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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88만원 세대


88만원 세대
우석훈.박권일 지음 / 레디앙

88만원.
비정규직노동자의 평균임금 119만원에 전체 세대에서 20대의 임금비율을 곱한 값이다.
비정규직이 아니면 일자리가 없는 20대가 직장에서 벌 수 있는 금액. 저자들은 이 숫자로 20대 표현한다.

이들은 어떤 세대인가?
당장 보기에, 이들은 문화적으로는 소비주의에 물들어있고, 붉은악마-황우석-디워까지 이어지는 민족주의 마케팅에 쉽게 동원되기도 한다. 인터넷에서는 악플을 남기고, 학생운동은 하지 않으며, 비권/반권 후보를 찍는다. 보수적인 인민주의에 휩쓸린다. 토익에 몰두하면서 공무원시험을 준비하거나 고시촌에서 근근히 살아간다. 정규직 노동자의 파업을 비난하고 차라리 구조조정하라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비정규직노동자에 파업에 연대하는 것도 아니고 노조에도 잘 가입하지 않거나 몰입하지 않는다. 소비는 동네수퍼가 아니라 대형할인매장, 찻집이나 동네빵집이 아니라 스타벅스, 뚜르주르 같은 프렌차이즈만 이용한다.

이런 20대가 한심해 보이나?
(특히 386의 눈에 그렇게 보일 것이라고 저자들은 예상한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 따라서 왜 그런지 물어야한다는 것, 그리고 그 답을 찾기 위해서는 "경제"를 보라는 것이 저자들의 말이다. 하다못해, 도대체 20대가 왜 스타벅스만 가는지 같은 것이 궁금하더라도 이렇게 해야 답을 찾을 수 있다.

남한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적으로 재편되는 속도가 가속화되면서 이제 과거와 같은 노동시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한때 대학을 나오면 학점이야 어떻든 취업이 가능했고,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지속적으로 임금이 인상되면서 정년퇴직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90년대, IMF구제금융, 노무현정권의 성장전략을 거치면서 이제 그런 일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특히 노무현은 독점의 기형적 강화를 촉진함으로써 사태를 돌이킬 수 없게 만들었다.) 이제는 아무리 경쟁해도 비정규직일자리뿐이고, 공공부문의 안정된 일자리나 대기업의 정규직은 "거의" 불가능한 꿈이다. 최악의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은 고졸 여성인데, 이들은 대졸 남성의 취업난이 부각되는 와중에 주목조차 받지 못한다.

게다가 앞선 세대인 386은 안정적 노동시장의 막차를 타면서, 뒤따를 수 있는 문을 모두 닫아버리고 자기들끼리 연대한다. 그러니, 386의 눈에 20대가 한심해 보일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386이 신자유주의 1세대라는 것을 생각하면 기만적인 일이다. (저자들은 이를 "386의 배신"이라고 부른다.)

386만이 아니라 그 앞선 세대인 40,50대도 20대를 착취하는데는 모두 공범이다. (저자는 이런 식의 악날한 세대착취가 이루어진 예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고 주장한다.) 10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데, 10대 아르바이트에 대한 노동인권 침해는 이미 많이 알려져있다.

(그러나 전혀 해결을 위한 노력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최근에는 서울시교육청의 결정으로 옥수동에 있는 "동호정보공업고등학교"가 폐교될 상황에 처하게 됐다. 공고학생들 불량해서 집값떨어진다는 주변 아파트주민들의 민원때문이다. 자신을 대변할 수 없는 10대들--정치적 대표성이 사실상 부재하기는 20대도 마찬가지다--에 대해서 잔인하다. 노동시장의 최하층에 몰릴 이들에 대해서 이 어른들이 작업장에서는 어떻게 할지 눈에 선하다. 참고:[왜냐면] 동호공고 폐교는 정당한가? / 이상조)

이들을 하나의 세대로 정의하면서 주목하는 것은, 특별한 대책이 없이는 이들이 처한 상황이 고착될 것으로 예상되는 데다가 그것은 한국경제의 미래에 두고두고 심각한 영향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남한 경제의 "현재의" 모순을 통해서 미래를 예상하는 작업인데, 단지 지금의 문제를 언급하기도 급급한 입장들보다 상당히 앞서 나가있는 흥미로운 분석이다. 특히 경제를 특정한 대중들의 문화와 정치에 단락시킴으로서 대중들이 처한 조건(따라서 대중운동의 조건)을 생각할 수 있게 한다.

이런 점에서 독자들에게는, 이 책이 열어주는 시야를 활용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다면 20대가 어떻게 (기만적이고 과잉된 허구적인 "희망" 마케팅이 아니라) 자신의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도록 할 수 있을까.

논쟁적인 지점들도 있다.
우선 저자들에게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 대한 비판이 없다. 저자들은 이건 당장 어찌할 수 있는 해법의 영역에 들어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국내정책적인 수준에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

그래서 저자들이 제안하는 대안은 아르바이트에 대한 노동권보호와 보조금지금, 20대가 연대할 수 있도록 하는 창업지원, 사회적 일자리 사업을 통해서라도 좋은 일자리decent job을 확대하는 것 등이다. 10대들에게는 사교육의 금지를 포함한 교육제도의 개편과 같은 다른 대안들도 제시하는 데, 10대들까지 그대로 두면 지금의 20대보다 더 절망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제안들은 매우 구체적이고, 급격한 혁명같은 것이 없이도 충분히 '개혁적'이기만 해도 실현가능한 것들이라 매력적으로 보인다. (민주노동당은 물론 문국현이나 류시민도 이런 제안들을 수용하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정책활용수단이 제한되어 있더라도 사태가 이렇게 전개된 데에 대해서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분석은 필수적이라는 점은 지적할 수 있다. 그리고 국내 경제정책적인 측면에서도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안이 없다고 말하는 것도, 단기적으로는 모르겠지만 미봉책이 그칠 수 있다. (정책의 실현가능성에 주목하는 저자들과 나는 쟁점이 있다.)

특히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20대가 자신들의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고 스스로 발언할 수 있도록 조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때, 그런 점에서는 여전히 20대는 정치무능세대로, 기성세대의 어떤 양보가 없이는 절망적인 세대로 규정되는 것같다.(그러나 그들은 어떻게 스스로를 대표할 것인가..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과 같은 기존의 운동들이 그것을 함께 할 수 있을까? 아니면 파시즘, 인민주의? 이 책은 지금같이 가다가는 20대가 파시즘에 쉽쓸릴 수 있다는 점도 경고하는 데, 매우 현실적인 정치적 문제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들이 제안하는 대안들은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저자들이 제기하는 대안들은 비록 당장 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어쩌면 작은 제도들의 변화일 수도 있겠지만 바로 그 '작은 것'들 속에 신자유주의 착취 체제의 문제들이 그대로 녹아있기 때문이다. 독점을 규제하거나, 20대에게 정부가 안정된 일자리를 제공하고 취업을 지원하거나, 사교육을 금지하는 것과 같은 "현실적인" 대안도 이미 지금의 착취체제에 핵심적인 요소가 된 것들을 건드릴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작은 변화도 큰 저항을 불러오고, 또 그만큼 정치적으로 어렵고 급진적인 것이 될 수 있다.

다만, 저자들이 제안한 대안조차 수용이 쉽지 않은 조건이라면 거기에는 정책대안을 넘어서는 다른 논의가 필요하게 된다. 정치적으로 실현가능하게 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라는 질문.

하지만 이런 질문에 이르지 않았더라도 이 책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 20대가 처한 조건, 다들 무언가 문제가 있다고는 느끼고 있지만 그것이 왜 그런지, 어떤 의미를 가지는 지 알지 못했던 것을 가시적으로 드러내준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든) 20대를 위한 대안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지배계급과 이전 세대가 "안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비정규직 노동자를 조직하고 투쟁하는 과정에서도 20대가 오히려 자신을 잘 드러내지 못하는 현재의 시기에, 비정규직운동을 조직하기 위해서라도 20대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다. 선배 세대들은 물론, 20대도 꼭 읽어보면 좋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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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l Hospital, 이상은


이상은의 작은 앨범이 새로 나왔다.


