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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부탱이~~

이제서야 알았다..

나를 옥죄는 이 삶의 무게가 무엇인지를..

그동안 회피해왔던 이 지긋지긋한 원초적인 허기!!

 

은희가 싸이에 글을 남겼다..

아빠, 엄마, 민수, 은희 핸펀번호를 쭉 올려놓고는

'전화하는데 얼마나 걸리나 두고보겠다'며 엄포를 놓았다

 

왜 하필 그날 그런 글을 올린거냐구...

내 감정상태가 최악일때..

정말 지지리도 궁상이던 날..그런날 그런 글을 올렸단말이냐...

 

10년이 지났다..

98년도에 헤어졌으니까..정확히 10년이 된게다..

그동안 한번도 전화를 하지 않았다.

 



'박'씨들을 만났다. 언니와 오빠..

이제 나이가 느껴지는 그런 날이었다.

가슴이 콩당콩당해서 찾아갔다.

언니가 역까지 마중을 나왔다.

언니와 오빠는 위아래층에 살고있었고,

내게 형부가 생겼다. 새언니도 생기고,

조카도 박씨남매에게 지지배, 머스매 한개씩..

 

낯설었다.

그리고, 행복했다..

그냥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것만으로도..

 

막한 밥이 먹고싶을때,

아파서 손하나까딱하기 싫을때,

갑자기 누군가 보고싶을때,

술한잔 묵고 목놓아 울고싶을때,

그럴때 전화할 사람이 생겼다.

 

이젠

용돈달라고 할 형부도 생기고,

서글서글한 새언니도 생기고,

명절에 갈 곳도 생겼다..

 

킁이모랑도 통화를 하고, 첫째 오빠랑도 통화를 했다

이번 구정때 꼭 오란다.

 

 

 

밥도 묵고, 술도묵고, 세월도 묵었다.

15년전부터 역순으로 우린 세월을 훑었다.

그래..그때 그랬지..

그래...그래서 그런거였구나..

 

근데 너무도 놀라운건말이지..

그녀가 노력이라는 걸 했더란 말이다..

 

노력이라는걸 한줄은 전혀 몰랐는데..

그사람이 이제 인간으로 이해되버렸다는게 날 미치게 한다.

그사람은 그냥 나쁜 사람으로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왜 날 이렇게 미치게 하냔 말이다.

 

왜 난 다 이해가 되냔말이다.

그 처지와 조건에서 각자 다 그럴 수 있었겠지라는 이해와 동의가 되는순간

난 투쟁의 대상을 상실하게 된거다.

 

10년간 한번도 전화하지 않았던 거..

연끊고 살아야지 했던거..

다시는 만나지 말자 다짐했던거...

절대로,,,절대로.. 무슨일이 있어도,.,,

용서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거...

 

이해와 동의는 다르다..

분명 동의가 되는건 아닌데..

98년 미아동 옥탑방에서 받은 편지를 붙잡고

미친년처럼 울었던 것은..

 

나에대한 다짐이었다.

살인을 한 뒤에 미안하다고 한다고 죽은사람이 살아나지 않듯이

그런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걸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이제와서 아무리 미안하다고 해도

절대로 인정할 수 없다는...

 

근데 이제는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 사람의 아픔을 알아버렸다..

오빠는 아주 조심스럽게 충격받지말라고 하면서,

아주 덤덤하게 이야기를 했다..

 

집에들어오는 시장통골목을 지나는데, 눈물이 마구마구 쏟아졌다.

시장통에서 울어보긴 또 첨이다..

미쳤다...미쳤어...

 

나 이제 정말 어쩌지???

 

감정조절이 안된다...

 

정말 어쩌야 하는건지..

10년간 깊이깊이 묻어놨던 것들이 꼬리에 꼬리를 잡고

새록새록 올라오고 있다..

 

 

왜?

왜!

왜?!

내 인생은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일들만 생기냔 말이다..

 

숨쉬기조차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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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적한..

#1.

총회가 끝났다.

1년에 한번하는 총회..

고거 준비한다고 눈코뜰새 없이 바빴지만..

정말 뭘준비했던 걸까 싶기도 하다.

행정적으로 늘 해왔듯이 그렇게 준비한 건 아닌지..

성원이 딱 찼다.

모두 내가 아니면 안되는 구나를 생각했을까?

모인 동지들중에 한명만 없어도 조직이 움직이지 않는..

그런 상태다..

우리는 아직 딱 이만큼이다.

 

 

#2.

'그런데에 갔다오면 한참을 앓아...'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런데를 갔다오면 한참을 앓아야 한다는...

