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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률 싸움에 생기는 새로운 전쟁
이광석(뉴미디어 평론가)
이라크의 핵사찰도 못미더운 미국은 예정대로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한다. 이제는 동맹국
들간 합의 기제도 귀찮다 싶어 독불장군처럼 앞만 보고 갈 태세다. 임박한 전쟁의 기운이
잔뜩 감돈다.
뉴스에선 이라크와의 전쟁이 벌써 시작됐다. 특히 케이블 텔레비전의 뉴스 전문 방송사들
은 냉정을 잃은지 오래다. 경솔하게 이라크 결전의 카운트다운을 세는 일은 보통이다.
MSNBC사는 무기 사찰 보고서가 유엔에 제출되는 이달 27일을 아예 전쟁 개시일로 잡고
방송 화면에서 전쟁 날짜를 꼽는다. 각종 자극적 음향과 군대 리듬을 배경에 넣고 연일 전
쟁 속보같지 않은 속보들로 시청자 주위를 끌며 분위기를 다잡는다.
9-11 동시다발 테러 이후 보여줬던 언론의 극우 애국주의가 요즘 또 다시 본연의 상업주
의로 외장을 바꾸고 있다. 애국주의의 싸구려 약발로 버티던 전쟁 촉발의 기운이 점차 잦아
들자 시청자와 광고를 위해 벌이는 뉴스사간 진흙탕 싸움이 자연스레 전쟁을 예정된 사건으
로 만들고 있다. 그러고보면 광고 매출에 목숨 거는 미 언론사 사주들이 테러 사건 후 희생
자를 기리기 위해 온종일 광고를 전폐했던 것은 시장 자본주의 역사상 앞으로도 정말 보기
드문 진풍경으로 남을 일이었던 셈이다.
CNN은 폭스 뉴스에 빼앗긴 시청률 탈환을 위해 이라크전에 사생을 걸었다. 다가올 전쟁
보도에 이미 3,500만 달러를 추가 예산 편성하고 일백여명의 기자들이 이라크 내외에 특파
될 모양이다. 전쟁이 없으면 진짜 큰일날 판이다. 무엇보다 지난 해 1억 3천만 달러의 광고
수입과 1백만 시청 가구를 넘어선 폭스 뉴스는 시청률 경쟁 게임의 진수를 보여준다. 한 자
유주의 언론인조차 폭스 뉴스를 "선전공장"이라 비꼴 정도면 그 수준을 대강 짐작할 만하
다.
지난 해부터 <뉴욕타임스> 신문 전면광고를 빌린 폭스 뉴스의 CNN 공격이 이 달 들어
점입가경이다. 폭스는 지난 해 여름 빈 라덴 녹화 테이프를 손에 쥔 CNN에 대한 질투성 비
난에 이어 이번엔 CNN 간부의 보도 경쟁 발언에 발끈해 반격에 나섰다. 경쟁사를 흠집내며
자사 뉴스의 '공평무사'를 부각시키는 요령을 썼다. "우리는 알리고 판단은 국민이 한다"는
폭스 뉴스의 오묘한 슬로건에 기대어 폭스는 '신뢰'요 CNN은 '술수'의 대명사라 주장한다.
어찌됐건 시청률 1위를 뉴스 신뢰지수 1위로 둔갑시키는 폭스나, 특종이나 기사 독점에 혈
안인 CNN이 별로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한 조사에 따르면, 미국의 평균 뉴스 시청자보다 케이블 뉴스 시청자의 영향력을 높게 사
고 있다. 정책 결정자, 언론인 등 사회의 유력 계층이 주시청 대상이란 설명이다. 3천만명에
달하는 공중파 방송 뉴스의 시청자수에 견주어 250만명이 그리 녹녹치 않은 숫자임을 짐작
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도 충분한 매체 위력을 지닌 뉴스 채널 3사가 언론의 공적 책
임을 저버리고 이라크전을 기정 사실화해 피의 전쟁을 보려 안달이니 실로 위험천만이다.
시청률 싸움에 살육전 유치 경쟁이란 정신나간 파국에 이른 꼴이다. (미디어오늘 200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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