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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지난 1월 브라질 현장탐방 및 세계사회포럼 참가기. 휴~ 두달이 다 돼가는데 언제 마무리 되려는지... -_-;;

4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03/07
    브라질, 세계사회포럼을 가다 ④(8)
    토리
  2. 2005/02/25
    브라질, 세계사회포럼을 가다 ③(1)
    토리
  3. 2005/02/25
    브라질, 세계사회포럼을 가다 ②
    토리
  4. 2005/02/25
    브라질, 세계사회포럼을 가다 ①
    토리

브라질, 세계사회포럼을 가다 ④

CCFD 일행이 MST 대학을 방문해 풍경을 둘러보고 있다.

 

* 이 글은 참소리에 연재하고 있는데, 이제 네편째... 헥헥~ 두편 남았습니닷!!


새로운 브라질을 만든다- MST 대학

 

 

땅없는 사람들 캠프에서의 세 번째 날(21일), 저녁 무렵이 되자 장대처럼 쏟아지던 비가 멈추고, 일행들은 어딘가로 이동해야 한다고 전해 들었다. ‘Mystic Ceremony’라는 표현에 ‘일행이 모두 천주교인들이니까 종교행사를 하나 보다’ 생각하고, 종교를 갖고 있지 않은 나는 망설이다가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숙소에서 1백여미터 떨어진 곳으로 걸어가니 커다란 폐공장 처럼 생긴 건물이 보였고 문 앞에 있던 캠프의 아이들이 우리 일행에게 다가와 한명씩 손을 잡고 안으로 안내했다.

아이들과의 아쉬운 작별

건물 안에는 캠프의 주민들이 동그랗게 원을 만들어 기다리고 있었고 전기불 대신 자동차 헤드라이트로 불을 비춘 행사장이 마련돼 있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떠나는 우리들을 위해 송별행사를 준비해준 것이었다. 우리 일행은 들어서면서 장미꽃 하나씩을 선물로 받았고 주민들 사이에 서서 함께 원을 만들었다. 원 안에는 색깔을 입힌 왕겨(탈곡 후 벼 껍질)로 세계지도가 그려져 있었고, 포르투갈어로 프랑스, 아프리카, 한국 등 나라 이름이 쓰여져 있었다.



▲왕겨로 만든 세계지도와 정성스레 송별행사를 치러준 캠프의 주민들.

주민들은 우리에게 “땅없는 사람들의 캠프를 방문해 줘서 고맙다. 앞으로도 연대하자”는 메시지와 함께 선물을 주었다. 나중에 열어보니 직접 나무를 깎고 쌀알로 장식하고 ‘마누엘 네토’ 캠프 이름이 새겨 넣은 조그만 탁상용 장식장, 귀여운 곡괭이 모형, MST에서 발간하는 ‘TERRA(땅)’라는 월간잡지, 어린이들의 포르투갈어 동요집 등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나무를 깎아 만든 반지를 하나씩 받았는데, 이 반지는 ‘사회정의를 위해 나는 신과 결혼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했다.


예상치 못한 정성스러운 선물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 지 머뭇거리는 사이, 주민들이 준비한 노래공연이 진행됐다. 아코디언, 조그만 기타 등을 든 연주자들의 흥겨운 노래가락에 맞춰 주민들과 나를 비롯한 일행들은 함께 춤을 췄다. (사람들은 젊은이들끼리 어울려 두손을 맞잡고 친밀하게 춤을 췄지만, 카메라를 들고 있었던 탓인지 아무도 나에게 춤을 권하지 않았다. 나중에야 카메라를 가방에 집어넣고 여자아이들 서너명과 함께 원을 만들어 빙글빙글 돌며 춤을 췄는데, 청년들과 춤을 추고 있는 마르가리타, 크리스텔이 그리 부러울 수가 없었다.) 두시간 정도 행사가 진행되고 몇몇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갔지만 젊은이들과 아이들은 숙소 앞에 남아 늦은 시간까지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며 밤이 깊어갔다.


