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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12/31
    야동을 재미있게 보려면...(1)
    불그스레
  2. 2005/12/11
    건담의 리얼함...? (1)(1)
    불그스레
  3. 2005/12/03
    미우라 켄타로의 만화를 안 읽는 이유...(36)
    불그스레
  4. 2005/12/01
    요즘 글쓰기가 싫어져서리...(4)
    불그스레
  5. 2005/12/01
    발로 만든 더블제타 건담...(1)
    불그스레

야동을 재미있게 보려면...

야동의 재미는 크게 영상 3: 소리 7로 나눌 수 있다. 역시 남 하는 거 훔쳐보는 건 보는 것보다 듣는 것이다. 믿기지 않으면 당장 사운드 뮤트로 해놓고 야동 돌려보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야동은 야사만도 못하다. 야하기는 한데 전혀 흥분이 되지 않는다. 성적인 흥분을 줄 수 없는 야동이라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영상은 다시 여배우(혹은 남자배우)의 외모 2 : 동영상의 화질 1로 구성되는데, 남자의 경우는 남자배우의 외모따위 별로 신경쓰고 싶지 않지만, 여자의 경우는 남자배우의 외모는 물론이고 여배우의 외모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이므로 이 비율은 성별에 따라 조금 다르다. 여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한 번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

 

어쨌거나 일단 내가 남자이므로 남자 기준으로 말하자면 북유럽쪽 야동에 나오는 여자들이 가장 예쁘다. 그리고 다음이 동유럽. 남미는 탱글탱글 야성적인 맛이 있고. 영국과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것들은 솔직히 눈으로 보는 재미는 없다. 미국은 포르노산업의 메카답게 스펙트럼이 넓어서 뭐라 하기 애매하지만 눈요기에 좋기로 플레이보이가 가장 좋고 보는 즐거움이 있기로는 허슬러다. 물론 내 개인적인 감상이다.

 

동영상의 화질은 주로 색감으로 나타나는데, 약간 붉은 기운이 도는 화면이 좋다. 모니터로는 색온도가 높은 쪽이 좋고, 그래픽카드로는 라데온이 좋다. 텔레비전은? 모르겠다. 텔레비전으로 야동을 본 것이 꽤 오래전 일이라. 솔직히 텔레비전으로는 조금 에러인 것이 야동이라는 것은 쪼그리고 앉아 모니터에 집중할 때 제맛이 나기 때문이다. 당당하게 텔레비전으로 야동 보고 있으면 왠지 보는 느낌이 나지 않는다. 어두컴컴한 방에서 이불 뒤집어쓰고 보는 야동이야 말로 진정한 야동이다. 아마도 중고딩때의 트라우마 때문일 게다.

 

동영상은 일단 이렇고 소리를 다시 나누면 고음2 : 저음 5로 나눌 수 있다. 흔히 야동이라 하면 뾰족하고 높은 신음소리를 떠올리기 쉬운데, 솔직히 그런 건 이제 갓 야동에 입문한 초심자들을 위한 3류 야동에서나 강조하는 것이고, 진정한 야동의 맛을 즐기려면 저음에 집중해야 한다. 헐떡이는 낮은 신음소리. 쇳소리에 가까운 갈라진 목소리에 질척이며 끈적거리는 마찰음. 그것이야 말로 진정으로 야동을 보는 즐거움이다. 들릴 듯 말 듯 집중하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는 그 소리에 야동의 진정한 맛이 숨어있는 것이다.

 

결론은 야동을 진정으로 재미있게 즐기려면 사운드, 특히 저음부에 신경써야 한다는 것. 어차피 눈으로 보는 거야 메이커와 출연배우만 잘 고르면 되는 것이니, 보는 입장에서 진정으로 신경써야 하는 것은 사운드인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중요한 것이 역시 헤드폰. 야동의 사운드는 스피커로 듣는 것이 아니다. 헤드폰 쓰고 불 끄고 이불 뒤집어 쓴 채 눈이 벌개져서 오타쿠 화장실 마려운 포즈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건 헤드폰. 헤드폰이야 말로 포르노를 보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돈 좀 되면 사운드카드에 투자해도 좋고, 돈이 조금 더 덤비면 앰프에 돈을 들여도 좋지만, 그래도 역시 마지막에 도달하는 곳은 헤드폰이다. 저음부에 강한, 저음을 확실하게 분리해주는 헤드폰. 야동의 새로운 세계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잘리려나?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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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담의 리얼함...? (1)

