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지사와 경제학자와 심리학자와 국회의원과 변호사가 최근 저녁밥을 함께 먹었다. 이날 대화를 압도한 주제는 오바마도, 환율도, 정치도, 대통령도, 강만수 장관도, 경제 위기 그 자체도 아니었다. 단연 '미네르바(Minerva)'였다. "미네르바가 도대체 누구냐", "맞는 말을 하는 거냐", "익명의 인사가 왜 이리 스타가 됐냐"…. 문답은 끊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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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일러스트=김의균기자
익명(匿名) 뒤에 숨은 인터넷 경제 논객이 요사이 유령처럼 화제의 중심을 떠돈다. 남녀노소가 방방곡곡에서 실체도 모르는 그를 복기(復棋)하고 논박한다. 찬반 토론의 대상으로 그가 떠오를 때 인터넷에 형성되는 보호막의 단단함으로는, 과거 노무현 전 대통령이나 황우석 전 서울대 교수에 필적할 정도다. 조금 과장하면, 익명의 필자 한 명에게 한국 경제 주체들이 휘둘리는 형국이다.
왜 그럴까?
물론 그가 일찌감치 리먼브러더스의 부실화를 비교적 정확하게 예측했고, 환율 변동 등 경제 예측을 대체로 잘 짚어오긴 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름과 신분을 숨긴 사이버 필자가 '경제 대통령'으로 추앙받는 현상은 결코 정상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미국에서 미네르바 못지 않게 우울한 예언들을 쏟아내고 있는 누리엘 루비니(Roubini) 뉴욕대 교수는 결코 익명의 그늘 속에 숨지 않는다. 그는 실명으로 자신이 운영하는 인터넷 금융정보 사이트를 통해 보고서를 내놓으며, 언론에 나와 공개적으로 토론한다.
■경상·자본수지도 헷갈리는 잦은 오류
그러나 루비니 교수와 미네르바를 구별 짓는 결정적인 차이는 전문성과 논리적 정합성이다. 루비니 교수의 주장이 과학적 분석에 입각해 있다면, 미네르바의 주장에는 보통 수준의 경제 상식을 갖춘 사람이 보기에도 논리적 흠결이 적지 않다. 최근 그가 평소의 욕설을 자제하고 차분하게 정리해 한 월간지에 기고한 글을 보더라도 오류가 적지 않다.
미네르바가 논란이 되자 A금융기관 직원들은 그의 기고문을 정밀하게 분석해 내부 토론을 가졌다. 이 회의에서 논리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지적된 게 10건이 넘었다.(이 금융기관은 회사 이름을 공개하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미네르바 비판의 부담이 그만큼 크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A금융기관의 내부 토론 자료에 따르면 미네르바가 '10월 이후에도 단기 외채상환금액을 제외하면 경상수지는…'이라고 쓴 것은 자본수지와 경상수지가 별개라는 경제학 기초 개념을 착각한 것이다. 또 '5월 말에는 환율 등락폭이 25%에 달할 정도로 경고등이…'라고 썼지만, 당시 환율은 1030원 선 안팎에서 안정돼있었다. '금리를 인하할수록 실질금리는 인상되는 효과가 있다'는 표현도 이해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미네르바는 또 '미국의 대외부채가 1경(京) 달러 이상'이라고 썼지만, 터무니없다. 1경 달러는 9999조 달러보다 1조 달러가 더 많은 엄청난 액수다. '달러 가치가 급락하면 이에 따라 원화 가치 역시 동반 하락할 공산이 크므로'라는 그의 분석도 "달러가 약해지는데 원화도 약해진다니 이해할 수 없는 논리"란 비판을 받는다.
또 이 월간지에 기고한 글에서 미네르바는 주가와 관련, '한국은 500선, 미국은 5000선이 올해 바닥이고 중국은 1000선이 붕괴될 것'이라고 섬뜩한 예측을 내놨지만, 아무런 논리적 근거도 제시하지 않았다.
지난 10월 24일
한국 증시 폭락을 초래한 원인 중 하나로 회자되는 그의 글도 자주 비판받는다. 그는 그날 상황을 한국이 긴급 구제금융 대상에 오르고 한국 경제가 IMF 외환위기 당시나 다름없이 간주되고 있다는 요지로 분석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많이 다르다. IMF는 당시 조건 없이 돈을 빌려줄 수 있는 통화스와프 대상, 즉 한마디로 상황이 괜찮은 국가 군(群)에 한국을 포함시킬 것을 검토한다는 것이었으므로, 이 소식은 호재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의 글은 이를 악재성으로 오해했다. 인과 관계를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런 부정적 해석이 제시된 시점을 즈음해 주가는 급락세를 탔다.
