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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프라이즈 펌 : 진중권 대담 전문,"우리 논쟁은 청동기 수준"

글이 짤렸다. 왜일까? 모르겠다. 전문은 아래 링크

http://www.joongprise.com/bbs/view.php?id=best_1&no=2660

 

뭐 그런 익히 주지하는 내용이다. 우리에게는 형식만 있을 뿐 내용이 없다. 단지 민주주의의 형식뿐

 

원문에서 최근 독일 사형제 폐지 논쟁을 죽이는 예로 들었다. 독일에서 누군가 “누가 다른 인간에게 다른 이의 목숨을 뺏을 권리를 줬는가” 하면, “그럼 누가 다른 인간에게 인신을 구속할 권리를 줬는가” 하는 반론이 나온다.

우리 코리아의 경우. 사형제 폐지하자고 하면, “XX야, 니 딸이 그런 일을 당해도 그런 말 할래” 한다. 그 뒤에 봉건적인 처형 방법이 뒤따른다. 능지처참을 해야 한다, 육시를 해야 한다는 등등. 차이가 있다.

좋지 않은 일에는 ‘원인’을 찾기보다는 ‘범인’을 찾고, 좋은 일에는 ‘원인’ 대신 ‘은인’을 찾는다. 이러한 의인법 접근은 청동기시대 대표적 코드이다.

 

 

 

제목 : 진중권 대담 전문,"우리 논쟁은 청동기 수준"
한겨레   2006-08-13 15:10:11, 조회:13, 추천:1
내려받기 진중권_1.jpg ( 46.2 KB ), 받기횟수 : 0

“공적인 글쓰기 더 이상 않겠다”고 선언한 시사평론가 진중권씨 … 군중독재에 환멸, 인터넷을 철학적으로 사유하는 일에 집중할 것

▣ 김창석 기자 kimcs@hani.co.kr


2005년 여름부터 1년 동안 를 진행했던 시사평론가 진중권(43·중앙대 및 카이스트 겸임교수)씨가 최근 “공적인 글쓰기를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8월3일 서울 홍익대 근처의 한 출판사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손석희처럼 하지는 못하겠더라


“나는 썩어가고 있다. 이제 내 자신을 배려해야 한다.” 최근 저서에서 자신의 상태를 이렇게 말했는데 지금도 여전한가. 공적인 글쓰기를 당분간 그만하겠다는 이유는 무엇인가.

= 지금도 디프레션 상태다. 자기의 감정이나 정서를 그동안 잘 모르고 살았던 것 같다. 10년 동안 글과 말을 통해 내 얘기를 했는데 지칠 때도 됐다. 방송일 하면서는 하루 4시간 정도밖에 못 잤다.

대한민국에서 논객을 한다는 게 그렇게 피곤한 일인가."


= 논객은 특정 사안에 대해 팩트를 점검한 뒤에 견해를 세워야 하는데 우리 사회에서는 팩트를 취합하는 과정부터가 쉽지 않다. 보도된 기사를 못 믿는 경우가 많다. 기사를 믿고 논평을 했다가 ‘물먹은’ 적이 종종 있었다. 아침에 특종하고 점심 지나면 오보로 된다. 비스마르크가 “어떤 견해든지 다른 견해와 부딪치기 전까지는 믿지 말라”고 했는데, “어떤 기사이든 논조가 다른 신문을 볼 때까지 그 기사를 믿지 말라”고 해야 할 판이다.

기사의 신뢰성 문제뿐만 아니라 사실(팩트)과 견해를 섞어 쓰는 보도 태도가 일반화한 점도 논점을 형성하는 데 어려움을 줄 것 같은데.

= 그렇다. 사실 기자들이 아무리 팩트만 전달한다고 해도 그 안에는 이미 주관적 견해가 들어가 있다. 그런데 거기에다 견해까지 섞어 쓰는 건 문제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기자들은 상당히 정치적이다. 사람들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고 싶어한다. 기자는 원래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지 간에 판단을 내릴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필수정보를 전달해야 하는데 이런 부분도 빠질 때가 있다.

방송사가 논객을 사회자로 쓴 이유는 논객의 정체성이 도드라져 보였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을 텐데 방송사의 의도를 충족시켜줬다고 보는가.

= 처음 시작할 때와 끝낼 때 내가 준비한 말들을 했다. 그러니까 오히려 인터뷰는 너무 무난하게 하는 것 아니냐는 소리도 나왔다. 그런데 손석희씨처럼 하지는 못하겠더라. 질문할 때 보면 좀 무섭지 않나. (웃음) 꼭 검사가 취조하듯이 하지 않나. 나는 성격상으로도 그렇게 못하겠더라. 그보다는 1년 365일 내내 하루에 하나 이상의 견해를 세운다는 게 정말 힘들었다.

한국에서 논객을 하는 것과 다른 사회에서 논객을 하는 것이 큰 차이가 난다고 생각하나.

= 독일을 비롯해 유럽에서 살아보면서 그들은 다른 자본주의에서 살고 있다고 느꼈다. 훨씬 더 정의로우면서도 자유롭고 효율적이었다. 북유럽은 또 다르다. 그에 비하면 한국은 여전히 ‘섬’이다. 스스로를 남과 비교할 기회가 적은 편이다. 가끔 해외여행 가는 것은 비교의 기회라고 하기 힘들다. 한국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이 보편적인 것도 있지만, 어떤 것은 정말 특수한 것도 있다. 우리는 특정한 부정적인 면도 ‘세상이 다 그럴 거야’라고 치부해버리는 경우가 많다. 삶을 다른 방식으로 조직할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지 못한다. 늘 살아왔던 대로 살아가게 된다. 한국 사회가 보수적이라면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가 외국과 접촉이 적었다는 데 있다. 최근 세사만 봐도 외국과의 접촉이 불행한 결과만을 가져왔다. 마음속의 쇄국주의는 여전하다. 내가 이런 얘기하면 또 “당신이 외국물 얼마나 먹어서 그런 얘기 하느냐”거나 “선진국 잘사는 것 누가 모르냐”고 한다.


