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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릭스> 3부작 메가토크 [5] - 진중권이 말한다

 

 

 

매트릭스> 3부작 메가토크 [5] - 진중권이 말한다

글 : 진중권 (문화평론가) | 2003.11.14
 

매트릭스의 철학,무엇을 말했는가

철학하는 블록버스터의 철학하기

“어떤 인간이 사악한 과학자에게 수술을 받았다. 그 사람의 두뇌가 육체에서 분리되어 두뇌를 계속 살아 움직이게 해줄 영양분이 가득 담긴 통 속에 옮겨졌다. 신경조직은 그대로 초과학적 컴퓨터에 연결되어 (…) 모든 것이 완벽히 정상적인 듯이 보이는 환각을 일으키도록 한다고 하자. 사람들, 사물들, 하늘 등등이 모두 있어 보이지만 그 사람이 경험하는 모든 것은 컴퓨터로부터 신경세포에 이어지는 전자자극의 결과다. (…) 그 사악한 과학자는 여러 가지로 프로그램을 변형시킴으로써 그 사람으로 하여금 과학자가 원하는 어떠한 상황이나 상태일지라도 ‘경험’하도록 할 수 있다.”(힐러리 파트남, <이성, 진리, 역사>)

실재론과 관념론

<매트릭스> 1편에서 거대한 수조 속에서 배양되는 인간 클론들의 충격적인 영상을 보고, 곧바로 미국 철학자 파트남의 사유실험이 머리에 떠올랐다. 이 “과학적 공상”은 “외부세계의 존재에 관한 회의론이라는 고전적인 문제”를 새로이 제기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하나의 두뇌로는 성에 차지 않았던지 그는 곧 이 운명을 전 인류에 지워 “모든 인간이 통 속에 들어 있는 두뇌라고 상상”하더니, 이어서 자기가 묻고자 했던 그 질문을 던진다. “정말로 우리가 통 속에 들어 있는 두뇌라고 한다면 그와 같은 사실을 우리가 말하거나 생각할 수 있는가?”

대답은 ‘아니오’이다. 이 물음 자체가 모순, 즉 “스스로 논파하는 가정”에 입각해 있다는 것이다. 내 견해를 묻는다면, 나 역시 파트남처럼 ‘아니오’라고 대답할 게다. 세계 속에서 특정 사물의 존재를 의심할 수는 있으나 세계 전체를 의심할 수는 없다. ‘의심’의 문법은 ‘믿음’이라는 낱말의 문법 위에 서 있다. 모든 것을 의심한다면 생각 또한 못하게 될 것이고, 그 결과 의심이라는 것도 할 수 없게 된다. 푸른 하늘과 빛나는 햇살, 새들의 지저귐과 들꽃의 아름다움을 맘껏 즐기라. 데카르트처럼 “방법적”으로만 회의를 하든, 아니면 그보다 더 진지하게 회의를 하든, 세계 전체를 회의하는 것은 철학적 난센스다.

팬텀과 매트릭스

‘매트릭스’라는 표현을 처음 사용한 이는 미디어 철학자 귄터 안더스로 안다. 하이데거의 제자였던 이 유대인 비평가는 잠깐 한나 아렌트의 남편 노릇도 했는데, 훗날 그의 아내는 “그의 대책없는 페시미즘(염세주의)이 견딜 수 없어서” 그와 헤어졌노라고 술회했다. 아내를 질리게 한 안더스의 비관주의는 대중매체가 만들어내는 미래에 대해서도 매우 우울한 전망을 내놓는다. 이 현대판 묵시론에는 인간이 만든 도구와 그것에 대한 인간의 통제능력 사이에 점점 벌어지는 ‘격차’(Diskrepanz)를 걱정하는 하이데거의 우려가 깔려 있다. 이 철학적 우려는 오래전부터 SF영화를 위한 풍부한 상상력의 원천이었다.

안더스에 따르면 대중매체는 새로운 존재층을 만들어낸다. 가령 안방의 텔레비전 속에서 쌍둥이빌딩이 실시간으로 불탈 때, 그 영상은 ‘가짜’ 하기도 뭐하고, ‘진짜’라 부를 수도 없다. 이렇게 가상도, 현실도 아닌 이 제3의 존재층을 안더스는 ‘팬텀’(환영)이라 부른다. 실제로 대중매체가 등장한 이래로 우리의 세계는 점점 더 관념적인 팬텀으로 변해가고 있다. 가령 미국에 가보지 못한 나의 머리 속에서 미국이라는 나라는 100% 사진이나 영화, 혹은 텔레비전 영상, 즉 내가 아닌 남이 본 영상들로 짜여져 있다.

‘팬텀’을 재료로 세계를 짜는 원리가 바로 ‘매트릭스’다. 철학자 칸트에게 시간과 공간이 주관의 선험적 형식인 것처럼, 대중매체는 세계를 세계로 제시할 때 ‘매트릭스’라는 선험적인 틀을 사용한다. 가령 <조선일보>를 생각해보라. 노무현 대통령이 말을 아끼면, “대통령, 꿀 먹은 벙어리인가”, 대통령이 말을 흐리면, “대통령 입장을 확실히 하라”, 대통령이 입장을 확실히 밝히면, “대통령, 입이 헤프다”. 이렇게 세계는 미리 짜여진 선험적인 틀에 따라 우리에게 제시된다.

사건은 원본의 형태로는 더이상 ‘사건’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보도라는 형태로 복제가 될 때 비로소 사건은 ‘사건’으로 인정받는다. 이렇게 모든 것이 원본이 아니라 외려 복제의 형태로서 사회적으로 더 중요해질 때, 현실은 팬텀과 매트릭스의 가상현실에 자리를 내주고 점차 사라져간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누가 짠 것인가? 이 세계는 과연 누구의 표상인가? 오래전에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나의 꿈이 너희의 표상이다.” 누굴까? 이 말을 한 매트릭스의 창조주는 히틀러다.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

어디선가 주인공 네오는 해킹 프로그램을 감추려고 서가에서 책을 하나 꺼내든다. 영화의 원작자들이 성경처럼 여긴다고 하는 보드리야르의 저서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이다. ‘시뮬라크르’란 ‘원본보다 더 실재적인 복제’를, ‘시뮬라시옹’이란 그런 복제들로 이루어진 세계를 가리킨다. 그렇게 놓고 보면 이 개념들이 실은 안더스의 ‘팬텀과 매트릭스’를 인터넷 버전으로 번안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원래 자기 사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이에 대해 함구하는 게 철학자들의 못된 버릇인 모양이다.