흔히들 건담의 중요한 설정 가운데 하나인 뉴타입을 "우주시대에 맞게 진화된 새로운 인류"라 정의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최초의 뉴타입이라는 라라아 슨은 콜로니가 아닌 지구, 그것도 인도의 한 뒷골목 출신이다. 토미노 요시유키의 소설판을 보면 인도의 한 뒷골목에서 몸을 팔다가 샤아를 만나면서 지온에 들어오게 되는데, 아무로에게 마음을 끌리면서도 끝내 샤아를 지키기 위해 죽어야 했던 이유가 바로 그때 그녀를 구원해준 것이 샤아였기 때문이었다.

 

하사웨이 노아 역시 지구 태생이다. 아버지인 브라이트 노아도 지구출신이고 어머니인 미라이 야시마도 지구연방의 명문 출신이다. 태어난 곳도 역시 지구. 1년전쟁이 끝나고 지구로 돌아간 미라이와 브라이트 사이에서 태어나 <역습의 샤아>까지 지구에서 자랐다.

 

<역습의 샤아>에서 최악의 패륜녀로 악명을 높인 퀘스 파라야 또한 지구인. 그녀의 아버지는 지구연방의 고관이고, 그녀 역시 샤아와의 협상을 위해 우주로 향하는 아버지를 따라 셔틀에 오르기 전에는 우주로 나와 본 적이 없다.

 

그나마 스페이스노이드라 할 수 있는 초기 뉴타입이자 최강의 뉴타입 아무로 레이도 스페이스 노이드 1세다. 지구출신인 양친이 사이드7으로 이주해 와서 낳은 자식이 아무로 레이다. 진화라는 것이 과연 단 1세대만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일까?

 

카뮤 비단이나 쥬드 아시타에 대해서는 패스. 얘들에 대한 설정은 아직까지는 없으니까.

 

물론 하만 칸이나 파프테마스 시로코의 경우는 완벽한 우주태생의 뉴타입들이다. 시부크 아노 또한 스페이스노이드로서의 뉴타입이고. 그런 점에서 우주세기의 새로운 인류 뉴타입이라는 설정은 그럴싸해 보이기는 한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그렇지 않은 초기 뉴타입들은 어떻게 설명할까?

 

사실 78년 방영되기 시작한 <기동전사 건담> 방영분 초기에는 뉴타입이라는 존재는 거의 언급되지조차 않는다. 아무로 레이가 모빌슈츠에 타자 마자 메뉴얼 한 번 훑어보고 조종하는 것을 두고 뉴타입 어쩌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은 <마징가 제트>에서의 카부토 코지도 마찬가지였다. 설정상 아버지 템 레이의 작업을 옆에서 훔쳐보면서 건담에 대한 데이터를 이미 알고 있었다고 되어 있으니 굳이 뉴타입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사실 뉴타입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토미노 감독의 전작 <라이덴>에 등장하던 초능력의 아류에 불과하다 할 수 있다. 전체주의의 영향인지 일본에서는 초인을 소재로 한 만화나 애니메이션이 오래전부터 상당히 널리 유행하고 있었는데, 로봇이라고 하는 비합리적인 설정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로봇 애니메이션에서도 자주 사용되곤 했었다. 이를테면 <단바인>의 오라배틀러라던가, <라이덴>의 주인공 아키라의 초능력과 같은 식으로. <파이브 스타 스토리즈>에서의 기사라는 존재도 그와 같다. 뉴타입이란 단순히 그러한 연장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초기 뉴타입은 사람들의 환상과는 달리 지구인이거나 우주이민 1세대였고, 오히려 우주세기의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강력한 뉴타입이 드물게 나타나고 있다. 심지어 역습의 샤아에 이르면 등장하는 뉴타입 가운데 절반 - 하사웨이와 퀘스 - 이 지구인이기까지 하다.