디지털싱글. Out of Space (자세한 소개는 ; 여기)

타이틀곡 Soul Hospital.
상담하는 의사는 나에게 어떤 "자아의 재통합과정"이라고 이야기하지만 나는 사실, 이게 모두 20대로 퇴행하는 것이 아닌지 걱정이다. 그러니 나에게도
"다시 태어나. 어른이 돼. 태양보다 높은 독수리처럼."
이라고 말할 수밖에,

하지만 쓸쓸한 곡.
이상은의 가사를 보면 난 소년이라기보다는, 소녀같군..



Soul Hospital


소녀가 찾아왔네.
가슴에 상처를 입고서.
빗방울 흩뿌려진 유리창 저 너머 별들.
투명한 거미줄로 상처를 조용히 꿰매주었지.

소녀여.
우리들은 보석이 가득 든 상자.
열쇠는 모두 태어날 때 깊은 바다 속에 잃어.
상처의 틈으로 우리의 영혼 반짝이는 보석
흘러나와야 어른이 돼.
달콤한 장미수처럼.

소년이 일어났네.
깨어진 커다란 알에서.
태양은 늘 그랬듯 하늘을 불타며 지나.
독수리의 흰 깃털과 심해수를 뿌려줬지.

소년이여.
우리들은 다시 태어나야 해.

그대라고 믿었던 그 것은 모두 껍질일뿐.
일어나는 모든 일은 당연한 것.
영혼에 좋은 것.
다시 태어나. 어른이 돼.
태양보다 높은 독수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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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F4일차]사회운동총회, 소통-연대-변혁

사회운동포럼이 나흘간의 일정을 모두 마무리했다. 마지막 행사로 사회운동총회에 대한 간단한 스케치와 사회운동포럼을 통해서 생각한 것들.

소통, 연대, 변혁, 사회운동총회

사회운동총회는 총회 선언문과 사회운동과제를 토론하고 채택했다. 사회운동포럼 프로세스의 일부로 사전에 토론을 통해서 초안이 제출되었고 심의(?)했다. 예상대로 다소 추상적인 선언문에 대해서는 문제제기가 없었고 세부적인 전략과제들에 대해서는 몇몇 의견이 나왔다.

다만 시간적 한계 등으로 인해 각 워크샵에 논의된 것들이 선언문이나 공동과제에 구체적으로 반영되지 못한 측면은 있다. 이후의 프로세스를 통해서 더 토론되고 보완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총회는 이 외에도 세 개의 행동제안을 채택했다. 10/17 빈곤철폐 행동의 날, 1/22 세계사회포럼의 글로벌 액션, 3/8 여성의 날에 공동행동 등을 결의했다. 단순히 다른 단체의 집회에 함께하는 수준이 아니라, 사회운동총회의 결의에 걸맞게 그러한 공동행동의 준비와 실행도 하나의 과정으로서 함께 진행되기를 기대한다. 노동운동도 여기 결합할 수 있어야할텐데, 이것은 더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 외에 사회진보연대 임필수집행위원장은 이후 사회운동포럼의 성과를 지속할 수 있도록 후속사업을 진행할 것을 제안했다. 이후 평가토론에서 논의될 수 있을 것이다. 성과를 확인하면서 아쉬움이 많았던 사회운동포럼이었던 만큼 문제의식을 계속 발전시켜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단지 행사를 진행하는 것으로 제한되지는 않을 것이다. 비정규노동센터의 김주환 부소장은 예를 들어 사회운동의 소통의 공간으로 이랜드 투쟁의 공간을 사고해볼 것을 제안했다. 집회 투쟁의 열린 공간에서, 사회운동포럼과 같이 사회운동의 고민들이 소통될 수 있도록 노력해보자는 제안.(이날 오전에 열린 비정규운동워크샵에서 박준도 동지가 언급한 내용이기도 하다. 집회 자체가 운동들이 교통하고 토론하는 공간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 사회운동들이 만나는 현장 여러곳에서 소통과 연대를 확장할 수 있을 것이다.



소통, 연대, 변혁 ; 이제 겨우 쟁점들을 확인한 사회운동들


이번 사회운동포럼의 모토인 소통, 연대, 변혁은 사회운동 상호간에, 사회운동과 대중의 소통을 증진하고 이를 통해 연대를 강화하고 이제는 잊혀지거나 화석화된 것으로 보이는 변혁의 전망을 다시 구성하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번 포럼에서도 확인한 것처럼, 이것은 한번의 행사로 이루어질수 없는 장시간의 과제, 끈기있게 인내심을 갖고 하나씩 만들어가야할 가치들이라고 할 수 있다. 소통에 기반한 연대를 하기에도, 대안세계의 상과 이에 조응하는 운동전략에 대한 변혁적 전망을 논의하기에도 아직 가야할 길이 멀다.

나흘 간 함께하면서 든 생각, 이번 포럼의 의의는 오히려 최소한 소통과 토론의 전제가 될 수 있는 것으로서, “서로 간의 쟁점”을 확인했다는 데 있는 것같다. 새로운 활동양식을 둘러싼 쟁점, 사회공공성 투쟁의 의미, 사회운동노조주의 혹은 노동자운동의 보편적 해방운동으로의 개조, 페미니즘 운동에 대한 상이한 시각 등 합의를 이루거나 그를 위한 토론에 이르지 못하고 쟁점만 확인한 것들이 많이 있다.

또 한편으로는 중요한 쟁점들을 도입하기도 한다. 운동들이 충분히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이제 보여주기 시작한 것들 ; 에이즈 인권운동, 비공식노동자 조직화, (당위가 아닌 현실로서) 풀뿌리 지역운동, 사회운동적 정당의 가능성.. 이번 포럼을 통해서 더 가시화된 이런 운동들은 이제부터 사회운동 안에서 더 풍부하게 논의가 이루어져야할 것들이다.

사회운동들이 함께 만들어갈 대안세계의 전망, 운동전략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쟁점들에 대한 발전된 논의가 필요하다. 따라서 그것은 상당한 기간의 프로세스가 될 수밖에 없다. 사회운동총회에서 채택한 운동과제 ver 1.0 인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 속에 있는 많은 쟁점들은 이번 포럼에서 깊이 논의되지 못하고 사전에 준비된 한계도 같은 문제.

소통의 난점들을 인내하고 넘어서기 위해서 운동 사이에 필요한 윤리.

이번 포럼에 참가하면서, 쉽게 이야기하던 운동 간의 소통/연대의 윤리를 더 진지하게 고민해야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운동들간의 시빌리테(시민윤리)가 필요한 것일 텐데 쟁점을 확인하기에 급급했던 이번 과정에서 충분히 고려되지 못했던 측면일 수 있다.

이것은 이론/정치적인 측면에서는 하나의 운동(주로 노동자운동; 노조운동과 노동자정치운동을 포함해서)이 자신을 우월한 위치를 당연히 전제할 때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따라서 주로 노동자운동이 다른 사회운동들과 관계맺는 방식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 하지만 실제 대화에서 필요한 윤리들도 매우 중요하다.

나 역시, 여러 토론과정에서 ‘쟁점을 분명히 하는’ 방식으로 발언했는데, 이것은 어떤 생산적이고 면밀한 토론의 결과를 만들기 위해서 쟁점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다른 운동들이 제기한 입장에 어떤 합의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라기보다는 자기 입장을 그저 주장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라는 점, 혹은 실제로도 그랬을 것이라는 점에서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특히 새로운 활동양식 워크샵에서 그런 점을 느꼈다.) 이번 포럼의 대화과정과 이에 대한 자기반성의 과정에서 배우는 것일텐데, 운동들 간의 소통에서 시빌리테가 강조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물론 나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소통’을 강조하는 입장도 역설적으로 논쟁을 회피하거나 불편해하는 장면들도 있는데, 상호 변화가 필요한 부분이다.