‘가상’에는 늘 인식론적 문제가 따른다. 현실의 모습과 일치하면 그것은 ‘참’이요, 일치하지 않으면 ‘거짓’이다. ‘현실’이 아직 펄펄하게 살아 있을 때만 해도 조작은 개별적인 사실의 날조를 통해 이루어졌다. 하지만 ‘현실’의 개념 자체가 위험에 빠진 시대에는 사정이 달라진다. 조작은 개별 사실이 아니라 아예 세계 전체를 날조하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오늘날의 조작은 ‘시뮬라시옹’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가상현실을 만들어 유지하는 거시적 규모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돌발사태와 저지전략

가령 워터게이트 사건을 보자. 이는 예기치 못한 우연이 하마터면 깨끗한 이미지로 포장된 미국 정치의 추악함을 폭로할 뻔했다. 그러나 시뮬라시옹의 관리자들은 이 돌발사태를 성공적으로 저지했다. 이 놀라운 조작의 비밀은 권력의 본질을 보여주는 필연적 사건을 한갓 우연적인 ‘스캔들’로 만들어 제시한 데에 있다. 더러운 것은 권력 자체가 아니라, 닉슨이라는 한 개인의 도덕성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에게 이 사건은 외려 ‘대통령도 잘못 하면 처벌하는’ 민주주의의 위대한 승리로 기억된다. 얼마나 완벽한가?

‘시뮬라시옹’을 관리하는 자들의 골칫거리는, 미리 입력하지 않은 돌발사태가 가상의 세계로 치고 들어와 현실의 실재성을 주장하는 것. 현실이 자기 주장을 하면 가상의 가상성은 폭로된다. 관리자들은 이를 저지해야 한다. 1편의 시나리오는 이 ‘저지전략’의 포맷을 따른다. 저지되어야 할 ‘돌발사태’는 네오처럼 미리 입력된 프로그램을 거스르는 자들. 이들은 제거되어야 할 ‘버그’다. ‘버그’는 프로그램의 작동을 멈춤으로써 그 속에 몰입해 있던 이를 돌연 바깥의 현실로 끄집어낸다. 버그를 잡아내는 프로그래머처럼 스미스 일당은 네오와 그의 친구들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기계들의 도시로 향하는 네오의 모습은 예수의 모습과 다름없다. 네오는 시온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전쟁이 끝난 뒤 모피어스는 전쟁의 끝을 선포한다. 이는 결국 <매트릭스>가 가진 기독교적 세계관을 보여준다.

결정론과 자유의지

이때만 해도 아직 가상과 현실의 구별이 존재했다. 선택은 기껏해야 빨간 약과 파란 약 중 하나를 고르는 문제였다. 인간을 구하려고 네오는 행복한 가상을 포기하고 현실의 비참함을 받아들인다. 2편에서는 이 선택마저 미리 입력된 프로그램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로써 1편의 소박한 ‘해방’의 서사는 흔들린다. 만약 네오의 선택마저 미리 입력된 것이라면? 그리하여 매트릭스 밖의 현실도 또 하나의 매트릭스라면? 이제 그것은 ‘무엇을 선택하느냐’의 윤리학적 문제가 아니라, ‘도대체 선택이란 걸 할 수 있느냐’의 존재론적 문제가 된다. 여기서 제기되는 것은 ‘결정론과 자유의지의 대립’이라는 고전적인 물음이다.

’라플라스의 악마.’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입자들의 위치와 운동량을 입력할 수 있는 무한한 용량의 두뇌. 이런 슈퍼컴퓨터가 있다면 우주의 진행을 남김없이 예측할 수 있으리라는 것. 그것이 근대 자연과학의 인식이상이었다. 이런 관념에 따르면 우연은 아직 인식되지 않은 필연일 뿐이며, 나의 자유의지는 내가 아직 의식하지 못하는 타인의 결정에 불과하다. 매트릭스의 창조주는 ‘라플라스의 악마’다. 2편에서는 이 악마를 대변하는 목소리들이 강박적으로 “자유의지란 피지배자의 환상에 불과하다”는 대사를 반복한다.

정해진 프로그램에 따라 시온은 이미 다섯번 멸망했고, 네오 역시 여섯번 태어났다. 우주는 유전하고, 만물은 윤회한다. 안더스의 논문 제목은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패러디한 것. 그가 말하는 ‘표상의 세계’를 불교에서는 ‘사바세계’라 부른다. 니체의 ‘영겁회귀’에서도 불교적 기원을 추측할 수 있을 게다. 현각 스님의 해석에 따르면 불교에서는 “새로운 우주가 나타날 때마다 새로운 부처”가 나타나는 바, 석가모니는 “고해의 매트릭스인 이 우주에 나타난 여섯 번째 부처”라고 한다.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부처의 길이 어떤 의미에서는 ‘매트릭스 탈출하기’가 되는 셈이다.

매트릭스 벗기

슈퍼맨이 되어 하늘을 나는 네오를 보는 괴로움 속에서도 2편을 참아줄 수 있었던 것은, 그 안에 철학적 충격을 강화하는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그 충격은 매트릭스를 교란시키는 네오라는 ‘버그’마저도 매트릭스의 특정한 필요에 따라 미리 입력된 존재로 상정된 데에서 비롯된다. 1편의 철학적 패러다임은 가상과 현실의 구별 위에 서 있는 플라톤적 매트릭스다. 하지만 리로디드된 2편의 패러다임은 가상이 아닌 현실 자체도 하나의 매트릭스, 그것도 새로이 생성되어 소멸하기를 영원히 반복하는 니체적 매트릭스다.

합리적으로 관리되는 매트릭스의 필연에서 빠져나오게 해주는 것은 계산되지 않은 우연, 즉 믿음, 소망, 사랑 같은 비합리적 동인에서 비롯된 행위들이다. 2편에서 네오는 예정된 대로 시온을 구하러 가는 대신에 돌연 위험에 빠진 트리니티에게로 간다. 3편에서 네오는 스미스의 냉철한 합리성 앞에서 인류에 대한 “사랑”을 설교하고, 또 그가 구원해줄 인류들은 네오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을 토로한다. 이 믿음은 그야말로 비합리적인 믿음, 즉 ‘근거가 없는 믿음이야말로 진정한 믿음’이라는 중세적 믿음이다.

이 우발성의 개입에, 합리적 결정론의 화신 스미스는 히스테리 반응을 보인다. “내가 올 것을 미리 알았지? 그런데 왜 피하지 않은 거지?” 쿠키를 집어던지며, “내가 집어던질 것을 미리 알았지? 그런데 뭐 하러 구운 거야?” 하지만 스미스를 당혹하게 만든 이 돌발사태도 혹시 미리 예정된 게 아닐까? 결말 부분에 비슷한 질문이 반복된다. 매트릭스의 과학자가 오라클에게 “이렇게 될 줄 미리 알았지?”라고 묻자, 오라클은 가볍게 부정을 하며 입가에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띄운다. 이로써 대답은 슬쩍 유예된다.

종교와 철학

3편의 분위기는 철저하게 기독교적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전형적인 십자가 책형의 모티브를 따르고 있다. 네오는 예수 그리스도가 된다. 스미스는 신에 의해 창조되었으나 그에게 반기를 든 사탄의 역할을 한다. 네오와 스미스가 3편에 걸쳐 벌이는 결투는 마치 광야에서 벌어진 사탄과 예수의 세 차례의 대결을 연상시킨다. 몸에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죽음을 극복한 예수처럼, 네오는 몸 속에 스미스를 받아들임으로써 스미스를 사라지게 한다. 순간 묵시록에서 예언한 아마겟돈의 결전은 멈추고, 네오의 사도 요한이 군중 앞에서 인류가 구원받았음을 외친다. 기쁜 소리, 복음이다. 할렐루야, 성령 충만한 은혜로운 시간이다.