‘노빠+박빠=황빠’에 나치를 떠올려


지금까지 대중을 설득해온 당신의 스타일은 성공적이었나.

= 내 글에 대한 반응은 항상 비슷했다. 속 시원해서 좋다거나, 격렬하게 항의하거나. 나는 글을 써도 구술성을 늘 염두에 둔다. 말하듯이 쓰는 것이다. 텍스트 문화가 가지는 비판성과 합리성에 더해 구술적 요소와 놀이 요소를 결합하려고 노력했다.

황우석 사태 때 황우석 지지자들로부터 고초를 당하지 않았나. 지방 강연회에 갔다가 감금까지 당했는데.

= 강연회 때는 이미 논문이 조작됐고, 줄기세포는 없는 것으로 확인된 뒤였기 때문에 오히려 괜찮았다. 상황을 즐길 수 있었다. 이런 일도 다 당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VIP가 되어서 전경들 호위를 받는 호사도 누렸다. 그런데 한창 사건이 진행될 때는 팩트가 없어서 힘들었다. 열린우리당을 비판하면 한나라당 지지자들은 가만히 있고, 한나라당을 비판하면 열린우리당 지지자들은 좋아하는 게 정석인데 이 사건에서는 그야말로 ‘노빠’와 ‘박빠’가 ‘황빠’로 뭉쳐서 한목소리를 냈다. 90%의 압도적 다수였다. 파쇼적, 나치즘적 상황이었다. 군중의 독재를 느꼈다. 정권이 바뀐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느낌이 드니까, 말하고 싶은 생각이 싹 사라졌다.

군중 독재의 원인은 무엇이라고 보나.

= 성찰이 없어서다. 민주주의라는 형식은 있는데 성찰이라는 내용이 없다. 인터넷은 민주주의를 확장시킬 수도 있지만, 군중독재의 도구로 쓰일 수도 있다. 인터넷을 통한 토론과 논쟁이 처음 선보일 때, 그러니까 안티조선 운동이나 노사모 운동 초기에 인터넷 논쟁은 수준이 높았다. 예의를 지켰고, 당파적 입장을 가능한 한 인정했다. 그런데 지금은 ‘담론’은 없고 ‘세론’만 있다. 세론에는 민중의 정서가 정직하게 녹아 있는 반면 정제돼 있지 않다. 그런데 ‘먹물’들은 세론의 영역에 안 들어온다. 대접도 못 받고 함부로 다뤄지니까. 나야 낯짝이 두꺼우니까 잘 견뎠지만, 섬세한 사람들은 못 견딘다. 담론은 사라지고 세론만이 남은 이유다. 그러니까 수준 낮은 얘기가 난무한다. 곰이 왜 나무에 올라갔을까, 노무현 때문에. (웃음) 그런 식이다. 노무현이 뭘 잘못했느냐 하는 식의 진지한 논쟁이 없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논거는 없고 정치적인 목적을 가진 이야기들이 대량 유포된다. 대표적인 게 의인법이다. 좋지 않은 일에는 ‘원인’을 찾기보다는 ‘범인’을 찾고, 좋은 일에는 ‘원인’ 대신 ‘은인’을 찾는다. 청동기시대 코드다.

수준 높은 논쟁은 사회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기도 하는데 한국 사회에는 생산적인 논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인가.

= 구술문화의 영향도 상당히 크다고 본다. 서구는 구텐베르크 혁명 이후 합리론, 경험론 등 문자문화 코드의 전통이 오래됐지만, 우리는 이제 50년이 넘었다. 감정을 억제하고 합리적 토론을 통해 생산적 결론을 내는 문화가 아니다. 그런 상황에서 인터넷이 전면적으로 들어왔다. 인터넷은 문자문화에 비해 감정적이고 정서적이며 친교적이다. 그래서 토론 양태도 다르다. 최근 독일에서 이뤄진 사형제 폐지 논쟁을 봤다. 누군가 “누가 다른 인간에게 다른 이의 목숨을 뺏을 권리를 줬는가” 하면, “그럼 누가 다른 인간에게 인신을 구속할 권리를 줬는가” 하는 반론이 나온다. 우리 경우를 보자. 사형제 폐지하자고 하면, “XX야, 니 딸이 그런 일을 당해도 그런 말 할래” 한다. 그 뒤에 봉건적인 처형 방법이 뒤따른다. 능지처참을 해야 한다, 육시를 해야 한다는 등등. 차이가 있다.


개똥녀, 조지 오웰을 뛰어넘었다


우리 사회의 보수와 진보가 건강하게 양립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이라고 보나.

= 서로가 합의할 수 있는 공공성의 영역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래야 소통할 수 있고 효율성도 얻을 수 있다. 지금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공공성의 영역을 당파성이 장악하고 있다. 진보 역시 패러다임의 변화를 읽어야 한다. 낡은 담론에 머물러 있기보다는 미래를 위한 구체적인 프로젝트를 마련하는 데 힘써야 한다. 여전히 농경사회 언어나 산업혁명 시대의 언어를 써서는 정의로우면서도 경쟁력 있는 사회를 꿈꿀 수 없다.

미디어 미학에 전념하겠다고 했는데.

= 3세대 미디어인 인터넷 등의 변화에 대한 철학적인 사유가 필요하다. 진보의 위기와도 맞닿아 있다. 진보사관이라는 게 텍스트 문화다. 피억압자의 기억을 조직해 더 나은 세계를 후손에 물려주자, 그러기 위해 현재를 희생하자는 논리가 진보사관이다.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에게 시간은 가역적이다. 텔레비전 시간 놓쳐서 못 봤더라도 인터넷 클릭하면 볼 수 있다. 현재중심적이다. 이순신, 주몽 같은 신화적이고 판타지적인 세계가 펼쳐진다. 문자문화보다 더 나아갈 수도 있지만, 후퇴할 수도 있다. ‘개똥녀 사건’을 보라. 조지 오웰 버전을 뛰어넘었다. 빅 브러더가 모두를 감시하는 게 아니라 스몰 브러더가 서로를 감시하는 체제를 보여줬다. 다른 곳에서는 안 일어나는 일이다. 이론적으로 해명할 일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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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 “인터넷 물 흐려져…초기 노사모가 좋았다”

진중권 “인터넷 물 흐려져…초기 노사모가 좋았다”
“정치평론 신뢰 잃어…노빠가 황빠된것, 초동판단 실수”
입력 :2006-07-30 13:22:00   이응탁 (et-lee@dailyseop.com)기자
‘논객’ 진중권은 이제 정치 평론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걸까?

