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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즐거운 몽상가일 뿐?

<69><몽상가들>

 

모두가 몽상가일 뿐이었다고,

그 시절은 꿈의 시절이었다고,

빛나는 젊음은 무엇이든 탐닉하지 못해 안달이 나 있었고,

무엇이든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위한 여정에 다름 아니었다고,

그렇게만 말해 버리는 것이 싫었다.

 

한 때 뜨거웠으나 이제는 시시해져버린 청춘들이 그렇게 떠들어대지 않아도,

지금 이 세상은 뜨거워 본 적 없이 냉소적이고 이성적인 청춘들로 넘쳐나고 있지 않은가.

 

지금 세상과 싸우는 사람들, 그들 모두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사랑해.

아름다움과 즐거움으로 충만해야 할, 그러나 빼앗긴,

자기 몫의 삶을 되찾기 위해 피눈물 흘리는 자들 앞에,

영화는 이렇게 무력한가? 혹은,

이렇게 무력함을 조장하는가?

 

그 꿈을, 그 에너지를 어떤 '비전'으로 보여준다기 보다는,

모르겠다. 나에겐 그랬다. 무력함, 이었다.



<69> 역시 거슬리는 구석이 상당하지만, 그나마 귀엽게 봐 줄 수 있겠다.

 

 

우리들의 청춘 시절이 비극적인 까닭은 지독한 입시지옥에 시달려서가 아니다. 돌이켜 생각할 때 가장 아쉬운 것은, 나와 내 친구의 꿈이 같았다는 것. 나와 친구가 아닌 이의 꿈도 같았다는 것. 청춘이 꾸는 꿈만으로 이 세상의 어느 한쪽에서는 바람이 불고 태풍이 일 수 있음을 전혀 알지 못했다는 것. 우리를 둘러싼 갑갑한 세상을 향해 돌 한 번 던져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는 것. 그래서 우리에게는 빛나는 청춘의 시간이 없었다는 것. 너무 빨리 늙어버려서, 이제는 세상을 감당하기에 너무나 힘이 빠져버렸다는 것. - 소설가 공선옥..

 

<몽상가들>을 읽어내는 여러가지 방식이 있겠지만,

어쨌든 이 영화는, 영화광들의 영화다.

68년 5월 혁명의 작은 혁명이라고도 일컬어지는 앙리 랑글루아(씨네마떼끄 관장) 해임 사건으로 시작해서... (재현과 뉴스릴의 흥미로운 교차편집)
"신선한 이미지"를 보는 행위에 대해 표현하는 나레이션은.. 관능적인 느낌마저 준다.

(하지만 이자벨의 처녀성이 그렇게 비유되는 건, 아.. 싫어..)

 


 

베르톨루치는 매튜의 입을 빌어 영화 만들기에 대해,

피핑 탐, 관음증, 부모의 침실을 훔쳐보는-거역할 수 없는 짜릿한 범죄...

그런 얘기들을 한다. 이 영화 역시, 그에 충실하게 '훔쳐보기'의 매력으로 짜여져가고..

나로 말하자면... 예술의 자기반영적인,

그러니까 이런, 영화 만들기에 관한 영화를 무척이나 좋아하고,
이런 식의 편집이나 대사들을 즐긴다.

서로가 서로의 레퍼런스가 되고 중첩되고 분열되고 새롭게 의미가 생성되는.

(여기서는, 글쎄. 새로운 의미의 생성까지 나아가는 것 같지도 않다.)

 

그 정치적 관점의 모호함만 아니라면 좋아했을텐데. 쩝.

모호함이 아니라 불쾌함인가.

(무셰뜨의 자살과 이자벨의 자살이 같이 놓일 수 있는 건 아니다.)

 

"거미의 계략"은 20대 초반이었던 나에게 꽤나 충격적인 영화였고,

일견 각성시킨 영화이기도 했다. 그렇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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