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슬픈가?
무너지는 것들 옆에서
- 고정희
내가 화나고 성나는 날은 누군가 내 발등을 질겅질겅 밟습니다. 내가 위로받고 싶고 등을 기대고 싶은 날은 누군가 내 오른뺨과 왼뺨을 딱딱 때립니다. 내가 지치고 곤고하고 쓸쓸한 날은 지난날 분별 없이 뿌린 말의 씨앗, 정의 씨앗들이 크고 작은 비수가 되어 내 가슴에 꽂힙니다. 오 하느님, 말을 제대로 건사하기란 정을 제대로 건사하기란 정을 제대로 다스리기란 나이를 제대로 꽃피우기란 외로움을 제대로 바로 잡기란 철없는 마흔에 얼마나 무거운 멍에인가요.
나는 내 마음에 포르말린을 뿌릴 수는 없으므로 나는 내 따뜻한 피에 옥시풀을 섞을 수는 없으므로 나는 내 오관에 유한 락스를 풀어 용량이 큰 미련과 정을 헹굴 수는 더욱 없으므로 어눌한 상처들이 덧난다 해도 덧난 상처들로 슬픔의 광야에 이른다 해도, 부처님이 될 수는 없는 내 사지에 돌을 눌러둘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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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슬픈가?
목까지 차오르는 슬픔을 짓누르며 한번 물어나 보자
왜?
도대체 왜?
이유는,
생각 못해
말 안하고 싶어
그냥 그래
젠장, 슬픈대로 내버려 둬
지금 필요한 건 약간의 술과 시간일 뿐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꺼야
난 원래 이성적인 인간이 못 돼
오랫동안 강철같은 인간을 꿈꿨지만
단지 꾸며낸 허상일 뿐이지
소심하고 나약하고 겁많은 인간,
그게 나야
그래서 견디기 버거운 거야
좀 더 뻔뻔해지면 좋을 텐데
좀 더 단단해지면 좋을 텐데
끝도 없이 작아지고 작아지고 작아지고 싶은,
서글픈 봄밤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