한번 논쟁이 붙으면 치열하게 싸우고야 마는, 그래서 ‘싸움닭’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진중권씨가 “앞으로 공적인 성격의 글쓰기는 하지 못할 것 같다”고 자신의 저서에서 밝혔다.

그는 최근 ‘진중권의 SBS 전망대’를 진행하던 시절 썼던 칼럼들을 묶어 책으로 냈다. 정확히 말하자면 라디오 방송을 진행할 때 썼던 오프닝과 클로징 멘트들이다.

‘첩첩상식’(새움)이란 이 책은 ‘가해자’부터 ‘황우석’까지 161개 키워드로 구성돼있다. 그는 처음 책 발간을 제안 받았을 때 “이미 방송을 통해 흩어진 말들을 책으로 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회의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니 생명력이 짧은 말들에 ‘시간적 지속성’을 더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했다. 그래서 책 서문의 제목이 ‘흩어진 말들의 무덤’이다.

26일 늦은 오후에 서울 신촌의 한 오래된 식당에서 그를 만났다. 맥주에 계란말이를 곁들여 인터뷰를 진행했다.

‘어떻게 지내냐’는 질문에 그는 “비행하는 재미로 살고 있다”고 답했다. 비행(非行)?, 비행(飛行)?

“일주일에 몇 번 화성에 내려가서 비행기를 탄다”고 말한 그는 방송 진행할 때 번 돈으로 자동차 대신 경비행기 한 대를 샀다고 전했다. 그리고 그 경비행기의 이름은 ‘포르코 로소’(Porco Rosso·붉은 돼지)라고 밝혔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만화영화 ‘붉은 돼지’의 그것이다.

‘까칠한’ 오프닝·클로징 멘트 사이의 ‘밋밋한’ 인터뷰…“진행의 공정성과 색깔 사이에 충돌”

▲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지료사진) ⓒ2006 데일리서프라이즈 
지난 1년간의 라디오 방송 진행에 대한 자평을 부탁했다.

“초보자였죠. 경험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논객으로서 색깔을 가지고 진행하는 것과 방송의 공정성 사이에 충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조정하기 힘들었죠.”

그의 방송은 앞뒤의 명확한 색깔을 가진 멘트들에 비해 정작 인터뷰는 다소 ‘밋밋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제가 인터뷰를 좀 해봤는데요, 인터뷰어가 자신의 견해를 가지고 논쟁을 걸면 피곤하더라고요. 전에도 한 인터뷰에서 그래서 ‘지금 내 의견 들으러 온 거냐, 아니면 논쟁하러 온 거냐’며 말한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프닝과 클로징 멘트 자체가 주관적 견해가 들어가기 때문에 인터뷰 자체는 상대가 하는 말을 들어주자는 개념으로 갔습니다.”

그는 ‘밋밋한 인터뷰’에 대해 이같이 해명하며 “판단은 청취자가 하게끔 하는 방식이 마음에 든다”고 덧붙였다.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송 앞뒤에 논평을 넣은 것에 대해서는 “색깔을 드러내는 방법이 그것 밖에 없었다”며 “논객으로서 제일 좋은 것이 칼럼 쓰듯이 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거의 매일 칼럼 쓰듯 멘트를 쓰는 것에 대해 “힘들었다”고 토로하며 “전날 시사를 점검하고 그 가운데 쓸 것을 선택해서 견해를 세우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더라”고 답했다.

특히 그는 ‘글말’인 칼럼과 ‘입말’인 방송 멘트의 차이가 있어서 더욱 쉽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사람이 글을 읽는 것과 말로 듣는 것은 차이가 있는데, 글은 늘 시간을 가지고 읽지만 말은 한번 지나가면 끝이죠. 그래서 난이도에서 더 쉬워져야 하죠. 마음껏 수사학을 발휘할 수도 없고... 또 한편 청취자의 무차별성도 고려해야 합니다. 글 같은 경우에는 글을 찾아 읽는 사람들이 저와 생각을 공유한 사람들인데, 방송은 그렇지가 않거든요. 그래서 어느 말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어느 정도 많은 부분 공유가 돼야 가능합니다.”

도올 김용옥의 막말 사고, “황당하고 아찔했다”… 강정구 교수와 논쟁 “역사관의 충돌”

‘SBS 전망대’는 생방송이다 보니 간간이 방송사고(?)도 있었다. 그 중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 도올 김용옥 씨의 막말 파문이었다. 김 씨는 지난 3월 새만금 사업과 관련 방송에 출연해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영원히 저주받을 사람”이라고 표현해 물의를 일으켰었다.

“황당했죠, 그렇게 해버리니까. 어떻게 수습이 안 되잖아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고요. 그런데 좀 이따가 쪽지가 하나 들어오더라고요. 마지막에 끝날 때 사과 멘트를 날리라고. 그래서 그래야 되는구나 하고 했죠. 정말 황당했습니다.”

진씨는 그날의 상황을 이렇게 전하며 김 씨에 대해선 “퍼포먼스의 성격이 짙다”며 “김용옥 씨 경우는 삶이 반, 연극이 반인 거 같다”고 말했다.

이어 “연출도 잘하는 것 같다”며 “그러나 그것이 대의가 걸려있었기 때문에 나쁜 것은 아니다”고 평했다.