내가 바로 '그런데'에 오라고 했다...

내가 잘 못한걸까???

우린 참 질긴 인연이다..

 

 

#3.

가족을 만난다..

잃어버렸던 가족을..

사촌언니, 오빠를 찾았다..우연히..

 

어제 통화를 했는데..

'오빠는 한번도 널 잊은적이 없다...하나밖에 없는 동생인데..'

라는 통화음성에 덜컥 울어버렸다..

 

 

 

 



우리들은 실제 팔촌정도는 되는거 같다..

그치만 어렸을적 항상 같이 놀았고, 같이 다녔다.

한살위인 오빠와 3살위인 언니..

고3때인가 오빠는 재수를 했고, 언니는 대학을 포기하고

우리는 방학때면 늘 같이 다녔다

난 워낙 집을 싫어했던지라,,

신설동 언니집에서 학원을 다녔고,..

당시 신설동에 입시학원같은것들이 많았다.

오빠는 공부를 잘했었던것 같다. 공부를 잘했던 오빠덕에

오빠와 함께 학원을 다니는것에 대해 전폭적 지지를 했던것..

 

선명한 기억하나..

딱 요맘때였던 거 같다.

신정을 전후한 때거나, 구정을 전후한 때거나 암튼 설즈음이었으니

난 입시에 떨어졌고, 재수를 하겠다고 집에다 이야기 했다.

엄마는 반대를 했고,,,

친구와 신설동에 갔다가 큰이모 집에 들렀고,

친구는 밖에 카페에서 기다리고,,,

난 잠시 이모집에 들렀다.

그 잠시 동안 이모가 불러서 그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를 듣는내내 심장이 쿵쾅거리고, 세상이 노래졌었다.

방에 깔려있던 담요를 덮도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큰이모가 이야기를 했고, 언니와 오빠가 같이 앉아있었다.

그 상황이 지금도 너무나 선명하다.

그러나 큰이모앞에서 티를 낼 수가 없었다.

큰이모는 내가 다 아는줄 알고 한이야기였고,

난 그날 처음 듣는 사실이었고..

그리고 어떻게 그 집을 나왔는지 모르겠다.

친구가 기다리는 카페에서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했다.

 

그리곤 엄마와 극도의 상황으로 갔다.

결국 재수를 하게됐다. 아빠의 허락으로..

재수하는 내내 엄마는 한번도 도시락이라는 걸 싸준적이 없었고,

'그렇게 해도 나에게 나쁜년이라고 할 사람이 없다'는 엄포를 놓았다.

재수하는 동안 놀이터에서의 소주와 새우깡으로 간신히 재수생활을 버텼다.

인생의 낙오자라는 패배감..

내 삶에 대한 절망...

부모 복없다는 자학...

 

그러면서 연락이 끊겼다..

서로 바빠서겠지..

그 이야기를 했던 큰이모를 원망하진 않는다.

더군다나 언니, 오빠가 나에게 해준것은

친 남매, 자매 이상으로 나에게 잘 해줬었으니까..

 

'미국으로 간 줄알았어...'

 

'...'

 

'결혼했니?'

 

'아니..혼자야..'

 

'오빠는 결혼해서 아기도 있는데...

우리 와이프가 널 잘 알아..내가 매일 이야기 했으니까..'

 

'...'

 

이게 가족이라는 걸가?

 

살기 바빠서 그랬겠지...

아둥바둥 살아야 했으니까..

살아남아야 했으니까..

그땐 운동하느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

지금생각해보면...

어찌 그리 억척같이 살았는지..

 

갑자기 지난 15년이 필름처럼 지나간다..

 

15년만에 만나서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할까??

그 세월을 다 어찌 이야기 할 수 있을까???

그 세월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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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과 개량의 경계

 

2007년 한해동안 내역량의 많은부분을 쏟아부었었다.

하나에 빠지면 정신없이 몰입하는 이놈의 스타일 때문에..

다른것을 다 팽개치고 그것에만 몰입했었다.

모든 투쟁이 그렇듯이 이것 또한 승리의 전망을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은 없었지만,

투쟁 자체가 주는 역동성과 흥미진진함은 날 더 열중하게 만들었던거 같다.

그리고, 

그 와중에 만나는 동지들과의 끈끈한 정은 더없이 날 빠져들게 했다.

투쟁의 방향을 둘러싼 여러 가지의 쟁점과 혼선,

본능적 직관은 촉수를 세워 어려운 길이었지만 만들어 나갔다.


한풀 사그러들었다.

