서 그가 쓴 이 책은 죽음의 문턱, 가장 절박한 시기에 병원을 '사용'한 사람이 느낀 절박함이 담겨있다. 그리고 그런만큼 치열한 대안에 대한 고민도 담겨있다. 그 절박함은 자신은 물론, 돈이 없어도 살아남을 권리를 주장하다가 먼저 세상을 뜬 동료 환자들의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들 자신의 것이기도 하다.

 

이 책은 한국의 보건의료 체제의 문제, 의료기관의 부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고발하는 것을 넘어서 매우 구체적인 대안들을 제시한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제도를 어떻게 바꾸어야하는가에 대한, 환자(따라서 보통의 시민들)의 입장에서, 그리고 현장에서의 시각으로 탄생한 대안이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아주 더 실용적으로, 환자의 입장에서 실제 병원을 이용할 때 어떻게 해야하는지 '매뉴얼'을 담았다. 사회적인 대안과 개인적인 대책을 모두 담은 셈이다.

 

저자는, 집단적이고 사회적인 운동은 물론 개인들이 병원을 이용할 때 병원에게 원칙대로 할 것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운동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자기 권리를 주장함으로써 병원을 당혹스럽게 하고 귀찮게 하는 것도 그들을 강제하는 큰 힘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병원이 꼼짝할 수 없는 '사소한 것들'(그러나 환자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것들)이 너무나 많은 현실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이러한 모순들은 병원이 사실상의 영리기관으로 자본의 논리에 따르기 때문이기도 하고, 정부가 그러한 자본의 원리를 적용하는 것을 개혁이라고 생각하는, 황당한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급기야 한미FTA는 최악의 상황을 몰고 올 것이라는 것을, 저자는 힘주어 말한다.

 

그래서 이 책은 단지 '보건의료 부문' 혹은 '의료개혁'에 대한 책만은 아니다. 제한된 영역을 주제로 하고 있지만, 이 부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운동은 필연적으로 전체 사회운동과 관련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부문운동'이라 불리는 것이 '부문'에 갇히지 않는 사회운동이 되는 방식을 또한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보건의료 영역의 이러한 중요한 쟁점들을 모르고 있던 내가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무상의료 무상교육을 주장하면서 켐페인 사업을 하기 전에 노조의 조합원들과 이런 내용을 교육사업 등을 통해서 공유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삶의 문제, 생명과 직결된 문제가 어떤 식으로 사회운동이 쟁점들과 연관되는지, 우리가 평등한 의료체계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을 왜 해야하는지를 너무나 생생하게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으로부터 이른바 노조의 '사회공공성 투쟁'이라는 것도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무상의료 무상교육 지하철 선전전 이전에 말이다.)

 

병원을 이용할 수 밖에 없는, 그리고 가난한 우리들에게 이 책은 실용적인 매뉴얼이면서 운동의 지침서이기도 하다. 다른 운동영역들에도 이런 식으로 글을 쓰고 대중들과 대화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 프레시안에서 처음 낸 책이다. 프레시안에 책 소개 기사가 잘 실렸다.

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30071116143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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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존재의 심리학


존재의 심리학
아브라함 H. 매슬로 지음, 정태연.노현정 옮김 / 문예출판사


미국의 심리학자 매슬로가 이 책에서 한 주장은 주로 "인사노무관리" 서적에 주로 도식으로 인용된다. 사람의 욕구를 다섯 단계로 나누어 위계화한 그래프인데, 한 번 쯤 본 적 있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생리적 욕구(physiological needs), 안전 욕구(sefety needs), 애정과 소속의 욕구(love and belongingness needs), 자기 존중의 욕구(self-esteem needs), 그리고 자아 실현의 욕구(self-actyalization needs)가 등장한다. 이들 그래프에서는 아랫 단계가 충족되어야 위에 단계가 가능하다고 인용하면서, 조직 안에서 자아실현의 욕구를 어떻게 창출(따라서 기업조직에 충성)할 것인가를 검토한다.

하지만, 정작 매슬로의 핵심적인 주장은 이러한 인용의 도식과는 거리가 멀다. 또한 목적에 있어서도 조직에 충성스러운, 혹은 창의적이고 따라서 효율적인 인간을 만들기 위한 것과도 다르다.

오히려 매슬로는, 자기실현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하위의 욕구들이 부차적일 수 있다고 말한다. 자기실현을 통해서 보다 건강하고 고귀한 인간형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주장이 핵심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실현의 과정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절정경험'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절정경험'은 자기 자신과 세계-대상을 직접적으로 인식하게 되는 몰입의 순간이다.)

매슬로에게 자기실현이 중요한 이유는 인간은 "경이로운 가능성과 심층적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행동동기는 결핍을 채우기위한 욕망이라기 보다는 존재를 실현하기 위한 욕구가 된다.(매슬로는 이런 맥락에서 프로이트를 '결핍의 심리학', 자신의 주장을 '존재의 심리학'이라 부른다. 책의 제목은 이렇게 나왔다.)