성가족의 성스런 대화(웅덩이에 쓰러진 네오의 얼굴에서 언뜻 오라클을 본 것 같다. 제대로 본 것이라면 이는 수육(受肉)의 드라마, 즉 인류를 구원하러 인간의 몸이 되어 내려온 신의 얘기가 된다). 매트릭스의 창조주에게 오라클이 묻는다. “이제 저들을 어떻게 할 거죠?” “이제 저들에게도 자유를 줘야지.” 유일신교의 승리다. 이집트 당국은 다시 이 영화를 허용하라. 하지만 이렇게 끝낼 수는 없는 일. 창조주는 “이 평화가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 것 같냐”고 묻고, 거기에 오라클은 “가능한 한 오래”라고 대답한다. 이로써 이 평화가 궁극적인 것은 아님이 슬쩍 암시된다. 기독교사관의 직선은 다시 불교사관의 원환과 합류한다.

포스트모던

이 절충주의가 이른바 ‘포스트모던’의 일반적 특징이다. 영화 <매트릭스>는 온갖 철학과 온갖 종교에서 따온 인용들로 가득 차 있다. 이를 ‘혼성모방’이라고 하는데, ‘포스트모던’ 계열의 작품에 종종 사용되는 기법이다. 나아가 현대의 최첨단 기술이 신화나 신학 같은 고대적 모티브과 모순적 결합을 이룬다든지, 가장 대중적인 오락에 매우 난해한 지적 유희를 도입하여 대중과 엘리트를 가르는 구별을 내파(implosion)하는 것도 포스트모던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 매트릭스 속의 ‘키치’를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키치’는 포스트모던에 본질적으로 속한다.

끝없이 자기 복제를 하는 스미스는 자본주의의 이미지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유일물의 제작이 아니라 동일한 ‘코드’에 따라 수천, 수만개의 동일자를 복제하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보드리야르는 현대사회를 동일자를 무한복제하는 암세포에 비유한 바 있다. 상품만이 아니라 자본주의는 그것을 생산하는 인간들마저도 획일화한다. 현대사회는 인간들을 다양하게 획일적으로 만들고, 이 매트릭스 안의 인간 시뮬라크르들은 남이 정해준 인생의 목표에 따라 남의 삶을 살아가며 자본의 확대재생산을 위한 역사적 사명을 다하다가 죽는다. <매트릭스>는 이런 현대사회의 영화적 반영이다.

아이러니와 몽타주

벗어날 길은 없을까? 포스트모던은 계몽의 서사와 해방의 수사를 비웃는다. 영화 속에서도 매트릭스를 벗어나려는 네오와 그의 동료들의 노력은 스미스나 메로빈지언에게 비웃음만 사게 된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게다가 대중들은, 적어도 영화를 보러 온 순간만큼은, 아직도 구원의 복음과 그것의 세속적인 형태인 해방의 서사를 보고 싶어한다. 3편의 시나리오가 진부한 기독교적 대속의 서사로 귀결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리라. 이런 점에서 포스트모던은 모던의 엘리트주의와 구별된다.

해방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해방의 수사는 벌써 낡은 것이 되었다. 이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가끔 ‘매트릭스’ 안에 갇혀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른바 ‘전투적 글쓰기’를 한다고 하나, 어쩌면 그 전투도 미리 체제의 프로그머에 의해 입력이 되어, 대중에게 값싼 카타르시스를 제공해줌으로써 이 현실을 견딜 수 있게 하는 역할만 하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이제 헛된 저항을 포기해야 하는 걸까? 해방의 뜨거운 열정과 순응의 차가운 지혜를 종합할 수는 없다. 영화의 결말처럼 다만 절충이 있을 뿐이다.

절충을 피하는 방법도 있다. 가령 네오가 스미스가 되고, 스미스가 네오가 되는 것처럼 ‘아이러니’를 실천하는 것이다. 이는 현대판 낭만주의자들의 방법이다. 아니면, 두개의 생각을 부싯돌처럼 충돌시켜 거기서 얻어지는 불꽃을 보는 것이다. 이것은 삶의 몽타주 예술이리라. 구원은 구세주에 대한 믿음에 있는 게 아니다. 스스로 구세주가 되는 데에 있는 것도 아니다. 영화 속의 대사처럼 구원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너 자신뿐이다. 하긴, 촌스런 구원의 수사학을 포기하고도 여전히 구원을 얘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뿐이 아니겠는가?

<매트릭스> 3부작 메가토크 [5] - 진중권이 말한다 1/5
<매트릭스> 3부작 메가토크 [4] - 오시이 마모루가 말한다 2/5
<매트릭스> 3부작 메가토크 [3] - 듀나가 말한다 3/5
<매트릭스> 3부작 메가토크 [2] - 류승완이 말한다 4/5
<매트릭스> 3부작 메가토크 [1] 5/5
글 : 진중권 (문화평론가)
 
 
매트릭스
매트릭스 2 - 리로디드
매트릭스 3 - 레볼루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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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릭스> 3부작 메가토크 [1] No. 427 2003-11-14
<매트릭스> 3부작 메가토크 [2] - 류승완이 말한다 No. 427 2003-11-14
<매트릭스> 3부작 메가토크 [3] - 듀나가 말한다 No. 427 2003-11-14
<매트릭스> 3부작 메가토크 [4] - 오시이 마모루가 말한다 No. 427 2003-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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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물가 과연 역전되었나? 2 - 소득과 집세에 따라서

 

 

1.
며칠전 한일 물가 정말 역전되었나1 - 교통비를 중심으로 를 올렸더니 댓글이 150개를 육박했다. 의견은 크게 두가지로 나뉘었다. 일본에 거주하시는 분들은 대체적으로 공감하는 상황이었고, 한국에서 고생(?)하시는 분들은 말도 안된다, 실제 수입이 2.5배에서 3배인데, 어떻게 물가를 단순비교하냐는 것이 주를 이뤘다. (근데 내용과 별개로 다짜고짜 반말에다가 욕하는 분들은 뭐하는 분들인지...)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아예 한일 년간수입 자체를 비교해보기로 한다. 일본 소득이 한국보다 2-3배이면 일본 교통비가 당연한 거고, 아니면 한국이 비싼 것일테니.



2. 우선 한국 근로자 평균 연봉에 대해서
   블로거 기자 리장님께서 무료일간지를 보시고 정리를 해주셨다.

   http://savenature.tistory.com/104
 
  한국 근로자 평균 연봉은 2006년 현재 2780만원이다.
 
  그럼 일본 근로자 평균 연봉은 얼마일까.

  일본통계청이 2007년 1월 발표한 데이터를 살펴보면 437만엔
 (2005년 현재 - 그 이후 아직 발표되지 않았음)이다.
 (일본어 기사 원문을 보려면 -> 여기로)

3. 자 단순히 통계 데이타만 놓고 따져보자.
   일본인들의 수입이 한국의 두배인가?