 

이러한 모순을 제작진에서도 뒤늦게나마 깨달은 것인지 최근 개봉된 극장판 를 보면 뉴타입에 절망하는 올드타입의 한계를 보여주던 캐릭터 라이라 라이라에게 뉴타입을 연상시키는 모습을 부여한다. 결국은 <기동전사 z건담>의 초기설정을 극장판에서 부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정도이니 그 모순이 얼마나 큰가를 알 수 있다.

 

우주세기를 위해 새로이 진화된 인류라고 하는 뉴타입. 그러나 정작 뉴타입 가운데 스페이스 노이드보다는 지구인 - 어스노이드, 혹은 스페이스 노이드 1세대가 더 많았던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지구의 중력에 사로잡힌 영혼" 어쩌구 주절거리는 하만과 샤아의 모습이 몹시도 공허하게 느껴지는 것은 비단 나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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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우라 켄타로의 만화를 안 읽는 이유...

아마 만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베르세르크의 이름은 알 것이다. 박력 넘치는 그림, 치밀함과 스케일을 고루 갖춘 스토리, 생동감 넘치는 캐릭터, 더구나 그 처절하기까지 한 리얼함까지... 그야말로 최고의 만화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는 작품이 바로 이 베르세르크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는 이 만화를 읽지 않는다. 해적판으로 우리나라에서도 꽤나 일찍 이 만화를 발견한 사람 가운데 한 명임에도 말이다. 이유는 이 작가의 다른 만화들 때문이다.

 

청랑이라는 만화가 있다. 두 권짜리이던가? 소꿉친구인 남녀 고등학생 둘이 삼국지 시대로 타임슬립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만화 용랑전과 비슷한 컨셉으로, 역시 비행기를 타고 가다 12세기 몽골로 떨어지는 소꿉친구 남녀 고등학생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물론 이 정도야 다른 만화나 소설, 영화 등에서도 많이 단골로 사용하는 설정이니 표절이라 할 수도 없고, 특별히 그러한 점이 문제가 될 이유는 없다. 내가 문제시 여기는 것은 다른 부분이다. 바로 주인공 남녀가 12세기 몽골에서 만나는 인물. 칭기즈칸이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일본인 가운데는 이 칭기즈칸이 일본인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 모델은 12세기 일본의 역사를 크게 뒤바꾼 겐페이 합전의 영웅 미나모토노 요시츠네. 겐지의 토료 미나모토노 요시토모의 아홉번째 아들로써 배다른 형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를 도와 당시 일본을 지배하고 있는 헤이케를 무너뜨리고 가마쿠라 막부를 세우는 데 크나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그는 단순히 능력만 뛰어난 것이 아니었다. 인품도 훌륭해서 배다른 형이자 가마쿠라 막부를 연 첫번째 쇼군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그 능력과 인망을 경계하고 두려워해서 그를 배척하고 공격했을 때에도 형제끼리 다툴 수 없다 하여 후지와라의 후원과 많은 무사들의 지지를 업고 있었음에도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죽음을 맞이했을 정도로 정의가 깊고 인정이 많은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이다 보니 사람들은 자연히 그의 죽음에 대해 깊은 아쉬움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그가 죽지 않고 살아 도망쳤다고 하는 이야기가 어느샌가 모르게 인구에 회자되게 되었다. 지금도 생존설이 끊이지 않고 있는 엘비스 프레슬리처럼. 이미 죽은 지 오래인 사람을 보았다고 하는 목격자가 아직도 나오고 있는 현실이고 보면 그보다 더 정보의 정확성이나 전달속도가 뒤떨어진 시대에 죽었던 사람을 살리는 정도야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렇게 미나모토 요시츠네의 생존설이 민간에 퍼지던 어느 날 갑자기 일본인들은 그들이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기마전술로 무장한 침략자를 맞이하게 된다. 일본인으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말을 타고 칼을 휘두르고, 창을 찌르며, 활을 쏘는 기술을 선보인 그들은 일본인들에게 크나큰 충격이었다. 심지어 몽골의 침략 이전의 일본과 이후가 다르다 할 정도로 일본은 그로 인해 큰 변화를 겪게 된다. 그리고 그때 일본인들은 칭기즈칸의 이름도 함께 전해듣는다. 미나모토 요시츠네가 죽을 무렵 대륙에서 세계의 정복자가 되었던 전설적인 영웅의 이름을.