사실, 이 책에서 매슬로의 주장은 흥미롭기는 하지만, '이론'이라고할 만큼 근거를 갖거나 논리적인 체계를 갖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책 전체의 내용은 '묘사'들에 불과하고 기껏해야 묘사에 대한 설명에 불과하다. (저자도 어느 정도 이것을 인정하고 있는데, 자신의 주장을 발전시켜 동료학자들이 이론적으로 증명해주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구절들이 등장한다.) 물론 '설명적'인 부분에서도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정신분석 혹은 심리학적인 상식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흥미로운 내용들은 많다. 설득력도 있다.

그러나 내가 이 책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어떤 이론적인 동기라기 보다는 순전히 개인적인 경험과 관련되어 있다. 이 책의 주장, 즉 자신과 대상을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순간(매슬로는 '절정경험'이라고 부른다.)이 존재하며, 이를 통해서 자신을 더 발견하게 될 때, 사람은 더 높이 고양된다는 것(매슬로는 이를 지속적인 과정으로서 '자기실현'이라고 부른다)에 깊이 공감하기 때문이다.

이 블로그에 여행기를 남기기도 했지만, 최근에 여행에서 경험한 강렬한 자기고양의 순간들은 매슬로가 묘사하는 '절정경험'과 대단히 유사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의 효과--자기존중과 고양, 신경증 증세의 해결 혹은 완화--도 그렇다.

여행에서 그 경험들은, 상당한 기간 동안 전혀 새로운 것들을 만나오면서, 그리고 나 외에는 대화할 사람이 없는 곳에서 불현듯 나 자신을 만나는 것이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눈물이 나는 아픈 것이기도 했지만 어느 때에도 경험하지 못했을 행복을 동시에 느꼈던 것이다. 암스테르담의 고흐 미술관에서, 베를린 아테 미술관의 네페르티티 상 앞에서, 스위스의 등산열차, 절벽 앞에서, 피렌체의 두오모 쿠폴라 정오의 종소리에서, 피사의 다리 위에서, 아테네 리카비토스 언덕의 야경 앞에서, 등등. (다른 어떤 이유보다, 이런 경험이 짧은 기간에 집중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지난 여행은 내 삶에 최고의 시간들이었던 셈이다.)

(한편, 매슬로가 언급하는 것처럼 그런 절정경험은 보통 사람들에게 연애/사랑에서 자기고양과 대상에 대한 직접적/총체적 인식으로 나타난다. 나에게도 이와 비견할 수 있는 것은 지난 연애들 중에 적어도 한 번의 사건--그 보다 강렬하지만 오히려 섹스는 아닌--에서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의 주장을 내가 모두 신뢰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매슬로가 보여주는 묘사의 내용은 나의 개인적 경험과 생생하게 일치한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물론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 책의 주장은 어떤 이론적인 근거를 갖는다거나 실증적인 증거도 거의 제시하지 못한다. 그러나 매우 개인적인 경험 때문에 이 책의 묘사, 그리고 이런 것이 적어도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동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고 증명하는 노력이 더 있었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한편으로, 이 책은 묘사적이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근거를 갖지 못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장점이기도 하다. 이 책의 묘사들은 읽고 있으면,  그런 경험들의 순간이 생생하게 다시 떠오르고 행복해진다. 그래서 매우 개념적인 언어들로 이루어진 묘사이지만 마치 시처럼 느껴진다. 글의 어떤 논리적 구조보다, 이어지는 낱말들의 연쇄가 행복을 준다.

자, 어쩌면 다른 이들의 독서에서는 말도 안된다는 비난을 받을지 모를 책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적어도 매슬로가 말한 것들(정확한 개념도 부여하기 힘든 것들일 수 있다)을 경험한 사람들이라면, 이 책의 독서는 흥미로운 경험이 될 것이다.  마치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것같았던 나의 독특한 경험을 누군가 "나도 그랬어"라고 말하는 것을 듣는 것 같다. 더 좋은 것은 그 경험이 자신의 발전에 더 큰 의미가 있다고 말해준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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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하면서;부치지 못한 편지

우여곡절 끝에 노조에 복귀한지 열흘이 지났다.

병가와 휴직이 끝나는 마지막 시기에는 복귀를 하지 않고 다른 활동을 하려고 생각을 했다. 결국, 결국은 복귀하게 되고 말았지만, 그것도 노조 활동을 하는 동안 끝까지 피하려고 했던 정책업무를 하게 되었다. 노조 정책실에서 쓰는 혹은 써야하는 글의 태반이 허구적이라는 점에서, 또는 정치적으로 그릇되거나 그도 아니면 엉터리라는 점에서 피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의 최근 가장 큰 고민은 어떻게 하면 거짓말을 덜 하고 활동할 수 있을까하는 것이다.('안 하고'도 아니고 말이다.) 불과 며칠 지나지 않았지만 어울리지 않은 옷을 입고 있는 것같은 느낌. 하지만 어떻게 진실을 유능하게 말하고 글로 쓸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해야겠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의미가 없지는 않은 일이니까.

