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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왕 독살사건>의 저자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
ⓒ 남소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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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과 그 후손들에게 정조독살설은 껄끄러운 이야기다. 그래서 독살설은 남인들이 한이 맺혀 지어낸 이야기나 소설이라고 폄하해 왔다. 비밀편지가 발견되니까 '둘은 편지를 주고받던 친한 사이다, 정조 독살 의혹이 사라졌다'는 수준 낮은 이야기를 삽시간에 퍼뜨렸다. 지금의 사태는 그들의 막강한 영향력을 반증하는 것이다.
정조 독살설이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료적 근거를 전혀 대지 못한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역사관에는 200년 전 정조를 죽인 노론 벽파의 시각, 우리 역사를 식민사관으로 난도질했던 조선사편수회의 시각이 일정 부분 반영돼 있다."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과 한국고전번역원 번역대학원은 지난 9일, 성균관대 600주년 기념관에서 정조가 노론 벽파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 299통을 공개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날 어찰이 공개되면서 정조의 막후정치와 독살설의 진위 여부 등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
지난 13일 오후에 만난 역사평론가 이덕일 한가람역사연구회 소장은 다소 격앙돼 있었다. 이 소장은 인터뷰를 하기 위해 자리에 앉자마자 관련 자료들을 제시하며 최근 일고 있는 '정조 독살설은 허구였다'란 일각의 주장에 반박하기 시작했다.
<조선왕 독살사건>으로 대중역사서의 새장을 열었다고 평가되는 이덕일 소장은 최근 언론 등에서 대서특필하고 있는 '독살설 허구'에 대해 "사료적 근거도 없는 수준 낮은 이야기"라고 일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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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 어찰 공개 기자회견 9일 서울 성균관대학교에서 김문식 단국대 교수,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 등 관계자들이 기자회견을 열고 새로 발굴한 정조 어찰 299통 중 일부를 공개하고 있다. 이 편지들은 모두 정조가 친필로 써 심환지 한 사람에게 보낸 것으로서 정조 말년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정국 동향을 파악하는 데 획기적인 가치를 지닌 자료로 평가된다. |
ⓒ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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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근이라 독살 아니라면, 박정희는 어떻게 설명하나"
이덕일 소장은 "정조 어찰이 발견되었다고 노론 벽파의 정조 독살 의혹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며 "둘 사이에 비밀 편지가 오갔다고 해서 심환지가 정조와 가까운 사이였거나 정조의 측근이었을 것이라고 볼 수 없다"고 못 박았다. "정조 어찰 발견 후 둘이 가까운 사이였으므로 심환지가 정조독살에 가담했을 리가 없고, 따라서 정조독살설이 힘을 잃게 되었다는 보도가 많은데 이것은 잘못된 해석"이라는 것.
그는 이런 주장의 근거로 박정희와 카이사르의 예를 들었다. 일각에서 주장하는 대로 정조와 심환지가 측근이었기 때문에 독살했을 리 없다면, 박정희가 김재규의 손에 죽은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는 것이다. 그는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측근에게 암살됐음을 상기시켰다. 그는 "편지가 발견된 것만으로 정조와 심환지가 측근이었을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지만 측근이므로 암살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는 것도 말이 안 된다"고 말했다.
이 소장은 '독살설 허구'란 주장은 "억지 해석"이라며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는 "노론 벽파와 조선사편수회의 후손이 역사학계 주류를 장악하고 다른 해석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다음은 마포에 위치한 한가람역사연구회 사무실에서 진행한 이덕일 소장과의 인터뷰 전문.
"정조 독살설이 여전히 유효한 이유는..."
- 이번 편지 발견으로 일각에선 '정조 독살설은 허구'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대한제국이 멸망한 다음 달, 일본이 76명의 조선인들에게 훈장과 돈을 준다. 76명은 대부분 노론이었다. 노론은 일제 때도 세력을 온존해 왔고, 지금도 학계, 법조계 등 한국 사회의 상당 부분을 장악하고 있다. 노론과 그 후손들에게 정조독살설은 껄끄러운 이야기다. 그래서 독살설을 '남인들이 한이 맺혀 지어낸 이야기나 소설'이라고 폄하해 왔다. 비밀편지가 발견되니까 '둘은 편지를 주고받던 친한 사이다, 정조 독살 의혹이 사라졌다'는 수준 낮은 이야기를 삽시간에 퍼뜨렸다. 지금의 사태는 그들의 막강한 영향력을 반증하는 것이다.