▲떠나기 전 모두 함께 기념사진 촬영.
마지막 날(22일) 아침에도 주민들은 이른 시간부터 숙소에 모여서 떠나는 우리를 배웅해줬다. 특히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던 건 함께 여러 가지 놀이를 했던 아이들이었는데, 엄지손가락과 중지손가락을 부딪쳐 ‘딱’ 소리를 내는 것을 잘 하지 못했던 아이 완더스는 며칠을 연습해 조그만 소리를 낼 수 있게 됐다며 버스가 출발할 때까지 우리 옆에서 소리내기를 계속했다. 기념사진을 몇 장 촬영하고, 사람들은 아쉬운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만남과 작별인사 모두 껴안고 양볼에 서로 키스하는 것이었는데, 어색해서 껴안기만 했던 나도 이번엔 아이들 하나하나를 꽉 껴안고 진하게 뽀뽀를 해줬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면서, 아이들의 노래를 녹음한 것을 반복해 들었다. 옆자리에 앉은 마르가리타와 함께 노래를 들었는데, 마르가리타도 “캠프에서 만난 아이들이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것 같다”며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땅없는 사람들, 10년 프로젝트로 스스로 학교를 만들다


차량 소통이 거의 없던 캠프를 벗어나 조그만 마을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우리는 MST 대학에 도착했다.


잘못된 토지관리정책에 반대하며 시작된 이들의 운동은, 이제 토지점유를 넘어 브라질 전체의 농지개혁과 새로운 주체들을 만들기 위한 투쟁으로 확장되고 있다. 친환경적이고 공동체적인 농경법의 개발, 농산물 유전자조작에 대한 반대운동, 그리고 각종 사회개혁운동 등. 그리고 MST 대학을 스스로의 손으로 세워 보다 폭넓은 활동을 위한 주체들을 재생산하고 있었다.


▲언덕위에서 본 MST 대학의 일부풍경. MST 대학에 다닐 학생들이 학교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담은 신문을 판매하고 있다.
우리가 학교를 방문했던 날은 마침 MST 대학이 정식으로 문을 열기 전날이었다. 학교는 들어가는 입구부터 공사가 마무리되지 않아 포크레인이 길 한가운데 들어서 있고, 군데군데 땅이 파여진 흔적이 있었다. MST 기념품을 판매하는 곳에서 물건을 사고, 각자 흩어져서 학교를 구경하며 돌아다녔다.


학교에는 공사하는 사람과 함께 10대에서부터 4~5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있었고 넓은 운동장 한 켠에는 약 1천여명이 모여 집회와 같은 행사를 하고 있었다. 눈에 띄는 것은 컴퓨터를 이용할 수 있는 휴게실이었는데, 학생들이 사용하고 있는 컴퓨터 화면을 보니 운영체제가 윈도우가 아니라 리눅스였다. 이 학교에 있는 컴퓨터는 모두 리눅스냐고 물어봤더니 그렇다고 말했다. 컴퓨터 운영체제에 있어서도 독점적인 윈도우를 지양하고 대안적인 운영체제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다. (일행에게 이 사실을 얘기했더니 리눅스가 뭔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대개의 국가에서 8~90% 이상을 윈도우 운영체제가 차지하고 있다 보니 당연한 반응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강의실로 보이는 공간에는 브라질 각지의 캠프에서 온 사람들의 침낭과 짐들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중에 들은 설명으로는, 이 MST의 무토지 농민운동 활동가들은 이 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10년을 준비했다고 한다. 기획작업에 수년 건물 토대를 만드는 데만 4년이 걸린 이 학교 설립을 위해 전국 각주의 캠프에서 60여명씩 사람들을 보내고, 이들이 흙과 돌을 재료로 해 몇 차례의 오류를 거치며 가장 친환경적인 공간을 구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학교의 한 실무자는 “전문가들이 하는 게 아니다 보니 건물을 짓는 것도 설계작업에 문제가 있어서 2번을 새로 지었다. 그런 오류를 통해 지금은 어느 건물보다 친 환경적이고 훌륭한 건물이 됐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학교를 연 후에는 MST 활동가와 캠프의 주민들이 이 대학에 다니며 농업, 언어, 컴퓨터 등 다양한 학과목을 배우며 보다 체계적인 활동을 펼칠 계획이다. 이들은 학교의 교육자 양성을 위해 1백여명의 활동가를 해외로 7년간 유학을 보내는 등 치밀한 준비작업을 거쳤고, 상파울로 국립대학에서도 교수들이 파견을 나와서 학생들을 가르친다고 한다.