또 그의 글에는 올 하반기 물가 폭등이나 식량난도 전망되고, 독일의 예를 들어 석달치 생활필수품을 사재기하라는 조언도 나온다. 이런 내용은 실현되지 않았고 실현될 것 같지도 않다. 요사이는 인플레이션이 아니라 디플레이션이 엄습할 분위기다.
또한 한·중·일 통화스와프가 불가능하다고 그는 내다봤지만, 현실은 달랐고 주가 전망도 종종 어긋났다.
이런 익명의 논객이 내놓는, 부분부분 논리적으로 하자가 있는 분석이 신드롬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세계적으로 찾아보기 힘든 현상이다. 도대체 무엇이 한국에 미네르바 신드롬과 같은 '비이성적 열광'을 가져왔을까?
1. 익명의 역(逆)권위원론적으로 실명(實名)은 익명(匿名)보다 권위와 힘을 갖게 마련이다. 그만큼 책임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일관되게 비관론을 내놓고 있는 루비니(Roubini) 교수나 마크 파버(Faber) 대표는 늘 실명으로 주장하고 논박하면서 권위와 신뢰를 다져간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익명의 역(逆)권위'란 왜곡이 생겼다는 분석이다.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한국에서는 언젠가부터 지식인이나 전문가가 실명을 걸고 말할 때는 자기 조직의 이익에 맞춰 수위와 방향을 조절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됐다"며 "이런 소신의 실종이 익명에 끌리게 만드는 변칙을 일반화시켰다"고 지적했다. 미네르바도 아마 처음부터 실명과 전·현 직함을 밝힌 채 같은 주장을 폈다면 오히려 열광이 덜했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하지만 미네르바도 이제는 본격적인 사회적 관심의 대상으로 떠올랐으므로 익명의 커튼을 열고 나와 자신을 드러내고 토론에 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2. 대중의 오묘한 심리 못 읽은 정부 이번 위기 국면에서 우리 정부는 국민의 신뢰 획득에 실패했다는 게 다수설이다. 오락가락한 환율 정책이 지핀 불신의 불에 '리만(Lee-Man) 브라더스'로 희화화된 대통령과 재정부 장관의 부적절한 코멘트가 기름을 부었다. 어설프게 미네르바 수사 방침을 밝혔다가 흐지부지한 것도 결국 익명 논객의 지명도만 높였다.
여기서 황상민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한발 더 나간다. 황 교수는 "정부 지도자들은 한국 대중이 단순하게 반응하고 움직인다는 옛날 경제학식 착각을 하는 바람에 심리전의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다"며 "정부가 경제 상황에 대한 적절하고 솔직한 우려와 긍정적 자신감을 버무렸어야 한다"고 비판한다.
2002년 노벨경제학상을 심리학자인 대니얼 카너먼(Kahneman) 교수가 수상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이제 경제학은 심리학을 수혈한 행동경제학(Behavioral Economics)으로 발전하고 있다. 가장 큰 변화는 과거처럼 경제 주체가 '단순한 합리성'에 따라 행동한다고 가정하지 않고, '복잡한 합리성 혹은 비합리성'에 터잡아 움직인다고 보는 점. 황 교수는 "위기에서도 정부는 일단 낙관론을 펴야 경제 심리 안정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은 대중의 오묘한 심리를 도외시한 견해"라며 "무조건적 낙관론을 펴는 지도자는 대중의 관심권에서 아예 사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비가 와서 둑에 물이 차오를 때 군수가 "비도 곧 그치고 둑도 튼튼하니 움직이지 말라"는 말만 되풀이하면 주민들은 불안감을 줄이는 게 아니라 아예 군수를 외면한 채 "둑이 곧 터지니 도망가자"는 이장의 선동적 비관론에만 몰입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도 "불안할수록 사람들은 대세를 따르려는 군중 심리가 강해진다"며 "정부가 이번 위기에서 대세로부터 너무 동떨어지면서 미네르바 같은 비관론자들은 무주공산에 손쉽게 입성한 셈이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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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러스트=김의균 기자
'설득의 심리학'으로 유명한 로버트 치알디니(Cialdini) 애리조나 주립대학 교수는 "상황이 어려울수록 사회적 증거의 법칙(가장 많이 팔린 상품이 더 많이 팔릴 것으로 믿고 싶어한다)이 더 강해진다"고 말한다.
3. 진실의 트라우마와 X-파일김난도 교수는 "한국인들은 '진실은 밝은 이곳이 아니라, 어두운 저곳 X-파일에 있다'고 과신(過信)하는 경향이 있다"며 "이런 속성이 불안과 공포 속에 증폭되며 '미네르바 신드롬'과 결합했다"고 분석했다. 왜 한국인은 어두운 X-파일을 과신할까? 김 교수는 그 이유로 '급변한 진실의 트라우마(trauma·충격으로 인한 정신 장애)'를 들었다.