▲ ⓒ2006 데일리서프라이즈 
이외에 허태열 전 한나라당 사무총장과의 일화도 있었다.

지난해 9월 방송 인터뷰 중 진씨는 허 전 사무총장에게 “2000년 총선 때 ‘부산의 자녀들은 아무리 공부를 잘하고 사업 수완이 있어도 이제는 틀렸다. 앞으로 우리 딸들이 비굴하게 남의 눈치나 살피며 종살이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자신할 수 있는가’라며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발언을 했다”고 지적했다.

이에 당황한 허 전 사무총장은 “그것은 시민단체에서도 ‘이것은 허태열 의원의 문제가 아니다’고 해서 낙천·낙선 대상 후보에서 빠졌다”고 답했다. 그러나 허 전 사무총장은 방송 후에도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진씨는 “당시 그것은 사고였다”며 웃으며 답했다.

“작가가 전날 우리만 보는 게시판에 인터뷰 문항을 올려놓습니다. 그러면 그걸 보고 제가 질문을 하는데, 제가 문제의 질문을 추가로 올렸습니다. 그런데 그게 상대방에게는 반영이 되지 않았던 거죠. 전 그게 반영된 줄 알고 질문을 했죠. 그러다보니 그게 돌발질문이 된거죠.”

진씨는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정치인들이 그 정도는 변명을 해내지 않느냐”며 “그 정도 변명을 들어줄려고 가볍게 한 것인데, 상대가 당황을 하더라”고 말했다.

그는 또 하나 기억에 남는 방송 중 일화로 ‘GP 총기 난사 사건’ 때 피해를 입은 병사의 부모와 전화통화를 한 것이라고 답했다.

“그 부모와 통화를 하는데 말을 하지 못하시는 겁니다. 감정이 격해지니까. 거기에 저도 동조가 되고 울먹울먹 목이 메는데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사회자는 멘트를 날려야 하는데, 그게 안되더라고요. 그런게 기억에 남습니다. 가슴이 아프죠.”

진씨는 이외에 강정구 동국대 교수와 논쟁한 일 등도 기억에서 끄집어냈다.

그는 “‘통일전쟁’이 가지는 의미는 평가적 의미와 기술적 의미 2가지가 있다”며 “평가적 의미에서는 통일은 해야 하고 그래서 전쟁은 정당하다는 의미가 있고, 기술적 의미에서는 통일을 하려고 전쟁을 했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강 교수는 이 양자를 섞어놓으면서 배후에 당연히 해야 하는 전쟁이란 전제가 깔린다”고 비판했다.

그는 당시 논쟁이 서로의 역사관이 충돌한 것이라고 평했다.

“황우석 박사 독하더라”…‘추적 60분’과 ‘PD수첩’ 비교 발언 유감 표명 “내 사과 아니다”

진씨는 “방송을 진행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황우석 사태였다”고 책 서문에서 밝힌 바 있다. 그에게 황우석 사태에 대해 묻자 대뜸 “스트레스 많이 받았다”라는 답부터 돌아왔다.

“나중에 보니까 2005년 5월에 벌써 황 박사에 대해서 비판적인 코멘트를 했더라고요. 그게 ‘생명과학과 생명윤리는 같이 가야 한다’는 것이었죠. 나중에 MBC ‘PD수첩’에서 이 문제를 들고 나왔을 때 ‘PD수첩’을 옹호해야 했습니다. 올바른 지적을 했으니까요. 이후 이 문제가 논문 진위를 검증하는데 까지 간다고 들었을 때, 사실 안 믿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PD수첩이 논문까지 검증하려 해서 짜증난다’고 했는데, 그걸 당시 박기영 보좌관의 허위보고한다고 판단하고 논평을 했습니다. ‘사이언스’에 논문까지 통과됐는데, 그걸 검증한다는게 황당하더라고요. 그런데 뉴스에 나오는 걸 보니까, 앞이 깜깜해지더라고요. 이거 잘못하면 다 작살나는구나 싶고 대책이 안서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부터는 PD수첩이 혼자 가야 한다’고 형식논리를 내세워 논평을 냈습니다.”

그는 당시를 이야기하며 사태를 길게 보고 파악할 만한 정보도 없었다면서 상당히 헷갈리는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진씨는 논객이 예언자가 아니기에 드러난 사실을 가지고 논평을 해야 하는데 논문조작 여부를 판단할 ‘팩트’(fact)가 없었다고 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흘러 2005년 12월 15일, 노성일 미즈메디병원 이사장이 “줄기세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폭로를 했다. 진 씨는 “그때 살았다 싶었다”고 털어놓았다.

“황우석 박사 독하더라고요. 전 그때 게임이 끝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몇 달 더 끌지 않았습니까. 그 다음에 한 사람이 죽고. 저는 사람이 착한 사람이다, 나쁜 사람이다는 판단을 하지 않습니다. 그건 하나님만이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그 보도를 접하고 나니까 이 사람 나쁜 사람이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진 씨는 지난 4월 경남 창원에 강연을 하러 갔다가 황우석 지지자들에게 감금을 당했다. 이에 앞서 진씨는 방송에서 “MBC ‘PD수첩’과 KBS ‘추적 60분’ 수준이 차이가 나도 너무나 난다”고 말했다가 이틀 후 방송에서 유감을 표명하기도 했다.

“방송 후 전화가 왔는데 첫 마디에 ‘글을 참 싸가지 없이 쓰셨네요’라고 그러더라고요. 그러면서 고소를 하겠다는 겁니다. 사과를 하라고 하는데 사과를 할 이유가 없더라고요. 그런데 방송에서도 동업자 의식은 있는가 봅니다. ‘그 발언은 그쪽(KBS 추적 60분)에서 들으면 기분이 나빠할 것이다’고 ‘SBS 전망대’팀에서 말해서 ‘그럼 하나 써달라’고 해서 써준 대로 (사과문을) 읽었습니다. 내 사과는 아닙니다.”

지난 4월 감금당했을 때 어땠는지도 물었다.