정조 독살설이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료적 근거를 전혀 대지 못한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역사관에는 200년 전 정조를 죽인 노론 벽파의 시각, 우리 역사를 식민사관으로 난도질했던 조선사편수회의 시각이 일정 부분 반영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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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덕일 소장이 쓴 <조선왕독살사건> |
ⓒ 다산초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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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가 보낸 편지엔 병명, 증세까지 상세하게 적혀 있다. 때문에 알려진 것과 달리 심환지가 정조의 측근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이 나오는 것 같다.
"정조는 재위 24년인 1800년 6월 28일 세상을 떠났다. 6월 14일 어의가 진찰을 해서 병세가 드러났다. 이미 알려진 병을 감출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심환지는 노론 벽파의 원칙론자이지만 대화가 되는 상대다. 노론 벽파가 사회를 장악하고 있는데, 전부를 적으로 돌릴 수는 없지 않나? 서로 이익이 있으니 편지를 주고받는 핫라인을 개설한 거다.
편지를 보면 심환지가 어떤 부분은 정조의 뜻대로 움직이고 어떤 부분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니 측근'이라는 말이 맞으려면, 심환지는 정조가 죽자마자 몰락해야 된다. 하지만 승진을 하고 정순왕후와 함께 (정조의)24년 치세를 모두 뒤집어버린다."
- 그렇다면, 독살설이라고 보는 근거는 무엇인가?
"정조는 사후 준비를 전혀 안했다. 그 정치지형을 그냥 가지고 가면 다 되돌릴 텐데, 꼼꼼한 정조가 왜 대비를 안 했을까? 자신이 세상을 떠나리라고는 생각도 안한 것이다. 그래서 독살설에 무게를 두는 거다. 인위적인 특정 세력이 정조를 독살한 것이라면, 수천 수백 년이 지나도 역사의 법정에 반드시 세워야 한다. 그래서 10년째 이 문제에 천착하고 있다.
<순조실록>에 이런 기록이 있다. 정조가 죽지도 않았는데, 정순왕후가 언서(諺書)를 내려 도승지를 갈아치우는 인사권을 행사한다. 그리고 정조의 상태를 직접 보겠다고 간다. 조선은 대비가 오면 어의는 물론 남자 신하 전원이 밖으로 나가야 한다. 정순왕후만 있는 상태에서 곡소리가 났고, 정조가 죽은 후 (정순왕후는) 바로 언서를 내려 좌상 심환지를 영의정으로 삼는다.
정조를 연구할 때 풀리지 않았던 미스터리는 '정조가 왜 심환지를 내의원 제조로 계속 두었는가'였다. 비밀편지는 심환지가 왜 왕의 병 치료를 담당하는 내의원 제조로 계속 있을 수 있었는가를 밝혀주었다. 그래서 심환지의 혐의가 더 커진다. 둘이 편지를 주고받았기에 혐의가 없어졌다고 하는 것은 사료를 해석할 능력이 안 되거나 악의적으로 사료를 왜곡하는 것 밖에 안 된다.
'편지를 주고 받았으니, 독살했을 리가 없다', 그럼 박정희는 죽었을 리가 없다. 김재규하고 얼마나 사이가 좋았는데 죽느냐. 브루투스가 카이사르를 암살하고, 수양제가 자신의 아버지를 암살하지 않았나. 항상 독살이라는 것은 최측근에서 나왔다."
"노론 벽파는 정조와 근본적으로 화해할 수 없다"
- 정옥자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과 유봉학 한신대 교수 등 간송학파 계열 학자들은 정조와 노론의 제휴·협력설을 주장하고 있다.
"노론 벽파는 정조와 근본적으로 화해할 수 없다. 노론벽파는 사도세자를 잘 죽였다고 본다. 노론이 석고대죄를 하든지, 정조가 아버지 잘 죽었다고 하지 않는 한 양자는 화해하기 어렵다. 그런데, 정조가 오회연교에서 남인들을 대거 등용하겠다고 말했다. 정계 개편을 한다고 말한 거다. 그래서 노론 벽파가 급해진 것이다. 오회연교(5월 그믐날 경연에서 왕이 내린 교시) 후 한 달이 안 되어 정조가 갑자기 죽는다."
- 비밀 편지의 발견으로 <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 공식 기록도 믿을 수 없는 것 아닌가란 지적이 있는데.