   한화 대 엔화 환율을 단순히 1:10으로 놓고 봐도 2780 만원 대 4370만원이다. 일본 직장인들의 수입이 한국 직장인의 두배가 되려면 5560만원은 되야 한다.
     
   그런데 현재 환율로 따져보면 어떨까. 1:8을 적용시키더라도  3496만원 정도다.
   오늘 환율은 현재 1:7.5 엔화 약세를 감안하더라도 한화로는 3277만원이 된다.

   물가 비싼 일본이 한국보다 벌어들이는 돈은 겨우 500만원이 더 안된다는 결론이다.


4. 이 정도 수입에 일본 물가는 어떨까.
    현재 교통비는 앞에서 언급했고, 식사를 놓고 봅시다.

    일본인들이 흔히 먹는 라면은 400 - 500엔(그러나 라면만 딸랑 나온다는 거)
    그리고, 돈부리(덮밥)도 밥만 딸랑해서 400 - 600엔 정도 한다.
    돈까스는 좀 먹으려면 최하 700엔은 줘야한다.
    한국처럼 반찬 풍족하게 놓고 먹으려면 1000엔은 넘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진> 일본 라면 400엔 정도 하는 가격인데, 이게 다다. 그 외 아무것도 안나온다.

  사실 싼 식사만 놓고 보면, 한국과 일본이 비슷해보인다. 오히려 일본이 더 싸 보인다.
 
  그러나, 2007년 3월 현재 '일본 농림중앙금고'에 의하면  일본인들이 점심값으로 평균 지불하는 금액은 평균 600엔으로 조사되었다. 언젠가 일본 신문에 500엔짜리 도시락 중에서 뭐를 사먹을까 하는 고민을 하는 직장인들의 기사가 실린 적이 있다.
 600엔이면 한화로 4500원인 셈이다. 돈 많이 버는(?) 일본인들이 왜 이렇게 점심값을 줄이고 사는 것일까. 일본음식 드셔본 사람은 아시겠지만 반찬 같은거 500엔대에서는 도시락 말고 일반 식당에서는 생강과 짠지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건 일본의 살인적인 주거비 때문이다. 물론 한국도 부동산이 폭등해서 강남의 웬만한 아파트들이 5억 10억 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 되었다. 그렇지만 한국에는 전세가 있다. 어떤 분은 이런 댓글을 단 적이 있다.

    '너도 한번 전세 살아봐라. 그러면 월급보다 더 빨리 오르는 집값 때문에 속터진다'
   
 일본은 현재 버블이 붕괴된 후 집값이 폭락했다가 다시 서서히 오르고 있는 상황이지만, 한국과 일본의 가장 큰 차이라면 전세의 유무라고 할 수 있다.

   내 친구 한명이 이번에 늦깎이 장가를 가는데 6000만원이 서울 변두리 전세를 얻는 최하한선이라고 한다.(방 두개에 18-20평) 그렇다면 일본은 같은 크기 혹은 그 엇비슷한 크기로 얼마에 구할 수 있을까. 도쿄 변두리에 방두개 13평 정도를 얻으려면 최소 보증금 20만엔에 월세 10만엔에서 13만엔은 주어야 한다. (독신자용 원룸은 제외.)

  아는 사람에게 물었다.

  당신이 이제 새로 인생을 시작하는 시기에 보증금으로 들어가는 돈은 적지만 월 100만원에서 130만원 들어가는 집에 살고 싶냐, 아니면 6000만원짜리 전세를 들어가고 싶냐 라고.

  다들 당근 전세가 낫다고 한다.

  상식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결혼전에 열심히 돈을 모으거나, 아니면 대출, 부모님께 도움을 받아서 다달이 없어지는 월세는 안내고 싶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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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도심의 경우 월세는 더더욱 올라간다. 15평 정도면 15만엔은 거뜬히 넘긴다. 신쥬쿠 도청차에서 바라본 도쿄

5. 사실, 일본 직장인들이 500엔짜리 도시락에 목숨 거는 이유도, 퇴근후 술한잔으로 끝내고 집에 와서 캔맥주를 사 마시는 것도 다 살인적인 주거비 때문이다. 이를테면 월세가 아니라 론을 끼고 자기집을 마련한 경우도 30년을 거쳐서 월세처럼 갚아야한다. 따라서 일본인들은 집을 살때 자기 수입 대비 다달이 들어가는 월세와 비교해서 집을 살지 말지를 고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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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에서 교통비와 주거비를 빼면 식비, 의복비, 교육비 등이 들어가는데 식비나 의복비는 한국과 일본이 비슷하게 되었다 쳐도, 기본적으로 일본에서 생활하는데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주거비다.

  내가 한국에 있을때 가장 궁금했던 것은 일본인들의 삶의 수준이 한국사람보다 수입만큼 더 나은가하는 점이었다. 그러나 막상 와보니 오히려 그닥 더 높지도 않은 수준이었다. 그 이유는 높은 물가와 그것을 뒷받침해주지 못하는 수입, 적은 양의 먹거리 등 때문이었다.

  일본의 보통 회사는 초봉이 20만엔이 안되는 회사도 수두룩하다.  

  그리고 가끔 일본 아르바이트 시급이 800엔에서 1000엔 하니까 우리나라의 2배 이상 아니냐고 하시는데, 그것도 돈을 많이 버는 일본의 상징이 아니라, 정규직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의 임시직일 뿐이다. 일본 전체 노동인구가 2005년 현재 5300만명이라고 했을때, 그 중에서 38퍼센트는 비정규직 노동자 - 즉 계약직이라는 통계도 있다. 그리고 이 중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이 2/3라는 사실. 부족한 가계 살림에 외벌이로는 답이 안나오니,수입을 보태러 쇼핑센터나 가게에 나와서 일을 하는 것이다. 프리 아르바이터는 젊은이들이 아니라 대부분 하층 노동자이거나 아주머니들이 대부분이다.

6.
 사실 한국 물가 많이 올랐다.
 식당 음식값은 글쓴이가 일본으로 떠나기 전과 비슷하거나 1000원정도 올랐다.
 그러나 집값은 미쳤다고 할 정도로 올랐다. 또한 교통비도 무시못할 정도로 올랐다.
 실제 현재 나도 한국에서 오른 물가를 체감하면서 살고 있다.

 그렇지만 외국과 비교해서 체감하기에는 그렇게 최악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정부나 지하철 공사 등을 옹호하기 위해서 쓰는 게 아니라, 단순히 일본과 비교해서도 그렇다는게 내 생각이다. 글쎄....세상 사는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바라보는 관점도 다르겠지만, 한국이 문제도 많고 탈도 많지만 아직까지도 살만한 나라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고 한국내 빈부격차나 수많은 모순점을 덮어두자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선진국이라고 해서 다들 잘먹고 잘사는데 우리만 왜 이 모양이냐는 이야기만큼 미래가 없는 이야기도 없다. 물가와 소득, 그리고 생활수준을 종합적으로 고려해볼때 어느나라나 삶의 무게는 다 각각 지니고 있고, 평온해 보이는 그 나라 사람들도 전투하듯 박박 기면서 생활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한국은 한국 나름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더 나은 길을 모색하면 된다.

 ps. 그렇다고 한국물가 싸니 만세 이런 이야기 아니니 오해하지 마시고, 댓글 다실때는 최소한의 에티켓을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욕설/협박 등은 기본적으로 통보없이 삭제할 예정이며 일절 대응을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반대 의견이 있다면 정정당당하게 예의를 갖추고 피력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ps2. 다음번에는 먹거리에 대해서 좀더 쓰기로 하겠습니다. 이것도 또 써라 마라 하시려나...-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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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집권땐 나라 망한다?

