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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구 day

언제였는지 모르겠는데

일주일에 하루는 나가서 마음대로 노는 날을 정하고

'상구 day'라고 부르기로 했었습니다.

 

제1회 상구day는 딱히 할 일이 없어서

우울하게 보냈었지만

 

그 이후로 다시는

우울한 상구 day는 없었습니다.

 

상구day가 아예 없었습니다.

 

몇 번 '오늘 상구day 할래?'같은 대화가

있었던 것 같긴 한데

 

제가 어쩌다 밖에 나갈 일이 생기면

그날을 그냥 상구day로 치기로 하는 둥 하다가

결국 유야무야됐습니다.

 

 

"상구~다큐멘터리 하나 보고 와~"

 

그래도 주선생님이 오늘은

저한테 서울독립영화제에 가서 다큐멘터리를 보고 오라고 했습니다.

 

자본주의의 폭력성을 실감나게 고발하는 액션영화나

창조적 상상력을 높이는 데 그만인 공상과학영화를 좋아하긴 하지만

그래도 그게 어디냐 싶어 좋다고 했습니다.

 

'극장에 가다!'

 

산모한테는 꿈 같은 얘기입니다.

아이 키우는 아빠한테도 꿈같은 이야기입니다.

 

신나게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리고 걸어서

극장에 도착했습니다.

 

매표소 앞은 평일인데도

죄다 2인 1조로 북적북적합니다.

 

번호표를 뽑으려고 갔는데

마침 기계가 고장입니다.

 

"현숙아~번호표 안 나와~!!"

 

이 상황에서는 이런 대사를 쳐줘야 하는데

주선생님은 집에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이 사태를 어떻게 할 지

같이 온 사람과 토론을 벌입니다.

 

저는 그냥 괜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가

무표정해졌다가, 어디서 누가 기계 고치러 안 오는지 멀리 보는 척 하기도 합니다.

어색합니다. 

 

방금 전까지 들떠 있던 감정은

차분하게 가라 앉았습니다.

 

"놀라운 가족 한장 주세요..."

 

결국 표를 끊게는 됐는데

표 끊어주시는 여자분이 저를 빤히 쳐다봅니다.

왜 그러시느냐고 눈으로 물어봤더니 묻습니다.

 

"두분이세요?"

 

"아니 혼잔데요..."

 

"맨 뒷자리로 드릴까요?"

 

매표원의 뜻은

'혼자 오셔서 다른 사람들 눈에 가련하게 보일거니까

맨 뒤에서 혼자 숨어서 보실래요?' 였습니다.

표정도 딱 그 표정입니다.

 

차분하게 가라앉았던 감정이

살짝 떴습니다.

이대로 물러서면 안됩니다.

 

"아니요, 앞쪽 중간쯤으로 해서 주세요..."

 

영화는 조금 뒤에서 봐야 목이랑 눈이 편한데

덕분에 괜히 앞 자리 표를 받았습니다.

 

어쨌거나 상영관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좌석번호 'E8'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습니다.

근데 'E8'에 앉는 건 어려웠습니다.

 

주변은 온통 빈 자린데

바로 옆 'E7'에 혼자 온 남자가 앉아 있었습니다.

 

모니터로 E7 한자리가 발매된 걸 보고

E8을 끊어줬을 아까 그 분이 다시 생각났습니다.

이 분은 끝까지 저를 배려해주신 겁니다.

 

생각했습니다.

'집에서 비디오나 빌려볼 걸...'

 

결국 저는 E9에 앉아서 영화를 봤습니다.

 

영화는 꽤 유쾌하고 생각할 거리도 많았습니다.

들어갈 땐 안 그랬는데 나올 때 기분은 괜찮았습니다.

 

오늘을 상구day로 치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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