따라서 소통의 난점들이라는, 그 긴 긴장들을 견디면서 노력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그것이 아니라 이번에 어떤 소통의 절벽을 느꼈다고 해서 대화에서 후퇴한다면, 오히려 소통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실천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될 것이다. 오히려 쟁점을 확인한다면, 그것을 토론하기위한 노력을 인내심을 갖고 지속할 필요가 있다.

대중과의 소통이라는 과제

한편, 이번 포럼에서 소통이란 주로 운동주체들 사이의 소통으로 사고된 측면이 있다는 것과 그것을 넘어설 필요가 있다는 점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첫 사회운동포럼이라는 점에서 활동가들의 행사로 집중된 측면이 있지만 앞으로 적어도 “지향”에 있어서 지속적으로 강조되어야한다. 실제 프로그램의 구성에 있어서도 그렇지만 (활동가들이 중심이 되는 현실적 한계를 인정한다고 해도) 토론의 지향에 있어서 그렇다.

문제는 무엇보다 대중과 소통하는 것일 텐데, 운동주체들 사이의 소통은 그것을 위한 전제이기도 하지만, 후자를 대체할 수는 없다. (그래서 시민교육, 대중운동의 개조와 같은 쟁점이 더 부각되어야한다.)

이후의 과정에서 소통을 사고하는데 있어서 방향은 대중을 향해야한다. 그럴 때 운동들간의 소통도 보다 현실에 발딪은 대화가 될 수 있다.

변혁에 이르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이번 사회운동포럼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던 많은 운동적 가치들을 언급해야겠다. 프로그램 상으로는 여러 워크샵으로 표현된 운동적 가치, 쟁점들은 대안세계를 만들기 위한 전망이 매우 단순한 어떤 것으로 환원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역사적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운동을 지금 이곳에서 계승하는 대안세계의 전망은 단 하나의 슬로건으로 정리되기는 힘들 것이다. 오히려 이런 운동들과의 대화, 갈등을 조정하는 민주적 과정들과 같은 것(말하자면 운동들의 운동)이 대안세계화운동의 필수적인 일부가 될 것이라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

포럼을 몇 번 빡세게-열심히 해서 단일한 전망을 합의하고 앞으로는 이걸로 일로매진하자, 이런 식으로는 앞으로 대안세계를 만드는 운동이 진행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 토론과 소통, 실천들의 연대를 통해서 매순간 대안을 새로 구성하면서 또한 그것을 실천해가야한다는 점.

이 과정에서 얼마나 우리가 공동의 대안사회에 대한 전망을 넓혀갈 수 있을 것인지, 운동“단체”들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대중들과 공동의 전망을 확대해갈 수 있을지가 관건일 것이다.

* 아래 두 개의 사진은 사회운동포럼 홈페이지에서 가져옴

(그림을 클릭하면 사회운동포럼 홈페이지로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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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F3일차]노동운동,정의의 무기로 부활하라

오늘(자정이 지났으니 이미 어제군) 사회운동포럼이 사회운동총회와 폐막행사로 모두 마무리되었다. 많은 사람들(워크샵들에 연인원 2500명이 했다고 한다)이 함께 했고 의미있는 쟁점들을 논의했다. 마지막날 모습과 결산은 이 다음 글에 올리는 것으로 하고, 일단 3일차 이야기를 해보자. 박래군 집행위원장이 참세상에 인터뷰한 것처럼, “안 갔으면 후회할” 행사였다고 평가.

 

[특별강연] 피터 워터만 ; 노동운동, 정의의 무기로 부활하라

 

워터만은 “사회운동 노조주의”라는 개념을 제기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대안세계화 운동의 일부로서 노동자운동의 미래를 생각해보자는 제안이다. 노동자운동이 보편적인 해방운동이 되기 위해서는 급진적 사회운동, 국제적 정의운동과 동행해야한다는 점, 이 속에서 자본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방안을 찾을 수 있을 것 등을 강연에서 언급했다.

 

워터만이 하나의 경향으로 강조한 것은 최근 우리 운동에서도 관심이 높아지는 “지역”과 관련된 부분이다.

워터만은 노동운동과 지역운동(community)과의 연대를 말한다.(community, 통역한 동지는 '지역운동'이라고 번역했지만 한편으로는 '지역공동체'라고 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중심부-주변부 모두에서 이러한 경향이 발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가 다른 것에 종속되는 방식이 아니라 상호이익, 상호보완의 관계로서.

 

특히 남아공, 남미, 미국에서 이주노동자들의 운동을 예로 든다. 작년 미국의 메이데이 시위를 보라, 이것은 가장 빈곤하고 소외된 이주노동자의 운동이었는데, 노조가 주도한 것은 아니었다.(오히려 이주노동자 공동체들) 조직화되지 않은, 조직화 될 수 없는 노동자들이 공세적으로 진출하고 노동자운동에 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역시 우리나라에서도 제기되는 쟁점 ; 비공식노동자 등이 노동조합으로 조직화되는 것이 맞는가라는 질문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언급한다.(혹은 노조로 조직된 것만 노동자운동인가?) 워터만은 “노조 형태가 아니더라도 어떤 자치적인 조직방식도 가능하지 않을까?”라고 묻는다.

 

취약한 층의 노동자들이 기존의 노조 조직 안에서도 억압될 수 있으며, 자신의 전략을 발전시키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인도의 노점상을 예로 드는데 이들은 노조 조직 안에 있기도 밖에 동시에 있기도 하다. 미국노총은 이주노동자 네트워크를 조직하기도 했다.(이주 일용직 노동자들을 동등한 파트너로 인정한 합의)

 

이러한 고민은 불안정노동자, 이주노동자, 비공식노동자들을 조직하는 데 있어서 기존의 노조형태가 아니라도 여러 가지 가능성을 고민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생각해볼 만한 쟁점이다. 이랜드 비정규직노동자를 조직한 지역운동(민주노동당의 지역조직)과 이랜드 월드컵 분회가 분별되지 않은 어떤 조직형태-조직화전략도 고민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이것은 이날 저녁 지역운동 워크샵에서 논의된 주제이기도 하다.)

 

워터만은 조직화된 노동자를 넘어선 보편적 운동, 조직화 전략이 노동자운동에 필요하다고 강조하는데, 노조를 넘어서는 조직화 방식에 대한 언급은 이런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기존의 노조를 넘어선 확장되고 유연한 (조직화)전략이 필요하다는 점.

 

그밖에도 세계사회포럼에서 노동자운동의 위치, 인종주의 반대운동으로서 노조의 역할 등등 쟁점이 더 있었다. 아마도 발제문이 사회운동포럼 홈페이지에는 올라갈 것같으니 참고들 하시라.

 

** 벌써 올라왔네 ; 피터 워터만 초청 강연자료 링크

 

“사회변혁적 노동운동”

 

노동자운동과 관련해서는 사회운동포럼의 중심워크샵이었던 자리. 나는 사회진보연대 토론자 역할을 맡았다. 주발제는 민주노총 서울지역본부 김진억 국장.

 

전반적으로 노조가 경제주의적 투쟁, 기업 사업장에 갇힌 투쟁을 넘어서 사회변혁적, 사회운동적 성격을 복원하는 것의 중요성을 확인했다. 그런 점에서 노동운동의 보편적 해방운동으로서 성격을 회복해야한다는 점, 그리고. 이를 위한 이념적 대안, 대안세계의 이념을 형성하기 위해서 페미니즘, 국제주의의 결합하고 또한 실천적으로, 사회공공성 운동, 사회운동의 의제로의 확장 등도 필요하다는 등의 논의가 진행되었다.


사회변혁적 노동운동이라는 개념은 사회운동적 노조주의라는 개념이 한노사연 류의 소개로 인해 논란이 되고 있는 측면, 정치적 지향을 보다 강조해야한다는 측면을 고려해서 선택되었다고 볼 수 있다.