휴직이 끝나는 마지막 주에, 사직하면서 노조 활동을 함께 했던 동지들에게 보내기 위한 몇개의 글을 썼다. 아래는 그 중에 하나. 전반적으로 이제까지의 활동을 평가하면서 앞으로는 이렇게해달라라는, 경계선에 있는 사람으로서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최대한 누린 글이다. 결국은 보내지 못했지만, 이제는 내가 나의 유언집행자가 되어야할 상황이랄까.

앞 뒤에 인사말과 개인적인 소회(그것도 매우 중요하지 않을 수 없지만;) 부분을 빼고 운동적 쟁점과 관련된 부분이다. (마지막 가는 인사에 이런 것이 적당하냐고 누가 물을 수도 있겠지만, 남는 활동가들에게 가장 최선의 선물은 이런 비판들이 아닐까?)

다만, 이른바 "사회공공성"에 대한 비판은 그것이 노조운동의 어느새 '지배적 이데올로기'라는 점에서 전면적이라기 보다는 우회적으로 비판했다는 점 정도는 언급해야할 것이다. 다른 부분은 더 솔직하다.
(더 개인적인 일부분은 조금 수정)

전반적으로 '사회공공성' 투쟁이라는 것의 문제, '비정규직 조직화와 투쟁'에 대한 노조사업이 변해야할  지점에 대한 의견이다.
 


(전략)

말씀드릴 것은 우선 사회공공성 투쟁에 관한 것입니다.
사회공공성 투쟁은 최근에 민주노조 운동 전반에서 크게 유행하고 있기도 하고, 어떤 한계에 봉착한 노동자운동이 나가야할 방향으로 제시되곤 합니다. 특히 노조-연맹에서 사회공공성이라는 건 중요한 과제로 제시되고 있죠. 그런데 죄송하게도 저는 사회공공성이라는 과제가 몇몇 중요한 전제가 빠진 현재와 같은 방식으로는 하나마나 하거나 혹은 안하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현재 제기되는 사회공공성에 대한 여러 측면의 비판이 있지만, 이 슬로건을 인정하더라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이 과제에 비어있는 측면만 언급하고 싶습니다. 현재까지 사회공공성은 노조 안에서는 주로 "사유화반대(국유화)-지배구조민주화"로 이해되고 있고, 노조-연맹 밖에서는 주로 무상교육 무상의료로 이해됩니다. 대선 돌아가는 꼴을 보면 아마 대선 이후 당선될 이명박이나 이회창의 주된 공세가 다시 사유화로 연결될 것같기도 하니, 사유화 반대 투쟁만 해도 아직 중요하죠.

그런데 여기서 제기되어야할 네가지 문제 중에 실제 운동과정에서 전혀 논의되지도 못하고 빠진 것이 세 가지가 있다는 겁니다.
1) 소유관계 2) 노동자, 민중통제 3) 국가성격, 권력 4) 노동자운동, 노조의 변화

1) 소유관계에 대해서는 사유화 반대라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되고 있는데 문제는 있겠지만 이건 일단 넘어가죠.(국가소유라고 그것이 자본주의적이지 않은 것처럼 이야기하는 일부 지식인들의 기만이 문제입니다.) 문제는 2)는 "지배구조 민주화"라는 식으로 제기되는데 이건 왜곡된 방식이라는 것이고, 여기에 3) 국가성격, 권력 4) 노동자운동, 노조의 변화는 아예 언급도 없다는 겁니다. 공공부문이 사유화되어서는 안된다고 할 때, 대안이 뭐냐는 게 문제이기도 하죠. 그럼 지금처럼 국가의 관료적 지배구조를 온존시키고 공기업노동자들은 IMF위기 이후 불안한 상황의 지대를 지키는데 몰두할거냐는 겁니다. 기득권 지키자, 이렇게 가면 그럼 그게 무슨 운동이냐는 것이구요.

결국, 변혁적인 전망 속에서 공공부문이 사고되어야한다면, 마치 "이해당사자 자본주의"(Stakeholder Capitalism)의 공공부문 번역판인 "지배구조 민주화"가 맞냐는 것이죠. (Stakeholder Capitalism는 한편으로는 주주자본주의로 번역되기도 하는 말이니, 그 의미는 자명합니다.) 오히려 노동자의 생산과 관리통제(따라서 인사경영참여를 넘어서는 작업장-현장권력의 문제로 접근해야합니다), 그리고 민중통제가 문제입니다. 특히 민중통제는 결국, 기업에 개입할 노동자운동이 어떤 방식으로 민중연대-사회적 연대를 구축할 것인가가 문제겠죠. 그렇게 보면 결국 4) 노동자운동, 노조의 변화라는 것이 동시에 이야기되지 않고서는 사회공공성은 허구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 "3)국가성격과 권력" 문제는 이야기가 길어질 수 있으니 넘어가죠. 결국 정치운동에서 노조가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문제일텐데, 지금처럼 민주노동당 선거기금 모아주는 방식의 운동으로 그게 되겠냐는 이야기부터 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런저런 정책대안들은 있지만 사회변혁을 위한 정치적 전망도 함께 갖고 있냐는 질문이죠.)