한나라 집권땐 나라 망한다?
과학적으로 한번 따져봅시다
[기획리포트] 과학과 정치의 닮은 점은 '관찰의 이론의존성'
텍스트만보기   이종필(ststnight) 기자   
 
 
과학 발전에 있어서 실험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인식은 보통 사람들에게 매우 널리 퍼져있다.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다든지, 무슨 연구소에서 어떤 이론을 실험적으로 검증했다든지 하는 얘기를 우리는 심심찮게 듣는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아무런 이론적 편견도 없이 설계된 객관적인 실험의 결과로부터 자연현상을 관찰하고 그로부터 자연법칙을 이론적으로 구성해 낸다'는 상식을 받아들인다.

나 또한 대학교 1학년 때 물리실험시간을 떠올려 보면, 그리고 그때 과학에 대해 가졌던 심상을 생각해 보면 이 생각은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자연법칙은 객관적 실험을 거친 결과다?

예컨대 평면대 위의 수레에 줄을 연결해서 도르래를 통해 수직으로 늘어뜨린 다음 그 끝에 다양한 질량의 추를 연결해서 평면대 위의 수레의 가속운동을 관찰하는 실험이 있다.

수레를 가속시키는 추의 질량 변화와 수레 속도의 변화(즉 단위 시간당 이동 거리의 변화)를 비교해서 우리는 F=ma(F:힘, m:질량, a:가속도)라는 뉴턴의 운동방정식을 실험적으로 확인한다. 나는 오랜 시간 운동량(p)의 질량과 속도(v)에 대한 관계(p=mv)나 에너지(E)의 관계(E=0.5mv²)도 이런 방식으로 얻어지는 것으로 '오해'했었다. 안타깝게도 대다수의 중고등학교 물리수업도 아직 이 틀을 벗어나지는 않는 것 같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상식'은 그리 신뢰할 만한 것이 못된다.

물론, 자연현상에 대한 면밀하고도 비편향적인 관찰로부터 직접적으로 어떤 법칙을 이끌어 낸 경우도 있다. 티코 브라헤가 남긴 방대한 천문학적 자료로부터 그의 제자 케플러가 그 유명한 자신의 3가지 법칙들을 유도한 경우라든지, 막스 플랑크가 1901년 흑체복사 곡선을 빛의 양자화 가설에 입각해서 완벽하게 설명한 경우가 그러하다.

그러나 케플러마저도 자신의 법칙들을 구축할 때 플라톤의 정다면체 '이론'에 기대고 있고, 플랑크가 촉발시킨 양자역학은 이른바 '코펜하겐 해석'으로 불리는 몇 가지 가설하에 구축되어 있다. 뉴턴의 운동방정식 'F=ma'는 떨어지는 사과와는 무관하게 힘(Force)에 대한 뉴턴역학의 정의에 가깝다.

실험 결과가 이론의 존폐를 결정하는 경우보다 오히려 그 반대로 이론이 실험의 구성과 해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다. 이론적인 배경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어떤 실험을 구상한다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좀 심하게 말하자면 실험이란 어느 이론을 물질적으로 확인하기 위한 과정에 불과하다.

이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새로운 현상이 발견되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처음부터 무작정 뭔가 새로운 현상을 보려고 시작하는 실험은 없다. 그 실험의 결과 또한 이론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기도 한다. 이론과 실험의 이런 관계는 핸슨의 '관찰의 이론의존성(theory-ladenness of observation)'이라는 말로 잘 알려져 있다.

이론이 실험결과 해석을 바꾼다

보통 사람들(혹은 잘 모르는 과학자들)은 생소할지 모르지만 과학에서 이론적 과정이 지배적인 영향을 미치는 예는 무척 많다. (관찰의 이론의존성을 설명하면서 몇 가지 '관찰적 사실'만을 주된 근거로 내세우는 것은 자기모순이다. 그러나 이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점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론에 대한 첫 실험적 검증은 1919년 영국의 천문학자 에딩턴에 의한 것이었다. 일반상대론에 의하면, 질량이나 에너지의 존재가 그 주변 공간을 휘어지게 한다. 그 주변을 지나는 다른 물체(혹은 빛마저도)는 이 휘어진 공간을 따라 운동하게 된다. 이는 마치 침대 위에 무거운 볼링공을 올려놓으면 그 일대가 움푹 패는 것과 같다. 주변에 골프공이라도 있다면 이 패인(즉 휘어진) 면을 따라 볼링공 쪽으로 굴러갈 것이 분명하다.

이런 효과는 물론 우리 일상생활에서는 극히 미미하다. 과학자들은 멀리 떨어진 별에서 나온 빛이 지구에 이를 때 질량이 아주 큰 태양 주변을 지나면서 그 경로가 휘어질 것이라는 점에 착안했다. 그런데 평상시에는 태양의 빛이 워낙 강렬해서 멀리서 오는 희미한 별빛을 제대로 관측하기 어렵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달이 태양을 가리는 일식을 기다려 관측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에딩턴은 일반상대론의 예측과 어긋나는 사진 검판을 일부러 제외했다는 의혹을 사게 되었다. 에딩턴은 망원경의 초점 등의 문제 때문에 제외했다고 해명했지만 적지 않은 과학자들은 에딩턴의 실험 결과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이후에 실시된 일식 실험에서도 그리 만족할만한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이는 노벨상 위원회에서 아인슈타인에게 노벨상을 안기지 않은 이유 중의 하나였다.(아인슈타인이 노벨상을 받은 것은 1925년으로, 주로 광전효과-금속에 빛을 쬐면 전자가 튀어나오는 현상-에 관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과학자들이 일반상대론을 믿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잇따른 실험에서 만족할만한 결과가 없었음에도 많은 과학자들은 오히려 일반상대론을 지지했다. 그 이유는 일반상대론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이론적인 매력 때문이었다.

패러다임 보호 본능

 
▲ 에딩턴의 실험
ⓒ 이종필
 
실험하는 사람들이 기존에 알려진 결과나 상식과 동떨어진 결과를 얻게 되면 처음부터 새로운 뭔가를 발견했다고 여기기보다는 실험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오차들을 우선적으로 점검하게 된다. 기존 패러다임을 보호하려는 본능이 작동하는 것이다. 이런 보정의 과정을 여러 차례 거친 후에도 여전히 새로운 무언가가 남아 있다면 그것은 학계의 수수께끼로 남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애초의 이상한 결과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해서 각종 제한조건들을 점검하는 것은 무슨 불순한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다. 이는 분명히 데이터 조작과는 거리가 멀다.

