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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스트리아제국 태생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1883~1924·왼쪽)와 〈자본론〉 저자 카를 마르크스(1818~1883·오른쪽). 이진경 교수는 오래된 소설 형식을 혁파한 카프카나 “불모의 땅”에서 새 영토를 일구고 있는 사회주의 붕괴 이후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유목민의 보기로 들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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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 지식논쟁 /
② 충분히 숙성된 사유다
지난주 홍윤기 동국대 교수는 노마디즘(유목주의) 기획을 과거의 ‘유토피아’ 구상을 대체하는 탈현실 기획이며, ‘개념’과 ‘실행’이 태부족한 실험기획이라고 지적했다. 노마드들이 규정력을 발휘하는 ‘개념’으로 총집되지 못하고 다감각의 ‘이미지’로 교착되고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노마드라는 용어 안에 수많은 노마드들이 다양한 의미를 갖고 경쟁하거나 대립·공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시장 노마드’나 ‘디지털 노마드’라고 해서 진정한 노마드가 아니라고 배제되어야 할 이유를 찾기 힘들다고 했다. 홍 교수는 또 제도장치로부터의 탈주라는 개념은 원시로의 회귀를 각오한 “역진적 퇴주”가 될 수 있음도 지적했다. 성격을 불문하고 모든 종류의 국가를 ‘포획’ 대상으로 삼는 것에 대해서도 이견을 보였다.
2002년 들뢰즈와 가타리 공저 〈천의 고원〉(1980) 해설서인 〈노마디즘 1·2〉를 펴내면서 우리 사회에 노마디즘을 널리 알린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는 이 글에서 유목민은 주류적 척도에서 벗어난 새로운 삶의 방식, 사유방식을 창안하는 자들이라고 규정했다. 따라서 자동차나 비행기로 돌아다니지만, 마음은 언제나 돈이나 자기 가족에 매여 있는 자는 유목민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시장 노마드’ 등 여러 유사 노마드들은 자본이 게바라로 돈을 버는 것처럼 ‘노마드의 상품화 전략’의 결과물일 뿐이라고 했다. 그는 또 노마디즘은 “좀더 나은 삶에 대한 꿈”이며 “그런 꿈을 통해 현실을 바꾸려는 의지의 표현”이란 점에서 혁명의 정치학과 상통한다고 강조했다. 다음주에는 김진석 인하대 철학과 교수가 견해를 밝힌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에게 노마디즘이란 정착과 소유, 착취와 포획, 동일성의 지배에 대항하기 위한 철학적 문제 설정이고, 우리의 신체와 삶을 사로잡고 있는 권력과 대결하며 새로운 창조적 삶을 창안하며 살아가는 방법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윤리학인 동시에 정치학이고, 삶의 방법인 동시에 사유의 방법이다. 흔히들 말하는 ‘차이의 철학’이나 ‘탈주의 철학’이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지층 속에서 ‘숙성’되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어떤 쓸모 있는 사유도 영향력을 얻게 되면, 그래서 심지어 ‘유행’의 물결을 타게 되면, 그것에 촉발되어 생성되는 ‘친구’들과 더불어, 거기에 편승하는 유사품들이 등장하게 마련이다. 더구나 자본은 돈이 된다면 게바라나 혁명마저도 상품화해서 팔아먹지 않던가! 그러나 상품화되는 사태를 들어 게바라를 비난하고 혁명을 포기할 순 없는 일 아닐까? 거기서 중요한 것은 상업적 물결 속에서도 애초의 문제의식을 더욱 멀리 밀고 나가는 것일 게다. 그래서 삼성이 ‘디지털 노마드’를 광고 카피로 삼고, 자크 아탈리 같은 이가 “인간이란 본래 노마드였다”면서 재빨리 책을 내는 사태도, 역으로 적절한 근거 없이 ‘노마디즘은 침략주의’라고 비난하는 사태도 내게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 사태를 헤쳐나갈 수 없다면, 어떤 사상도 현실 속에서 작동하는 능력을 획득할 수 없을 것이다.
신체·정신적으로 주류적 척도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창안하는 자들이 노마드
새 정착지를 찾아 여기저기 떠돌거나
돈·가족에 얽매인 ‘이동’과 혼동 말아야
이동이 자본의 중요한 특징이 된 지금 노마디즘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유목’과 ‘이동’을 혼동하지 않는 것이다. 정착민도 이동을 하며, 유목민도 멈춘다. 차이는 정착민의 이동이 어떤 목적지(멈춤)에 종속되어 있다면, 유목민에게 멈춤이란 이동의 궤적 안에서 잠시 머무는 것이란 점에서 이동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휴대폰, 노트북 컴퓨터 등을 갖고 “세계는 넓고 갈 곳은 많다”고 자동차로 비행기로 돌아다니지만, 마음은 언제나 돈이나 자기 가족에 매여 있는 자를 유목민이라고 하지 않는다. 반면 여행도 잘 다니지 않지만, 멈추지 않는 사유로 자신이 구축한 영토마저 떠나는 사상가는 유목민이란 정의에 정확하게 부합한다. 더구나 들뢰즈·가타리는 ‘이주민’과 ‘유목민’ 또한 구별한다. 이주민이란 어느 영토에 이주하여 그 영토를 이용하며 살지만 그 영토가 불모가 되면 버리고 떠나는 자들이다. 반면 유목민은 불모가 된 땅(초원이나 사막, 혹은 사회주의 붕괴 이후의 마르크스주의 같은…)을 떠나지 않고 오히려 거기서 살아가는 법을 창안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나는 정착민이란 성공에 안주하는 자라면 유목민은 성공을 버릴 줄 아는 자고, 이주민이란 실패를 쉽게 떠나는 자라면 유목민이란 실패와 대결하며 새로이 길을 찾아내는 자들이라고 이해한다.