“그 때는 솔직히 상황을 즐겼습니다. 11월 초부터 12월 초까지는 힘들었고 이후에는 사실 아무리 난리를 쳐도 팩트가 있는데 어떡할거냐는 생각을 했죠. 그 때 전투경찰의 호위를 받아보는 호사(?)도 누려보고……. 강연장에는 한 스님이 들어와 목탁을 치고 있었는데, 그걸 보자니 살바도르 달리도 만들어내지 못할 그런 초현실주의적 상황이 벌어지더라고요.”

그는 이른바 ‘황빠’라고 불리는 사람들에 대해 “아마 종교적 욕구가 강한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 ⓒ2006 데일리서프라이즈 
소위 ‘노빠’와 ‘황빠’가 일정부분 겹치는 것이 국익, 애국심, 국가적 자존감이란 부분에서 겹쳐서 그런가라고 질문을 던졌다.

그는 이에 대해 “‘박빠’(박근혜 지지자)가 ‘황빠’가 된 것도 그런 걸로 설명할 수 있을 거 같은데, 노빠는 그게 아니다”라며 “‘박빠’와 ‘노빠’는 코드가 약간 다른데, 이 사람들은 초동 판단을 잘못했다”고 설명했다.

초동 판단의 실수가 무엇인지를 물었다.

“황우석을 믿어버린 것이죠. 딱 보다가 이에 아니다 싶으면 수정을 해야 하는데, 그게 안된겁니다. 그러다보니 ‘박빠’보다 더한 ‘황빠’가 된 거죠. 코드가 달랐는데, 결과적으로는 코드가 같아졌습니다. 참여정부가 내세운 정책 중에 IT, BT 육성이 있었는데, IT가 진대제라면 BT는 황우석이었죠. 그런데 이게 어그러지니까…….”

그는 “또 하나 문제가 ‘논객’이나 ‘먹물’들의 역할인데, 그 때 누군가가 몰매를 맞아도 ‘이 길로 가면 죽는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었어야 하는데 그게 안됐다”고 말했다.

이어 “(온라인에서) 내부 커뮤니케이션 자체가 잘못됐다”며 “커뮤니케이션 자체가 동질화되다 보니 수정이 안된다”고 꼬집었다.

진씨는 또 “자꾸 그러다 보니 현실을 현실로 인정하지 않고, 음모론과 같이 주관적으로 무엇을 자꾸 만든다”면서 “현실과 동떨어진 자기들만의 판단의 틀을 만들고 주관성의 세계에 스스로 빠졌다”고 비판했다.

“정치평론과 인터넷 문화, 옳은 이야기해도 먹히지 않는 느낌이 든다”

그에게 ‘공적인 글쓰기를 못할 것 같다’고 밝힌 부분에 대해 물었다.

“정치적인 글쓰기, 정치적 공동체(의 일원)로서의 글쓰기를 안 한다는 겁니다. 글쓰기는 거의 10년 가까이 충분히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게 주장한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말하고 나서 또 해야 되고 하는 부분에서 지칩니다. 밀린 작업도 많고요.”

그는 또 “인터넷의 물이 많이 흐려졌다”며 “옳은 이야기를 해도 먹히지 않는 느낌이 든다”고 밝혔다.

그는 “초기 노사모와 안티조선 운동할 때가 인터넷 문화 전성기였다”며 “그 때 인터넷은 토론과 오락의 마당이었고, 즐거웠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그는 정치 평론에 대해서도 “정치 평론이 신뢰를 잃은 것 아니냐”며 ‘카산드라’(Cassandra) 같다는 말을 덧붙였다.

‘카산드라’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예언자로, 태양의 신이자 예언의 신인 아폴로에게 예언능력을 받았지만 이후 아폴로는 그녀가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자 않자 아무도 그녀의 예언을 믿지 않게 만들었다.

그녀는 트로이에 불행이 닥칠 것이라고 예언했지만 아무도 그녀의 말을 귀 기울이지 않았고, 결국 트로이는 그리스군에 의해 함락됐다.

“정치 평론을 하는 사람들이 정치세력에 많이 이용당하는 거 같습니다. 진보든 보수든 자기 입장을 명확히 해야 하는데……. 매체의 입맛에 맞게 쓰고, 매체가 불러주는 대로 쓰는 경우도 많고요. 이런 것이 문제입니다.”

맥주 1병과 계란말이로 시작된 이날 인터뷰는 제육볶음으로 안주가 바뀌고 맥주 몇 병을 더 채우고서야 끝이 났다.

ⓒ 데일리서프라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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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재산 환수 57년만에 재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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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들의 문제는 이땅에서 내 몸뗑이 귀찮은 것 피하고 편리한 것만 찾을 뿐 블란서, 독일 등 세계사적 비교가 안된다는 것

그러니 한국적 민주주의(=유신) 같은 개소리가 나오지

 

 

 

친일파 재산 환수 57년만에 재개
[SBS TV 2006-08-13 21:20]    
- 친일 반민족 행위자 400여명 우선 대상 -



<8뉴스>

<앵커>

지난 49년 반민특위 해체 이후 57년만에 오욕의 역사를 청산하기 위한 작업이 다시 시작됩니다. 친일파들의 재산을 국고로 환수하기 위한 국가 차원의 활동이 오는 18일부터 본격화됩니다.

신승이 기자가 보도합니다.

<기자>

친일재산조사위원회는 앞으로 4년에서 길게는 6년 동안 친일파 재산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와 국고 환수 작업을 벌입니다.

조사위는 을사오적과 정미칠적 등 명백한 친일 반민족 행위자 400여 명의 재산을 국고 환수 우선 대상으로 정했습니다. 

[장완익/'친일재산조사위' 사무국장 : 당연히 몰수됐어야 될 재산에 대해서 오히려 우리 정부가 너무나 늦게 재산권 행사를 하는 것이라고 봐야될 것입니다.]