실제 실험에서 이런 일은 흔히 일어난다. 규모가 꽤 큰 실험그룹에서 비교적 최근에 있었던 일이다. 이 실험그룹에서 관심 있었던 물리량은 어떤 비율에 대한 사인(sin)함수 값으로 표현된다. 중고등학교 때 다들 배웠겠지만, 사인함수는 기본적으로 직각삼각형의 빗변에 대한 다른 변의 비율로 정의되는 양이다. 따라서 이 값은 결코 1을 넘을 수 없다.

그런데 처음 데이터를 열고 분석을 해 보니 그 결과가 1을 약간 넘는 것으로 나왔다고 한다. 사인함수 값이 1이 넘는다고 나왔으니 그 결과를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심리적으로 어려웠을 것이다. 내부적으로 격론이 벌어졌고 다시 다양한 제한조건들을 계속해서 점검하고 오차를 줄이는 노력을 기울인 결과 최종적으로 0.99라는 결과로 공식발표하게 된다.

이처럼 아무리 새로운 결과가 실험에서 관측되더라도 그것이 곧바로 새로운 자연현상이나 새로운 이론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과학자들이 알고 있는 혹은 몸담고 있는 기존의 이론적인 체계 내에서 그 결과를 해석하려는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때까지 일종의 유예기간이 필요하다.

어느 분야보다 합리적이며 객관적이라고 여겨지는 과학에서도 자연세계에 대한 관찰과 실험 과정에서 일종의 '선입견'이 개입할 수밖에 없다면, 그보다 더 애매한 온갖 사회 영역에서는 그 정도가 훨씬 더 심하다고 예상할 수 있다. 최근의 한국사회를 들여다보면 이 점이 명확해진다.

망국론 부추기는 정치에 객관적 관찰 가능한가

 
▲ 한나라당과 일부 언론은 '무능한 좌파정권이 나라를 망친다'는 논리 펴고 있고, 노무현 대통령은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끔찍하다고 말하고 있다. 두 주장 모두 합리적인 관측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참여정부 이후 지난 5년은 한마디로 '무능한 좌파정권 대 꼴통수구보수'의 격돌로 요약된다. 한편에서는 정권 초기부터 이른바 <조중동>이 신정부를 '좌파=빨갱이=무능'으로 몰아붙였다. 많은 사람들은 언론보도나 그 주장들이 모두 객관적인 사실취재와 전문가들의 합리적인 분석 결과라고 쉬 믿는다.

그러나 과학 활동의 예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런 경우는 드물다. 소재·사진·취재원·전문가, 이 모두는 편집부의 '이론'이나 선험적인 결론을 정당화하기 위해 '구성'된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옳을 것이다.

예를 들자면, 참여정부 들어서 경제가 나빠지고 있다는 기사를 쓰고 싶으면 재래시장을 찾으면 된다. 이곳 경기가 안 좋은 주된 원인이 정부의 경제정책 실패에 의한 것인지 인근 대형할인점에 의한 것인지는 부차적인 문제다.

'무능한 좌파정권이 나라를 망친다'는 자신의 이론이 입증되기 위해서는, 역설적일지도 모르지만, 정말 나라가 망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나라가 망해가는 데이터 수집에 열을 올렸다. 2003~2004년에 걸친 대대적인 경제위기론이 그러했고 종부세 '세금폭탄'도 여기 해당한다.

다른 한편에서도 마찬가지다. 대표적인 주장이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나라가 망한다(혹은 전쟁난다)'는 것이다. 손학규 전 지사가 탈당하긴 했지만, 이른바 빅2인 이명박-박근혜 후보는 많은 국민들의 예상을 뒤엎고 당내 경선에 모두 참여했다. 어찌되었든 이것은 우리나라 정당정치가 최소한의 상식과 룰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평가받을 만한 일이다.

민주주의가 발전한다는 것은, 비록 자신과 정견이 다르지만 어느 정당이 정권을 잡더라도 나라가 망하지 않을 만큼 그 사회가 성숙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가 집권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정말 그 후보가 당선되었을 때 자신의 그 '이론'을 정당화하기 위해 차기 정부에서 지금처럼 또 무리하게 '나라 망해가는 관측'에만 열을 올릴 것이 분명하다.

관찰의 한계를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인지 과학자들은 어지간한 이론이나 주장은 잘 안 믿는다. 또한 실험 뿐만 아니라 이론 그 자체의 내적 정합성을 따지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들인다. 반대로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이론이나 실험도 쉽사리 거부하지 않는다. 그 결과 과학에서는 온갖 종류의 다양한 이론과 실험결과들이 대체로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과학의 힘이다.

세상만사 모든 일을 과학 하듯이 처리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적어도 다양한 가치판단이 민주적이고 평화롭게 공존하고 또 공유될 수 있다면 아마도 그런 사회가 열린 사회이고 선진화된 나라가 아닐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모두가 이론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관찰의 한계를 분명히 깨달아야 할 것이다.
 
 
오마이뉴스 기획취재기자단 기사입니다. 이종필 기자는 고등과학원 물리학부 연구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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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씨 '위장전입 해명' 애쓸 필요없다.

 

 

이명박씨 '위장전입 해명' 애쓸 필요없다.
 
번호 330800   글쓴이 옵저버™    조회 9497   누리 2413 (2413/0)   등록일 2007-6-16 14:43   대문 24   톡톡 2  
 
 
 

***국무총리 지명자 '장상'...부동산투기, 위장전입

(해명)
장상 총리서리는 세 차례 주민등록을 옮긴 사실을 시인했으나, "부동산 투기 의도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경과)
한나라당 심재철 의원은 "아파트 투기의 전형적 수법" 이라고 주장했다

(결과)
한나라당, 장상 총리 지명자 국회인준부결

(결론)
해명은 본인의 생각일 뿐, 결론은 부동산 투기이며, 국무총리가 될 수 없다.



***국무총리 지명자 '장대환'...부동산투기, 위장전입

(해명)
장(대환) 지명자는 "제 아이들이 초등학교 취학과 관련해 주소지를 옮긴 사실에 대해 죄송하다"면서 "비록 이사를 전제로 취학 이전에 아파트를 사긴 했지만 실제 이사하기 전에 미리 주소를 옮긴 사실에 대해 송구스럽다"고 용서를 구했다.

(경과)
한나라당 안경률 의원은 "명백한 법 위반사항에 대해 맹모 운운하는 것은 공인으로서의 자세가 아니다" 고 말했다.

(결과)
한나라당, 장대환 총리 지명자 국회인준부결

(결론)
용서는 본인의 해명일뿐, 결론은 부동산 투기이며, 국무총리가 될 수 없다.



의도가 없었던, 용서를 구하던, 그것은 본인만의 주장이며 생각이다.
결론은 명백한 부동산투기이다.
국무총리감이 될 수 없다며 국회에서 날려버린 한나라당의 실천사례가 좋다.

내가 두 번째 이야기 한다.
이명박 씨를 끼고 돌면 돌수록 정권획득은 고사하고 한나라당 통째로 무너진다.
이명박 씨는 당뿐만 아니라 수구세력전체에 굉장히 골치 아픈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있다.
박근혜, 이명박 씨로 정권획득을 꿈꾸는 한나라당을 상당히 흥미롭게 쳐다보고 있다.
앞으로 여러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 옵저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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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물간 스타의 스캔들… 이명박의 자해공갈, 역겹다

게임 이론?

