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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4/08/28
    인터뷰
    SABOTAGE
  2. 2004/08/28
    입장의 동일함
    SABOTAGE

인터뷰

THINGS you shouldn't say in a tenure-track job interview

By Kerry Soper

 

 

 

저와 유사직종에 종사하는 후배의 블로그에서 퍼왔습니다.

재밌습니다. -- sabot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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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의 동일함

신영복: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한 법입니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적 연대가,

실천적 연대 보다는 입장의 동일함이 더욱 중요합니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이 관계의 최고형태입니다.

 

 

 

신영복 선생께서 미국에 가셨던 모양입니다.

몇 해 전 쓰신 것이지만 지금 읽어도 좋은 기행문입니다.

선생의 통찰이 언제나 큰 자극입니다. -- sabotage.



신영복 / 아메리칸드림

 

우리는 꿈속에서도 이것이 꿈이라는 자각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영화의 본고장 헐리우드에 있는 '명성의 거리'(The walk of fame)에는 3천개가 넘는 별이 있습니다. 보도에 박혀 있는 별 하나 하나에는 우리들에게 너무나 친숙한 스타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아메리칸 드림(American dream)의 주인공들입니다. 스타들의 싸인과 수족(手足)이 도장(圖章)되어 있는 챠이니즈 극장 앞은 젊은 시절의 우상을 확인하려는 관광객들로 발들여놓기가 힘들 지경입니다. 나도 나의 젊은 시절을 사로잡았던 스타를 찾아보다가 새삼스레 헐리우드가 만들어낸 별들의 광휘와 위력에 놀랍니다. 10만개의 전구(電球)로 200미터의 아취터널을 만들어 놓고 펼치는 라스베가스의 라이트 벌 브 쇼(Light bulb show)는 한판의 환상이었습니다. 라이트 쇼가 끝난 거리는 세계각처에서 몰려온 사람들의 꿈같은 탄성으로 다시 한 번 출렁입니다. 나는 라스베가스의 아침거리를 걸으며 생각했습니다. 간밤의 얼굴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드 러내고 있는 거리의 풍경은 어제 밤의 일들이 꿈같습니다. 꿈이란 무엇인가. 꿈의 벨트 미국 의 서부(西部)는 17시간의 시차(時差)와 함께 내게 심한 현기증으로 다가왔습니다.

미국은 '꿈의 대륙'이고 20세기를 '미국의 세기(世紀)'라 한다면 아메리칸 드림은 곧 20세기 의 꿈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20세기를 살아온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꿈꾸어온 가치라고 해야 합니다. 20세기 1백년은 미국의 승리와 영광으로 가득찬 세기임에 틀림없습 니다. 동구사회주의의 이상이 좌절된 지금 우리는 이제 유일한 강국으로 군림하고 있는 미 국의 꿈을 통하여 미래의 꿈을 읽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인류에게는 더 이상의 역사는 없고 더 이상의 꿈도 없는 이른바 '역사의 종말'과 함께 '꿈의 종말'을 선언해야 할 지도 모릅니 다.

미국의 역사는 아메리칸 드림의 역사였습니다. 신대륙을 찾아나선 청교도의 꿈에서부터 서 부(西部)를 향하여 불태웠던 골드러쉬의 꿈. 실리콘벨리에서 키우는 정보사회의 꿈에 이르기 까지 미국은 꿈의 제국입니다. 미국의 꿈은 이제 아메리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를 석권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꿈은 헐리우드의 필름이 깔아놓은 '셀룰로이드 고속도로'를 따라 세계의 방방곡곡으로 수출되고 있습니다. 맥도널드와 코가 콜라를 예로 들지 않더라도 수많 은 상품과 자본은 막강한 군사력의 계호를 받으며 미국의 꿈을 도처에 심어놓고 있습니다. 미국의 꿈은 이제 세계의 꿈이라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미국을 찾는 사람들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것이 자유의 여신상입니다. 자유의 여신상을 바라보는 관광객들의 눈길이 꿈 속을 더듬는 듯 합니다. 미국의 꿈은 이제 자유의 꿈으로 승화되어 있는 지도 모릅니다. 반 세기가 넘도록 미국의 꿈을 꾸어온 우리 나라의 경우는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미국적 가치와 미국의 꿈이 우리의 가치가 되고 우리의 꿈이 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도시와 학교에는 미국을 꿈을 찾아온 사람들로 한인타운을 이루어 마치 당제국(唐帝國)시절 의 신라방(新羅坊)을 연상케 합니다.

