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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기획] 미디어로 사회읽기- ④뉴미디어, 문화와 하이테크의 결합
아날로그 권력체계에 흠집내는 디지털세대의 테크노문화 실험
이광석
지난 몇 년 전에 우리에겐 ‘X세대’, ‘신세대’라는 미확인세대의 유행어가 풍미한 적이 있다. 아직까지도 상품광고에서 줄곧 써먹는 이 정체불명 세대 지칭의 정확한 경계선은 없다. 이와 같은 용어의 발원지에는 저 바다 건너 미국적 전통이 놓여 있다. 미국에서 비롯된 새로운 세대의 명칭은 다양하다. ‘X세대’를 포함하여, ‘영상세대’, ‘닌텐도세대’, ‘비디오세대’ 등등의 새로운 조합어들이 창궐한다. 그에 대칭하는 기성세대는 베트남전 이후의 ‘베이비붐 세대’로 뭉뚱그려진다. 말하자면 영상문화와 더불어 사고하고, 길들여지고, 생활하는 세대가 바로 새로운 하이테크의 세대이다. ‘베이비붐 세대’는 반전운동 등을 통해 알려진 히피적 전통을 지닌 세대다. 전후 히피세대는 노자의 도가에 심취하고, 점성술에 의지하고, 피부문신과 LSD를 즐기며, 권위와 자본주의 기계를 경멸한다. 물론 아버지와 아들간에 유전자 요인이 승계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영상세대 또한 아버지세대의 모습을 닮고 있다. 일종의 문화적 유전자(밈, meme)를 담지하는 것이다.
하이테크 문화평론가인 마크 더리(M. Dery)에 따르면, 6~70년대 사이키델릭(psychedelic) 문화와 90년대 사이버델릭(cyberdelic) 문화를 구분하는 가장 큰 준거틀로 테크놀로지의 수용 여부를 들고 있다. 요컨대, 현대의 새로운 세대는 테크놀로지와 80년대 대항문화의 새로운 통합을 의미하는 반면, 60년대 대항문화는 촌스럽고 낭만적이며, 반과학적이고 반기술적이다. 이들 영상세대는 정보화사회의 그늘에서 태어나, 세기말의 정신적 혼돈이라는 토양에서 자라나는 문화라는 의미에서, 보다 미디어 친화적이다. 그들은 60년대 이후의 히피적유산을 계승하고 있지만, 히피들보다는 훨씬 복합적이고 심화된 기술의 대항문화적 통찰력을 지닌 집단이다.
90년대 사이버델릭 문화와 닌텐도세대
이 새로운 닌텐도세대는 기성의 제도와 권위를 부정한다. 그들의 차별성은 기술과 영상을 즐긴다는 데 있다. 국내에도 한 때 일본에서 유행한 ‘다마고치’게임이 히트한 적이 있었다. 스크린 안에 새, 물고기 등을 키우고, 번식시키고, 어떻게 하면 빨리 죽일 수 있는가를 즐기는 초등학생들, 우주전쟁과 국지전을 순수한 디지털전쟁의 유희 속에서 즐기는 세대가 바로 닌텐도세대인 것이다.
위험스러운 사실은 문화란 현상이 ‘삶의 방식’이라면, 삶이란 구체적 현실에 도사린 구조적 변인들이 너무 크게 작용한다는 점이다. 이전에 볼 수 없었을 정도로 전세계 자본의 ‘창조적 파괴’가 진행되고 있다. 특히 초국적 미디어기업들은 이미 상업 전략과 테크노문화를 결합시키고 있다. 소비문화가 80년대의 가장 특징적 현상이자 자본시장의 텃밭이었다면, 이제 90년대 이래로 21세기의 자본문화전략은 테크노상품에 근거한 문화전략이 된다. 뉴욕대 교수인 앤드류 로스(Andrew Ross)에 따르면, 이러한 변화는 “강건한 신세계의 지속적인 기초를 제공하는 테크노문화와 자본의 불경스런 결혼”에 이른다. 소위 ‘디지털계급’ 혹은 ‘가상계급’에 의해 구상되고, 짜여진 새로운 판(version)이 테크노문화의 상스러운 얼굴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과거 소비시장의 아날로그 상품들을 그야말로 부드럽게 하고(softening), 디지털화한(digitizing) 상품으로 재생산하여, 새로운 시장에 그럴듯하게 패키지로 포장하여 전시하는 일이다. 예컨대, 상품문화의 테크노적인 혼합은 통칭하여 ‘사이버펑크 토탈패션’이란 미명하에 등장한다.
