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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아이들

36년간 오직 인류의 평화에만 관심이 있던 제가

요즘엔 애들한테 눈길이 갑니다.

 

같은 아파트 9층에는

11살, 7살 짜리 남매가 사는데

엘리베이터에서 자주 만나는 바람에 친해졌습니다.

 

"상구, 쟤네들이랑 같이 놀까?"

 

공원 벤치에 앉아서

이런 저런 얘기를 했습니다.

 

어린애들이 가만히 앉아서

조근조근 얘기하는 게 이뻐보였습니다.

 

한 10분 지나니까

한 명씩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우리 집에요, 18개월 짜리 막내 동생이 있는데요.."

 

여자애가 설명하니까

옆에 있던 나무 중간 쯤 올라가던 남자애가

말합니다.

 

"걔는 막내 동생을 막 이 옷 저 옷 입히면서 가지고 놀아요~~"

 

여자애는 어느새

화단 가장 자리에 쳐놓은 줄 위에 앉아서

대롱대롱 거리고,

 

남자애는 10미터 쯤 떨어진

농구대 꼭대기에 올라가 있습니다.

 

"너네들 밥 안 먹었지? 같이 밥 먹을래?"

"엄마한테 허락 받아야 되는데요..."

 

아이들 어머니는

처음보는 멀쩡하게 생긴 사람들이

자기 애들 밥 준대니까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봅니다.

 

진심을 담아서 설득해야 겠다 싶었습니다.

 

"애들이 너무 이뻐서, 맛있는 거 사줄려구요..."

 

제 말을 듣은 어머니

더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봅니다.

 

할 수 없이 신원보증인을 댔습니다.

이름은 '미루'

 

"어머~몇 개월 됐어요?"

 

같이 집에 와서

애들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어 하는

짜장면과 짬뽕, 그리고 '절대음식' 탕수육을 시켰습니다.

 

음식이 올 동안

애들은 미루한테 가더니

막 만지고, 건들고 하면서 이뻐합니다.

애들한테서 꼬랑내가 났습니다.

 

"저 혼자 다 먹을 수 있어요~"

 

시킬 땐 짜장면 한 그릇, 짬뽕 한 그릇 시켜서

4명이서 나눠 먹자더니

막상 음식이 오니까 애들이 한 그릇씩 차지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의연해야 합니다.

 

11살 남자애는 탕수육부터 공략하고 나서 짬뽕을 먹었습니다.

7살 여자애는 짜장면부터 먹었습니다.

 

남자애의 초록색 화사한 티에는

목부터 배꼽까지

기관총으로 짬뽕 국물을 발사한 흔적이 남았습니다.

 

여자애는 얌전히 먹다가

"더 못 먹겠어요.."합니다. 다행입니다.

 

전 그제서야

남은 짜장면과 탕수육을 조금 먹었습니다.

 

그 후 애들은 1시간 30분쯤 더 놀다가

아이 찾아 3만리를 건너온 표정으로 달려온 엄마 손에 끌려

한참 송편 찌고 있는데 그냥 갔습니다.

 

잘 시간이 다 됐는데

누가 문을 두드려 나가 보니

애들이 북어채를 들고 서 있습니다.

 

"야, 니가 말해~"

"오늘 낮에...감사드린다고요...갖다드리래요..."

"아이고 고마워라, 잠깐만 기다려~"

 

낮에 찐 송편이라도 주려고 봤는데

없습니다.

 

"어쩌지? 송편 남은 거 있나 봤더니 없네..."

여자 아이는 고개를 잔뜩 들고

제 이야기를 듣고 있고

남자 아이는 45도 삐뚤어진 대()자

모양으로 벽에 붙어 있습니다.

 

애들이 참 이쁩니다.

 

나중에 주선생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아까 상구가 걔네들 엄마한테 한 이야기 있잖아..

애들이 이뻐서 뭐 사주고 싶다는 거..그거 딱 유괴범 멘트인거 알어?"

 

애들을 끌고 간 엄마의 심정이

이해가 됐습니다.

 

그래도 미루 아니었으면

애들, 탕수육 못 먹을 뻔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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