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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려도 좋아?

"사과로도 부족하다면 화가 풀릴 때까지 때려도 좋아!"

 

일본 만화에 많이 나오는 대사 가운데 하나다. 주로 실수로 잘못을 저지른 캐릭터 - 특히 여자 - 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다가가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하는 말이다.

 

아마 가장 유명한 만화로는 아다치 미츠루의 <슬로우스텝>이 있을 것이다. 여기서도 여자주인공이 변장으로 속이고 있던 것을 들키게 되자 사과하면서 눈을 감고 화가 풀릴 때까지 때려도 좋다고 말한다. 눈을 감고 있는 틈을 노려 키스를 하려다 불발로 끝나기는 하지만.

 

사실 별 것도 아닌 대사. 그렇게 특별할 것도 없는 대사인데 요즘 유독 저 대사가 어떠한 명대사보다도 가슴에 와닿는다. 여기저기 화내고 싸우고 돌아다니면서 겪는 여러가지 일들 때문이다.

 

나는 성격이 좀 격한 편이다. 화도 잘 내고 울기도 잘 하고 웃기도 잘 하고 풀리기도 잘 풀린다. 말하자면 단순열혈남? 그보다는 우리나라식으로 속좁고 성격 더러운 인간이다. 그래서 조금만 화 나는 일이 있어면 참지 않고 그대로 화를 내 버린다. 괜히 쌓아두었다가 나중에 앙금 만드는 일 없도록.

 

사실 내가 화내는 이유 대부분은 그렇게 큰 일이 아니다. 큰 일일 경우 아예 무시해버리거나 화도 내지 않고 창을 닫고 사라져버리니까. 화를 내는 것은 그나마 화를 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작은 일들이다. 그런데 대개는 이 작은 일들이 큰 일로 번진다. 바로 사과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 화를 내면 사람들은 바로 사과를 한다. 사람들이 좋아서인지 몰라도 일단 화를 내면 사과를 한다.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왜 화를 내는지도 모르고, 왜 사과해야 하는 지도 모르면서도 사과를 한다. 아니 정확히는 사과해 준다. 이게 사람을 열받게 만든다. 끝없이.

 

사과라고 하는 것은 상대가 불쾌해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다. 상대가 나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전제하는 데서 시작된다. 상대가 불쾌해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상대가 피해를 입었다는 것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과가 아니다. 그냥 사과해 주는 거지. 징징대며 보채니까 사과를 적선해주는 거지.

 

그럼에도 일단 저렇게라도 사과를 하고 나면 상황은 역전된다. 일단 사과를 해놓았으니 사과를 한 사람은 모든 책임에서 면제된다. 남은 것은 일단 화가 났고, 거기다 저런 황당한 사과를 받은 사람의 용서. 만일 여기서 사과를 받아들인다는 말을 하지 않으면 화 낸 사람에게 모든 책임이 돌아간다. 속좁고 화 잘내고 예의없는 사람으로.

 

대개 저런 식으로 사과를 하고 나면 사과를 한 사람은 끝간 데 없이 당당해진다. 진짜 당당하다. 왜 사과를 받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미 사과를 했는데 뭐가 문제냐는 것이다. 오히려 더 당당하게 힐난하며 책임을 묻는다. 그러면서 속좁은 사람이 된다. 그렇게 예의없는 사람이 된다.

 

더 웃기는 건 주위에서 끼어드는 인간들이다. 대개 구경꾼들은 화를 낸 사람에게 적대적이다. 어떠한 이유에서든 일단 화를 냈다 하면 그 화 낸 인간에게 더 큰 책임을 묻는다. 뭘 그런 걸로 화를 내냐고. 왜 조금 더 참지 않았느냐고. 구경꾼이니까. 철저한 타자니까. 더구나 화를 내게 만든 사람이 사과라도 했다 치면 그 다음은 더 끝장이다. 여기서 굽히고 들어가지 않으면 아예 그 사이트 떠날 각오까지 해야 한다. 안그러면 버티지 못하니까.