 

미나모토노 요시츠네는 어딘가 살아 있을 것이다라는 소박한 믿음은 그렇게 그의 죽음과 비슷한 무렵 대륙에서 세계의 정복자가 되었던 칭기즈칸에게로 이어지고, 칭기즈칸이 이끌던 몽골군의 공포스럽기까지 한 힘은 요시츠네의 전설로 덧붙여졌다. 지금도 정설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요시츠네의 신기에 가까운 기마전술이라는 것은 그때에 비로소 완성된 것이었던 것이다.

 

물론 최소한의 상식을 갖춘 사람이라면야 이러한 설을 진실이라고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일본 밖의 세계에 대한 정보에 어두웠던 에도 이전의 시대라면 모를까, 메이지유신 이후 동아시아의 역사와 철학, 과학 등 거의 모든 학문에 선구적 발자취를 남겼던 근대의 일본인이 단순히 전설에 불과한 이야기를 사실로 믿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그러나 아주 일부, 극히 특이한 사고를 갖는 사람들은 아직도 그러한 사실을 믿고 있다. 칭기즈칸의 무덤을 찾기 위한 작업에 막대한 돈을 아낌없이 투자할 수 있었던 그들. 누구일까? 바로 일본의 극우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검도도 우리나라에서 건너갔다. 종이접기도 우리가 전해준 것이다. 꽃꽃이도 원래 우리의 것이었다. 유도도 고려의 유술이 건너간 것이다. 다도도 고려의 것이 일본에 전해져 정착된 것이다. 등등등... 모든 것의 원류는 한국이며 한국이야 말로 모든 문화의 종주국이라 주장하는 이들. 심지어 일본의 천황까지도 한국인이었다 고집하고 싶어하는 그들. 일본에도 그러한 무리들이 있어, 세계에서 가장 광대한 제국을 일구었던 칭기즈칸을 자신들의 영웅으로 만들고 싶어했던 것이다.

 

미우라 켄타로의 만화 청랑은 바로 그러한 무리들의 역사관과 세계관을 그대로 담은 만화였다. 미나모토노 요시츠네가 몽골고원으로 건너가 칭기즈칸이 되고, 무사시보 벤케이는 그를 보좌하는 제베가 되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주인공 남녀의 아들이 칭기즈칸의 양자가 되어 이후 쿠빌라이칸이 되는 데에는 미치지 못한다. 쿠빌라이의 일본원정을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노력으로 만들어 버렸으니. 우리나라 국수주의자들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역사딸딸이의 궁극이라 할 것이다.

 

 

물론 이것 하나만 가지고 미우라 켄타로의 정치적 성향을 미루어 짐작한다는 것은 너무 성급할 수 있다. 나 또한 이것 하나만 가지고 문제 삼을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일본 만화라는 게 작화를 담당하는 만화가와 스토리를 담당하는 스토리작가의 분업화가 확실히 정착되어 있고, 그나마도 편집자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는 체제인 터라 미우라 켄타로 개인의 문제는 아니라 좋게 생각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뒤에 나온 미우라 켄타로의 단편집에 있었다. 제목이 "지팡구"였던가? 만화의 내용은 아주 단순하다. 핵전쟁이 있었다. 그래서 모든 것이 파괴되고 세계는, 아니 일본은 무정부의 혼란에 빠져든다. 모든 인간들이 절망과 공포로 어쩔 줄 몰라 하는 상황에서 한 사람 구세주가 나탄잔다. 혼란을 질서로 바꾸고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줄 영웅. 바로 야쿠자다. 믿기는가? 야쿠자게 세계를 구한다.

 

더구나 그 야쿠자가 세계를 구하는 방식이라는 것도 지극히 야쿠자스럽다. 강제된 질서와 그 질서에 복종하는 개인. 일본 만화나 영화, 드라마에서 많이 나오는 와和. 박정희로 인해 우리에게도 많이 익숙한 그것. 초등학교 어린아이들에게조차 제식훈련을 시켜가며 강요하던 바로 그것. 대동아공영권을 외치며 귀축미영을 몰아내기 위해 전선으로 나아가는 병사들에게 일본 대본영이 부르짖었던 그것은 일본이 자랑하는 일본의 혼 야마토 타마시大和魂다.