워크샵에서는 새로운 노동자운동을 위한 조직적 대안들도 언급되었는데 토론에서 깊이 논의되지는 못했다. 이후 논의 필요한 부분일텐데, 노동자 사회운동체 혹은, 노동운동-사회운동의 안정적 지역적 네트워크(연대구조) 같은 것들.

 

한편, 내가 주로 제기한 쟁점들은 토론문을 참조할 수 있다. 다운받기;링크

 

“사회운동 노조주의”는 여러 “의제”들을 노조에 도입하는 것인가?

 

한편, 토론 과정에서 사회운동노조주의가 마치 노조에 여러 가지 운동의 ‘의제’를 도입하자는 것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렇게 이해될 경우 사회운동적 노조운동을 제안하면 현장활동가들은 "다양한 운동을 하기에는 노조도 힘들다, 지금하는 투쟁으로도 가랑이 찢어진다"는 식의 반응이 나오게 된다.

 

심지어 사회운동 노조주의를 제기하는 것이 민주노총 1기 집행부의 “사회개혁적 노동운동”과 같은 것 아니냐는 식의 발언도 나온 상황. 토론자였던 노동전선의 김태연 씨의 토론 중 발언인데, 대단히 불쾌한 일이다. (예를 들어 새흐름이나 사회진보연대가 “사회운동노조주의”를 주장한다고 “비판”하면서도) 정작 사회운동 노조주의에 대해서는 전혀 읽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거나, 혹은 알면서도 왜곡한다고 밖에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운동 노조주의라는 것을 통해서 제기하고자하는 것은 노동자운동이, 특히 노조가 이익집단이 아니라 사회운동이어야한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사회운동은 대안세계화운동, 워터만의 표현으로는 지구적 정의운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노동자운동이 자기 사업장의 경제적 이익을 수호하는 활동을 넘어서, 보편적인 해방운동이 되어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서 반드시 노조의 이념도 혁신되어야하는데, 특히 남성노동자만을 노동자운동의 주체로 규정하고, 민족국가 안에서 타협을 추구했던 역사를 넘어서 페미니즘과 국제주의라는 보편적 요소를 필요로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말하자면 페미니즘과 국제주의를 제기하는 것은 노동자운동을 보편적 해방운동으로 만들기위해서, 역사적인 보편적 해방운동이었던, 그러나 현재는 실패-소진된 역사적 사회주의, 공산주의 운동을 개조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좀 더 쟁점적으로 말하자면, 노조가 백화점식으로 사회단체들의 운동에 모두 결합하자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물론 정세에 따라서 결합할 필요가 있는 공장밖 운동의제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운동에 대한 강조는 <사회공공성 투쟁을 제기하면서 많은 비노조 운동의제를 “도입”하자는 주장>과 경향적으로 혼동된다는 점을 이번 토론에서도 확인하게 된다.

 
노조들의 경제주의, 기업별 이기주의에 비판적인 활동가들은 그 돌파구를 공장밖 운동의제인 다양한 사회운동 혹은 소비자-시민으로 조합원들이 마주치는 문제들을 상대하는 ‘사회공공성’ 의제(교육, 의료, 교통 등)에서 찾는 경향이 있다. 다른 대안이 딱히 보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대안이념, 변혁전망 자체가 취약해진 현실을 반영한다.) 이러한 활동가들의 문제의식은 현재 노조운동의 문제를 지적하는 데서는 정당하지만 한걸음 더 나갈 필요가 있다.

 

그러나 오히려 공장 안-밖에서 동시에 보편적인 해방을 위한 실천을 하는 것이 문제다. 그것은 어떤 시기에는 이랜드비정규직 지원을 위한 현장조직화 운동일 수도 있고, 평택미군기지 반대투쟁일 수도 있고 한미FTA반대 투쟁일 수도 있다.(이랜드비정규직 연대투쟁은 노조에게 사회운동이 아닌가?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다만, 그것이 노조 안에서도 사회"운동"이 되기 위해서는 "지침"에 따라 간부들 집회참석하는 것을 넘어서 조합원들을 상대로 이랜드비정규직 지원, 연대를 위한 말그대로 "운동"을 벌여야한다.)

 

사회운동으로 노조를 개조하자는 주장을 노조 외부에서 ‘의제들의 도입’으로 생각하게 되면, 사회운동-노조운동의 관계에 있어서도 다소 도식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운동의 결합이라는 측면에서 △ 대중조직이 보편적 운동이라는 쟁점이 아니라 △사회운동단체라는 조직들과 노조라는 조직들의 조직간 관계의 문제로 이해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이제 '사회운동 노조주의'는 대중운동 스스로 운동의 확장이라기보다는 “연대단위”를 불러오는 것으로 이해된다. (첫날 대토론회에서 제기되었던 문제가 반복되는 셈이다.) 하지만 오히려 대안세계를 만들기 위한 사회운동들을 (외부적 결합이라기 보다는) 노조운동 안에 도입하는 것이 문제다.

 

그러나 우리가 사회운동 노조주의를 제기하는 맥락은 노동자운동이 보편적 성격을 회복하고, 경제주의/현장주의를 넘어서 대안세계를 건설하기위한 운동에 나서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측면에서 보면, 한편으로는 “사회운동 노조주의”라는 개념이 가진 어떤 한계가 있다는 생각도 하게된다.

 

용어의 성격 때문인지 다양한 운동의제들을 병렬적으로 도입하자는 식으로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특히 우리운동 지형에서는 '사회운동'이 '비노조 사회운동 단체들의 운동'을 의미하는 것으로 읽히다보니 더욱 그런 측면이 있다. 따라서 주장하는 바를 잘 드러내는 다른 용어를 쓸 수도 있고, 이번 워크샵에서 사용한 "사회변혁적 노동운동"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이념적 대안?

 

울산에서 온 어떤 활동가는 “볼세비즘도 아니고 사민주의도 아니라면 어떤 길인가”라고 묻는다. 한편에서는 구사회주의권의 몰락과 운동이 가져왔던 역사적 한계, 한편에서는 시공간적으로 우리에게 적용불가능한 사민주의가 아닌 대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역사적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을 반성하면서 어떻게 새로운 보편성을 가지는 대안적 사회를 구성하는 운동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문제제기가 핵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것은 사회공공성과 같은 쟁점을 넘어설뿐더러 “노동해방”, “사회변혁”이라는 것이 그냥 외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재구성해야하는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따라서 이 질문은 앞으로 계속 될 필요가 있다.

 

한편, 토론과정에서 플로어에서는 자본주의 위기와 체제붕괴를 예상하는 것은 (1) 몇 년 전부터 항상 하던 이야기 이거나 (2) 파국론이다라는 식의 문제제기도 있었다.


2010년대 전자본주의적 금융위기에 대한 예상은 신자유주의 경제비판을 통해서 도출되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것은 경제적 분석을 정세분석에 어떻게 반영하는가가 문제라고 볼 수 있다. 그냥 ‘위기가 올 것이다’라고 쉽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을 전제로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경제적 분석에 따른 정세예측이 ‘파국론’은 아닌데, 이를 혼동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우리가 맞을 객관적 위기라는 제한조건 속에서 운동주체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의 문제인 것이다.


* 이와 관련해서는 사회운동포럼 노동운동 사전워크샵 중 2차, "세계자본주의와 한국자본주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참고할 수 있다.

 

사회운동과 정치운동, 지역운동의 쟁점들


* 이 부분은 오전과 저녁에 있었던 지역운동워크샵의 내용이다. 쟁점과 내용이 좀 되는 만큼 별도의 글에서 따로 언급하는 것으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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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F2일차]새로운 활동양식, 무엇이 필요한가

사회운동포럼 2일차,
새로운 사회운동 활동양식 워크숍, “미래를 돌아보라”

2일차 프로그램 중 오후에 진행된 열쇠말(공동의제) 워크숍은 사회운동의 활동양식을 바꾸자는 논의였다. 이제까지의 사회운동의 활동양식이 변화하는 대중의 감성을 따라가지도 못할 뿐 아니라 대중을 수동화시킨다는 점에서, 단지 “형식”에 대한 논의라고만은 볼 수 없는 쟁점이다.