특정 재산이 일제에 협력한 대가로 취득됐다는 사실이 조사 절차를 통해 확인되면 소유권 이전등기같은 방법으로 해당 재산을 국고에 환수한다는 방침입니다.

9명으로 구성된 위원회는 과반수 출석에 다수결 방식으로 국고 귀속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조사위는 공식 출범에 앞서 대표적 친일파인 이완용과 이재극, 민영휘 후손들의 재산 네건에 대해 본격 조사에 들어갔습니다.

또 송병준 후손의 땅과 지차체에서 의뢰한 서너건의 재산에 대해서도 사전 조사를 벌이고 있습니다.

제헌국회 당시 친일파를 처벌하기 위해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가 만들어졌지만 반민특위는 큰 성과없이 1949년에 해체됐습니다.

하지만 지난해 말 친일파 재산환수법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정부 각부처가 참여하는 조사위가 구성돼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을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습니다. 

신승이 seungyee@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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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icejisung
조선일보의 내일자 제목이 궁금한가?[307] 3349 732 08/13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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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저분한 똥별과 전과자 집단인 전 국방장관 할압지들께

추저분한 이력이 일목요연하게 아주 잘 정리되었다.

 

 

지저분한 똥별과 전과자 집단인 전 국방장관 할압지들께
나라를 기둥을 갉아먹었던 님들이시여!
입력 :2006-08-12 10:10:00   고은광순(한의사)
전 국방장관 할압지들께

2009~2012년 사이에 어느 때라도 전시작전권을 환수해도 상관없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말에 전직 국방장관 할압지들이 모이셨네요. 어이구... 조중동 신문마다 님들의 비장한 모습들이 크게 실렸더먼요.

17명이 노무현 대통령의 견해에 반대하는 성명에 서명을 했고, 모임에는 세 명을 빼고 14명의 전직 장관과 장군들이 참석하셨다고요. 그런데 님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대서특필한 조중동의 호들갑과는 달리 누리꾼들은 님들의 명단을 보고 전과자 명단이라거나 지저분한 똥별이라고 비아냥거리고 있군요. 그게 정말인지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박정희 시대의 장관들]

아니, 폭압적 군사독재정권인 박정희 정권에서 국방장관을 했던 김성은, 정래혁, 유재흥, 서종철, 노재현 할아버지들은 옷 벗은 지 30년~40년이 되었는데 아직도 살아계셨군요.

김성은 할아버지는 11일 서울역 광장의 규탄대회에서 "대한민국은 이미 적화됐지만 주한미군이 있기 때문에 적화통일이 안 되는 것“이라고 하셨네요. 어련하시겠어요. 40여 년 전,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를 따라 아침부터 저녁까지 ‘반공’을 외치며 ‘초전박살, 때려잡자 공산당’을 군부대 담벼락마다 써 놓게 하셨던 분이니 빨간색만 봐도 경기가 날 것이며 ‘박살’이외의 방법은 생각하실 수가 없겠지요.

에그머니나. 일본육사 58기 출신 정래혁 할아버지는 부정축재자로 몰리자 ‘84년, 32억을 자진 헌납하고 은퇴했던 분이라고요. 세상에, 얼마나 쌓아 두셨길래 32억을 선선히 토해놓을 수 있나요? 그 무시무시한 박정희, 전두환 시절에 월급 말고 챙길 수 있는 돈이 그렇게도 많으셨어요?

유재흥 할아버지는 1948년에 시작된 제주도의 4·3 민중봉기를 미군정과 함께 확실하게 진압하셨더군요. 대령이었던 당신의 부대는 1949년 2345명의 '유격대'를 살해 혹은 부상시켰고 1608명의 민간인을 살해했는데 미군이 파악하고 있던 숫자보다도 몇 배나 많은 ‘유격대’를 학살한 것이었습니다. 4·3 민중봉기는 제주도민이 조국의 완전한 해방을 촉구하는 3·1독립운동기념대회를 여는 동안 미군정이 이를 저지하는 과정에서 일어나게 된 것 아니었습니까?

서종철 할아버지는 박정희가 죽을 때까지 대통령을 하겠다고 ‘72년 유신헌법을 만들고, ’74년 긴급조치를 발표하는 등 군사독재가 극악스러워질 때 그의 충복이 되셨군요. 최근 조작된 사건으로 밝혀진 인혁당 사건의 수감자들이 1975년 군법회의에서 사형판결을 받자 전무후무하게도 그 즉시 사형집행명령서에 서명을 해 박정희의 충복노릇을 충실히 하셨더군요.

노재현 할아버지는 박정희 사망 후 일어났던 12·12 반란을 진압하지 않으시고 육군본부 벙커로 달아났다가 나중에 전두환에게 체포된 후 국민에게 총을 쏘아댔던 전두환에게 협조하셨다고요.

[전두환 시대의 장관들]

국민에게 총칼을 휘두르고 정권을 잡았던 전두환의 각료였던 윤성민 할아버지는 육군 1군사령관이었을 당시 광주민주화운동을 외부 불순세력의 치밀한 배후조종을 받아 유언비어로 선동당한 광주시민이 일으킨 것이라 발표한 바 있고, ‘82년 국방장관으로 재임 당시 육군참모총장에게 “문제 사병(학생운동출신을 뜻함)은 전방에 근무하도록 유도하라”고 지시하는 등 그 악명 높은 ‘녹화사업’의 주역이셨다고요?

이기백 할아버지. 1986년, 전두환에 장단을 맞춰주시느라 “ 북이 최대 200억톤의 금강산 댐 물을 방류하는 수공(水攻)작전을 감행하면 핵무기 보다 더 큰 위력을 발휘한다”고 마이크 앞에서 국민들을 향해 설레발을 치셨지요. 국회의사당은 지붕만 물 위에 간신히 나오게 될 거라며 조·중·동도 함께 설레발을 치고... 그래서 당신들이 연출한 희대의 사기극에 속아 순진한 국민들은 716억을 성금으로 냈고, 당신들은 국민의 혈세 1294억을 합하여 평화의 댐이라는 쓸모도 없는 괴물을 만들다 내박쳐 두었습니다. 세상에... 2000억을 쓰레기통에 처박다니요.