▲돈 토마스 발드로.
다른 캠프를 방문했던 CCFD 그룹 멤버들까지 모두 함께 모인 자리에서 MST 대학의 책임자이자 천주교 사제인 돈 토마스 발드로(Don Thomas Balduro)씨는 이렇게 말했다.


“브라질의 땅없는 사람들은 새로운 관계를 만들고 있다. 가난한 이들은 운동가들의 활동 대상이 아니라 주체로 다시 서고 있다. 그들은 역사의 주체이며 자신의 미래를 바꿀 힘을 갖고 있다. 나아가 우리는 땅없는 사람들을 비롯해 남미 전국가의 빈곤계층의 운동, 인도의 달리트 운동(카스트 제도의 최하위 계급의 차별철폐운동), 국가가 없는 사람들의 운동 등 인종차별, 성차별 등 모든 차별에 반대하는 운동에 함께 하며 함께 연대할 것이다. 땅은 자연 공동체의 상징이고, 우리의 운동은 다른 사회,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운동이다.”


브라질 좌파정권의 우경화 경향은 외부의 보수언론들로부터 ‘보라! 좌파정권도 이렇듯 훌륭한 정책을 하고 있지 않느냐’며 칭송받고 있지만, 그들로부터 권리를 박탈당한 이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투쟁을 일구어가며 정부의 편향을 바꾸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드는 길을 열어나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아~ 마르셀로


여기에서 잠깐, 앞에서도 언급했던 우리 일행의 가이드 마르셀로에 관한 가슴 아픈 에피소드를 얘기하고 넘어가야겠다. 캠프에서의 사흘, MST 대학에서의 하루로 꼬박 나흘간 우리와 함께 하며 자질구레한 대화까지 친절하고 차분하게 통역해주었던 MST 활동가 마르셀로.


▲마르셀로.
며칠을 함께 있다 보니 일행들과 사적인 대화를 나눌 기회도 꽤 있었는데, 31살의 이 남성은 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하고 졸업한 후 브라질에서 가장 큰 규모라는 한 언론사에서 저널리스트로 일하다가 3년 전부터 땅없는 사람들 운동에 뛰어들게 됐다고 한다. 마르셀로는 자신도 직접 캠프 생활을 하면서 우리와 같은 방문자들에게 땅없는 사람들의 운동을 설명해주고, 또 운동을 조직하는 일에 힘쓰고 있었다.


가족에 대한 얘기도 들을 수 있었는데, 마르셀로는 자신이 캠핑하고 있는 곳을 직접 방문한 어머니가 “왜 하필 네가...”라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해주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운동의 대의에는 동의하지만 자식의 고생스러운 생활을 보기 안타까워하는 어머니가 있다면 누구나 괴로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잘나가는’ 언론사에서 직업으로 의무화된 기자일을 하는 것보다 사람들을 만나며 새로운 것을 만드는 현재 자신의 일에 만족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영어 전공에 저널리스트로 활동했다는 경력과 나이도 비슷하고, 게다가 ‘체 게바라’를 연상케 하는 외모 등으로 개인적으로 큰 관심(!)을 갖게 됐는데, 함께 했던 일행의 나머지 4명의 여성들도 예외는 아니었나 보다. 가장 젊은 크리스텔이 대뜸 ‘아이가 몇 명 있느냐’고 질문하자, 마르셀로는 자신은 독신이고 결혼의 계획이 없다고 말했다. 이때부터 일행 여성들이 마르셀로의 옆에서 친밀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는데, 사적인 대화는 익숙지 않은데다가 영어가 잘 되지 않는 나로서는 그런 상황을 연출할 수가 없어서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각오를 확실히 세운 것은 이때가 아니었나 싶다.)