이 주제는 민주주의, 페미니즘, 운동언어, 집회, 교육이라는 소주제들을 함께 토론하는 것으로 진행되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현재의 많은 대중운동, 사회운동의 활동양식은 고루하고, 창의적이지 못하고, 하던 것을 답습하는 데 급급하다. 그리고 많은 경우 화석화되어서 대중에게 감동을 주지도 못한다.

운동언어

특히 제기된 영역 중 운동언어의 측면은 중요한데, 대중과 소통하는 언어의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이다. 대중에게 지식을 돌려주거나 토론하거나 공감하고자할 때, 대중의 언어로 말하는 것은 필수적이지만 많은 활동가들에게 그것은 그리 쉽지만은 않다.

하지만 워크샵 과정에서 드러난 하나의 문제는, 이러한 문제제기가 마치 운동의 언어들 중 모든 경우에 개념(어)들이 사라져야한다는 식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

운동내의 논의, 혹은 이론에서는 정확한 개념(어)는 필수적이다. 추상적이고 어렵게 느껴진다고 해도 말이다. 따라서 대중집회나 선전물, 대중과의 토론에서 언어와 운동전략과 이론의 토론에서 언어는 다른 문제다.(물리학이 쉬운 언어로 말해질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일부는 이 쟁점을 반지성주의, 반이론주의의 맥락에서 수용하는데, 애초의 취지와도 다르게 위험하다.

한편, 집회에서 “동지 여러분”이라는 호명도 도마에 올랐다. 이 표현이 집회에 조직된 참가자와 그 근처를 지나는 보통의 시민들을 분리하는 효과를 낳으며, 또한 집회 자체가 “자기들끼리”의 자족적인, 대중과 소통하지 못하는 행사로 전락하게 한다는 것이다.

어떤 점에서는 내부의 결의를 다지기위한 집회도 많기 때문에 일반화 할 수는 없지만, 대중집회에서는 이럴 수도 있을 것같다. 집회 참가자와 근처를 지나는 청중 모두가 시민이라는 점에서, “시민 여러분”이라고 호명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지배권력은 집회 참가자들을 시민이 아닌, 어떤 동원된 기괴한 대상, 집회 때만 출몰하는 인간-시민이 아닌 존재로 취급한다.(그래서 전경들은 사람을 “몇 점”이라고 호칭한다.) 따라서 우리가 먼저 시민으로 우리와 거리의 시민들을 함께 호명할 필요가 있을 것같다.

불균등한 영역들

토론 중에도 지적된 것이지만 워크샵을 구성한 다섯 개의 영역은 상당히 불균등하다.
민주주의와 페미니즘은 운동의 가치, 지향과 관련된 것인 반면, 운동언어와 집회 부분은 상당히 형식-양식에 관련된 부분이다. 교육은 양면적인데, 지적 차이를 감축하기 위한 전략적 시도로, 또한 대안적 이념을 대중과 공유하고 대중이데올로기로 형성하기위한 과정으로 이해할 수도 있는 반면, 단지 교육형식-방식의 다양화라는 식으로 제기될 수도 있다.

이렇다보니, 워크샵의 진행과정에서도 다소 불균등하게 토론이 진행된 느낌이 있다. (혹은 민주주의와 페미니즘이라는 운동의 지향과 관련된 부분까지 형식-양식과 무차별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편향이 있었을 수도 있다.) 각각의 영역은 병렬적인 것이 아니고 오히려 구조적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는 것들이다.

운동 내 민주주의의 문제

이렇게 볼 때, 민주주의라는 쟁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내가 플로어발언으로 언급하기도 했던 것이지만, 집회에 대중동원이라는 쟁점도 이와 관련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마치 대중동원이 부정적인 것으로 언급되지만 과연 그런가?

대중조직 안에서 대중의 자발적 참여를 증진하기 위해서는 “조직 내 운동”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집회 참석과 같은 경우에는 반드시 매번 사항에 자발성만으로 참여를 기대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사회보험지부는 지회, 분회마다 조합원 집회 참석 비율이 할당되면 평등하게 돌아가면서 참석한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공동체 내에 민주적 합의가 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의 집회 참여에 대한 합의, 집회 참석 지침을 내리는 집행부에 대한 신뢰, 집회 순환 참석에 대한 현장분회 내 조합원들의 동의 등등. (그래서 3만명이 파업해도 500명만 집회에 나오는 현대자동차노조보다 사회보험노조의 집회 참석, 연대투쟁이 나을 수 있다.)

문제는 공동체 내의 의사결정에서의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관료적으로 대중의 자발성을 억압해서는 안 되지만, 어떤 합의된 공동체의 운영원리는 필요하기 때문이다.
(위에서 예를 든 사회보험지부도 시간을 지나면서 이러한 ‘합의’가 점점 형식적인 것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려되는 부분도 있다.)

권위와 권위주의

또한 고루한 것으로 취급되는 ‘권위’라는 것도 이런 측면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어떤 참석자는 “우리가 왜 대표자에게 꼭 존대를 해야하나? 서로 반말을 하자!”는 주장을 하기도 했는데, 다소 어이없는 일이다.

대표가 존중받는 것은 그가 민주적 과정을 통해서 공동체의 대표성을 부여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조 교육의 1번 중 하나는 위원장-지부장을 존중해야 사측이 우리를 존중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그것이 존중할 가치가 없다면, 그것은 권위라는 것이 모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 대표의 대표성 자체가 민주적 과정이라거나 공동체의 합의를 반영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심각할 때 그렇다.

권위없는 권위주의만 남는 것은, 운동이 정당성을 구성원들에게 확인하지 못하게 되면서 다만 조직적 권위로 강제할 수밖에 없을 때 나타난다. 민주주의의 문제와 함께 운동의 정당성에 대한 구성원들의 동의와도 관련되는 부분이다.

권위 일반을 부정하는 무정부주의적, 혹은 다소 문화주의적인 반권위주의는 민주주의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조직내 민주주의를 강화하고, 공동체의 합의를 만들어내야할 때 오히려 공동체를 원자들로 분할한다. 그것은 소통을 증진하는 방식도 아니며 운동을 파괴하는 것이다.

페미니즘, 반성폭력 활동? 라이프스타일?

이번 사회운동포럼의 전체 프로그램들에서 가장 많이 강조되는 가치가 페미니즘이다. 하지만 이것이 활동양식 상의 하나의 주제일까? 물론 페미니즘적 감수성을 갖추는 것이 모든 운동들에게 필수적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활동양식의 혁신이라는 측면에서 가능할까?

오히려 나는 그것이 운동노선의 문제, 이념의 문제, 그리고 무엇보다 실천의 문제라고 말하고 싶다. 노조가 페미니즘을 수용하는 첫걸음은 노조가 스스로 여성운동을 하는 것이다.(물론 이를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이념을 수용하는 결단이 필요하다.) 이 실천 속에서 주체가 혁신되고, 그것은 다시 운동의 제도들, 형식들을 바꾸어낸다.

즉, 운동의 양식과 형식의 측면에서 페미니즘을 아무리 강조해도, 그것은 그냥 “좋은 이야기”일 수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조직, 운동이 실제로 바뀌기위한 경로를 제기해야한다.

