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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트 코베인, 육체를 죽여 음악을 살리다

커트 코베인, 육체를 죽여 음악을 살리다
[영화평] 구스 반 산트가 그린 '커트 코베인 최후의 나날', <라스트 데이즈>
텍스트만보기   최인규(artman88) 기자   
▲ 영화 <라스트 데이즈>의 포스터.
ⓒ 스폰지
케빈 스미스의 2001년 작품인 <제인 앤 사일런트 밥>이란 영화에 구스 반 산트 감독이 카메오로 출연한 적이 있다. 불쌍한 백수 영혼인 제이와 사일런트 밥 패거리들의 대책 없는 할리우드 방문기를 다룬 이 기상천외한 케빈 스미스표 영화에서 구스 반 산트는 스튜디오에서 <굿 윌 헌팅2>를 찍는 감독으로 나와 자기 자신을 패러디한다.

구스 반 산트가 출연한 장면은 그가 영화 촬영을 하고 있는 장면이다. 여기서 그는 맷 데이먼, 벤 애플렉에게 '액션!' 사인을 주고는 모니터도 보지 않은 채 돈만 열심히 센다. 구스 반 산트의 영화 이력을 조금이나마 아는 관객이라면 포복절도를 금할 수 없는 명장면(?)이었을 것이다.

나도 한참 그 장면을 킥킥거리며 보다가 문득 구스 반 산트에게 일종의 연민을 느꼈다. "감독의 마음 고생이 얼마나 심했을까?" 미국 인디영화의 기수라고 추앙받던 사람이 상업화된 제작시스템 아래에서 <투 다이 포> <사이코> <굿 윌 헌팅> <파인딩 포레스트> 같은 말랑말랑한 상업영화나 찍고 있자니 마음이 개운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돈만 밝히는 상업영화감독으로 비치는 게 영 찜찜했던 것이다.

하지만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할리우드표 상업영화에 대한 실망감이었을까? <제이 앤 사일런트 밥>에 출연한 뒤 구스 반 산트는 절치부심 혹은 환골탈태해서 <제리>라는 저예산 영화로 인디영화계에 돌아왔다. 그리고 그 후 <엘리펀트> 같은 희대의 걸작을 만들었다. 역시 인디적이며 반골의식이 가득한 영화적 사이즈가 그에게 정확히 맞는 치수였던 셈이다.

그는 서사적 장르의 자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최근 대중영화계를 마치 훈계라도 하듯 <엘리펀트>와 <제리>를 통해 새로운 영화 만들기의 진수를 보여줬다. <라스트 데이즈>는 그의 그런 실험이 이제는 구스 반 산트 영화의 새로운 스타일로 자리잡아가고 있음을 증명해 보인다.

불친절한 <라스트 데이즈>, 대중영화의 상식을 해체하다

커트 코베인의 마지막 날들을 재구성한 이 영화에서 그는 대중영화 만들기의 상식과 우상을 여지없이 해체한다.

여기서 '상식'이란 대중영화는 쉽게 이해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내러티브, 즉 이야기체의 기승전결식 구성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우상'이란 이러한 요건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불가결한 것이며 이러한 부분에서 결함이 있다면 대중영화로서 하자가 있다는 것이다.

<라스트 데이즈>는 대중영화 혹은 최근 몇 년간 할리우드를 강타했던 전기영화 혹은 뮤지션에 관한 영화가 응당 걸어야 할 길을 과감히 거부한다. 구스 반 산트는 사실이나 고증을 통한 현실의 재구성이 아니라 마치 자신을 커트 코베인의 심리 상태로 이입시킨 듯 단지 '필'과 '무드'만을 활용해 '그 혼란스러웠던 마지막 날', 한 위대했던 뮤지션의 최후를 복원했다.

그래서인지 영화는 불친절하기 짝이 없다. 이야기는 주인공 블레이크(커트 코베인의 영화 캐릭터)의 계속 이어지는 읊조림을 통해 전개되고, 그와 그의 동료들의 너절한 일상이 연속적으로 드러난다.