사이버펑크와 테크노아나키즘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우리는, 관객이 컨베이어벨트를 통과하는 쇼를 관람하듯, 테크노문화를 소비하는 디지털 관음증에 시달릴 수도 있다. 샌디에고의 노교수 허버트 실러(Herbert Schiller)는 이러한 미디어 전략을 ‘토탈 혹은 원스톱 커뮤니케이션’이라고 명명했다. 즉 개념화 단계에서 최종 생산, 배달 단계에 이르기까지 그저 미디어자본이 만든 메시지와 이미지를 소비하고, 디지털계급들이 만들어내는 스펙터클을 그저 숨어서 지켜보는 주체들만을 양산한다고 말한다. 물론 기성세대의 아날로그적 관성과 중독증은 디지털 소비문화에 이르면, 한차원 더하여 순응적이고 나약한 모습으로 허우적 거린다. 하지만 디지털문화를 소비하는 다양한 하위집단들 중에는 디지털 자본 환경에 도저히 훈련시키기 어려운 ‘지하의’천덕꾸러기들도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가장 도전적인 그룹은 아나키의 자유분망함과 디지털 정보의 공유를 꿈꾸는 새로운 세대들, 이른바 ‘해커’(hacker) 혹은 문화적 의미로는 ‘사이버펑크’(cyberpunk)라고 불리는 유대인의 하이테크 자손들이 존재한다.
사이버펑크는 사이버(cyber)에서 발생하는 하이테크 하위문화와, 펑크(punk)에서 유발되는 밑바닥 거리문화의 결합물이다. 다시 말해 사이버펑크는 도시 거리문화에 뿌리를 둔 공격적이고 반권위주의적인 펑크적 감수성에, 기술과 인간 사이가 해체될 고도의 테크놀로지 미래를 결합하고 있다. 한편 기술적인 인물보통명사로서 사이버펑크는 ‘해커’의 문화적 대체어이다. 즉 히피의 테크노변종이 해커이자 사이버펑크이다. 사이버펑크는 테크놀로지의 세례를 받았으나, 기술적 미래의 부정적 잠재력과 긍정적 잠재력 모두를 강조한다. 사이버펑크는 컴퓨터를 해방적 추동력과 억압적 장치의 성격 모두를 지닌 야누스적 기계로 간주한다.
작년에 FBI의 끈질긴 수사망에도 18년 동안 굳건히 우편폭탄을 실어나르다 붙잡힘으로써 유나바머(Unabomber)의 반문명주의는 막을 내렸다. 테크노문화에 대한 비적응의 극단적 전형이자, 자본주의의 물질문명에 대한 기성세대의 분노를 표출했던 인물로써 보자면, 조금은 측은한 희생자였다. 어쨌거나 현실에는 이런 구식 러다이트의 빗나간 발악보다는, 해커 혹은 사이버펑크의 문화정치가 그 대중적인 세련됨을 돗보인다. 해커 사회에서 정보와 컴퓨터는 곧 권위의 기반이다. 해커들은 컴퓨터를 사용하여, 예컨대 패스워드 파괴, 트랩도어(trap doors), 트로이목마(Trojan Horse) 등의 기술을 개발하고 전수한다. 그들이 보여주는 것은 권위에 대한 기술적 도전이자, 테크노아나키즘의 실현이다.
해커들 대부분은 해킹을 게임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은 열광적인 SF 소설의 독자들이다. 그들에게는 해킹의 게임과 사이버펑크 소설이 사회적 실천의 의미와 뒤섞여 있다. 디지털자본가들에게 이들은 골치아픈 존재이다. 디지털 저작권, 보안 등 상품화될 가치들이 있는 것들의 웬만한 것들은 하드웨어, 소프트웨어를 막론하고, 모두 다 변형시키고 풀어헤친다. 닌텐도세대의 자유로움이 현실적인 이윤논리를 부담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그들은 네트를 방랑하고, 얘기를 나누고, 미지의 것을 탐험하고, 놀길 원한다. 자기만의 영상을 다른 이들에게 나누고, 공유하는 행위가 그들이 지닌 원칙이다. 독식, 독점, 권위, 논리, 이성보다는 공유, 자유, 개방, 감성이 그 우위에 선다.