유목이나 정착, 이주는 ‘현실적인’ 영역에서도, ‘정신적인’ 영역에서도 모두 나타난다. 어느 영역에서든 유목은, 홍윤기 교수 말대로 “국가나 자본, 시장 같은 준거를 떠날” 뿐 아니라 그것과 대결한다. 노마디즘이나 차이의 철학이 혁명의 정치학과 상통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지배적인 척도가 새겨 놓은 사유나 삶의 ‘홈 파인 공간’을, 그 깊은 홈들을 범람하여 매끄러운 공간을 만든다는 것은, 지금의 조건에서라면 어떤 것도 자본이나 국가, 시장과 대결하지 않고선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관념적’이라는 나쁜 관형어를 덧붙인다고 해도, 이를 ‘홈 파인 공간’ 안으로 몸을 도사리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좌우를 못 가리는 것이다.
들뢰즈·가타리가 말하는 마이너리티(minority)란 수가 적다는 의미의 ‘소수파’가 아니라 이처럼 주류적(major) 척도와 대결하는 자들이고, 그런 척도에서 벗어난 새로운 삶의 방식, 사유방식을 창안하는 자들이다. 빈민이나 이민자, 혹은 여성이나 성적 소수자들조차 주어진 상태에 머물러 있다면, 혹은 주류적 척도에서 벗어난 삶이나 사유의 방식을 구성하지 못하고 개별적인 새 정착지를 찾을 뿐이라면, 홍 교수 지적대로 그들 또한 정착민이다. 물론 주어진 상태가 결코 안주하기 힘들기에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아나서게 할 거대한 잠재성을 갖고 있음을 잊어선 안 되지만.
유사 노마드·이념 상품화 현혹됨 없이
애초의 문제의식 더욱 밀고 나가야
비현실적 ‘유토피아’ 주장 틀렸음은
현대·역사 속 수많은 노마드들이 증거
이런 대결을 들뢰즈·가타리는 니체의 용어법을 따라 ‘전쟁’이라고 했다. 지배적인 가치에 대한 전쟁, 낡은 습속에 대한 전쟁. 그리고 이런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그들은 ‘전쟁기계’라고 일컬었다. 가령 오래된 소설의 형식을 혁파하고 관료제와 더불어 새로이 등장한 권력을, 그 권력에 대한 대중의 욕망을 드러내고 그것과 대결하는 카프카의 책들 또한 그들의 정의에 따르면 전쟁기계다. 따라서 이런 전쟁기계는 전쟁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좋은 전쟁에서는 화약 냄새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새로운 삶을 구성하려는 시도가 국가장치나 지배적 가치와 충돌할 때, 그 전쟁 같은 충돌을 피하지 않는다. 물론 여기서 굳이 ‘전쟁’이란 단어를 사용해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나로선 ‘투쟁’, ‘투쟁기계’라는 말을 사용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전쟁기계나 탈주선, 매끄러운 공간 등 들뢰즈·가타리가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것들조차, 창조적 생성이 결여된 채 주어진 세계에 대한 분노와 혐오에 머문다면, 전쟁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파괴적 전쟁기계로 될 수 있음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다. “매끄러운 공간으로 충분하다고 믿지 말라”는 말은 이런 의미에서 했던 것이며, ‘노마드 자체에서 벗어나라’는 홍 교수 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들뢰즈·가타리의 유목적 사유를 어떤 이념의 냄새를 확실하게 풍기는 ‘노마디즘’과 대비하여 ‘노마돌로지’라는 말로 그들을 구해주려는 시도가 있음을 알고 있다. 어떤 사유의 명칭에 ‘이즘’이란 말을 넣거나 뺌으로써 무언가 크게 달라질 거라고 믿지 않지만, 설령 그렇다고 해도 자신들의 책을 삶을 바꾸고 정치적으로 작동하는 ‘책-기계’로 사용해 달라고 책의 첫머리부터 주문했던 사람들이, ‘노마드적 삶에서 많은 것을 학습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어떤 이념 같은 것이 되어선 안 되기에 ‘노마디즘’이란 말을 거부할 거라고 할 수 있을까? 그건 마치 “중요한 것은 변혁”이라고 했던 마르크스가 자신의 이론이 ‘이념’이 되는 것을 거부하기 위해 ‘마르크스주의’ 대신 ‘마르크스론’(Morxology)이란 말을 고집했다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어이없어 보인다. 아니라면, 들뢰즈는 그저 ‘학자’일 뿐이라는 말일까? 마지막으로, 노마디즘은 ‘21세기 유토피아’인가? 유토피아라는 말이 ‘좀더 나은 삶에 대한 꿈’이고 그런 꿈을 통해 삶을 바꾸려는 의지의 표현이라면, 적어도 나는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반면에 흔히 말하듯 비현실적 공상이라면, ‘그렇지 않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스피노자를 모르고도 스피노자주의자가 될 수 있”듯이, 노마디즘을 모르고도 노마드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현실 속에, 그리고 역사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진경 교수/서울산업대
이진경 교수는 1963년생이며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마르크스주의 전반에 대해 다시 사유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와 구별되는 ‘코뮨주의’란 화두를 들고 공부하고 있으며, 생명의 경제·정치학에도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습니다. 주요 저서로는 <미-래의 맑스주의> <자본을 넘어선 자본>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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