공기업정규직노동자들에 대해서 '귀족노동자'라고 언론에서는 주장합니다. 이미 비정규직노동자가 '일반화'된 상황인데다가, 비정규직노동자들의 빈곤화라는 것까지 감안하면 반박하기 힘든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공기업정규직노동자들이 자본주의적 착취에 노출되어있지 않다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다소 위험할 수 있는 말이지만) 공기업정규직노동자들에게 임금가이드라인 분쇄라는 것이 결정적인 문제일까하는 것을 묻고 싶은 겁니다. 오히려 운동의 방향을 전환하기 위한 "조직 내 운동", 노조의 이념과 조직을 혁신하기 위한 운동이 매우 의식적으로 진행되어야할 겁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사회공공성이라는 것이 국가소유를 유지하는 것을 넘어서야한다면, 그것이 지배구조민주화든 노동자, 민중통제이든 소유를 넘어선 관리와 운영에 개입해야한다면, 여기에 개입하는 주체인 해당 사업장의 노동자(노조)에게 사회적 정당성이 있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노동자통제'가 되기 위해서라도 사내하청을 포함한 비정규직노동자에게 열려있어야하는 것은 물론이고, 민중통제라는 문제의식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도 민중연대, 사회적 연대가 결정적일 겁니다. 하다못해 '노조의 경영참가' 정도로 이해된다고 해도, 그 노조가 조합주의, 경제주의에 빠져있다면 결과는 뻔한 것 아닐까요? 조합주의와 경제주의가 지배적인 공기업정규직노조를 내부에서부터 변혁하는 과제가 같은 '사회공공성' 슬로건과 무게로 취급되어야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사회공공성을 이야기하려면 그것을 주장하는 만큼, 동시에 노동자, 민중통제, 정치운동, 노동자운동의 내부적인 변화라는 것이 패키지로 함께 제기되어야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듣기만 좋은 슬로건 몇개 제기하는 것은 결국 자본주의를 한발짝도 넘어서지도 못하는 국가소유, 관료적 통제를 넘어서지도 못하는 지배구조 개혁을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설사 된다고 해도 만들어지는 것은 결국 퇴행적인 공공부문 판 '노사담합체제'겠죠.) 그게 운동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러니 아예 사회공공성 슬로건은 폐기하거나 전면적으로 재구성해야할 것입니다. (그나마 이런 정도로 사회공공성 슬로건에 반성이 가능하고 그것을 주도할 수 있는 조직은 공공노조 정도밖에 없습니다. 사회공공성이라는 것이 이런 모양새인 조건에서 '사회공공성 선전전' 같은 사업이 진행되는 것을 보면 답답해집니다.)

그래도 공공부문 노조운동에 '주도적인' 슬로건인데 너무 심하게 이야기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만, 뭐 떠나는 마당이지만 애정이 있으니 이렇게라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라고 이해해주시면 고맙겠네요. 아제 이 다음 이야기는 제가 해왔던 활동과도 연관되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비정규직 투쟁과 조직화에 대한 측면입니다.
저 도 조직실-비정규직-지역본부를 거치면서 비정규직관련 사업을 여기저기서 해왔기 때문에, 이것은 더더욱 자기비판의 성격이 강한 이야기입니다.(지금 활동하시는 동지들 비판하고자하는 것은 전혀 아니니 양해해주세요. 그보다는 자기비판.)

제가 하던 시기부터 이제까지 비정규직 사업은 주로 신규조직화와 조직확대, 단위사업장 투쟁, 제도개선 투쟁 등이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중심적으로 진행해야할 사업들임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 지만, 애초에 왜 비정규직 조직화와 투쟁이라는 과제가 중요하게 판단되었던 것인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새로운 노동운동의 주체를 형성한다는 측면이었죠. 그러나 돌아보면 조직확대, 사업장 투쟁을 넘어서 매우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주체형성"(새로운 운동주체의 형성)이 거의 간과되어왔다는 점은 반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최근 몇년간의 비정규직 운동을 평가하면서 비정규직 노조운동이 정규직 노조운동의 경제주의와 조합주의를 모방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 비정규운동을 하는 주체들 사이에서 자주 지적되고 있습니다. 공공노조(연맹) 역시 비정규직노조운동이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새로운 운동주체가 될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 부족했다고 생각합니다. 조직형식적인 실험(지역지부) 정도가 진행되고 있으나 여전히 한계가 많고 전략적 투자도 전혀 없는 상황에서 어려움에 처해있죠. 그것을 넘어서 이들 주체가 지역적 연대를 강화하도록 하는 것에서부터 사회운동과의 결합, 활동가 육성, 조합원교육 등등등에서 주체를 형성하고 운동의 '질'을 바꾸기 위한 노력은 당면한 투쟁에 항상 밀려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긴급한' 과제를 진행한 것이기는 하지만 '중요한' 과제를 수행했다고 보기는 힘들겠죠.