또한 발제자가 지적한 것처럼 페미니즘이 반성폭력활동, 이와 연관된 조직내 교육으로 이해되거나 혹은 그 반대 편향에서 정세적으로 대응해야할 운동의 어떤 조직적 과제라기보다는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로 이해되는 편향도 있다. 둘 다 문제가 있다. 페미니즘은 여성대중의 해방을 위한 운동이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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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양식의 변화가 필요한 측면이 많다는 것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다. 그러나, 현존의 활동양식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활동양식을 제기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활동양식이 형성된 이유를 먼저 묻고 이해해야한다. 그럴 때 변화가 필요한 지점을 제안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상이한 활동양식이 공존할 수도 있다는 것을 상호 인정하는 것이 필요할 것같다. 집회 양식에 있어서도 소규모 활동가들의 직접행동이 의미있는 집회가 있는가하면, 대규모의 군중동원이 필요한 집회도 있다. 그것이 모두 의미가 있다는 것이 서로 이해되어야한다. (기존의 양식이 문제라고 해서 대규모의 군중집회를 모두 활동가들의 자발적인 퍼포먼스로 바꿀 수는 없다는 것이다. 또한 대규모 집회가 의미가 있는 만큼, 활동가들의 직접 행동 켐페인도 의미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한다.)

이러한 대중운동이 가져온 제약조건들을 인식하면서도, 그것을 변화시키기위한 노력이 함께 필요하다는 것을 확인했던 워크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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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민중법정

나오는 길에 잠깐 지켜봤던 민중법정.
철거민이 직접 연기에 나서고 대중이 함께 반응하면서 극을 이끌어가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다. 민중이 스스로 만드는 민중극과 같은 양식.

한편으로 “민중법정=인민재판”일 것이다. (워낙 인민재판이라는 용어가 지배계급에게 부정적으로 사용되지만 말이다.) 인민들이 자신을 착취하던 억압자들을 앞에 놓고 직접 심판하면서 자신을 해방하고 그들의 범죄를 묻는 가운데 공동의 이념을 형성하는 공간으로서 인민재판은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다만, 피고라고 하더라고 혹은 범죄자라고 하더라도 인간으로서 권리를 가진다는 점을 잊는 순간 위험할 수 있지만.

여튼 오늘 잠시 지켜본 민중재판은, 긍정적인 의미에서 인민재판의 역사적 전통을 다시 불러오는 것같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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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F1일차]소통,대중과는 어떻게?

사회운동포럼 1일차,
사회운동총회 1,2부.
흥미롭고 중요한 논의들이 진행되었다고 생각한다. 430석 규모의 강당이 꽉찰 정도로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갖고 토론에 참가했다.

1부 : 전쟁과 빈곤의 시대, 사회운동의 대안이념과 변혁의 전망은 무엇인가
2부 : 사회운동의 소통과 연대를 어떻게 확장할 것인가

두 개의 토론회가 불균등하게 결합되었다는 느낌이었고, 특히 1부의 논의가 2부에 연결되지 못한 구조로 짜여진 것은 문제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두 토론 모두 나름대로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일단, 몇가지 느낌만 언급하자면



운동들의 "소통"의 문제

사회운동포럼의 모토는 소통/연대/변혁.
그런데 사회운동 단체들간의 소통이 문제인가?
(경향적으로 특히 2부 토론은 그런 논점으로 제기된 것같은데)
다른 부문의 사회운동 간의 혹은 단체간의 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그 활동가들의 불성실함, 혹은 소통의 '방법론'이 문제인가?(아마도 내일 있을 "새로운 사회운동 활동양식" 워크샵은 그런 결론을 이미 예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말이다.)

오히려 대구민중행동의 활동가가 플로어 토론에서 언급한 것처럼 (단체들, 혹은 활동가들 간의 소통 이전에) '대중과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를 제기해야 운동들 간의 소통이라는 문제도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상이한 운동들의 소통이라는 문제-- 운동노선의 토론, 공동의 대안이념의 형성을 위해서--는 각각의 사회운동이 (다른 장소, 혹은 어떤 토론회나 네트워크 이전에) 대중속에서 서로 어떻게 만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이해되어야한다. (혹은 부문운동들간의 소통이라는 쟁점의 진실은 "대중"에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운동들이 그러한 고민을 할 때 대중운동이라는 공간 속에서 함께 만날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로 해서 사회운동들이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관계망이 의미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운동의 분할이 사실은 대중의 내적 분열, 대중이데올로기의 분열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비록 올해의 사회운동포럼이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대중과의 직접적인 소통을 자신의 방법론으로 채택한 행사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러한 쟁점은 제기될 수 있다. 또한 다음 사회운동포럼이 가능하다면 한계를 넘어서야하는 부분이다.

이것은 사회운동포럼 안에 하나의 쟁점이다. 1부 토론 사회를 맡은 백승욱 선생이 특히 지적하는 것처럼 이것이 핵심적인데; (부문)운동단체들, 활동가들 간의 소통이 문제인가, 혹은 대중과의 소통이 문제인가라는 지점. (특히 후자는 지적 차이의 감축, 지식의 민주화라는 쟁점, 시민교육이라는 쟁점을 동반한다.)

운동정당 혹은 사회운동적 당

당적인 운동의 미래에 대해서 1부 토론회 중에서 잠시 언급되었다. 이 점에 있어서 적어도 오늘 토론에서는 장석준(전진)이 제기한 논점이 노동자의 힘에 당운동의 문제제기를 압도했다는 느낌이다. (혹은 누군가의 언급처럼 장석준은 전진의 알리바이?)

장석준은 이렇게 말한다(다소 정리가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

내가 제기한 ‘운동정당’은 노힘의 비제도적 투쟁정당과는 다르다. 운동정당은 사회운동과 제도정치의 긴장과 갈등 속에 존재한다. 이것은 어떤 모범답안을 갖고 해결되지 못하는 조건에 있다. 이 쟁점은 레닌(사회주의 혁명 후)에게 있어서는 국가화된 당-대중운동의 긴장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이러한 긴장을 인식하고 정세에 개입하는 것이 문제이지 당의 형태에 대해서 일반화된 어떤 원칙이 있을 수 없다. 이러한 긴장 속에서 당 운동을 전개하는 것, 사회운동이 국가에 진출하는 경로로서 당운동을 생각해야한다는 입장이다. 운동의 혁신은 특정한 조직형태로 이루어질 수는 없다. 어떤 조직형태의 특권화로 모든 것이 풀려나갈 수 없고 그것은 사회운동의 혁신에도 도움이 안 된다.
* 그럼 운동정당에 걸맞는 조직형태는 가능한가?
당만을 갖고 이야기해서는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 전체 사회운동과의 관계가 문제. 사회운동의 전반적인 변화속에서 이야기해야한다. 현재 민주노동당 내에서 나오는 아이디어들.. 전형적인 선거주의들을 지역운동과 결합된 것으로 바꿀 것인가.. 당지역조직을 사회운동의 지역조직으로 만들어갈 것인가.. 이것이 다만 아이디어로 제한되는 이유는 전체 사회운동의 변화 속에서 이루어져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운동은 국가기구와 관계하기 때문에, 경향적으로 국가화되는 것을 막을 수 없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떤 기발한 조직형태--아마도 "비제도적 투쟁정당?"--가 아니라 끊임없는 조직의 창조적 파괴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이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위의 발언은 1부 토론에서 나온 것이지만 2부 토론 중에도 민주노동당이 (다소 다른 용어로 표현되었더라도) '사회운동적 당'이 되어야한다는 점들이 강조되었다. 특히 지역운동과 관련해서 그런데, 민주노동당이 선거정당이냐 운동정당이냐라는 모순 속에서 어떤 길을 갈 것인지, 또 어떻게 다른 운동들이 개입할 것인지가 중요한 부분. 아마도 전체 사회운동포럼 과정에서 계속 강조될 것으로 보인다.

노조운동에 대한 비판 이전에 대중의 조건을 인식할 필요

김진억(민주노총 서울본부)은 이렇게 말한다(구체적인 낱말은 다르지만 나의 언어로 정리하자면 이렇다)

노조의 한계에 대해서 노조를 비판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노조가 그렇게 되는 대중들의 상태에 대해서 언급하고 대안을 함께 고민해야한다. 역사적으로 노조가 경제주의/현장주의로 후퇴하는 과정에서 비노조 사회운동들도 대중들을 어떻게 만나왔는지 자기반성을 해야한다.