 

 

한물간 스타의 스캔들… 이명박의 자해공갈, 역겹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상황인식도 가공스럽다
 
입력 :2007-06-14 13:41:00     |  서영석 정치전문기자 e-mail
 
 
   
 
  ▲ 13일 경남 창원시 한나라당 경남도당에서 열린 경남지역 선대위발대식에 참석한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범여권의 '이명박 죽이기 플랜'이 확인됐다는 보고에 인사말 도중 격앙된채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 뉴시스   
 

요즘 연예와 스포츠에 대해 관심을 좀 기울이다 보니 알게 된 사실 하나. 한물(?) 간 연예인들이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해 일부러 스캔들을 조작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지금 잘 나가는 대중 스타들은 절대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스캔들은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한물 가기 시작하면 대중의 외면은 무섭다. 280만장의 음반을 팔아 한국 기네스북에 오른 가수 김건모가 어제(13일) MBC 예능프로그램 ‘황금어장’의 ‘무릎팍 도사’ 코너에 나와서 하소연한게 바로 대중의 외면에 대한 불만, 그것이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한물 간 스타들은 스캔들 조작이란 자해공갈도 서슴지 않는다고 한다.스캔들 조작도 아무나 하지는 못한다. 나름대로 잘 알고 통하는 스포츠연예신문사 기자 한 명을 끼지 않으면 자해공갈도 먹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명박이 13일 창원도당의 선대위발대식 강연에서 자신을 죽이기 위한 플랜이 있고, 거기에 청와대가 무슨 간여를 했느니 안했느니 음모가 어쩌니 하는 얘기를 했다고 한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나는 “이명박도 이제 한물 간 스타로 전락했구나”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명박이 현재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는 후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이명박이 대통령이 될 것이란 확신은 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이회창 학습효과 때문이다. 지지율 1위를 줄기차게 몇년간 고수하다가 대통령 선거 한달 앞두고 역전 당해 피눈물을 흘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회창도 그랬었는데, 이회창에 비교하면 ‘반의 반’도 되지를 않는, 그래서 도대체 언제 지지율 1등 자리에서 떨어질지 모르는 이명박에 대해 무슨 음모를 하고 무슨 플랜을 짜겠는가. 실제로 요즘은 박근혜가 뜨고 이명박은 진다고 한다. 따라서 이명박의 청와대 음모설 거론은 한물간 스타의 스캔들 조작에 해당한다. 조선일보가 그런 보도를 했다면 조선일보는 바로 스캔들 조작에 동원된 스포츠연예신문 기자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이명박이 그런 얘기를 했다면 그건 자화자찬일 뿐이다. 또한 그런 얘기를 할 수 있는 이명박의 상황인식도 가공스럽다. 인간의 자기의 인식지평만큼 세상을 본다고 한다. 이명박의 인식 지평에는 여전히 청와대가 그런 음모를 꾸미고 조작을 할 수 있는 주체다. 바꿔 말하면 이명박이 만에 하나 청와대에 입성한다면 그런 음모와 조작을 서슴지 않을 것이란 얘기이기도 하다. 이러니 어찌 가공할만한 상황인식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이명박이 공격받는 것은 게임 이론상 너무나 당연한 1위의 시련일 뿐이다.

황야의 무법자 세사람이 있다고 하자. ‘선량한(A)’ ‘포악한(B)’ 그리고 ‘추잡한(C)’이 그들이다. 각각은 삼각형의 꼭지점에 서서 최후의 일인이 살아남을 때까지 권총 결투를 계속한다.

선량한(A)의 사격솜씨는 형편없어서 명중률이 30%다. 포악한(B)의 사격솜씨는 탁월하여 명중률이 100%다. 추잡한(C)의 명중률은 70%라고 하자. 서로간 사격솜씨에 대해서는 익히 잘 알고 있는 상황이라고 가정한다. 이들이 결투를 하면 누가 살아남을 확률이 가장 높겠는가.

상식과는 다르게 명중률이 가장 낮은 선량한이 살아남을 확률이 가장 높다. 왜 이런가.

첫 결투에서 3사람이 갖는 심리 때문이다. A와 C의 최대 적은 B다. 명중률 100%인 B를 없애야만이 2회전에서 살아날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1라운드에서 명중률 30%의 A와 명중률 70%의 C는 백발백중 B를 향해 쏘게 돼 있다.

B는 누구를 쏠까. B의 주적은 명중률 30%의 A가 아니라, 자신만큼은 못하지만 그래도 명중률 70%를 자랑하는 C다.

자, 여기서 1회전의 결과를 산출해 보자. 우선 C는 100% 사망이다. 명중률 100%의 B가 C를 쐈기 때문이다. 명중률 30%의 A는 무조건 생존이다. 아무도 그를 향해 쏘지는 않기 때문이다. B의 생존확률은 얼마일까. B의 생존확률은 수학적으로 (1-0.3)(1-0.7) = 0.21 즉 21%다.

1회전의 결과는 어땠는가. 사격솜씨가 가장 형편없는 A는 생존확률 100%이기 때문에 무조건 살아남았다. 사격솜씨 2위인 C는 무조건 사망이다. 사격솜씨 1위인 A의 생존확률은 21%밖에 안된다. B가 2회전 이후까지 살아남을 확률은 더 작다. 0.21(1-0.3) = 0.147 즉 14,7%밖에 되지 않는다.

수학을 현실로 풀어서 설명하면 이렇다. 3명이 이런 상황에서 붙은 게임은 2회전을 넘기지 않는다. 1회전에서 시격솜씨가 가장 좋지 않는 A는 무조건 살기 때문에 B와 C가 모두 죽으면 게임은 1회전에서 종료다. 사격실력 2위의 C는 1회전에서 무조건 사망이니까, 2회전은 B가 살아 있으면 A는 B에게 무조건 죽게 되고, B는 죽을 수도 있고, 살아 있을 수도 있다. A의 사격솜씨가 형편없긴 하지만 명중률 30%는 되기 때문에 A의 총알이 B를 맞출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말이 길어졌는데, 3파전이나 4파전으로 붙는 게임일 경우 1위나 2위가 무조건 이긴다는 보장이 없다는 점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다보니 이렇게 됐다.

여하튼 현재의 대선 구도는 3위가 오리무중인 상태란 점만 빼면 위에 설명한 경우와 거의 유사하다. A는 정체가 드러나지 않은 이른바 범여권의 후보라고 한다면, 과연 B와 C는 누구인가.