따라서 이후에 노조의 어떤 부서 혹은 지역본부가 업종본부가 하든, 비정규직 운동주체를 강화하기 위한 노력이 매우 특별하게 배치되어야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노력없이는 비정규직사업은 '앙꼬없는 찐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당면해서는 이런 노력은 몇몇 지역지부 조직들에서 어려운 조건이지만 그나마 진행되고 있습니다.(중앙조직에서 직접 주체형성에 기여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결국 지역-현장의 몫일텐데, 그렇다면 중앙조직에서는 이러한 지역-현장에 대한 지원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집중적으로 고민되어야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특히 00, 00, 00같은 지역에서 이런 측면의 노력들이 의미있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제한된 자원의 전략적 투자라는 측면에서 생각해볼 때, 이들 지역지부에 대해서는 별도의 더 과감한 가중투자가 필요할 것입니다. (이건 지역지부 간 형평의 문제가 전혀 아니고 전략적 투자라는 측면에서 집행부의 결단이 필요한 측면도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다른 지역본부들도 대승적으로 양보할 필요도 있을 겁니다.) 이들 지역에서 어떤 '전형'을 만드는 과정 자체가 이후 조직의 전체 발전, 공공노조 내 비정규직 사업, 투쟁, 조직화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질 것이라는 건, 이제 떠나는 마당에 개인적인 이해관계도 전혀 없으니 솔직하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같습니다. 그것들은 소중한 불씨이지만 너무 꺼지기 쉬운 상황입니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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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르카, 강의 백일몽

로르카는, '시인이 총살 당하는 시대'의 희생자다.
좌파였던 이 시인은 1936년, 스페인에서 프랑코를 두목으로 하는 파시스트들의 쿠데타가 시작된 직후 그라나다에서 총살당한다. 시인이 총살 당하는 시대, 20세기는 오래 지속되고 있다.

번역된 시집을 읽으면 그는 너무나 아름다운 서정시인이다. 서정시인을 죽이는 시대.

로르카를 읽으면서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이렇게 예민한 영혼을 가진 시인도 헤어지고 영혼에 칼로 벤 상처를 받아도, 여전히 또 시를 썼다는 것, 쓸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 시를 중단시킬 수 있었던 것은 파시스트의 총탄 뿐이었는데,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파시스트들을 용서할 수 없다.)

그러니, 아마도 훨씬 마음이 무딜 우리는 여전히, 살아가고 적어도 시를 읽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된다.


강의 백일몽
(헤닐 강)

포플러 나무들은 시들지만
그 영상들을 남긴다.

   (얼마나 아름다운
    시간인가!)

포플러 나무들은 시들지만
우리에게 바람을 남겨 놓는다.

태양 아래 모든 것에
바람은 수의를 입힌다.

   (얼마나 슬프고 짧은
    시간인가!)

그러나 그건 우리에게 그 메아리를 남긴다.
강 위에 떠도는 그걸.

반딧불들이 세계가
내 생각에 엄습했다.

   (얼마나 아름다운
    시간인가!)

그리고 작아진 심장이
내 손가락들에 꽃핀다.

(정현종 옮김, 표현은 조금 바꿈)


하나만 더. (너무 많이 옮기면 시집을 사보지 않을테니 ^^;)
번역된 것이기는 하지만 이 시들은 소리내어 리듬을 읽어야한다. 혹은 시를 옮겨 적는 타이핑의 경쾌한 키보드의 리듬도 어울린다.


어떤 영혼들은...
1920년 2월 8일

   어떤 영혼들은
푸른 별을 갖고 있다.
시간의 갈피에
끼워놓은 아침들을,
그리고 꿈과
노스텔지어의 옛 도란거림
이 있는
정결한 구석들을.

   또 다른 영혼들은
열정의 환영들
로 괴로워한다. 벌레먹은
과일들. 그림자의
흐름과도 같이
멀리서
오는
타버린 목소리의
메아리, 슬픔이 없는
기억들.
키스의 부스러기들.

   내 영혼은
오래 익어왔다 : 그건 시든다.
불가사의로 어두운 채.
환각에 침식당한
어린 돌들은
내 생각의
물 위에 떨어진다.
모든 돌은 말한다 :
"신(神)은 멀리 계시다!"


===
아래는 로르카의 시집


강의 백일몽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지음, 정현종 옮김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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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색,계 (色, 戒: Lust, Caution)

보고나서는 한참 동안 멍하게 혼란에 빠지게 만드는 영화.