영화는 마치 아무렇게나 흘려 쓴 블레이크의 개인적 다이어리를 엿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할 만큼 극이 계속 전개되어도 핵심을 잡아내기 어렵게 구성돼 있다. 한마디로 요령부득이다. 영화엔 그가 왜 죽었는지, 왜 그렇게 힘들어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다. 다만 감독이 의도적으로 배치해 놓은 몇 개의 장면을 통해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첫 번째 키는 영화의 맨 첫 장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영화가 시작되면 숲 속에서 길을 헤매는 블레이크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알 수 없는 말을 되뇌며 숲을 걸어간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길이 갈라지는 지점에 멈춰선다. 그리곤 '홈(home)', 즉 집이란 말을 지껄이다 하나의 길을 선택해 걸어간다. 얼마 후 그는 자신의 집에 도착한다.

아마도 이 장면은 무척이나 외로웠던 커트 코베인의 최후의 나날을 잘 보여주는 장면일 것이다. 음악적 행로를 고민하던, 그래서 길을 잃고 헤매던 그는 결국 '홈', 즉 음악적 본심 혹은 진정성을 갈구했을 것이다. 갑자기 '스타'가 되어버린, 혹은 대중가수로 타락해 버린 작금의 처지가 견디기 힘들 정도로 힘들었던 것이다.

또한 여기서 '집'이란 말 그대로 가족, 고향, 혹은 부모라는 말로 등치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다호>의 리버 피닉스나 <드러그스토어 카우보이>의 맷 딜런처럼 <라스트 데이즈>의 마이클 피트도 늘 가족과 고향을 그리워하지만 돌아갈 본향을 잃어버린 젊은 영혼이다.

▲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다. 하지만, 그 혹은 그들이 잃은 '하나'는 너무 뼈아픈 것이었다.
ⓒ 스폰지

화석화되는 자신에 대한 저항... "젊어서 죽는다"

두 번째로 눈여겨볼 장면은 레코드사 관계자들이 블레이크를 찾으러 그의 집을 방문했으나 그를 찾지 못하고 그의 방에서 뭔가 유심히 보는 장면이다. 그들이 뭘 봤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그들은 작고 딱딱한 뭔가를 들고 얘기를 나눈다.

두 사람은 "이건 딱딱하게 굳어 있어! 이건 잘 깨지지 않아! 속에서부터 깨져야 해!"라는 말을 주고받는다. 아마도 이 말은 당대 최고의 밴드, '너바나'의 리더였던 커트 코베인이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이 아니었을까 싶다!

예상치 못한 거대한 상업적 성공으로 굳어져버려(crystalized) 이미 그 진정성을 잃은 그의 음악이 살아나는 길은 속에서부터 본질적으로 부서져야 하는 길, 즉 내파(內破)되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내파는 아마도 커트 코베인의 죽음을 뜻하지 않았을까?

비즈니스가 되어버리고 이미 하나의 단단한 권력이 되어서 '얼터너티브'라는 하나의 장르에 속해버린 자신의 음악에 커트 코베인은 절망했을 것이고 저항하고 싶었던 것이다. 저항은 결국 죽음으로 이어졌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자신들의 음악적 진정성을 담보하는 희생양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 '죽음'이라는 행위로 음악은 살리고 자신의 육체는 죽는 길을 택한 것이다.

구스 반 산트는 <라스트 데이즈>를 통해 '죽음의 레퀴엠' 삼부작(<제리> <엘리펀트> <라스트 데이즈>)에 방점을 찍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자신이 그토록 연모했던 혹은 존경했던, 그리고 영원히 젊음의 상징으로 남아 있는 커트 코베인을 삼부작의 마지막 대상으로 선택한 것이다. 또한 그의 영화가 '젊음'과 '죽음'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에 천착하고 있다는 사실에 비춰볼 때 커트 코베인의 선택은 당연한 일로 보였을 것이다.

결국 이 감독의 전작 대부분에서 알 수 있듯, <라스트 데이즈>는 커트 코베인의 죽음이 '젊음의 총체적 위기' 상황에서 발생한 필연적 행위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또는 순수해지기 위해 젊어서 죽는다는 역설이 이 영화를 관통하는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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