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고양이 기르기에 대한 잡상...

어렸을 적, 그러니까 아직 중학교 다니던 무렵에 집에서 고양이를 한 마리 키운 적이 있었다. 이름은 그냥 평범한 야옹이. 암컷이라 나중에 새끼를 낳으면서부터는 에미가 되었다. 검은색이라 동생들은 네로라 이름짓기를 졸라댔지만 어쩐 일인지 야옹이였고 에미인 채로 자랐고 새끼를 낳고 그리고 죽었다. 모두 세 배, 15마리의 새끼를 낳았으니 고작 3년의 인연치고는 꽤 많은 것을 남기고 간 셈이다.

그때 처음 에미를 기르던 때 사실 고양이를 기른다고 하는 자각은 그리 크게 없었다. 집에 고양이가 한 마리 있고, 고양이 밥그릇이 있다는 정도에 불과했다. 고양이 집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고양이를 위한 다른 배려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래도 고양이라고 사람도 자주 먹지 못하는 생선 대신 멸치를 넣어 국을 끓여주는 정도였다. 똥이야 그냥 알아서 돌아다니다 아무데나 싸고 돌아오면 그만이고.

그런데 이제 다시 고양이를 키우려니 고양이를 키운다고 하는 것이 너무도 크게 현실로 와닿는다. 그냥 사람 먹는 것을 먹이면 안 된단다. 먹다 남긴 밥이라든가, 술안주로 사다 놓은 오징어포라든가, 예전에 에미를 기를 때는 오히려 별식으로 주던 것들이 자칫 고양이가 탈이 날 수 있어 피해야 할 것들이 되었다. 물도 수돗물은 고양이에게 안 좋으니까 생수를 먹이라 하고. 그래서 한 봉지에 8천원이나 하는 고양이먹이를 사다 먹이고 물도 따로 사서 먹이고 있다.

먹이는 것도 큰 일이지만 함부로 밖에 내보낼 수도 없어 방안에서 똥오줌을 받아야 하니 화장실 꾸미는 것도 일이다. 사실 이번에야 고양이를 키우기 시작하고서 화장실용 모래를 따로 팔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심지어 어떤 것들은 사람이 쓰는 변기에서도 녹도록 사람도 없어서 못 먹는 옥수수나 쌀을 사용해서 만든 것들이란다. 가격도 만만치 않다. 아마도 집에서 기르는 잡종고양이 두 마리 모두를 합해봐야 화장실용 모래 한 봉지 값도 안 나올 것이다. 그렇다고 그냥 모래를 쓰자니 모래를 구하기도 애매한 것이 옛날에야 학교 운동장에서 퍼 오면 그만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이 허용되는 시대가 아니다. 그나마 공짜로 뿌려지는 무가지를 가져다 화장실에 두텁게 깔아 모래를 대신하지 않았다면 모래 값으로만 수억 깨졌을 것이다. 워낙 똥을 많이 싸야지.

참 어렵다. 고양이를 키운다는 것이. 뭐 그리 안 되는 게 많고, 뭐 그리 해야 하는 게 많고, 뭐 그리 돈 들어가는 게 많은지. 가족처럼 밥 먹이고 같이 뒹굴면 그만이던 그때와는 너무도 다르다. 솔직히 지금도 예전처럼 남은 밥 먹이고, 오징어포 같이 나눠먹던 그때 방식대로 기르고 싶다. 가끔 멸치대가리 가지고 장난도 치고, 생선가게에서 생선대가리며 내장 얻어다가 고양이밥 만들어 주고도 싶다. 하지만 아는게 병이라던가? 우유조차도 고양이는 일반우유를 소화시키지 못한다는 말에 먹이기 꺼려진다. 고양이를 기른다는 것이 왜 이리도 어렵고 거추장스러운 일이 되어 버린 것일까?

하긴 대개의 일이 그렇다. 처음에는 단순하다. 일상처럼 단순하고 당연하게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 그것은 하나의 체계가 되고 원리가 되고 규칙이 되어 사람을 구속하게 된다. 밥 나눠먹으며 기르던 개나 고양이도 개나 고양이를 위한 어떠한 특별한 것을 제공해야 하고, 일상에서 쓰는 그리 대단할 것도 없는 말이어야 할 언어는 문법과 맞춤법과 어휘 속에서 구속되고 강제된다. 그러면서 먼저 체계와 원리와 규칙을 지배한 자들이 모든 이익을 독점하게 되고.

아마도 이런 것이 지식의 속성일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특별한 것으로 만들어 사람을 구속하고 강제함으로써 소수의 특정인들을 위한 이익을 구하는 것. 역사상 나타났던 모든 형태의 지식이 추구하는 바가 바로 그것이었다. 겉포장이야 보다 많은 다수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그 궁극적인 목적은 결국 그 지식을 먼저 선점한, 혹은 그 지식이 지향하는 위치에 있는 자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던 것이다. 나 또한 그러한 농간에 현혹되어 헤어나지 못하는 소시민일 뿐이고.

참 돈도 많이 들어가고, 손도 많이 간다. 예전 생각하고 고양이 덜컥 맡았다가 꽤나 고생이 심하다. 그래도 뭐 귀여우니까 모든 것이 용서가 된다. 하긴 그 비싼 고양이밥이며 고양이모래며 만들어 팔 수 있는 것도 그 귀여움 때문일 것이다. 때로 자고 있는 데 배 위에 올라와 웅크리고 자는 뜨거운 체온을 느낄 때면 당장 고양이쇼핑몰에 가서 이것저것 다 사다주고 싶어지니까. 그래서 고양이를 요물이라 하는 것일게다. 역시 여자는 예쁘면 장땡이고 고양이는 귀여우면 광땡인 모양이다. 아유 귀여워라~!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