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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와 닭고기를 나누어 먹다...

고양이 사료를 사러 동물병원에 갔더니 협박을 한다. 고양이에게 사료 이외의 것을 먹이면 안 좋다고. 인터넷을 뒤졌더니 마찬가지 이야기가 나온다. 고양이에게는 사료만 먹이라고. 그래서 지금껏 쭈그리와 꼬맹이 녀석들에게 사료만 먹였다. 어찌되었거나 그게 더 좋다니까.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렇게 사료만 먹이고 있으려니 꼭 고양이를 기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같이 사는 것이 아니라 고양이를 기르고 있는 것이다.

 

예전에 고양이를 기를 때는 기른다기보다는 함께 살아간다는 생각이 강했다. 먹는 것을 같이 먹었기 때문이다. 생선을 먹으면 생선을 나눠먹었고, 고기를 먹으면 고기를 나눠먹었다. 하다못해 된장국을 먹어도 된장국 안에 들어 있는 멸치는 고양이 차지였다. 그래서 밥상에서는 전쟁이 벌어진다. 뭐라도 하나 얻어먹으려는 고양이와 그것을 막으려는 어머니의.

 

그러면서도 어머니는 시장에 갔다 오실 때마다 먹지도 않는 생선대가리와 내장들을 억지로 챙겨오셨다. 고양이를 먹이기 위해서였다. 가족의 밥을 차릴 때면 부엌 한 구석에서는 생선대가리와 내장이 밥알과 함께 익어가는 비린내가 진동하곤 했고, 그 냄새에 이끌린 고양이와 어머니의 싸움이 또 시작되었었다.

 

고양이가 새끼를 낳았을 때 어머니는 애써 종이박스를 구해 산실을 따로 만들어 주고, 미역국을 끓여주셨다. 나나 동생도 먹지 못하는 우유를 뼈에 좋다고 사다 주시고는, 그래도 애 낳았는데 미역국은 먹어야 한다며 닭고기를 찢어 넣은 미역국을 끓여 고양이에게 먹이셨다. 어머니도 고양이를 마치 한가족처럼 여기셨던 것이다.

 

하기야 사람이 먹는 것 가운데 사람 몸에 좋은 게 몇 가지나 되겠는가? 나처럼 먹는 대부분을 밖에서 사들고 와서 먹어야 하는 사람이라면야 두 말 할 필요도 없다. 튀김닭에 쓰인 기름이나 양념들은 사람에게도 안 좋은 것들이다. 하물며 고양이에게는 어떻겠는가? 그래서 어제 닭을 먹으면서도 고양이를 쫓기 위해 꽤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었다.

 

그런데 그러고 있으려니 꼭 고양이와 내가 남인 것 같다. 아니 그보다는 먹을 것을 달라고 외치는 파리 시민들에게 "빵 없으면 케잌을 먹으면 되지 않느냐."는 어떤 바람난 유부녀의 말이 생각난다. 먹는 것과 먹고자 하는 것과 그것을 가로막는 어떠한 보이지 않는 선에 의해 고양이는 같은 집에 살면서도 전혀 별개의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오늘 어제 남은 닭을 데워 먹으며 일부를 떼어 고양이에게 주었다. 그랬더니 내 발 밑에서 잘도 먹는다. 두 마리가 서로 머리를 앞발로 눌러가며, 먹던 것을 빼앗아 도망도 다니며 아주 잘도 먹는다. 먹는 것이 보기 좋아 닭을 조금 더 떼어 주니 더 좋아한다. 같이 먹는다는 기분. 무언가를 나누어 같이 먹는 다는 그 느낌. 그러고 있으니 마치 고양이가 가족이 된 것만 같다.

 

앞으로도 고양이에게 사료 이외의 것을 먹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고양이를 좋아하기에 고양이에게 안 좋다고 하는 것을 굳이 먹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자칫 고양이가 탈이라도 나게 된다면 무척이나 슬프고 아플 것이기에 가족이라는 느낌이 좋기는 하지만 여전히 사료로만 고양이를 먹일 것이다.

 

그러나 가끔은 그런 딱딱한 이야기따위 모두 무시해 버린 채 먹던 것을 나누어 먹으며 가족이라는 느낌을 확인해보고 싶을 것이다. 내가 먹는 것을 고양이도 먹고, 고양이가 먹는 것을 나도 먹는다는 예전 고양이를 기르면서 느꼈던 일체감을 다시 한 번 느껴보고 싶을 것이다. 조마조마. 무슨 탈이라도 날까 가슴을 조이면서도.

 

어쨌거나 걱정과는 달리 참 잘도 먹는다.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닭고기이건만 자기들끼리 잘도 먹어댄다. 저렇게 잘 먹고 있는 것을 보니 그동안 먹여주지 못한 것이 미안하다. 그렇다고 사료 대신 다른 것을 먹이기엔 내가 또 너무 소심하고. 주인을 잘못 만난 탓이다. 불쌍한 것들. 언제고 생선을 먹을 일 있으면 또 먹으라 나눠주어야지. 그 정도는 괜찮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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