 

아다시피 일본의 극우는 필연적으로 야쿠자와 맞닿아 있다. 일본 총리 고이즈미의 할아버지도 야쿠자 출신이었다. 야쿠자로서 쌓아 놓은 지역에서의 연고를 바탕으로 중앙 정계와 연줄이 닿아 정치에 입문했던 것이 고이즈미 총리의 할아버지였고, 그것이 고이즈미의 아머지와 고이즈미에게로 삼대에 걸쳐 세습되었던 것이다. 고이즈미 뿐만이 아니다. 뒤져보면 야쿠자와 어떤 식으로든 연관되지 않은 정치인이 없다고 할 정도다.

 

범죄조직이 무슨 극우냐고 할 지 모르지만 원래 범죄조직처럼 극우와 가까운 것이 없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2000년 새역모의 교과서 왜곡 파동 때 손가락을 자르는 퍼포먼스를 벌인 인간들은 바로 그 지역 조폭들이었다. 아니 그 전에 해방공간에 파업 노동자와 사회주의자들을 상대로 백색테러를 저지르던 인간들도 조폭이었다. 왜? 극우의 논리란 바로 조폭의 논리니까.

 

송강호가 그러지 않던가? "내... 내가 그러... 그렇다면 그런 거야! 아... 안 그러면... 배... 배... 배신이야!" 라고. 이게 바로 조폭의 논리다. 의심도 저항도 이탈도 허락되지 않는, 이른바 묻지마 의리, 묻지마 단결, 묻지마 복종이야 말로 조폭이 지향하며 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극우주의자들의 - 이라고 쓰고 꼴통이라 읽는다. - 묻지마 민족, 묻지마 국가와 근본적으로 같은 것이다.

 

감히 보스에게 반항하면 안 되듯 국가에게 반항하면 결코 안된다. 강도강간살인마약밀매를 밥먹듯 저지르는 같은 조직원을 형제애로서 감싸주듯, 학살과 약탈을 자행하는 국가와 민족에 대해서도 무한한 애정을 보여야 한다. 국가는 선이며 민족은 진리다. 그것은 결코 의심해서는 안되는 절대가치이며,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은 배신이며 죽음으로 갚아야 할 죄이다. 그래서 지금도 거리에서 마이크로 떠들어대는 인간들은 깍두기머리들이다. 군대라고는 가본 적 없는, 그저 어깨에 힘이나 주고 평범한 사람들을 위협할 줄이나 아는 무리들이 군대를 이야기하고 전쟁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미우라 켄타로의 "지팡구"는 이러한 야쿠자의 속성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었다. 매우 긍정적으로. 아마 기억할 것이다. 아놀드 슈왈츠제네거가 주연했던 "유치원으로 간 사나이"라는 영화를. 군대식의 억압과 통제에 길들여지는 아이들의 모습을 미화해 보여주던 끔찍하도록 혐오스럽고 공포스런 영화를. 여기서 아놀드 슈왈츠제네거를 야쿠자에, 유치원 아이들을 혼란에 빠진 인간들에 대입하면 바로 지팡구라는 영화가 된다. 보는 내내 한없이 불쾌하고 끔찍한 만화였다.

 

이 두 편의 만화는 미우라 켄타로라는 만화가에 대한 나의 인상을 결정지었다. 그리고 이들 작품들을 통해 형성된 미우라 켄타로에 대한 인식은 베르세르크에 대한 해석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베르세르크 역시 내게는 무척이나 끔찍한 만화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전혀 다른 시대, 전혀 다른 세계, 전혀 다른 캐릭터의, 전혀 다른 만화임에도 같은 작가의 작품이라고 하는 고리는 결코 다르지 않은 느낌으로 여겨지게 했던 것이다.

 

지금도 미우라 켄타로라는 이름을 들으면 청랑이 생각난다. 지팡구도 생각나고. 베르세르크의 주인공 카츠의 압도적인 폭력과 광기에서 "지팡구"의 야쿠자를 떠올린다. 결국에는 폭력과 파괴로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밖에 없는 만화의 내용은 지팡구가 추구하던 그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그래서 그의 만화를 읽는 것은 내게 무척이나 큰 고통이다. 즐거워야 할 만화가 고통이라는 것만으로도 읽어서는 안 될 이유는 충분한 것이고.