[노태우 시대의 장관들]

오자복 할아버지는 국가보안법사수국민대회, 대한민국사수대회, 북한해방대회, 자유와 민주주의 사수를 위한 시국선언 등에서 목청을 높이시지만 당신의 손자들은 한국 국민이기를 포기하고 미국 국적을 받았다면서요.

이상훈 할아버지는 군납과 관련해 수천만 원의 뇌물을 받아 구속되었고,
이종구 할아버지는 율곡사업과 관련해 1억 8000만 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었던 비리 공무원 아니셨나요?

최세창 할아버지는 15년 전에 미군의 전시작통권을 2000년 이내에 이양 받게 될 것이며 그렇더라도 미군은 한반도에 계속 주둔할 것이라 말하셨다면서요. 1979년 12·12 당시 3공수여단장으로 쿠데타에 병력을 동원해서 유죄 확정판결을 받기도 하셨더군요.

[김영삼 시대의 장관들]

이병태, 김동진 할아버지, 모두 12·12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의 충복이셨고,
이양호 할아버지는 무기 로비스트인 린다김에게 마음을 홀딱 빼앗겨 “96년 3월과 7월 R 호텔과 A 호텔에서 두 차례에 걸쳐 린다와 부적절한 관계를 가졌다”고 고백을 하기도 했지만 〈사랑하는 린에게, 맨 처음 Amb. Hotel 커피숍에서 내 눈동자에 못 박힌 우아하고 세련미 있는 중년의 숙녀....〉라고 쓴 연서가 공개되면서 큰 망신을 당하셨지요.

그런데 이를 어쩌나. 린다 김에 홀딱 빠졌던 사람은 그 외에도 금진호, C 전 장관 등이 있어서 “너는 나를 아끼고 사랑하고 있는 사이임이 틀림없다고 믿게 되었다” “산타 바바라 바닷가... 그 추억을 음미하며...안아보고 싶다.” 는 등의 애절한 연서를 앞 다퉈 보내는 동안 국방정책결정과정에 주요한 역할을 하고 있던 당신들은 국민의 혈세로 변변찮은 무기들을 비싼 값에 사들이지 않았습니까? 결국 이양호 할아버지는 대우중공업에서도 1억 5000만 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습니다.

아, 요 며칠 새 조선·중앙·동아가 기를 쓰고 심혈을 기울여 당신들이 전시작전권환수를 반대하는 일거수일투족을 보도하고 있건만, 알고 보니 당신들의 대부분은 네티즌들의 비아냥 섞인 표현대로 지저분한 똥별이고 전과자 집단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무능하고 무력하고 부패한 당신들이 나라의 운명을 좌지우지 해왔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알게 되니 경악스럽습니다.

상관인 독재자를 위해 언제라도 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눌 자세가 되어 있었고,
무기를 사들일 때는 국민의 혈세를 펑펑 쓰면서 뇌물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고,
자주국방을 착실히 준비하기 보다는 미국에 언제라도 빌붙을 각오를 하고 계셨던,
당신들이야말로 나라의 기둥을 갉아먹었던 범죄자들 아니십니까.

아이고. 할아버님들, 인터넷을 달구는 누리꾼들의 반응을 알게 되시면 엄청 망신스럽겠습니다. 그려. 그러게 집안에 가만히 들어앉아 바둑이나 두시면 중간이나 갈 걸...

자, 할아버님들. 그래도 기력이 남아 다른 일이 하고 싶어 좀이 쑤시거들랑 일본의 군사무장과 군비강화를 반대하고, 역사교과서의 왜곡을 반대하는 일본의 좌파들에게 위문편지라도 쓰십시오.

일본의 우파들이 난징학살사건을 부정하고, 역사교과서 왜곡에 앞장서며, 군비를 증강시키고, 평화헌법을 개정하여 명실상부한 군사대국으로 나서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을 때, 일본의 좌파(당신들 표현으로 빨갱이)들은 일본의 군사무장을 금지해 놓은 평화헌법은 보물과 같은 거라며 우파들의 준동을 제지하려 안간 힘을 쓰고 있더군요.

좌파라면 살이 떨리신다구요? 그럼 린다김이나 난다김에게 연서라도 다시 끄적여 보시던가요.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강아지에게 애정을 쏟으며 공원산책을 즐기시면 5년은 더 사실 수가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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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대통령 인사 '정략코드'가 문제다&quot;

노대통령 인사 '정략코드'가 문제다"
노회찬, 대통령 인사 비판 "민주노동당 논평 신중했어야"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은 "노무현식 인사정책에 대한 불신이 누적됐기 때문에 문재인 전 수석에 대한 반대 여론이 높게 나타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노 의원은 4일 <레디앙>과의 인터뷰에서 "'코드인사가 뭐가 문제냐'고 하는데, 말 자체는 맞는 말이지만 맥락을 봐야 한다"면서 이 같이 말했다.

노 의원은 "노대통령은 총선에서 떨어진 사람을 장관 자리에 앉히고, 그 사람을 다시 지방선거에 내보냈다. 김근태 의장, 정동영 전 의장도 당내 대선주자 관리라는 낮은 수준의 정략적 목적을 위해 입각시켰다."면서 "해당 업무에 가장 적합한 사람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장관 자리를 다른 정치적 목적으로 활용했다"고 노대통령의 인사 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노 의원은 "(코드인사에 대한 비판은) 무원칙하고 정략적인 인사정책에 대한 불신이 누적된 것"이라며 "이런 것들의 연장선상에서 문 전 수석에 대한 반대 여론을 봐야 한다"고 말했다.

