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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의 거장, 황금시대를 소환하다

 

 

 

황혼의 거장, 황금시대를 소환하다
[김작가 칼럼] 에릭 클랩튼 내한 공연... "지는 해는 장엄하다"
텍스트만보기   김작가(zakka) 기자   
 
아는 동생 하나가 이런 말을 했다.

"아무리 디지털이 세상을 장악해도 끝까지 아날로그로 남을 두 가지가 있어. 섹스와 공연이야."

지난 23일, 올림픽 체조 경기장에서 열린 에릭 클랩튼의 공연을 보면서 그 말이 다시 생각났다. 제 아무리 디지털 음악 테크놀로지가 발달할지라도 재현할 수 없는, 인간의 위대함이 굳은살로 점철된 그의 손가락을 타고 흘렀다.

큰 기대 하지 않았는데...

 
ⓒ 서울음반
사실, 공연장으로 향하며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90년대 들어 'Tears In Heaven', 'Change The World' 같은 히트곡을 내며 화려하게 재기한 에릭 클랩튼이다. 그러나 그런 히트곡은 역설적으로 위대한 기타리스트로서가 아니라 노장 팝 뮤지션의 삶을 그에게 안겨다 줬다.

팝 뮤지션이 나쁜 게 아니다. 다만, 이번 공연의 세트 리스트가 최근의 앨범을 중심으로 한 히트곡 위주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 선입견은 아마도 70년에 발표한 불후의 명곡 'Layla'가 94년 언플러그드 앨범에서 어쿠스틱으로 바뀌어 수록되었을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저녁 8시로 예정된 공연은 약 20분쯤 후에 시작됐다. 갑자기 불이 꺼지고 기타 리프가 흘렀다. 'Tell The Truth'. 전율이었다. 기타리스트로서 에릭 클랩튼 커리어의 절정인 데렉 앤 도미노스 앨범에 담겨있는 노래가 아닌가.

공연 시작 전 갖고 있던 선입견은 단숨에 깨졌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6명의 백 밴드와 2명의 코러스를 대동하여 무대를 꾸린 에릭 클랩튼은 크림, 존 메이올 앤드 블루스 브레이커스, 데렉 앤 도미노스 시절의 음악들을 포함하여 록의 황금기이자 자신의 절정기였던 70년대 곡들을 계속해서 연주했다.

그 이후의 곡은 2004년 앨범 < Me & Mr. Johnson >에서 하나, 89년 < Journeyman >에서 하나가 연주됐을 뿐이다. 약관의 나이에 기타의 신이라는 호칭을 들으며 록계의 가장 위대한 기타리스 반열에 올랐던 청년 에릭 클랩튼이 무대에 서있는 듯했다.

'Wonderful Tonight'을 제외하고는 '한국인이 좋아하는 팝송'에 들어갈 히트곡은 전혀 연주하지 않았지만 그의 명곡들이 흘러나올 때마다 객석은 환호했다.

아들 손을 잡고 온 아버지, 혹여 사인이라도 받을 수 있을까 기타를 매고 온 청년들에게 에릭 클랩튼은 'Tears In Heaven'의 가수가 아닌 음악에 경도됐던 청춘의 심볼이었기 때문이리라.

그의 기타가 불을 뿜던 시절의 연주에 감화되어 낙원상가로 달려가 구입한 기타를 매고 거울 앞에 서게 했던 그 시절의 심볼. 그런 그들에게 이날의 선곡은 환상이자 청춘과의 재회에 다름 아니었다.

맥주에 취해 'Crossroads'를 들으며 말문을 잊고, 직접 연주한 'Wonderful Tonight'을 테이프에 녹음해서 짝사랑하던 소녀에게 선물하던 시절의 기억들이 문득 문득 되살아나는 재회.

판에 박힌 인사말은 없었다

 
ⓒ 서울음반
그런 환호 앞에서, 거장이 된 한 때의 청년은 별 표정을 짓지 않았다. 폼잡는 일은 젊은 세션맨들에게 맡기고 왼손으로는 기타 넥을 잡고 오른 손으로는 피크를 위 아래로 움직였을 뿐. 그는 말도 하지 않았다. 젊은 뮤지션들이 한국을 오면 꼭 하는 '안뇽하세요'나 '캄사합니다' 따위의 인사말도 없었다.

예전의 라이브앨범에서 언제나 들을 수 있는, 낚아채듯 발음하는 '땡큐'가 처음부터 끝까지 들을 수 있는 유일한 그의 말이었다.

음악만 연주해도 인사치레와 현란한 액션은 가볍게 능가할 수 있는 경지에서, 에릭 클랩튼은 금색 팬더 기타를 뜯었다. 그의 손가락은 또 다른 성대가 되어 목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희노애락의 경지에서 지판을 오고 갔다.

그 모습을 보며, 그 연주를 들으며 어쩌면 우리는 거장이라는 말을 너무 남발하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종심의 경지에서 무심히 연주하는 그를 보며 어찌 과거에만 매달린 채 허송세월하는 사람들에게까지 거장의 칭호를 내릴 수 있으랴.

에릭 클랩튼은 거장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 청춘을 바쳤다. 기타가 반주 악기에 머무르던 시절, 기타와 앰프를 가지고 온갖 실험을 한 끝에 기타를 록의 주인공으로 격상시켰다. 그 누구도 들어본 적 없는 굉음을 뿜어냈고 그 누구도 들려준 적 없는 신묘한 소리들을 만들어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귀도 혹사시켜야 했다.

그 후유증 때문에 우리나이로 올해 63세인 그는 현재 심각한 이명 현상에 시달리고 있다. 이번 월드 투어가 마지막 공연이 될지 모른다는 얘기도 그래서 신빙성이 있다.

뮤지션으로서 황혼기에 있는 그가 70년대 혈기왕성하던 시절의 음악을 전성기 못지 않은 기량에, 세월의 연륜을 더 해 연주했다.

동쪽에서 뜨는 해는 찬란하다. 서쪽으로 지는 해는 장엄하다. 일출이 비추지 못했던 음악 세계의 뒷면을, 에릭 클랩튼은 일몰에 선 채 감싸 안았다. 과거의 위대함을 바로 이 순간에도 얼마든지 펼칠 수 있는 단련의 나날만이 펼칠 수 있는 장엄한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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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26 11:16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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