예를 들어 한국인의 뇌리에는 둘도 없는 국부(國父), 나라 망친 친일파, 건국의 영웅으로 등락을 거듭했던 '이승만 재평가'의 충격이 각인돼 있다는 설명이다. '공식적 설명과 진짜 스토리가 완연히 다른 사건들'은 한국에 특히 많았고, 이것이 '어두운 저곳'에 정답이 있을 것이란 기대, 혹은 환상을 불러일으켰다는 해석이다.
이런 성향은 한국인의 '음모론', '배후론' 선호로도 이어진다. 신문 기자 출신인 한 언론학 전공 교수는 "처음 대학교로 옮겨갔을 때의 충격을 잊기 힘들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B신문에만 공직자 비리 기사가 크게 실리면 현업 메커니즘을 아는 제 눈에는 '아, B신문 특종했구나'하는 게 바로 보이죠. 그런데 일부 교수들은 '정부가 요새 C프로젝트와 관련, B신문을 섭섭하게 만든 바람에 이런 기사가 나왔다'는, 근거가 미약한 음모론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옆에서 '과연 그렇군'하며 고개를 끄덕이고요."
이렇게 전문가·비전문가를 막론하고 우리 사회가 공식 설명보다 비공식 배후와 인과(因果) 관계에 더 매혹당하는 데다, 11년 전 'IMF 환란 위기'를 앞두고 정부와 언론이 제대로 '공식 경고음'을 내지 못했던 기억도 맞물린다는 지적이다.
4. 재야 프리미엄 과잉+제도권 홀대"뉴라이트 운동할 때는 그렇게 제 이야기를 경청하던 사람들이 제가 국회의원이 되자 너무나 제 발언을 무시하는 바람에 깜짝 놀랐습니다. 사실 지금이 훨씬 더 많은 정보를 바탕으로 더 정확하고 의미 있는 분석을 내놓고 있는데도요." 시민단체인 자유주의연대 대표 출신 신지호 의원(한나라당)의 토로다.
글로벌 컨설팅업체인 올리버와이만 정호석 한국지사 대표는 "외국과 비교할 때 한국에서는 고위 공직자나 정치인 등은 '그렇고 그런 사람들'로 홀대하는 반면, 시민운동가나 교수 등 '재야 인사'를 과대 평가하는 경향이 확연하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한국처럼 교수 출신이 장·차관급으로 직행하는 나라는 선진국에서는 거의 없다. 미국의 경우 교수가 행정부에 들어갈 때는 국장이나 차관보급 자리에서 검증받은 후에 최고위직으로 옮겨가는 게 일반적이다.
전문가들은 이런 재야(在野)에 대한 과잉 프리미엄과 제도권 공직자에 대한 홀대 풍조가 경제 관료보다 미네르바 견해를 훨씬 더 존중하는 결과에 일조했다고 진단한다.
5. 노스트라다무스는 족집게?지금의 미네르바 신드롬에는 노스트라다무스 신드롬의 그림자가 읽힌다는 전문가들도 있다. 정신과 전문의인 표진인 박사는 "큰 사건이 벌어지면 사람들은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에서 적당한 것을 골라 사후적이고 결과론적으로 적중한 것처럼 믿어버리려 한다"며 "이는 세기말적 불안감이 엄습할 때 대중들이 이를 설명해주는 '족집게 현자(賢者)'가 있다고 믿고 싶어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즉, 예전에 겪지 못한 경제 위기가 오자 대중들은 적중한 것으로 보이는 미네르바의 예측들만 골라 선택적으로 기억을 집중시키면서 위안을 삼는다는 분석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심리학자도 "너무나 불안할 때는 역설적으로 차라리 불안을 정당화시켜주는 논리를 과감히 끌어안으면 편해지는 심리가 사람에게는 있다"며 "미네르바는 그런 기제로 활용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6. 비관론자가 유리한 게임전문가들은 기본적으로 이런 위기 국면의 구도는 비관론자에게 훨씬 유리하다고 입을 모은다.
박남규 서울대 경영대 교수는 "비관론자가 틀리는 상황은 일이 잘 풀리는 경우이므로 욕을 먹을 가능성이 높고 '위기를 예고한 덕분에 피해갈 수 있었다'는 변론도 가능한 반면, 낙관론자는 조금이라도 틀리면 훨씬 잘못이 도드라져 보인다"고 말했다.
마치 한국 기상청이 호우 예보를 제대로 못한다는 비난에 시달리자 웬만하면 호우 주의보나 경보 같은 기상 특보를 발령한 경우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지금처럼 미증유의 위기 국면에서는 미네르바 같은 철저한 비관론 견지가 일관성도 있어 보이고 유리해질 가능성도 높다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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