내 열정이 아니라,

주체들의 조건이 아니라,

투쟁자체가 아니라,,

내가 해야만 하는 것들을 더 이상 팽개칠수 없어서..

그렇게 나는 서서히 내 자리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내버려진(최소한 내기준에서, 나에 의해 내버려진) 투쟁과 동지들..

내가 책임지지 못했다는 것이 날 가장 옥죄어 온다.

책임져야 할 위치는 아닐지 모르지만,

내가 그것을 위해 마지막까지 행동을 함께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말이나 글로 방향과 전망을 만드는 것이 아니기에,

투쟁은 한순간만 혼란해져도 그 상처가 번져나가는 것이기에..


어려운 결정을 해야 할시기..

난 동지들의 결정을 존중한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 내부에 그 결정을 존중할 수 없다는 입장이 팽팽했다..

결국 우리는 결론을 못냈고, 오로지 주체들이 판단해야 하는 몫으로 남겨졌다..


상황이 이리된 것이 어찌 그들탓이랴~

한 동지가 민주노조운동에 회의를 느낀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정말 이놈의 민주노조운동의 생명력이 있는걸까?

시지쁘스의 신화처럼 커다란 돌을 계속 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왜 서럽지 않겠는가?

왜 울분이 없겠는가?

지금의 이것을 얻으려고 이렇게 한게 아닌데..

그리고, 정세를 읽지못한것이 아닌데..

투쟁은 총체적인것을, 조직과 투쟁계획과 전술과 전략적 기획과 연대투쟁,

투쟁이 투쟁을 조직한다는 총파업의 신화는 이제 사라졌다.

철저히 통제되고, 관리되는 민주노조운동의 현실앞에

단위노조의 투쟁은 그렇게 고립되고, 말라죽어버린다..


나의 판단은 정말 올바랐는가를 계속 되내인다..

정말 올바른판단인가?

조직력이 떨어지고, 투쟁전망을 제출할 수 없는 상황,

이전의 장투와는 전혀 다른 질을 가진 이 싸움을..

보통의 장투는 해고로 인해 길거리로 내몰리거나,

직장폐쇄가 되거나, 뭐 그런 경우인데..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을 하는 이싸움에서

정규직이 얻을수 있는 것은아무것도 없는 이 상황에서

조직력은 깨어져 나가는 이 상황에서..


조금만 더 버틴다면 좀 더 나을 수 있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 조금을 버티게 하기 위해 어떤 전망을 제시해야 하는가 말이다.

내가 책임질 수 없는 지금에서 그것이 오로지 나의 문제로 치환되지 않는다고 해도

그렇게는 입이 안떨어졌다.

하염없이 눈물만 나왔다. 할수있는게 이것밖에 없다니..

왜 이런때에 난 눈물을 흘리냐 말이다..

눈물을 흘리는 것이

이렇게 무기력하고,

날 더 비참하게 만든단 말이다..

제기랄~~


나또한 상황논리에 젖어있는 것일까?

대중운동이라는 틀 속에서 갇혀 버린 것일까?

일반화되어있는 투쟁의 매뉴얼을 생각하며,

그 경험들에 갇혀 또다른 역동성과 창발성을 잃어버린 것일까?


원칙과 개량의 경계는 과연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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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너무 많이 와~~

올해는 유난히 눈이 많이 오네..

온난화현상이 어쩌니, 저쩌니 해도..

이렇게 눈이 오는 겨울인걸 보면..

 

어제는 하루종일 눈이 내리다가 멈추더니

오늘 아침 집을 나서는데,

또 하야안 눈들이 마주한다.

 

눈오는 날

심장에 후욱하고 불어오는 이 바람은 뭐란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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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사랑하자

올해는 꼭 사랑을 할거다

 

가슴설레는 사랑을 ..

 

결혼안하냐는 이야기를 너무많이 듣는다.

 

올해는 반드시 가슴설레는 사랑을 할거라고  했더니..

 

다들 비웃는 상황이라는거~~

 

한동지 왈 

 

한단계 수준을 좀 낮추라며 살맞대는 사랑을 하는 것으로 하란다.

 

살을 맞대다 보면 가슴이 설레기도 한다며...

 

푸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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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만의 재회..

 

그래..

벌써 3년이 지났다.


내 기억에서 지우고픈 그 일은 2004년 그렇게 일어났고.

선택적 기억상실증에 걸린 나는

무의식적인 본능으로 내가 아팠던 일들을 선택적으로 삭제했다.

살아남기 위해서...


주변과 관계, 동지와 사랑. 운동과 생활의 전반을 돌아보게 했던

그일은 아무렇지 않게 나에게 왔었다.