 

 

1.

파시스트들에게는 영혼이 없다.

그들은 타자의 자유를 억압할 뿐 아니라, 그 필연적인 귀결로서 자신들의 자유까지도 억압하고 지속적으로 소거해가기 때문이다.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그 말은, 파시스트들에게는 영혼이 교통하는 사랑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파시스트들에게 예컨데 soulmate라는 것이 가능할까? 그것은 영혼의 울림, 떨림을 동반하는 것이지만, 파시스트의 자기억압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일본 파시스트의 하수인인 이(양조위)는 자신의 주변에서는 만나지 못하는 대상을 저항군의 스파이인 왕치아즈(탕웨이)에게서야 찾을 수 있다. ('이'에게 부인은 가장 고통스런 순간에도 '내려가서 마작이나 하라'고 말할 의미없는 대상이다. 파시스트와 함께 사는 여인들은 그저 마작을 하는 장면만 등장한다.) 

 

하지만 그것은 파시스트인 그에게는 '적당하지 않은' 것.. 따라서 왕치아즈(탕웨이)에게 만큼이나 이(양조위)에게도 이 사랑은 파멸적이다.

 

2.

영화는 저항군이 왕치아즈(탕웨이)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어떤 한계로 내모는 순간, 가장 잔혹하다. (사람을 수십번의 칼질로 난도질 때가 아니라 이 순간에.) 그렇다면 그것을 계속 견딜 것을 요구하는 저항군의 중간간부에게는 파시스트만큼의 영혼이 있는가?

 

적어도, 영화에서 그 중간간부는 왕치아즈(탕웨이)의 말, 이미 멈출 수 없게 이(양조위)를 사랑하게 될까봐 두려워하고 그녀가 처한 성적 착취에 괴로워하는 말을 더 이상 들을 수 없어한다는 점에서 이것이 잘 못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끝까지 '조직의 이름으로' 작전을 지시한다.

그렇다면 '저항군'이라는 사람들은 결국 파시스트들과 어디서 다른가. 파시스트의 육체를 살해하기 위해서 동지의 영혼을 살해할 때..

 

운동은, 그것이 설사 그것 때문에 패배하더라도 지켜야할 것들이 있지 않을까.

그러나 내가 서 있는 곳들에서조차 그런가.

 

3.

사랑이 정치적 적대와 얽혀들 때.

사랑에 대한 온갖 찬사들에도 불구하고 그것도 다만 현실의 (정치적) 적대 속에 존재한다.

이와 관련해서 떠오르는 작품은 일본 애니메이션인 인랑 (人狼, Jin-Roh)이다. 이 애니메이션은, (흥행을 포기했는지) 불길하게도 정치적 적대 아래서, 사랑은 가장 낮은 차원의 종속변수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영화를 같이 보았던 애인과는 다음해, 첫직장에서 노조를 만들고 싸우는 과정에서 헤어졌다. 같은 직장에서 일하는 그녀와 노조활동에 대한  입장을 화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전에 연애에서도 그 '정치적 입장'이 문제였던 것이다.)

 

나중에 생각해보면 다른 가능성은 없었을까, 가끔 떠오르기는 하지만 역시 그 당시 상황에서 어떤 다른 판단들이 열려있었을까.

 

이 영화를 보면서, 그 모든 과정이 영화의 흐름과 동시에 다시 재생되었다. (극장에서 나는 두 개의 영상들을 본 셈이다.) 모두 잊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이후의 또 다른 과정에서는 정치적 입장의 차이가 실패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라는, 아주 당연하고 별로 특별할 것도 없어보이는 결론을 고통스럽게 얻었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왜 사랑은 정치에 대해서 그렇게 강하지 못한지 생각하게 된다. '정치'라는 말 보다는 그/녀들이 처한 사회적 조건이라고 말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지만.

 

'로미오와 줄리엣'에서부터 '색, 계'에 이르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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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노사 형평성 ‘OECD 꼴찌’

한겨레신문 기사.
노동관련 법제도, 관행이 이 지경인데, 얼마나 더 노동시장을 유연화하고 노조활동을 제약해야 분이 풀리겠냐.. 그리고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를 '열사'로, 산업재해로 죽여야 분이 풀리겠냐..

이런 상황에서도 노동유연화, 기업규제완화, 노조활동제한, 노동자투쟁에 대해 "법와 원칙" 운운하는, 정작 자신들은 범죄자인 놈들이 대선에 보란 듯이 나와서 1,2위를 하고 있으니 나라 꼬라지가 한심하다.
87년은 역사책에만 남고, 이 모양이 되도록 제대로 싸우지 못한 우리  노동운동의 상황이 참담하기도 하고..