분명한 사실은 이들 네트세대가 인터넷이나 영상을 통해 접하는 가공된 현실이란, 그들 자신의 삶이자 현실이란 점이다. 이들에게 영상은 삶의 경험과 기준이다. 텍스트에 친숙한 부모세대는 네트를 두려워한다. 부모세대는 네트를 수렁으로 보며, 자신의 자식들이 그 수렁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지 못한 과거의 세대는 자신의 두려움을 자식에게 전가한다. 통신모뎀을 빼앗고, 심한 경우엔 컴퓨터 자체를 못쓰게 만든다. 그러다 보니 본의 아니게 디지털상품의 광고주들도 기성 세대에 대한 급진적인 설득 작업을 펼 수밖에 없다. 그 유명한 최불암이 컴퓨터 광고에 나섰다. 최불암은 컴퓨터에 빠져 정신을 못차리고, 자식은 졸린 눈으로 아버지인 최불암에게 안자느냐고 짜증스럽게 묻는다. 이에 대한 최불암의 응답, “너나 먼저 자, 임마”. 이 배꼽잡는 말은 자식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오히려 기성권위에 대한 도전장이다. 부모들이여, 아이들에게서 컴퓨터를 빼앗지 말라! 당신도 최불암 정도로 컴퓨터에 빠질 수 있다. 두려움은 버려라. 아이들은 수렁에 빠진 것이 아니라, 영상과 네트가 그들의 삶일 뿐이라고 부르짓는 것이다.
새로운 네트세대의 무질서 속에서도, 그들에게 내려오는 하위문화적 원칙은 있다. 컴퓨터 접근권을 완전하게 보장하라, 정보를 무조건적으로 공개하라, 모든 권력을 분권화하라, 디지털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라, 권력과 투쟁하라, 권력 체계에 소음(noise)을 되먹임(feedback)하라,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라(DiY), 극단의 스릴을 즐겨라(surf the edge). 이들의 강령은 크게 보면 두 부분이다. 정보의 자유와 권력의 해체. 그들을 하위문화로 보는 근거는 결국 디지털 정보 독점에 대한 저항과 자유로운 유통의 정신이다. 물리적으로 굳게 잠겨있는 모든 통제권과 이로부터 나오는 약호의 일방성과 규제를 거부하고 공개하려는 것은 신선한 정치 프로젝트가 될 수 있다. 문제라면 이들이 경제적 지위나 신분에 구속받지 않으면서, 단지 정보의 활용 능력에 의해 이합집산한다는 점에서, 과연 대항문화적 주체가 될 수 있는지는 미지수다.
대항문화 주체를 향하여
사실 21세기는 기성 권위의 힘으로 미래를 헤쳐나가기에는 밑천이 부족하다. 개인의 창조성과 실험성이 미래 준비의 자산이 된다. 여기서 테크노문화 세대의 자기 스스로의 개성과 자유를 발산하는 방식은 매우 중요해진다. 빠르게 적응하고, 혼란스러우나 스스로의 동일성을 찾아내며,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그들의 행동 양식이 장점이 된다. 특히나 대안적 미디어 전략과 관련하여 거대 자본에 의한 첨단장비에 밀리고 있는 실정을 고려한다면, 그들의 테크노문화 실험은 하위문화에 힘을 실어줄 수 있다. 그들은 최선의 문화정치적 비전을 산출해내는데, 충분조건은 아니더라도 필요조건인 것만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들의 자유스러움이 앞서 우려한대로 개인 중심의 말초적 디지털 ‘몽환’(hallucination)으로 빠질 수도 있다.
또한 그들의 개성과 자유가 디지털기업이 이끄는 스타일 정치문화의 미끼로 이용될 수도 있다. 신세대 욕망을 자극한 상품의 미끼라는 유혹이 도사릴 수 있는 것이다. 자본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별짓는 그들의 영역화의 작업은 그래서 중요하다. 한편에서는 문화정치학의 새로운 정초와, 다른 한편에서는 새로운 문화 실험의 사례들의 발굴 작업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요컨대, 문화의 집단적 표현 형식의 새로운 징후를 읽어내어 이론화하는 것과 테크노문화적 실천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 테크노 시대의 문화집단에 대한 지형짜기와 그 집합적 실천의 모색, 이것이 21세기 문화정치의 화두이자 출발이다.
[중앙대 대학원 신문 111호] (200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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