이것은 오히려 대중을 이야기하면서 대중에 대해서는 비사고하는 토론분위기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시종일관 노조운동이 문제라는 식의 분위기 속에서 하소연 같은 발언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나도 노조활동가로서 공감할 수밖에 없는 어떤 억울한 감정같은 것이 있다.) 노조운동을 중심으로 한 노동자운동이 비판받을 수는 있지만, 단지 비판으로 그치는 것은 무의미하고,

우선 노동자운동이 현재의 상황에 처하게된 원인을 대중의 관점에서 인식할 필요가 있을 뿐더러
현존의 노동자운동의 관행에 대한 비판 뿐 아니라, 직접 대중을 만나는 과정에서 이를 함께 변혁할 필요가 있다는 문제제기다. (이 것은 위에서 언급한 쟁점, 부문운동들의 소통이냐, 대중과의 소통이냐라는 문제와도 관련되어 있다.)

운동진영은 기술적으로 혹은 정책적으로 유능하지 못해서 문제인가?

토론중에 제기된 쟁점.
사회운동은 경실련과 같은 NGO운동이나 신자유주의자들이 제기한 쟁점을 먼저-유능하게 제기하지 못했기 때문에 대중과 유리된 것인가?

이것은 사회운동의 약화에 대해서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어떤 원인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민주노동당의 출범과 국회의원 확보 이후에 가장 유능하게 정책을 제기하는 집단이 민주노동당이라는 것도 알려진 현실이다. (그래서 민주노동당은 다른 보수정당이 자신의 정책을 배낀다고 불평한다.) 이런 비판은 사회운동의 자원을 대중조직화가 아니라 정책대안의 생산으로 치환하는 데, 이는 운동을 더욱 상대화하고 사회운동단체들의 NGO화를 촉진한다.(사회진보연대 이상훈이 지적한 것처럼 '정책'은 '정치'가 아니다.)

그렇다면 오히려 문제는 부동산이나 부패 문제와 같은 정책이슈를 잘 포장해서 제기하는 것이 아니며, 대중들이 현실의 고통의 원인을 적합하게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정치적 문제제기와 대중운동의 조직화일 것이라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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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토론 중에 메모한 것들 중 몇가지 쟁점이다. (사실 더 많은 쟁점들이 있는데, 그것들에 대해서는 다른 글을 통해서 언급하도록 하자.) 내일과 글피까지 이어지는 토론 속에서 더 많은 쟁점들이 부각되고, 그럴 뿐 아니라 소통되고 공동의 대안을 만들어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런 종류의 토론이 가능하다는 것 자체가 우리 운동의 중요한 전진이라는 점을 새삼  생각하게 된다.

(그림을 클릭하면 사회운동포럼 홈페이지로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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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생각의 탄생


생각의 탄생
로버트 루트번스타인 외 지음, 박종성 옮김 / 에코의서재


‘생각’에 대해서 생각하는 책. 사람의 사고가 이루어지는 여러 가지 방식들을 몇 개의 개념(생각도구)들로 정리한다. ‘생각하기’에 대한 매뉴얼이라고할까.

이 책이 제시하는 생각도구들은 모두13가지.
관찰, 형상화, 추상화, 패턴인식, 패턴형성, 유추, 몸으로 생각하기, 감정이입, 차원적 사고, 모형만들기, 놀이, 변형, 통합 등이다.

대상을 인식하고 개념으로 다듬는 것에서 시작해서, 그것을 다른 차원의 인식들과 결합하고 새로운 것들을 창조하는 과정까지를 13개의 생각도구를 이용해서 제시한다. 이런 과정은 모두 하나의 두드러진 목표, ‘창조성’을 위한 것이다.

이를 통해서 저자들은 전인적 교육을 부활시켜야한다고 주장한다.(이 책은 ‘생각도구’들에  대한 책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교육제도에 대한 많은 제안들을 담고 있다.) 개별 학문들 사이에 벽을 쌓고 분리해서는 창조적 사고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예술과 과학은 교통해야할 뿐 아니라, 예술가는 과학자가, 과학자는 예술가가 되어야한다. 이 책의 저자들이 예를 드는 수많은 학자, 예술가, 사상가들은 그러한 주장을 확인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이러한 통합과정은 서로 다른 영역의 '개념'들이 만나는 과정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과학적 개념들과 감성이 만날 때, 심지어 몸과 만날 때, 그것은 다른 효과를 만들어낸다. 어떤 창조적인 과정이라는 것이 순수하게 상상의 산물은 아니며, 오히려 낯선 것들이 만나는 가운데 만드는 고유한 효과라는 것을 말하는 것같다. 마치 상이한 문명들이 만나는 변경지대에서 창조적인 것들이 형성된 것처럼 말이다.

이런 방식의 ‘생각도구’들은 순수한 개념들 사이의 운동으로는 사고가 뻔한 결말에 도달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를 창조하는 능력.

이 책을 읽으면서 13가지의 ‘생각도구’만큼 중요하게 제기되는 쟁점, 창조성과 그것을 육성할 수 있는 교육제도라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된다. 현대의 대중교육은 어떤 창조성을 가진 ‘전인’을 육성한다기 보다는 노동시장의 상황(이중 노동시장)에 맞는 노동력을 길러 내는 것에 중심이 가있다.

따라서 이 책이 제기하는 ‘전인’이란 전-신자유주의적인 어떤 지식인모델이거나 혹은 신자유주의 하에서 요구되는 엘리트일 수도 있다. (책이 나온 시점이나 책에 열광하는 독자들을 봐서는 후자일 가능성이 많지만.) 아마도 여기서 배제된 사람들은 불안정노동시장을 구성하는 현대의 프롤레타리아로, 그들에게 창조성이란 별로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되고 요구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한편으로는 엘리트 교육을 위한 방법론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창조적인 전인’이라는 이상이 단지 부르조아, 신자유주의 엘리트들의전유물일 수는 없다고 다시 주장해야한다. 프롤레타리아에게 창조성이란 어떤 거추장스러운 무엇이 아니라 삶을 실현하는 필수적인 요소가 되어야한다. 이를 위해서는 교육은 물론이려니와, 창조성이라는 것이 ‘실현’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물질적 조건이 구축되어야한다.

여기서 우리는 상이한 것들이 마주치는 과정을 통해서, 무엇인가 창조적인 것이 형성될 수 있다고 할 때, 저자의 13가지 생각도구에 더해서, 하지만 ‘부가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핵심적인 것 하나를 추가할 수 있다. 바로 ‘노동’이다.

노동을 통해서, 개념들과 미적인 요소들을 현실과 만나게 하고 실현하고 변용할 수 있다. 노동 속에서 창조성은 존재의 의미를 찾는다. 저자들에게 ‘노동’이라는 항목이 이상하게도 빠져있는 것은 저자들에게나, 역사적으로나 창조적인 무엇은 노동과 분리된 엘리트들의 활동으로 정의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창조성을 위한 사고의 도구이자, 그것을 실현하는 요소로서 노동이 강조될 수 있다면, 또 한편으로는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창조적일 수 있도록 하는 현실의 조건(작업장과 교육현장에서)이 사고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과정은 모든 사람에게 전업화가가 되라는 것은 아니지만, 누구나 ‘한편으로는’ 화가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러스킨은 1850년대의 런던의 노동자들에게 데생을 가르쳤는데, 이는 데생을 통해서(그림을 직접 그리는 것을 통해서) 사물을 더 풍부하게 보고 느끼고, 그 아름다움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러스킨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목수를 화가로 만드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목수로서 더 행복하게 살게하려는 것이다”, 혹시 소질과 의지가 있다면 화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에서 재인용)

이렇게 노동자들과 예술, 과학이 만날 때, 인류의 위대한 정신적 유산들과 창조성이 소수의 전유물이 아니라 노동하는 대중의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러스킨이 150년 전에 시작했던 일이 아직도-아직은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진다고 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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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창조적인 사고의 사례로 여러 인물을 드는 데 그 중에는 헬렌 켈러도 있다. 그녀는 활동 과정에서 공산주의자가 된 것으로 알려져있고, 메카시즘 광풍에서 희생되기도 했다. 그녀가 한 것으로 알려진 말이 생각났다. (그런데 찾아보니 그녀가 한말은 아니고, 브라질의 해방신학 계열의 Helder Camara주교가 했던 말이라고 한다. 여튼, 훌륭한 어구가 다시 떠올랐기 때문에 인용.)