나는 꿈의 도시 헐리우드와 동화의 세계 디즈니 랜드 그리고 환락의 메카 라스베가스 등 아 메리칸 드림의 상징이 되고 있는 '꿈의 벨트'를 통과하면서 내내 꿈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세계적 가치가 되고 세기적 가치가 되어 있는 미국의 꿈에 대하여 생각했습 니다. 물론 이 꿈의 벨트가 보여주고 있는 상품화된 꿈 을 아메리칸 드림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미국의 꿈은 개인에게 열려 있는 '기회(機會)와 가능성'을 일컫는 것 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기회와 가능성에 대해서도 우리는 그것이 무엇을 성취할 수 있 는 기회이며 어떤 가능성을 열어주는 꿈인가를 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흔히 그 사람을 알기 위하여 그의 과거를 묻는 것에 못지 않게 그의 꿈을 물어봅니다. 그의 꿈을 물 어 그 사람을 들여다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단 한사람의 흑인 관광객도 찾아볼 수 없는 꿈동산 디즈니랜드가 보여주는 꿈은 무엇이며, 헐리우드가 생산하고 있는 꿈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그리고 라스베가스가 펼쳐 보이는 꿈 은 과연 어떤 내용을 갖는 것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리콘 벨리가 선도하는 정보 사회의 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구텐베르그의 금속활자에 버금가는 혁명을 예고한다고 하지만 그 정보사회의 꿈은 무엇을 지향하고 있으며, 무엇이 그 꿈을 이끌어 가고 있는가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헐리우드의 거리를 걸으며 꿈을 이룬 사람들의 이름을 읽을 때마다 나는 스타의 꿈이 좌절 된 더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세븐 일레븐'은 이곳에 햄버거를 사러 왔다가 우연히 영화감독의 눈에 띄어 일약 스타가 된 어느 여배우의 신화가 남아 있는 가게 입니다. 지금도 수많은 스타지망생들이 감독의 눈에 뜨일 때까지 부지런히 '세븐 일레븐'을 찾아와 계속해서 햄버거를 사고 있습니다. 이것은 차라리 한 토막의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 으며 에피소드는 비극을 희극으로 만들어 그 심각함을 희석시켜주기도 합니다. 서부의 꿈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부의 꿈은 그것을 꿈으로 미화하는 구조를 배후에 감추고 있습니다. 문명과 야만, 카우보이와 인디언, 라이플과 도끼, 법과 무법, 여선생과 매춘부라는 서부극(西部劇)의 도식이 바로 그것입니다. 신대륙의 꿈은 더욱 명백한 내용을 갖는 것입니다. 아메리카는 신대륙이 아니라 이미 사람 들이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었음은 물론이며 더구나 '발견'이란 가당치도 않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신대륙의 꿈은 땅과 가족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아메리카 원주민들 의 처지를 완벽하게 사상하지 않는 한 결코 꿈이라고 부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비극을 '명백한 운명'으로 규정하는 신탁(神託)의 권능을 전제하지 않는 한 그것 을 꿈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꿈은 암흑의 무대를 필요로 하는 어둠의 언어입니다. 꿈이란 한 개를 보여줌으로써 수많은 것을 보지 못하게 하는 몽매(蒙昧)의 다른 이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메리칸 드림 뿐만이 아니라 모든 꿈의 구조입니다. 명(明)과 암(暗), 극소(極少)와 대다(大多)가, 심지어는 무(無)와 유(有)가 무차별하게 전도(顚倒)되는 역상(逆像)의 구조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러 한 구조가 꿈의 세계가 아닌 우리의 현실에 깊숙히 또아리를 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미국에 도착한 이후 나는 내내 시차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서부의 끝인 샌디에고 에 이르기까지도 시차가 풀리지 않았습니다. 계속 밤잠을 설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쩌 다 새벽잠을 얻은 날도 피곤한 아침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꿈이 아름다울수록 더 참담했던 옥방(獄房)의 아침같았습니다. 꿈은 우리들로 하여금 곤고(困苦)함을 견디게 하는 희망의 동의어가 되고 있음이 사실입니 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꿈은 발밑의 땅과 자기자신의 현실에 눈멀게 합니다. 오늘에 쏟아야 할 노력을 모욕합니다. 나는 이것이 가장 경계해야할 꿈의 위험이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우리세기가 경영해 온 꿈이 재부(財富)와 명성(名聲)과 지위(地位)와 승리(勝利)로 그 내용을 채우고 있는 것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꿈의 유무(有無)에 앞서 꿈의 내용을 물 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새로운 세기에는 새로운 꿈을 경작해야 한다는 당신의 주장은 옳습니다. 20세기를 석권해 온 '미국의 꿈'을 반성하고 다시 새로운 세기의 꿈을 설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 는 새로운 꿈을 설계하기 전에 가능하다면 모든 종류의 꿈에서 깨어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모르지 않습니다. 소수의 선각적 노력에 의해 서 될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집단적 몽유(夢遊)는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겪는 집단적 아 픔이 없이는 깨어나기 어려운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꿈속에서도 이것은 꿈이 라는 자각(自覺)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무심히 걷고 있는 좁은 골목길 에서 우연인 듯 만나는 이 작은 자각에 잠시 걸음을 멈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작은 자각 이 결코 작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큰 것이 다만 작게 나타나고 있을 뿐 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침을 만들어 내는 노력은 적어도 개인의 경우에는 이 작은 자각에 서부터 시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비록 참담한 아침이 되어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나는 샌디에고에서 고난의 땅 멕시코로 넘어 갔습니다. 멕시코의 국경도시 티후아나는 비에 젖고 있었습니다. 나는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을 찾아 갔습니다. 시계청소(視界淸掃)로 헐벗 어버린 언덕위로 견고한 철책이 멀리 해안까지 이어져 있고 미국령에는 밀입국자를 감시하 는 순찰차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경계를 서고 있었습니다. 나는 국경순찰차를 긴장시키면서 천천히 철책을 따라 걸었습니다. 뜻밖에도 도중에 10여명의 라틴아메리카 빈민들을 만났습 니다. 그들은 꿈의 땅 미국으로 밀입국하기 위하여 비내리는 동굴에서 벌써 며칠째 밤을 지새고 있었습니다. 꿈의 경계(境界)에 서 있는 그들의 초췌한 모습이 슬픕니다. 철책은 제1 세계와 제3세계의 견고한 경계선이었습니다. 나는 도로 하나를 경계로 하여 빈(貧)과 부(富) 가 칼로 자른 듯이 격리되어 있는 미국의 도시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꿈이란 양 파와 같다던 당신의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꿈이란 껍질로만 이루어진 것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알맹이는 없고 외피(外皮)만으로 겹겹이 포장된 구적(球積)이 꿈의 실체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됩니다. 미국의 꿈은 미국의 바깥에 있었습니다. 비내리는 맥시코의 국경에 있고, 멀리 지구의 반대 편 낮밤이 바뀌어 있는 우리나라에 있는 지도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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