한겨레신문(07-11-22)
http://www.hani.co.kr/arti/society/labor/252111.html

노사 형평성 ‘OECD 꼴찌’
30개국 중 29위…비정규직 비율 2위 등 효율성 항목만 상위권

한국노사관계 지표별 순위   
한국의 노사관계 수준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소속 30개국 가운데 23위에 머물고 있다는 평가가 나왔다. 또 ‘효율성’은 높지만 ‘형평성’은 지나치게 낮아 심각한 불균형을 낳고 있으며, 노동기본권 보장 수준 등 형평성 측면에서 노사관계 순위는 꼴찌에 가까운 것으로 지적됐다.

김동원 고려대 경영대 교수는 22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한국의 노사관계 평가를 위한 국제세미나’에서 “노사의 조직 특성과 전략, 노사관계의 제도적 틀과 노동정책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개발한 노사관계 평가 지표로 각국 노사관계를 비교해보니, 한국은 효율성과 형평성에서 심각한 불균형을 이루고 있는 대표적 나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김 교수가 개발한 노사관계 지표에 근거해 2005년 기준으로 한국의 노사관계 순위를 살펴보면, 한국은 집단해고의 자유나 노동운동 통제 정도, 비정규직 비율 등으로 이뤄진 ‘효율성’ 순위에서 7위를 기록한 반면, 노조 조직률이나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 정도, 정부의 사회보장 지출 수준, 단체협약 적용률 등으로 이뤄진 ‘형평성’ 순위에선 29위에 그쳤다. 종합 순위도 23위에 머물렀다. 비교 대상이 된 30개국 가운데, 덴마크는 효율성과 형평성이 모두 높아 1위를 차지했다.

김 교수는 △국제사회 수준의 단결권 신장 △노동조건 개선 및 고용차별 해소 △사회보장의 확충 등을 통해 노사관계의 효율성과 형평성 사이에 균형을 맞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 노사관계 평가 연구에 함께 참여한 파울라 부스 전 미국노사관계학회장(럿거스대)은 이날 세미나에서 “한국처럼 형평성을 제대로 취하고 있지 못한 나라에선 상대적으로 노사 갈등이 심각하게 야기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황보연 기자 whyn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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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서경식 지음, 이목 옮김 / 돌베개


"그라나다의 처형은 자유로운 인간이라면 누구나 총부리 앞에 세워질 수 있는 시대, 시인이 총살당하는 시대가 왔음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1936년, 프랑코 파시스트 쿠데타군에 의해서 살해당한 스페인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가 살해되는 순간, 이 열전의 첫번째 인물에 대한 글의 한 구절이다. "시인이 총살당하는 시대", 20세기에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하지만 의외로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들도 많다. 서경식 선생이 일본에서 연재한 글을 모은 것이니 내가 들어보지 못한 일본인들은 등장할 수 있다고 쳐도, 로르카부터도 그렇지만 잭 시라이, 파블로 카잘스, 에른스트 톨로.. 이런 삶들을 내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아주 역설적으로, 이 책이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잘 기억되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말이다. 어떤 잘 알려진 위인들보다도 위대한 삶을 살다가, 위대하게 죽은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 그리고 수백만, 수천만의 사람들이 더 그럴 것이다. 자신을 돌아보면 부끄러워지는 일이다.

이 책에 소개된 49명은 대부분, 파시스트 독재나 전쟁에 대항해서 투쟁하고, 또 상당수는 그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인물들이다. 살아남은 이나, 그렇지 않은 이나, 이들은 모두 '인간다움'을 지키기 위해서 죽음앞에서도 자신에게 떳떳한 사람들이다. 이들을 살해한 자들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존엄한 파시스트"란 존재할 수 없는 말, 형용모순이다.)

한명 한명의 삶과 죽음이 가지는 무게 때문에 그리 두껍지 않은 이 책에 책장 하나하나를 쉽게 넘기기 힘들다.  그 중에도 가장 강렬하게 기억되는 인물은 잭 시라이.

일본에서 고아로 자라서, 항구에서 노동자로 일했고, 미국에 밀항하여 식당노동자가 되었다. 스페인 내전, 국제여단에 참전한 그는 파시스트의 총탄에 1937년7월11일 사망한다. 일본인으로 미국노동자가 되어 스페인에서 공산주의자로 죽었다.

시라이의 죽음에 대해 뉴욕주재 일본영사관은 "있을 수 없는 비국민"이라고 했다고 한다. 우리가 되려고 하는 것은 무엇보다 바로 그런 "있을 수 없는 비국민"이 아닌가!

20세기는, 그런 "비국민"들을 "있을 수 없게"하기 위해서 살해하고 기억에서 지우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겨우' 기억되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지금 우리 시대에도 마찬가지.
떠난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오늘, 우리는 언제, 떠나더라도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이 될까를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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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왕사신기 본색

무한한 연습님의 [<<주몽>>과 <<태왕사신기>>: 자본주의적 욕망의 서사(와 민족 서사)로써의 고구려 역사 드라마들.] 에 관련된 글.
님의 [<태왕사신기>와 포섭의 정치] 에 관련된 글.