 

그렇게 떠난 사이트가 꽤 된다. 워낙에 화를 잘 내는 성격인데다 같지도 않은 사과따위 사과라고 받아들여줄 정도로 유한 성격이 아니라 끝까지 화내며 싸우다 속좁고 성질더러운 예의도 모르는 놈이 되어 거의 쫓겨나듯 떠나게 된다. 게시판을 떠나 거의 블로그에 정착하게 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하도 쫓겨나느라 이젠 쫓겨날 데도 남아있지 않으니까.

 

하여튼 웃기는 일이다. 무엇 때문이든 화가 났다고 한다면 그 화를 푸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 화 난 당사자의 권리다. 분명한 이유가 있어 화가 났다면 그 이유가 해소되기 전까지 화를 풀든 말든 그것은 화가 난 사람의 책임이다. 설사 진심어린 사과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 사과로 만족할 것인가 아닌가도 그 화난 당사자의 책임이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게 화를 내면 화를 낸다고 속 좁은 인간이 된다. 사과같지 않은 사과를 하고도 일단 사과를 했다고 화를 풀지 않으면 예의도 모르는 인간이 되어버린다. 한 마디로 화를 내지 말라는 것이다. 아무리 개같은 일이 있고, 아무리 좆같은 일이 있어도 무조건 화 내지 말고 참으라는 것이다. 뭐 이런 개좆같은 일이 있는가 말이다.

 

이런 일을 당할 때마다 위의 저 만화 대사를 떠올린다. 사과를 하고도 그 사과로 부족할 것 같으면 화가 풀릴 때까지 때리라고 하는 저 대사. 원래 저게 정상 아닌가? 사과를 할 때는 상대방이 용서할 것을 전제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용서할 수 있도록 상대방에게 용서의 방법을 구하는 것이 정상 아닌가?

 

솔직히 인터넷에서 저렇게 때리란다고 해봐야 때릴 수도 없다. 오프라인에서 누군가가 저렇게 때리라고 뺨을 내민다고 진짜 때릴 수 있는 인간은 얼마 없다. 누가 때릴 수 있겠는가? 미안하다며 차라리 자기를 때려서라도 화를 풀 수 있으면 때려도 좋다는데. 오히려 거기서 화를 내면 그게 이상한 놈이다.

 

그렇게까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상대가 화가 나 있다는 정도는 인정해줘야 하지 않을까? 상대가 나로 인해 화가 나 있다는 정도는 인정하고 들어와도 되지 않을까? 사과를 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그 화가 났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자기 잘못이 없다면 좀더 솔직하고 당당하게 해명해야 하지 않을까? 잘못했다는 생각도 상대가 나로 인해 화가 났다는 생각도 없이 그냥 화가 났다니까 적선하듯 사과를 던져주는 것보다는 말이다.

 

하여튼 이렇게 해서 또 사이트 하나를 떠나왔다. 그냥 좋게좋게 넘어갈 수도 있지만 역시 그러기 싫다. 무엇보다 그 사이트에 대한 애착이 없다. 남아있고자 하는 애착이 있었다면 어떻게든 참아봤겠는데, 사람도 그렇고 장소도 그렇고 여러가지로 정이 가지 않는다. 그래서 손 털고 나와버렸다. 성질도 제대로 못 부리고.

 

뭐 이 글 보고 나더러 속좁고 성질더럽고 예의도 모르는 인간이라 여기는 사람도 있을 지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할 수 없다. 중요한 건 내가 그러한 상황을 그냥 참고 넘어가지 못하겠다는 거니까. 최소한 나에게 있어 그냥 참고 넘어가도 좋을 그런 상황은 아니었다는 거니까. 그것이 중요하다. 결국 화를 내는 것은 나 자신이니까.

 

어쨌든 마지막에는 사이트 떠날 각오까지 하고 화를 내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화를 내면 그 사이트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으면서도 끝내 화를 참지 못해 화를 내고 있는 것 아닌가 말이다. 그 사이트를 떠날 것까지 감수해가며 화를 내는 만큼 최소한 화를 내는 데 대한 나름의 리스크는 치르고 있는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화를 내는 데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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