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순간 2009/04/18 20:14

왜 슬픈가?

                                                                      무너지는 것들 옆에서 

                                                                                                              - 고정희 

 

   내가 화나고 성나는 날은 누군가 내 발등을 질겅질겅 밟습니다. 내가 위로받고 싶고 등을 기대고 싶은 날은 누군가 내 오른뺨과 왼뺨을 딱딱 때립니다. 내가 지치고 곤고하고 쓸쓸한 날은 지난날 분별 없이 뿌린 말의 씨앗, 정의 씨앗들이 크고 작은 비수가 되어 내 가슴에 꽂힙니다. 오 하느님, 말을 제대로 건사하기란 정을 제대로 건사하기란 정을 제대로 다스리기란 나이를 제대로 꽃피우기란 외로움을 제대로 바로 잡기란 철없는 마흔에 얼마나 무거운 멍에인가요.
   나는 내 마음에 포르말린을 뿌릴 수는 없으므로 나는 내 따뜻한 피에 옥시풀을 섞을 수는 없으므로 나는 내 오관에 유한 락스를 풀어 용량이 큰 미련과 정을 헹굴 수는 더욱 없으므로 어눌한 상처들이 덧난다 해도 덧난 상처들로 슬픔의 광야에 이른다 해도, 부처님이 될 수는 없는 내 사지에 돌을 눌러둘 수는 없습니다.

.........................................................................................................................................................................................

 

왜 슬픈가?

목까지 차오르는 슬픔을 짓누르며 한번 물어나 보자 

왜?

도대체 왜?

이유는, 

생각 못해

말 안하고 싶어

그냥 그래

젠장,  슬픈대로 내버려 둬

지금 필요한 건 약간의 술과 시간일 뿐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꺼야

난 원래 이성적인 인간이 못 돼

오랫동안 강철같은 인간을 꿈꿨지만

단지 꾸며낸 허상일 뿐이지

소심하고 나약하고 겁많은 인간,

그게 나야

그래서 견디기 버거운 거야

좀 더 뻔뻔해지면 좋을 텐데

좀 더 단단해지면 좋을 텐데

끝도 없이 작아지고 작아지고 작아지고 싶은,

서글픈 봄밤이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9/04/18 20:14 2009/04/18 20:14

트랙백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댓글

1 ... 28 29 30 31 32 33 34 35 36 ... 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