드디어 이번주 태왕사신기 방영분(18~19회). 태왕사신기의 본색이 위에 링크한 글에서 무연님, 삼님이 말한 것과 같은 식으로 너무 '친절하게' 드러났다. '친절한 담덕씨' 우리 태왕폐하는 아주 친절하게 프리젠테이션까지 준비해서 자신의 비전을 설명한다. 어디선가 들었던 표현을 언급하자면 "벤처 사장들의 북방 개척론"이랄까.

자신이 하려는 것은 피흘리는 전쟁이 아니라 거란이나 부여나 주변의 이런저런 나라들과 무역을 하려는 거다, 그게 '쥬신민족'이 평화롭게 하나되는 길이라나.(18회) 그러다가 드디어 다음회(19회)에서는 소금장사하러 거란으로 떠나신단다. (게다가 태왕 담덕이란 인물은 점점 더 내적 모순이 완전히 제거된 무슨 꽃미남 밀납 인형같은 캐렉터가 되어가는 중이다.)

결국, 신자유주의 시대에 적합한 전략이라는게 세계화된 경제라는 식의 연설을 광개토대왕이 하는 셈. 이걸 보면서 정부의 한미FTA 홍보광고가 당장 떠올랐던 것이다. "더 넓은 시장에서 경쟁합시다" 실제로 국정홍보처의 한미FTA 광고 중에는 광개토대왕 어쩌구하면서 하는 것도 있었다. "경제영토"가 뭐네하는 광고도 있다.


요것은 태왕사신기의 한 장면? 아니다. 국정홍보처의 FTA광고 "도전편"에서 광개토대왕 어쩌구하는 장면이다. http://fta.korea.kr/Article/?dataSeqNo=9007&dataGubun=TV&PageMode=Detail

그런데, 여기까지는 MBC 뭐 니들이 그럼 그렇지, 하는 건데 좀 더 생각하다가 기분이 더러워졌다.
(물론 나름 드라마 재미있게 보다가 기분 잡치면 그 자체가 좀 그렇기는 하다. 그런데, 게다가,)
이게 위에서 말한 "벤처 사장들의 북방개척론"이라는 생각이 떠오른 건데, 이건 뭐시기냐하면,
권영길 후보 공약을 비판하면서 우석훈씨가 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레디앙] 소제국주의 식민지 전략보고서?

"코리아(=고려=고구려)연방"으로 "쥬신(조선)민족" 대동단결해서 북방시장 개척하자는 거잖아, 이거..
전근대적인 것과 초근대적인 것의 결합이랄까, 민족주의 상징을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위한 대중동원에 결합하는 이런 방식을 사회운동들까지 따라해야하나..

그러다가 작년 투쟁할 때 민주노총에서 만든 총파업 깃발에 메인 로고가 '태왕사신기'에도 열심히 출연하고 게시는 삼족오라는 것도 떠올랐다. 젠장.. 이러다가 민주노동당이 태왕사신기 컨셉으로 선거 선전할까봐도 심히 걱정된다.

뭐, 작년에 민주노총은 그게 삼족오가 아니라 주작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으니 문소리나 이지아를 섭외하려나? (남조선은 남쪽이라 주작인가??.. 그런 심오한 고려까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주작(朱雀)이 민주노총 세상을 바꾸는 총파업투쟁을 수호한다.

민주노총은 이번 총파업 상징으로 선정된 주작을 이미지화해 깃발로 제작, 연맹과 지역본부, 지구협에 보급하고, 11월12일 전국노동자대회 장소에서도 배포한다.

깃발 이미지는 ‘민중적 내용을 민족적 형식에 담는다’는 원칙아래 주작의 상징적 모양과 붉은 색조를 기본으로 형상화했다. 또 검정과 회색톤을 가미해 강렬하면서도 현대적 이미지를 표현했다.

주작은 우리 민족 설화에서 청룡, 백호, 현무 등과 함께 하늘의 사방四方을 지키는 신을 일컫는다. 주작은 남방의 수호신으로 삶, 생존을 의미하는 사신四神 중의 하나다.

봉황이 득도를 하면 온몸을 붉게 물들이며 주작이 된다 하여 ‘붉은봉황’이라고도 한다.

이준용 민주노총 문화미디어실장은 주작을 총파업투쟁 상징으로 정한데 대해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변혁세력의 단결로 민족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나감으로써 역사의 변환점을 만들어가자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또 “이번 상징물은 노동자뿐만 아니라 농민, 빈민, 청년학생 등이 참여하는 민중총궐기 투쟁에서도 이용될 것”이라며 상징물의 쓰임세에 대한 기대를 표시했다.

(노동과 세계 기사, 홍미리 기자 gommiri@naver.com   2006년11월06일 )


http://newscenter.nodong.org/news/view.php?board=mainnews&id=6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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