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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남기고 간 편지

 

나의 젊은날을 함께 한 동갑내기 친구. 내가 그 친구 등을 떠밀었다. 그래서 그녀는 독일로

떠났다. 독일로 가며 그녀가 나에게 보낸 편지를 오늘 받았다. 한참을 웃다가 한참을 울었다.

그녀의 편지와 그녀가 선물하고간 책을 들고 난 또 한 번 용기내어 한 발 내딛어본다.

부적처럼 날 언제나 지켜줄 그녀의 편지. '오현지'이름으로 처음!!!!! 받아든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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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현지! 오현지! 오현지!

이 모든게 다 뭔가 싶어 허망한 마음 붙잡고 엎치락뒤치락 하다가

펜을 꺼내든다. 펜을 꺼내든다.

그 곳도 사람 사는 곳인데 나는 뭐가 이리 두려워 불안해할까.

내가 품었던 세상은 고작 이것밖에 되지 않을까.

아님 나도 모르는 사이 세상에 대한 불신만 키워왔던 것일까.

 

'아가가 잃어버린 꽃신 한짝 속에 아무도 모르게 바다가 숨었네.

 종이배 둥실 띄워 노를 저어볼까 하얀구름 벗삼아 뱃놀이 갈까

 비개인 풀밭사이 숨어있는 아가의 꽃신 속에 바다가 있네.' (한영애. 꽃신속의 바다)

 

뒤적거리다 보낸편지함도 열어보았어. 내가 아빠한테 썼던 편지가 있더라.

이천삼년 처음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고 3학점만 들었던 때

장학금 못받아서 미안한데 나 아직 젊고, 젊어서 공부만 하기엔 고민이 많노라,

진실되게 살겠노라 세상에 아주 작은 변화라도 만들어내겠노라

그 담엔 당신께 맥주 한 잔 사겠노라, 자신있노라...

 

내가 잃은 꽃신 속에 아빠의 바다가 있더라.

그 바다를 이제서야 나아가는데 뭐가 두려울까.

두려우면 난 사기꾼이 될거야. 허풍쟁이. 그렇지?

 

너, 참 웃긴다. 나는 너한테 잘, 편히 자라고 겉옷 한 번 덮어준 것밖에 없는데,

넌 왜 그리 커다란 옷을, 날개를 달아주냐? 왜 나를 도발해?

그냥 대충 살아보려 했는데 왜 밀어내냐? 왜 이 간밤에 아빠를 느끼게 하는거냐?

담배만 여럿 날렸다. 왜 대충 글 못쓰게 하냐?

 

나는 있잖아. 번듯한 허울 속에 갇혀 삶을 실감하지 못했다.

하영준 말마따나  ~척 하느라 계속 도망만 다녔어.

도망다닌 신세한탄으로 각종 술자리를 전전했던 것 같아.

스물여섯인데 지금 이 순간의 이야기보다 빛나던 과거 다가올 미래이야기가 전부였어.

이 썩어빠진 청춘! 그러지 말자, 우리.

지금 이 순간, 내 영혼과 내 육신에 진실해야지. 더부룩한 관습의 때 따윈 가당치 않아.

 

조금 더 삶 속으로 들어오게 된 건 너와의 대화 덕분이었어

또렷이 기억해. 인사동서 아빠 얘기했던 날. 대학로서 울었던 날,

그리고 독일 갔다와서 너가 학원계단에서 했던 얘기.

삶의 치명적인 부분들을 내 입으로 말하게 된 순간, 나는 어른이 된 것 같아.

 

죽음과 섹스.

이 말을 내 입에서 나오게 한 너, 참 강단지다. 너, 참 살아있어.

스물다섯의 가을과 겨울을 너와 함께 보내게 된 건 정말로 행운이다.

험준한 분수령에서 굴러 떨어지지 않고 잘 걸어갈 수 있었다.

 

잊지 않았지? 기대되는 새시간. 잘 살아낼 자신있지? 하나하나 느끼며 진실되게. 즐겁게.

눈물겹게 살아낼 자신있지? 겉늙지 않고 노회하지 않을 자신있지? ㅋㅋ

 

힘들면 학림에서 커피마시고 정신차리시오!

내가 왜 한 곳을 고집했겠냐? 다 이유가 있어서였어. 심어둬야지. 우리의 장소.

추억할 수 있고 힘 얻을 수 있는 그 곳. 그 곳 한곳쯤은 말야.

 

베를린으로 떠나는 날. 비온다네. 나 비오는 날 무지 좋아하는데 좋다!

일상 속에서의 너는. 멋졌어. 진실되었으므로.

비행기가 뜰 때 너에게 에너지를 보낼께. 웃을 수 있는 힘.

 

정말 너의 힘으로 새로운 세계로 간다.

진심으로 고맙다.

있는 힘껏 살고 새로이 생겨난 에너지로 네 날개도 퍼덕여줄께.

징징거리지 않고 세상에 나아가볼께. 잊고있었던 내 색깔 찾아볼께.

 

너, 너도 니 색깔 잘 찾고 있어야해 .꼭.

우리 다시 새하얀 팔렡에 투명하고 맑은 원래색 찾아 하나씩 하나씩 채워보자.

니 색도 쓰고, 내 색도 쓰면서 멋진 그림 하나씩 그려보자. 세상에 새그림 내놓아보자.

 

정말 고마워서, 정말 잘 살고 올께.

 

새 땅에서, 새 에너지 보낼테니 너도 꼭 더 잘 살아야해!

 

07.03.02 3:44AM

 

덧1. 공항가는 길은 설레는 것만은 아닌 것 같아.

뒤돌아보니 애달파서 눈물흘리고 말았어. 어쩐지 자꾸 눈물이 나와.

간다고 전화 못할지도.... 넌 '사람'이었어. 고맙다.

(리무진 버스 안)

 

->결국 그녀는 나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비행기 문앞인데 울까봐 전화안한다 문자만 남기고

 

덧2. 혹시라도 사고나게 되면 보험금 수령액 중 1/4 너에게 배당했어. ㅋㅋ

그럴 일 없겠지만 생기면 기꺼이 받아라. 기분 상하지 말고.

 

->이 덧을 보고 한참 웃고 한참 울었다. 그리고... 나도 내 보험의 수령인으로 그녀를 썼다.

 

덧3. '염쟁이 유씨'. 좋아하는 사람이랑 봐. 13일 에매했어.

 

->그녀는 나에게 연극티켓을 예매해 선물하고 갔다. '그'와 보라고.

   그래서 나.... 혼자 연극을 본다. '그' 자리에 '그'가 아니면 아무도 앉을 수 없으니까.

    이제 '그' 자리에 '그'는 없으니까. 처음부터 지금까지. 앞으로도 언제나 '그'는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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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내 안에 잠들어있던, 억눌렸던 에너지들을 찾아주었다.

그녀가 용기내어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것처럼.....

나도 이제 용기내어 새로운 그 길에 한 발 내딛는다.

 

이젠 말과 언어가 아닌. 나의 음악 나의 몸짓으로 세상을 향해 외쳐보려고 한다.

나의 음악, 나의 몸짓으로 세상의 변화를 만들어가려고 한다.

언제나처럼 진실지게. 그 진실이 언제나 통하는 것은 아니나 그래서 상처받을 때 많으나.

언제나 진실지게 살아가련다. 나의 그 어떤 언어보다 내 진심으로.. 삶을 살아가련다. 

 

그녀의 편지로 내 어깨에 짊어졌던 많은 짐을 내려놓는다. 미련과 이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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