 

이것이 내가 미우라 켄타로라는 만화가를 싫어하고, 그의 만화를 읽지 않는 별 대단찮은 허접한 이유다. 진짜 싫다. 미우라 켄타로나 그의 만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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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글쓰기가 싫어져서리...

인터넷에 그저 자유롭게 자기 생각을 글로 끄적일 뿐인 것 가지고 논객이네 뭐네 해가며 편을 가르고 공격을 해대는 데에 질려서 한 두어달 글을 안 썼습니다. 한 번은 아예 제가 올려놓은 글을 비밀번호까지 알아내서 싹 지워버리더군요. 어느날 가보니 게시판에 글이 하나도 안 남아있더라는... 그 순간 등줄기로 사악 차가운 기운이 오르면서 글 쓴다는 게 싫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블로그를 개점휴업하고 있었죠.

 

하지만 이제 준비하던 문화동인홈페이지도 어느 정도 윤곽을 잡아가고, 글로 먹고 사는 주제에 언제까지나 찌그러져 있기도 뭣 해서 슬슬 블로그 운영을 재개할까 합니다. 단 블로그 수는 줄여서요. 진보넷과 야후와 경향신문에 각각 하나씩, 전혀 다른 주제로 블로그를 운영할까 합니다. 진보넷은 이제까지 하던 대로 주로 대중미디어 관련 블로그로 할 생각이구요. 뭐 봐주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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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로 만든 더블제타 건담...

1. 에르 비아노가 갑자기 비차에게 마음을 주기까지의 중간과정이 생략되어 있다. 46화에서 출격하기 전 비차가 따뜻한 한 마디를 건낸 것에서 갑자기 감정반전. 이전까지 쥬도에게 마음을 주고 있던 건 어떻게 된 거냐? 비차가 에르 비아노에게 마음이 있다는 거야 쥬도의 "비챠와 에르를 두고 다투고 싶지 않아."라는 대사에서 구체화된 바 있지만. 하지만 그조차도 비차가 에우고를 배반할 때 에르와 어떤 커뮤니케이션도 없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없어진다.

2. 루 루카와 목성으로 떠나는데 말야... 루 루카와 쥬도 사이에도 중간과정은 생략되어 있거든? 도대체 어떻게 해서 쥬도가 루 루카와 함께 목성으로 가는 건데? 루 루카가 쥬도에게 마음이 있다는 거야 중간에 몇 번 언급된 바 있지만 쥬도는 아니잖아? 그놈은 여자에는 전혀 관심없는 완전 어린애인데. 결론은... 루카에게 잡아먹힌 건가? 다른 가능성은 생각할 수조차 없잖아? 그렇게 한 순간에 나 이제부터 얘랑 살래 할 다른 개연성이 있어? 더블제타건담에?

3. 그레미 토토 이 덜떨어진 자식이 일으킨 덜떨어진 반란이라는 것도 그렇다. 반란이라는 건 자기가 권력을 잡기 위해서 일으키는 것 아닌가? 그런데 코아3에 액시즈를 충돌시켜? 액시즈는 네오지온의 근거지인데? 코아3는 지온의 발흥지인데? 그런데 하만 하나 때려잡겠다고 자신의 근거지로 지온의 발흥지를 파괴한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냐? 하기야 그런 덜떨어진 자식이니까 싸우는 도중 모습을 드러내고 루 루카의 제타건담에 뒈져버렸지. 쯧.

4. 결론은 히키코모리. 하만도 역시 히키코모리였다. 세상에 대한 불신과 증오를 가지고 혼자 틀어박혀 뇌내망상이나 키우는. 그레미 토토도 마찬가지고, 플 투도 마찬가지고. 인조뉴타입인 강화인간들도 인위적인 히키코모리들이고. 하만의 장미에 정신을 놓는 마슈마 제로나 모빌슈츠에 열광하는 캬라 슨이나... 세일러 마즈의 샤아 아즈나블에 대한 평가도 걸작이지. 우주의 의지 같은 것에 사로잡혀 사명감을 갖고 있다고. 전형적인 히키코모리 아닌가? 하만이 쥬도와 일대일 대결을 통해 자살하듯 죽은 것도 히키코모리 특유의 자기파괴욕구 때문일 듯. 그렇게 말고는 하만의 뻘짓을 이해할 도리가 없잖아?