난 정말 그 일이 그렇게 나를 옭아메게 될 줄 몰랐다.

정말이지...

운동한지 십수년이 되었지만, 한번도 잠수라는 것을 타본적이 없던 내가

당시 일주일을 잠수했었다.

집에서 혼자먹는 술이 너무 싫었다.

누구랑도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았고,

그렇게 앓았다.

술과 눈물이 뒤섞여..


죽을거 같은 암흑이었다. 

주변 관계는 모두 실선에서 점선으로 멀어져갔다

쟁점과 논란, 분석과 추측, 무슨무슨 이론을 들먹이며

그(녀)들이 떠들어대는 것이 싫었다.

아무런 해답도 실마리도 없던 그사건은

무수한 논란만 남긴채 미해결로 남았다.


그리고,

난 선택적 기억상실증을 부여잡았다.

잊자..

잊자..

그렇게 되지도 않는 비정규법안폐기를 위한 총파업을 조직해야 한다는

변명을 하면서 관계를 끊었다.

운동으로 또 몰입한거다. 정신없이 거리에서, 천막에서, 삼실에서..


한 친구가 지리산완주를 하자고 했었다.

맘도 달래고, 정리좀 하라구..

난 그때 이정세에서 무슨 지리산이냐고 했던거 같다.


그리고, 그렇게 잊혀졌던 기억은

1년이나 지난뒤에 한사람에 의해

간신히 간신히 꼬메놓은 실밥이 터졌다.

‘조직적 보복’이라는 한마디에..


난 그게 아니었는데 말이다. 

정말로,,,

그게 아니었는데 말이다..


아무런 문제제기도 하지 않았었다.

하고싶지 않았다.

또 수많은 논란을 만들어내고, 내 상처따윈 전혀 안중에 없는

그런 사람들과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았다.

그 뒤 그 사람과는 말을 섞지 않았다.

그게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



몇일전 울산에서 그 사람과 말을 텄다.


왜 그랬을까?

왜 말을 섞었을까?

이젠 괜찮아진건가?

이해와 연민같은게 생긴걸까?

비쩍마른 그사람이 왠지 짠하게 느껴졌다.


또 다시 복잡해 지는건 싫다.

단순명쾌하고 살고잡은데..

쿨하게...

정말 쿨할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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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날~

새해 첫날.

새해가 새해이기 위해서는

새로워야한다.

아니, 새로워져야 한다.

그래야 새해다.

아니면 헌해의 담날이 되는거지..

 

올해 마지막 여행을 다녀온 곳은 하얗게 눈이 덮혀있었다

앞이 보이지 않을정도로 눈바람이 휘몰아치는데,

정말 앞이 보이지 않았다.

내 지금의 상황을 너무 잘 반증하는건가?

 

올해는 꼭 좋은일만 있어야 한다.

아니, 있을거다!!!

 

행복한 2008년이 될거다..

즐거운 2008년이 될거다..

신나는 2008년이 될거다..

 

몇일전 할머니한테 전화를 했다..

생전 오란이야기를 하지 않으셨다.

늘 차비드는데 오지말구, 목소리 들었으니 됐다고 하시더니..

근데 이번에는 '한번 댕겨가라'는 이야기를 하신다.

 

왜그리 눈물이 나던지..

 

이제 늙으신거구나...

많이 아프시구나..

 

내 유년시절의 절반이었던 당신이신데..

 

'가족'이라는게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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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아

 

소희야! 뭐라고 말해야 될지 모르겠구나

왜 소식을 끊어버린거니?

엄마 골탕좀 먹어보라고!....

전화를 거니까 없는 전화라잖니? 너무나 어이없더라

한방 맞은 기분 같은거 이해하니

이유가 뭔대 왜 이래야 되냐고 소식 몰라 전전긍긍 하다가

니 매일이 생각나서 해보는거야

엄마가 짜증났니? 소식도 자주 전해주지않는다고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엄마가 얼마나 바쁘고 힘들게 사는대

눈코 뜰새도 없어요 글쎄 늦게 공부해서 글씨쓰느라고

밤에는 잠도못잔다 아니? 젊어서 재단하느라고 너무 어깨를 혹사시킨거지

항상어깨가 아픈대다가 글씨를 쓰니까 팔 어깨에 무리가 온고야

소희야 그만 넉두리하고 니소식이나 빨리 보내다고

엄마 성질 급한거 아니? 너!빨리 소식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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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코아 동지들!!

라디오레벨데님의 [] 에 관련된 글.

2007년 절반을 함께 한 동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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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전선 회원강좌 1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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