"정조 시대는 <정조실록> <홍재전서> <승정원일기> 정약용의 글, 문집, 외사촌이나 채제공에게 보낸 편지 등 사료가 많다. 그런 것 중 하나가 새로 나온 것이다. 다만 정적이었던 노론 벽파의 영수 심환지에게 보낸 것이라 성격이 다른 것이다. 하지만, 이 사료로 인해 바뀐 사실은 하나도 없다. 편지와 <정조실록>의 내용이 다르지 않다. 이 편지는 기존의 사료를 보완해 줄 뿐이다."
- 박사학위 논문이 <동북항일연군>이다. 근현대사 전공인데 조선 시대에 관한 책을 많이 쓴 이유는?
"대학원 다닐 때, 노론 벽파와 조선사편수회로부터 내려오는 특정 사관에 동조하지 않으면 역사로 벌어먹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구조적 모순과 근현대사의 여러 문제의 원인을 찾다보니 조선시대에 그 뿌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 관한 책을 많이 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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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왕 독살사건>의 저자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
ⓒ 남소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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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 국사 교과서는 정조를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한 왕으로만 소개했다. 소설 <영원한 제국> 이후 정조를 연구한 책들이 많이 나온 것 같은데.
"예전 교과서들은 노론 벽파의 시각으로 역사를 서술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조가 별로 한 일도 없는, 영조의 부록처럼 보였던 것이다. 아직도 그들의 시각이 관철된 부분이 많다. 그러다 이인화 교수가 책을 내면서 몇몇 사람들이 정조에 대한 새로운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고 생각한다. 그런 것들이 바탕이 돼서 정조에 대한 붐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국사교과서에 '중상학파(북학파)는 서울의 노론출신이 대부분이었다'란 부분이 있다. 하지만 (북학파인) 박제가, 이덕무 등은 노론이 아니다. 가장 크게 왜곡된 부분은 '상공업 중심개혁론의 선구자는 18세기 전반의 유수원이었다(국사교과서 314쪽, 교과서 맥락으로 보면 '유수원=노론'이라고 인식하게 된다)'란 부분인데, 유수원은 노론에게 사형당한 소론 강경파다.
남인이 농업 중심 개혁론을 개발했으니, 집권 세력인 노론도 한 일이 있다고 주장하기 위해 왜곡한 것이다. 청을 오랑캐로 보는 노론에서 청과 교류하자는 상공업 중심 개혁론이 나올 수가 없다. 이렇게 교과서가 노론 벽파의 시각을 담고 있으니 정조가 제대로 소개되지 못했던 것이다."
"정조 붐은 지금 우리에게 이런 지도자가 필요하기 때문"
- 정조를 근대적 군주라며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사료를 찾아보면 '각 붕당의 주장이 옳은지 그른지 끝까지 토론을 했다'고 나온다. 이는 현대적 시각에서 보면, 자신의 의견을 끝까지 관철하려고 한 것 아닌가란 느낌을 준다. 이를 보면 다양성을 존중하는 현대사회 사고방식과는 좀 다른, 성리학적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으로 정조를 볼 수 있지 않나.
"(정조가) 근대적 군주였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첫째 증거는 천주교에 관대했다는 점이다. 노론은 성리학만 유일사상으로 신봉하고 그 외는 이단으로 본다. 노론 벽파가 천주교를 수사하고 처벌해야 한다고 했을 때, 정조는 '정학(正學, 성리학)이 바로서면 사학(邪學, 천주교)은 저절로 소멸한다'면서 용인한다. '천주교 별로 나쁜 것 없던데'라고 하면 난리가 날 테니 돌려 말한 거다. 정조는 서양 사상까지도 포용하며 사상의 다원화를 꾀한 인물이었다.
둘째는 남인 등 다른 당파 사람을 적당한 시기에 등용해 노론 일당 독재를 다당체제로 만든 점이다.
셋째는 신분제 완화다. 노론은 서자(庶子)를 인간으로도 안 보는데, 정조는 규장각 검서관에 서얼을 등용하면서 신분제를 완화시켜 나간다. 지금 우리나라는 학벌로 차별한다. 정조의 신분제 완화 조치는 학벌 카르텔 사회와의 싸움이기도 했다. 현재의 학벌 카르텔 사회와 조선시대 노론 일당 체제 사회는 똑같은 사고구조를 지닌다. 요즘 정조 붐이 그냥 일어나는 게 아니다. 지금 우리에게 이런 지도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 정조는 문체를 정통고문(正統古文)으로 되돌리려는 '문체반정'을 시도했다. 이 대목을 접하고 개인적으로 꽤 놀랐는데, 이는 보수적 사고방식을 가졌기 때문 아닌가.