5. 마슈마 제로가 죽는 장면도 그래. 마슈마 제로의 역할은 캬라 슨이 그레미 토토의 부대와 싸우는 것을 뒤에서 엄호하면서 뒤 이어 나올 증원을 견제하는 것 아니었나? 캬라 슨은 일반 모빌슈츠 부대를 상대하고, 마슈마 제로는 뉴타입 부대를 적으로 상정하고, 그런데 혼자 액시즈까지 달려들었다가 사로잡혀 죽어? 바보냐? 아무리 뇌내망상 강화인간이라 할지라도 그렇게 무모할 리 없잖아?

6. 그래도 더블제타 건담의 의의라면 역습의 샤아의 내용을 예고한다는 것이겠지. 하만 칸의 모습은 역습의 샤아에서의 샤아의 모습이기도 하니까. 어쩌면 하만 칸 자체가 샤아의 오마쥬인지도. 샤아에게 감화된 결과 그런 모습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하만 칸의 모습에 세일러 마즈의 샤아에 대한 평가를 더하면 그야말로 역습의 샤아 자체가 된다. 캐릭터 디자이너도 역습의 샤아에서와 같은 기타즈메 히로유키이고. 처음에는 어설프기 그지없더니만 후반으로 갈 수록 역습의 샤아 삘이 나는구만.

7. 그런데 더블제타 건담에 단바인 팀이 다수 참여했나? 아무래도 그림에서 단바인 삘이 많이 나서 말야. 나중에 나오는 퀸만사의 경우 단바인에 나오는 오라배틀러 딱 그거던데. 캐릭터의 표정이라던가 동작도 그렇고. 특히 싸우는 장면의 그 어색함은 단바인 그 자체. 전작에 비해 기사삘이 강한 것도 어쩌면 그 때문일 듯. 한 번 알아봐야겠다. 기타즈메 히로유키가 단바인에 참여한 적이 있는지. 최소한 메카닉 디자이너 중 한 명은 단바인 팀이다. 단바인도 좋아하는 편이기는 하지만...

8. 어쨌거나 결론은 발로 만든 애니라는 것. 다른 건 다 참겠는데 개연성 없는 건 못 참겠다. 플이 플투에게 죽는 장면도 그렇고, 에마리가 퇴각하는 플투를 공격해서 반격을 자초해 죽는 것도 그렇고, 뜬금없는 그레미 토토의 뉴타입 부대에 둘러싸여 전사하는 캬라슨도 생뚱맞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몰살의 토미노인게지. 개연성이야 어찌되었든 일단 죽이고 보자는 식이니까. 개연성이 있다면 왜 몰살이라 그러겠나? 제타 건담에서도 마찬가지였는 걸. 하여튼 쯧...

9. 그래도 역대 건담 가운데 여자 캐릭터가 가장 예쁜 건담시리즈였다. 단일캐릭터로는 단연 세일러 마즈와 크리스티나 맥켄지가 수위를 다투지만, 등장캐릭터 평균으로 따진다면 더블제타가 본좌다. 에마리, 루 루카, 엘 비안노, 하만 칸, 캬라 슨, 라사라, 플, 플 투까지... 더구나 전편의 화 유이리와 세일러 마즈까지 찬조출연하지 않던가. 그림만 조금 더 예뻤더라면... 어쩌면 더블제타 건담의 더블은 두 배로 예쁜 여자들이 출연한다는 뜻에서의 더블인지 모르겠다. 그냥 뭐...

10. 막판 6화는 진짜 지겹기 이를 데 없어서 겨우겨우 끝까지 봤다. 처음 봤을 때도 30화 넘기기가 힘들어서 32화에선가 보다 끝내버렸는데, 그래도 이번에는 근성으로 끝까지 볼 수 있었다. 하기야 그래도 제타건담보다는 낫다. 이건 극장판 보는 내내 언제 끝나나 시간만 재고 있었으니까. 키프레임으로 스킵해서 보느라 2시간 가까운 극장판을 다 보는 데 고작 40분 걸렸을 정도. 역시 어렸을 때나 건담이지 대가리 크고 나니 역시 아니다. 이런 걸 그렇게 좋아 추종했었다니. 뭐 어릴 적 한 때 추억이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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