노 의원은 "지금까지 (정책 코드가 아니라) 정략 코드 인사가 많았고, 이에 대한 불만이 코드인사 반대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그런 점에서 어제 우리 당 대변인의 논평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민주노동당 박용진 대변인은 전날 논평에서 "자신과 생각과 뜻이 맞는 사람을 인사하는 것은 당연한 처사이자 임명권자의 권한"이라며 "법무부장관 임명을 둘러싸고 코드인사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업무 적합성을 놓고 임명의 타당성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고 정치권의 코드인사 비판론을 비판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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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대통령이 처한 '지독한 패러독스'

노 대통령이 처한 '지독한 패러독스'
[取중眞담] 교육부총리는 6번 교체, 조선일보 기자와는 임기 함께 하나
텍스트만보기   김당(dangk) 기자   
▲ 노 대통령은 지금 청와대가 취재를 거부한 언론사의 출입기자와는 5년 '임기'를 함께 하고, 5년 임기를 함께 하겠다던 교육부총리는 최소한 6명째를 임명해야 하는 지독한 패러독스에 놓여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교육부와 환경부 그리고 경찰청 등 정부 부처들과 공동 주최해온 상을 연달아 철회당한 <조선일보>의 분위기는 사뭇 비장해 보인다.

특히 경찰청이 <조선일보>와 함께 공동 주최해온 40년 역사의 청룡봉사상에 대한 철회 방침을 통보한 1일 광화문 정부중앙청사 등 관가에서는 <조선일보>가 휴가를 간 기자들까지도 불러들이는 복귀령을 내리는 등 '전면전'을 준비중이라는 얘기가 돌았다.

이와 관련 <조선일보> 측은 "낭설"이라고 일축했다. 다만 <조선일보>로서는 이 문제가 확대되거나, 비화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조선일보>는 기사와 사설말고는 이번 사건과 관련해 어떤 입장도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다.

사실 언론사가 정부와 공동으로 주최해온 시상에서 '파트너'인 정부가 손을 뗀다고 해서 언론사가 이를 '강제'할 방법은 없다. 또 <조선일보> 내부의 일부 분위기에서 감지되는 것처럼 정부가 공동 주최에서 빠진다고 해서 언론사가 당장 무슨 위기에 빠진다거나 야단법석을 떨 일도 아니다.

조선일보, "휴가 간 기자 복귀령은 낭설"

또 김대중 정부 시절의 언론사 세무조사나 참여정부 들어 추진된 신문법, 언론피해구제법 등과 비교하면 공동 주최 상 철회는 '새발의 피'다. 이 신문도 '옹졸한 정권 옹졸한 사람'이란 제목의 2일자 사설에서 저간의 '사정'을 이렇게 호소했다.

"조선일보는 이 정권 출범 이래 기사와 논평에 대한 집단적 소송을 비롯, 독자에게 신문을 배달하는 지국에 대한 지속적 감시와 사찰, 광고 수주 등 신문 제작의 전 부문에서 권력의 압박을 받아왔다. 권력의 강압이 심해질수록 독자의 성원 역시 강해졌던 게 조선일보가 지나온 3년 반 세월이었다."

그러나 <조선일보> 측도 권력과 언론의 관계에 비춰서는 언론 입장에서 이번 사안 자체가 갖고 있는 의미는 적지 않다고 보는 것 같다. 공동 주최 철회를 '신호탄'으로 '전방위 장기전'이 펼쳐칠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선일보>의 '계륵 대통령' 보도가 나간 날 이병완 대통령 비서실장은 <조선일보>에 전화를 걸어 "정면 대응하겠다"고 통고했고, 이어 정태호 청와대 대변인은 <조선일보>에 대한 취재 거부와 함께 "앞으로도 지속적 장기적으로 대응하겠다"고 대응 방침을 발표한 바 있다.

청와대에서는 '한 번 붙들면 뿌리를 뽑는' 노무현 대통령의 스타일로 볼 때 이것은 시작일 뿐이라고 예측하는 참모들이 적지 않다. <조선일보> 측도 청와대가 그 연장선 상에서 이번 일을 벌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그래서 '정중동'이다.

▲ 서울 태평로 코리아나호텔 뒷편에 있는 조선일보 사옥
ⓒ 오마이뉴스 권우성

'계륵 대통령'과 '약탈정부'

이번 사건은 '김병준 죽이기'의 와중에 나온 '계륵 대통령' 칼럼이 사단이 되었지만, 누적된 감정이 분출될 것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감정적 대응'으로 비치는 청와대의 '즉자적 반응'은 이번 기회에 다잡지 않으면 임기의 마지막 1년 반을 '식물인간'으로 지낼 수밖에 없다는 절박감을 반영한 것이다.

<조선일보>의 '계륵 대통령'과 <동아일보>의 '약탈정부' 기사에 대한 청와대의 1차 선전포고는 조선·동아에 대한 대통령비서실의 취재협조 거부로 나타났다.

<조선일보>의 청와대 출입기자는 노 대통령을 후보 시절부터 마크한 청와대 출입기자 중에서 현재까지 남아 있는 유일한 기자이다. 그런데 이 기자는 청와대 출입기자 중에서 유일하게 노 대통령과 '임기'를 함께 할 것으로 예상된다.

노 대통령은 2003년 2월 국민들 앞에 참여정부 조각명단을 발표하면서 "저와 임기를 함께 할 분들"이라고 소개했다. 그런데 임기의 3년 반이 지난 오늘, 김병준 부총리의 자진 사퇴로 자신과 임기를 함께 할 것이라고 공언했던 교육부 장관마저 6번째 장관을 골라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오늘 사퇴한 김 부총리는 참여정부 들어 이기준 전 교육부총리에 이어 두 번째 최단명 장관으로 기록됐다. 다른 부처도 아닌 교육부총리에서만 최단명 1, 2위를 기록한 셈이다. 노 대통령으로서는 '김병준 구하기'의 명분과 실리를 모두 잃게 되었다.

노 대통령은 지금 청와대가 취재를 거부한 언론사의 출입기자와는 5년 '임기'를 함께 하고, 5년 임기를 함께 하겠다던 교육부총리는 최소한 6명째를 임명해야 하는 지독한 패러독스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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