"문체반정도 당시 시대의 맥락을 보고 이해해야 한다. 문체반정의 시작은 진산사건(전라도 진산에서 천주교도 권상연과 윤지충이 부모 신주를 불태운 사건)이다. 이 사건은 노론에게 정조를 돕는 남인을 몰아낼 호재였다. 정조가 불리한 현안을 반전시키려고 제기한 것이 문체반정이다.
정조는 신분제의 틀을 바꾸고자 했던 사람이다. 정조의 문집 <홍재전서>를 보면 서북인(함경도, 평안도 사람)이 차별받는 것, 한 번 노비가 되면 영원히 노비로 차별받는 것, 여성의 재가를 허용하지 않는 것 등을 비판하고 있다. 그 시대 국왕이 어찌 저토록 선진적인 발상과 철학을 가지고 있었는지 놀라울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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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독살설 모든 증거 사료 엉뚱한 해석·왜곡 과장된 것”경향일보 9월 23일
ㆍ유봉학 한신대교수 주장
지난 2월 정조가 노론 벽파의 거두 심환지에게 보낸 비밀어찰이 공개되면서 불거졌던 ‘정조 독살설’ 논쟁이 재점화됐다.
유봉학 한신대 국사학과 교수는 22일 경기 수원 경기도문화의전당 컨벤션센터에서 ‘정조시대 정국 동향과 정조어찰’을 주제로 열린 학술대회에서 “정조 독살의 증거라고 내세우는 사료 모두는 가설을 합리화하기 위해 왜곡 과장된 것이며 이는 사료의 잘못된 번역, 자료의 전후 맥락과 유리된 엉뚱한 사료 해석의 결과”라고 밝혔다.
유 교수는 “우의정이자 약방도제조로서 정조 치료의 최고 책임자였던 소론 정파의 지도자 이시수를 노론 벽파인 줄 잘못 알고 독살의 공범인 양 서술한다든가, 정조의 와병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복합적 의미로 여러 차례 사용됐던 ‘대점(大漸)’을 단순히 ‘위독하다’라고만 잘못 번역해 정조의 생사 시점을 혼동한 것 등이 그 사례”라고 덧붙였다. 그 결과 <순조실록>의 ‘대행대왕 대점시(大行大王 大漸時)’를 ‘정조가 위독한 상태일 때’로 오역해 정조가 서거하기 전인데도 정순왕후가 서둘러 독살범 심환지를 영의정으로 임명하는 등 불법적으로 인사권을 행사했다고 터무니없이 설명했고, 공범인 정순왕후 혼자 정조의 임종을 지킴으로써 정조 독살을 마무리했고, 이들과 한 패인 이시수는 이를 방조한 것인 양 황당한 주장을 펼치게 된 것이라고 유 교수는 설명했다.
이와 함께 정약용까지도 정조의 독살을 의심했다고 하면서 제시되는 <여유당전서>의 ‘독살설’ 기록은 자료를 거두절미해 왜곡한 경우라고 지적했다.
유 교수는 “정약용은 ‘독살설’이 실의에 빠진 시골 영남 남인에서 의당 나올 수도 있었다는 정황을 이해한 현명한 안핵사에 의해 처벌이 최소화되었다는 점을 제시하면서 그 역시 당시의 칭송에 동조하고 있는 것”이라면서 “그는 정조 서거 당시 조정과 서울 주변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처럼 독살설을 믿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유 교수는 “정조를 독살한 보수적 주자학자들이 세도정치를 함으로써 조선은 다시 ‘주자의 나라’가 됐고, 자멸할 수밖에 없었다는 식의 설명은 역사적 사실과도 다를 뿐더러 일제의 침략을 조선과 조선의 주자학자들이 자초했다는 주자학망국론이 되어 일제 침략을 정당화하는 주장으로 귀결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어 “겉으로는 식민사관 청산을 소리 높이 외쳤지만 돌아서서는 정체성론과 당쟁론, 주자학망국론을 추종하는 모순이 정조 독살설을 주장하는 일각의 역사의식 근저에 깔려있었던 것”이라고 비판했다.
<김진우기자 jw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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