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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이의 눈길이 나를 피하지 않던 날, 소통에 대해 생각하다

습지괴물양이 강아지 구름이를 데리고 온지 어느덧 서너달이 넘어가는 요즘. 내 손을 두번이나 물어 분노에 떨게 만들었던 구름이. 습지괴물양은 구름이를 키울 수 있는 장소가 없어져서, 새로 살 곳을 찾기 위해 굉장히 바쁜 시간을 보냈다.

 

친척을 통해 시골집에도 데려갔었는데, 그 곳은 개를 식용으로 키우는 집이었고, 사람들 품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생활하던 구름이는 낯선 곳에서 철장에 갖혔다가 몸부림을 치는 바람에 콧등이 찢기는 상처를 받았다. 보다못한 습지괴물양은 구름이를 다시 데리고 왔고, 최근 몇달처럼 사무실 옆에 이불을 깔아주고 재우는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다.

 

주인만 따르고, 낯선 사람에게는 컹컹 짖어대고, 사무실 사람들도 손도 대지 못하게 움츠러있던 구름이도 사무실에서 먹고 자고 싸게되면서 어느덧 이 생활에 익숙해졌나보다.

 




두번째 내 손을 물었던 날, 나의 이성을 잃은 발길질과 뭇매를 맞았던 구름이는 나만 보면 습지괴물양 치마밑에 숨고 공포스러운 눈빛을 보내곤 했었는데, 이제는 담배라도 피우려고 구름이 옆 의자에 앉아있으면 가만히 다가와 발밑에 드러눕기까지 한다.

 

그게 기특하기도 하고, 살 곳을 잃어서 안스러운 마음에 종종 구름이에게 혼잣말하듯 말도 걸어보긴 하지만, 아직까지는 오래 눈을 마주치면 쉭 고개를 돌려버리고, 손을 전혀 댈 수 없도록 하는 구름이다.

 

그런데 오늘 아침, 무료하게 개로서는 취하기 힘든 이런 저런 해괴망측한 자세를 취하던 구름이 앞에 앉아있는데, 창밖을 보다가 구름이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구름이가 쭈그려 누운 상태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5초 후면 눈을 돌리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흘러도 구름이는 나를 계속 바라본다.

'

저 인간은 도대체 뭐하는 사람일까' 하는 분위기가 풍기긴 했지만... 그 조금의 변화에 구름이와 나의 험악했던 관계가 어느덧 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브라질에서 낯선 이국어로 대화를 나누면서 소통이라는 문제를 생각해볼 기회가 많았었는데, 복잡한 단어와 긴 문장을 사용하지 않아도, 혹은 손짓 발짓 만으로도 소통이 되는 것을 느끼면서 찰나의 바디랭귀지만으로도 '이 사람과 나는 지금 뭔가 통하고 있구나'라는 기쁨을 갖게 됐었다.

 

그런데 짧은 단어도 언어 자체로는 소통이 되지 않는 강아지 구름이와의 이 눈빛 교감이 나에게는 더욱 큰 기쁨을 줬다. 구름이에게 인정받고 싶은 나의 기대가 컸기 때문인 것인가? 아니 그보다는 '무언가가 흐르고 있다'는 느낌 자체만으로도 기뻤던 것 같다.

 

그런 기쁨을 느끼는 한편, 나와 주변의 인간관계를 동시에 돌아보게 되는데, 무수하게 많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뭔가 풀리지 않는 갈증은 나를 항상 괴롭게 만든다.

 

브라질에서 언어문제로 애를 먹을 때, 나의 생각을 말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축복이로구나 생각하면서 한국으로 돌아가면 많은 사람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한달이 넘게 지난 지금 여전히 소통은 어렵고, 나 자신을 드러내는 것도, 상대방이 생각하고 느끼고 있는 것을 알아내기는 너무나 힘들다.

 

차라리 언어가 없는 세상이라면, 이것 저것 복잡하고 복합적인 조건과 상황을 따지지 않고 그 순간의 감정과 욕구에 충실하면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새롭게 만들어갈 수 있을까? 활자화되지 않은 몸의 언어로 소통하던 원시인들은 더 순수하게 사랑을 키워나갔을까?

 

너무 많은 생각들이 존재하고, 거칠은 폭력과 상처내기가 난무하는 지금, 눈빛과 몸으로 마음을 전하는 단순한 세상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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