   
 
  ▲ 서영석 정치전문기자   
 
명중률 100%인 ‘포악한(B)’ 는 현재 이명박이다. 명중률 70%인 ‘추잡한(C)’에 해당하는 것은 현재 박근혜다. 방금 설명했지만 2위의 사망확률은 100%다. 자해공갈은 사실 박근혜가 해야 할 판이다. 그런데도 이명박이 자해공갈을 겸한 자화자찬을 하는 것은 현재의 추세가 B에서 C로 옮아가고 있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이명박의 인기는 하락추세이고, 박근혜의 인기는 상승추세이다. 뭐 그들 둘이서 치고받고 해봤자 ‘그 나물에 그 밥’이라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얼마전 6·10항쟁 20주년 기념 열린음악회에서 인천시립합창단이었던가, 여하튼 그런 곳에서 합창으로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를 부르는 걸 TV로 봤다. 20년전 숨어서, 혹은 시위의 현장에서만 불렀던 그 노래가 이젠 공중파를 타고 당당하게 불려지는 것을 확인하고는 재삼 감격에 젖었었다.

세상은 이렇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정도로 바뀌었다. 민주화를 향한 이 놀라운 변화의 막바지에 노무현정권이 있다. 이 변화는 정말로 비가역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마당에 청와대 음모 운운하는 후보가 여전히 지지율 1위를 한다는 사실은 나를 너무나 부끄럽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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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보다 선거법이 더 나쁘다

 

 

대통령보다 선거법이 더 나쁘다
[선관위의 해석] 입 틀어막으려면 차라리 제비뽑기를
 
 
 

   
  ▲ 김정진 변호사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 때문이 또다시 말이 많다. 혼자서 네 시간 동안 연설했다는 이 자화자찬식 연설의 백미에 대해서는 굳이 옳고 그름을 따져야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한나라당이 선거법 위반이라고 주장하고 있고, 중앙선관위는 일단 선거중립의무 위반으로 위법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선거중립 의무는 처벌조항이 없는 다분히 선언적인 조항이기 때문에 대통령과 같은 고위 공직자에 대해서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 처벌조항이 있는 사전선거운동 금지와 유사기관설치에 대해서는 모두 위법이 아니라고 판단하였다.

선관위 판단 현행법 신중 해석 결과

선관위의 판단은 현행법을 신중히 해석한 결과라고 일단 평가할 수 있다. 현행법 상 사전선거운동은 선거기간 전에 “당선되게 하거나 되지 못하게 하기 위한 행위”라고 정의되어 있기 때문에 명시적으로 한나라당의 낙선 또는 당선을 거명하지 않은 노무현에 대해서 사전선거운동에 해당되지 않다고 판단한 것은 틀린 해석은 아니다.

‘참평포럼’에 대해서 유사기관이 아니라고 한 것 또한 무엇보다도 ‘참평포럼’이 현재 대선후보 중 특정인의 선거운동을 위한 조직은 아니라는 점에서 유사기관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하겠다. 공무원의 선거중립 의무는 사전선거운동보다 훨씬 넓은 개념으로 공무원이 선거와 관련하여 특정 후보 내지 정당에 유불리한 발언을 하는 경우에는 선거중립 의무에 위반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러한 법률적 해석에 무관하게 한 번 근본적으로 던져보아야 할 의문이 있다. 현재 아마도 국민의 한 70% 정도는 특정 정당의 후보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현 집권세력이 다시 재집권해서는 안 된다는 사람과 한나라당이 집권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다 합치면 못해도 70% 정도는 되지 않을까한다. 문제는 70% 정도에 이르는 국민이 생각하고 있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표명하였다고 하여 그것을 과연 위법으로 규정하는 현행 선거법이 타당한가이다.

대통령 정치적 견해 표명 법으로 막는 것은 잘못

물론 보통사람의 견해 표명과 대통령의 견해 표명은 다르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현행 선거법은 대통령에게만 무거운 의무를 지우고 있지 않고, 모든 공무원에게 선거중립 의무를 부과하고 있고 일반 국민 모두에게 사전 선거운동을 하지 말도록 동등한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

따라서 동사무소에 근무하는 9급 공무원이 공개석상에서 노무현과 동일한 발언을 한 경우에는 공무원의 선거중립의무 위반이고, 9급 공무원이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 징계 받을 수도 있고, 일반 국민도 한나라당이나 열린 우리당은 절대 찍지 말자라고 인터넷 게시판에 올리면 사전선거운동 위반으로 처벌되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한나라당 낙선을 위해 구체적인 행동에 돌입하여 자신의 권한을 남용하거나 국가예산을 사용하였다면 당연히 문제는 달라지고 이에 대해서는 당연히 제재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대통령이 권한을 남용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표명하였다면 이것을 과연 법으로 금지할 수 있을까. 필자는 금지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대통령이건, 20세의 청년이건, 100세의 노인이건 간의 그 견해는 모두 동등한 가치를 가지고 그것이 다수결의 원리이자 보통선거권에 내재되어 있는 핵심적인 철학이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무능과 오만은 아마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의 심판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의 정치적 견해표명을 위법으로 볼 수밖에 없는 현행 선거법이 정당한지에 대해서는 검토해 볼 때가 되었다.

   
▲ 노무현 대통령이 양재동 교육문화회관에서 ‘21세기 한국, 어디로 가야 하나’를 주제로 참여정부평가포럼 월례강연을 하고 있다.(사진=청와대 홈페이지)
 
야당에 대한 극단적 탄압과 정당이 주도한 극단적인 혼탁선거가 지배하던 시절에 대한 반성으로 만들어진 현행 선거법이 현재와 같이 누구나 거리낌 없이 의견표명을 하는 시대에 부합한지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미 몇 번의 선거를 거치면서 많은 네티즌들이 사전선거운동 혐의로 처벌받은 바 있다. 그것이 허위가 아니라면 선거운동기간 전에 한나라당, 열린우리당의 후보, 중도통합민주당, 민주노동당의 후보 중 어느 누가 당선되어야 한다거나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견해 표명이 과연 왜 금지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할 때다.

허위 사실 유포 아닌 한 '입'을 해방시켜라

그토록 혼탁선거가 걱정되어 국민들의 입을 틀어막아야 한다면 고대 그리스처럼 차라리 선거를 하지 말고 추첨을 하는 것은 어떨까하는 생각도 든다.

이러한 기이한 선거법 때문에 법원에서는 기이한 해석이 속출하고 있다. 도의원으로 출마한 자신의 남편을 잘 부탁한다고 동네 약국에서 이야기한 경우, 약을 사러 간 김에 이야기가 나와서 한 것이지 선거운동이 아니라고 판단한 법원의 판결은 정말로 기이하다.

같은 이야기를 하였는데도 약을 사러 가서 이야기 하면 사전선거운동이 아니고 그렇지 않으면 사전선거운동이라는 이 기이한 해석은 상식과는 전혀 무관한 기준이다.

또 다른 예로 선거운동기간 하루 전에 국회의원 후보자가 자원재생화 시설을 주민동의 없이 설치하지 않을 것이고 자신이 낙선하더라도 이를 막겠다고 말한 것이 과연 금지되어야 할 일이고, 의원직을 상실(민주노동당 조승수 의원 경우-편집자)시킬 만큼 중대한 일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결론적으로 선거 때는 허위사실이 아닌 한 입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대통령이건 일반시민이건 국회의원 후보자이건 간에 말하는 것을 막지 말라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은 결국 주권자인 국민이 판단할 것이기 때문이다.

 
2007년 06월 08일 (금) 11:10:51 김정진 / 변호사 redian@redia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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