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는시간 2009/03/22 16:51

방법서설

한 개인이 국가를 그 밑바닥으로부터 모두 변화시키거나 올바로 재건하기 위해 전복시키거나 개조하려고 하는 것은, 전적으로 이치에 어긋나는 것이고 또 마찬가지로 학문의 전 체계나, 그 교육을 위해 학교에서 확립하고 있는 질서를 변혁시키려고 하는 것도 이치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그렇지만 내가 그때까지 받아들여 믿어온 여러 견해는 모두 '자신의 신념'에서 일단 단호히 제거해 보는 게 최선의 길이다 라고 말이다. 나중에 다른 더 좋은 견해를 다시 받아들이고, 전과 같은 것이라도 이성의 기준에 비추어 올바르게 해서 받아들이기 위해서이다. 낡은 기초 위에만 건설하고 젊은 시절에 믿어버린 여러 원리에만, 그것이 참됨인지 어떤지 검증해 보지도 않고 의거하기보다는, 이런 방식에 의해 훨씬 더 잘 자신의 삶을 이끌어가는 데 성공하리라고 믿었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도 여러가지의 어려움은 있더라도 대응책도 있고, 공공의 아주 작은 일을 개혁할 때에도 볼 수 있는 어려움과는 비교가 안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공의 커다란 조직은 일단 쓰러지면 재건하기가 매우 어렵고, 단지 동요되었을 경우라도 계속 유지하기조차 곤란하기 짝이 없으며, 더구나 그 붕괴는 매우 가혹한 상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큰 조직의 불완전한 점에 대해 말하자면, 이것들이 여러 가지의 다른 형태로 되어 있는 것만으로도 결점이 많은 걸 충분히 확인할 수 있지만, 이런 결점이 있어도 습관이 그러한 결점들을 크게 완화시켜 왔을 것임에 틀림없다. 더구나 습관은 부지불식 간에 결점의 대부분을 피하거나 교정시켜 왔다. 사려 분별만으로는 이 결점들에 이토록 잘 대처할 수는 없으리라.

 

- 데카르트 '방법서설' 중에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는 바로 '방법서설'에서 제시된다. '나'가 무엇인지에 대한 검토 끝에 '생각하는 것(사유)'이 본질임을 밝히고, 그 '생각하는 것'은 존재하기 위해 어떤 장소도 어떤 물질적인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하나의 '실체'임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데카르트의 선언은 확실성의 기초가 인간 자신 그리고 주체적 자아 의식으로서 인간의 이성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사상사에 있어서 혁명적인 성격을 갖게 된다. 또한 그의 합리주의적 사상은  인간의 자연 정복에 대한 이념적 기초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현재의 생태학적 세계관으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으며, 물심 이원론적 사상은 아직도 비중 있는 논쟁중의 하나이다.

이 책의 정확한 제목은 '이성을 바르게 인도하고 여러 학문에서 진리를 찾기 위한 방법에 관한 서설'이며 철학적 자서전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의 '양식 내지 이성은 만인에게 갖춰져 있다'는 이성주의적 신념 아래, 여성들을 포함한 대중들도 이해할 수 있는 모국어인 프랑스어로 씌어졌다. '방법서설'은 당시 학문의 혁신을 위한 방법론적 반성인 동시에 명증적인 이성의 인도에 따라 올바르게 살고자 하는 데카르트 자신의 삶의 방법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담고 있다. 전체는 6부로 나뉘어 있으며 1부는 자선전적 고백으로 전통적인 학문에 대한 비판, 2부는 학문 방법의 주요 규칙, 3부는 잠정적 도덕의 규칙, 4부는 형이상학 - 하나님 및 인간 영혼의 존재 증명, 5부는 자연학, 6부는 장래 학문의 구성등의 내용으로 정리되어 있다.

 

우선 이 책은 가볍다. 지금까지의 책들과는 달리 양적으로 짧아서 읽기 편해진다. 그리고 데카르트의 철학적 삶의 자세와 고민을 엿볼 수 있는 대목들은 그것이 단지 위대한 철학자만의 것이 아닌 시대를 한참 뛰어넘은 현재 우리의 것과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다시 한번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 나 역시 현실의 오류속에서 사상은 수정되고 보완되어야 했다. 하지만 짧은 인식속에서 마치 절대신앙처럼 굳어버린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될 때, 그런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과 불꽃처럼 부딪히게 될 때 그만 쉽게 절망하게 된다. 완전한 인간, 완전한 세계, 완전한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데도 말이지. (비록 데카르트는 완전한 존재로서의 하나님을 인정했지만.)

 

'내 의견에 대한 비판자로서 나 자신보다 더 엄격하고 공정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 게다가 나는 학교에서 행해지고 있는 토론이라는 방식을 통해 지금까지 몰랐던 진리를 뭔가 하나라도 발견했다는 것도 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누구나 상대에게 이기려고 애쓰는 동안은 쌍방의 논거를 고찰하기보다는 진실다워보이는 것을 강조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런 순간이 많다. 토론이랍시고 모였지만 서로가 자기 주장의 나열 외엔 아무것도 아닌 지루하고 답답한 시간들 말이다. 현실에서 이성적 존재로서 합리적인 또는 과학적으로 사고하기란 멀고 힘들지만 습관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기란 간편하고 쉬운 것이다. 진실다워보이는 것, 어찌 연연하지 않을 수 있겠나. 자본주의를 살아가면서 내용보다 껍데기에 취할 때가 많은 걸. 인간에 대해서조차도. 한 때는 내가 그런 시선의 피해자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이제 누구나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어떤 부분에서 소수자이지만 어떤 부분에선 그렇지 않고, 자본주의를 반대하지만 동화되는 순간, 앞과 뒤가 맞지 않는 의견과 선택이 종종 존재한다. 결국 자기 모순 속에서의 끊임없는 변화와 발전, 이것만이 변치 않는 진리겠지. 그리고 절대적으로 필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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