"When you give food to the poor, they call you a saint. When you ask why the poor have no food, they call you a communist."
-- Archbishop Helder Camara, Brazilian liberation theolog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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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여행의 기술


여행의 기술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여행을 준비하면서 잡다하게 챙겨읽고 있는, 여행에 대한 책들 중 한권. 하지만 가장 독특한 책이라고 할 만하다. 여행을 ‘낮선 곳에서 사진을 찍고 오는 행위’가 아닐 수 있게, 여행과 그 속에서 만나는 것들에 여행자가 스스로 의미들을 부여할 수 있도록 사고하게 하는 책.

 

글쓴이 알랭 드 보통은 여행의 다양한 장소들, 다양한 측면들.. 낯선 장소를 만나고 보고 느끼고 인식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보들레르나 위즈워스, 고흐와 같은 예술가들의 말을 경유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영국 숲의 덤불속에 어떤 생명에게서 나와 같은 시간대에 같은 행성을 살고 있다는 동류감을 떠올린다. 호퍼의 그림을 통해서, ‘외로움’과는 또 다른 ‘공동의 고립감’에 빠진다. 시나이의 사막에서 신이 빚은 위대한 창조 앞에서, 숭고한 장소들은 부드럽게 우리를 다독여 한계를 인정하게 한다는 것을 느낀다. 남프랑스의 아를에서, 화가들의 작업이란 눈에 보이는 것들 중에서 화가가 보여주고 싶은 현실의 귀중한 특질들을 담아내는 것이라는 점을, 고흐를 통해서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마주치는 아름다움과 그 소유에 대해서도.

 

보통이 말하는 모든 곳에 가보고 싶어진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나도 실험해보고 싶어진다. (다행히 보통이 언급한 몇 군데는 앞으로 다녀오려고 하는 장기간의 여행 예정지 목록에 들어있다.)

 

특히 러스킨을 통해서 말하는 이 부분은 인용해볼만 하다.

 

러스킨은 아름다움과 그 소유에 대한 관심을 통해 다섯 가지 중심적 결론에 도달했다.

첫째, 아름다움은 심리적인 동시에 시각적으로 정신에 영향을 주는 수 많은 복잡한 요인들의 결과물이다.

둘째, 사람에게는 아름다움에 반응하고 그것을 소유하고 싶어하는 타고난 경향이 있다.

셋째, 이런 소유에 대한 욕망에는 저급한 표현들이 많다. (앞서 보았듯이, 기념품이나 양탄자를 산다거나, 자기 이름을 기둥에 새긴다거나, 사진을 찍는 행위를 포함해서)

넷째, 아름다움을 제대로 소유하는 방법은 하나뿐이며, 그것은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스스로 아름다움의 원인이 되는 요인들(심리적이고 시각적인)을 의식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의식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자신이 그런 재능이 있느냐 없느냐에 관계없이, 그것에 대해 쓰거나 그림을 그림으로써 예술을 통하여 아름다운 장소를 묘사하는 것이다. (문단나누기와 강조는 나) 


여행에서 마주친 대상들에 대해서 데생을 하거나, ‘말그림’을 그려보는 방식으로 우리도 러스킨이 말한 것처럼 아름다움을 소유할 수 있다.(그것은 러스킨의 언급처럼 기념품이나 사진으로 이루어지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렇게, 여행을 위한 영혼의 준비를 얼추 갖추었다면(아, 그리고 작은 스케치북과 연필, 노트도), 우리는 보들레르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때, 이제 떠나야할 시간이다. (아, 아직도 준비가 너무 부족한데, 이 곳의 눈물은 이미 너무 많구나!)

 

열차야, 나를 너와 함께 데려가다오! 배야, 나를 여기서 몰래 빼내다오!
나를 멀리, 데려가다오, 이 곳의 진흙은 우리의 눈물로 만들어졌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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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국현이 걱정되는 이유

풀소리님의 [문국현이라는 고수의 출현] 에 관련된 글.

문국현이라는 쟁점에 대해서는 한번 메모라도 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풀소리님의 포스팅이 있다. 문국현은 이번 대선에게 가장 눈에 띄는 대선주자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문국현이 제기하는 쟁점이 대중들이 '갈망'하는 것인지는 아직 불확실하다. 대중들은 이명박류가 제기하는 발전주의 환상에 다시 동원될 수 있고(적어도 현재까지 그것이 가장 강력하다), 혹은 문국현이 제기하는 사회투자국가류의 대안에 솔깃할 수도 있다.

하지만, 풀소리님이 쓴 것처럼, 문국현은 민주노동당에는 가장 강력한 적수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해보인다. 그 가장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여야를 막론하고 다른 보수정당 후보들이 잘 이야기하지 않는 것들-그러나 민주노동당 후보들이 열심히 다루는 것들--을 말하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한미FTA, 농촌, 대안적 발전전략, 중소기업, 남북경협 등등. (그러나 이미 노무현 정권의 정책프레임에 있던 것들이라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문국현이 민주노동당에게 위험한 이유는 역설적으로, 문국현이 아주 뛰어난 어떤 대안을 제기해서는 아니다. 오히려 민주노동당의 정책과 정치적 입장이 리버럴들과 구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입장이 같다면, 그것이 오히려 실현가능해보이고(당선가능성), 세련되어 보이는(정책역량) 인물에게 투표하는 것이 당연하다.

민주노동당은 정책프레임의 측면에서는 리버럴들이 이미 만들어놓은 구조 안에서 움직이고 있고, 그 내용에 있어서도 크게 구별되지 않는다. 얼마전에 포스트에도 언급했지만, 예를 들어 권영길 후보의 경제정책은 오히려 DJ의 벤처정책, 북방정책과 유사하고 심상정의 국제경제정책은 스티글리츠를 연상시킨다. 좌파가 형성해야할 정치의 다른 장소--대중정치가 전적으로 부재한 이 판에서 유능한 리버럴을 상대할 수는 없다.

대중을 주체화시키고, 그들이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운동정치는 이미 이들의 기억에서 사라진 것같다.(하긴 대선을 운동공간이라기 보다는 집권의 징검다리로 생각하는 순간, 당연한 일이겠지.) 대중들에게, (선거에 제한되지 않게) "함께 이것을 투쟁으로 쟁취합시다"가 아니라 "내가 해드리겠습니다"라는 어법이 전면에 있다. 이것이 "인간이 그 속에서 이 갈등을 의식하고 투쟁으로 해결"(마르크스)하는 영역으로 정치를 바라보는 관점과는 이미 몇백광년 떨어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알 수 있다.

그것이 선거정치의 고유한 한계일지, 그건 아직 잘 모르겠다.(대안적인 선거정치, 즉 대중을 수동적 대상으로 소외시키지 않으면서도 선거에 대응할 수 있는 방식이 있는지 말이다.) 그러나 적어도 현재의 민주노동당 경선 속에서 드러난 민주노동당의 '정치'란 그 프레임에 있어서나 내용에 있어서나 점점 더 짝퉁 리버럴에 불과한 무엇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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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운동포럼, 곧 열립니다.

2007년 여름의 가장 중요한 운동적 사건이라면 우선 이랜드-뉴코아투쟁, 그리고 사회운동포럼.
역사적인 자리가 되길 예상하고 또 기대하는 중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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