그러나 MST 대학을 방문하던 날. 영어가 제일 짧은데다 촬영을 한다는 이유로 일행에서 이탈해 길을 잃어버리는 일이 잦았던 나를 잘 챙겨주던 마르셀로 옆에 낯선 빨간머리의 여성이 서 있었다. 어디로 이동하든지 마르셀로 옆에 꼭 붙어있어 우리를 눈살 찌푸리게 만들었던 그 여성은 나중에 알고 보니 함께 MST 활동을 하고 있는 그의 오래된 여자친구였다. 나를 비롯한 일행 여성들은 “그는 독신이라고 말했지만 결코 혼자는 아니야”라고 수군거리며 가슴 아파해야 했다.


MST 대학에서의 일정이 끝나고 상파울로 시로 돌아가야 할 시간. 우리는 마르셀로를 위해 새 다이어리 북에 각자 감사의 메시지를 자기 나라의 말로 적어서 작별의 선물을 전했다. 이메일 주소 등도 교환하고, 나는 마르셀로에게 캠프에서 찍은 아이들의 사진을 보낼테니 꼭 전해달라고 당부하며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성실하고 친절한 브라질의 한 열성 활동가와의 만남은 그렇게 끝났지만, 남미의 운동 그리고 세계화에 반대하는 운동을 계속하는 한 그와의 조그만 인연은 계속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작은 희망을 가지며 우리는 자리를 떠났다.


드디어 세계사회포럼이 열리는 포토알레그레(Porto Alegre)로


23일 일주일여간 머물렀던 상파울로 시를 떠나 제5회 세계사회포럼이 열리는 도시 포토알레그레로 출발했다. 각자 미리 비행기표를 끊었기 때문에 개별적으로 이동을 해야 했는데, 다행히 아폴로니에라는 프랑스 흑인 청년과 비행기가 같아서 그의 도움으로 두시간의 비행기 여행은 수월하게 이뤄졌다. 그는 영어를 못하고 나는 프랑스어를 몰랐지만 의사소통에는 그다지 무리가 없었다.


포토알레그레 시는 브라질 남부에 위치해 있는데, 상파울로에 비해 훨씬 한적하고 조그만 도시였다. 공항에 도착하고 보니 각국 각지의 단체들이 피켓을 들고 방문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니 세계사회포럼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실감했다. 우리는 안내인이 나오지 않아 직접 택시를 타고 숙소인 리터 호텔로 이동했다.


순조로웠던 이날 나의 여행은 호텔에 도착한 순간 난관에 부닥쳤다. 프론트에서 CCFD 일행으로 단체예약이 돼 있을 숙박객 명단에 나의 이름이 없어서 방을 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다른 일행들은 도착하지 않았고, 무거운 짐을 들고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발을 동동 굴렀지만, 포럼이 시작되는 시기에다가 여름이어서 성수기인 호텔에서 함부로 방을 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브라질로 오기 전 꿨던 악몽이 현실로 나타났나 보다, 이제 혼자 따로 떨어져서 브라질을 헤매야 하는가보다 생각하며 불안에 떨었다.


로비에서 기다린 지 두 시간 정도 지나서야 호텔 측에서는 명단 입력에 오류가 있었다며 새로운 방의 룸키를 건네주었다. 뒤늦게 도착한 베트남 친구 칭과 또 다시 한방을 쓰게 됐는데, 이런 우여곡절이 있었던 탓인지 다른 일행은 3~5명씩 비좁게 쓰는 방을 나와 칭은 두명이 넓고 편한 방을 쓸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브라질 방송에 출연하다!


▲세계사회포럼이 열리기 사흘 전. 메인 행사장 풍경
짐을 풀고 난 후 땅없는 사람들 캠프 방문을 친해진 마르가리타와 크리스텔 등 일행들과 함께 세계사회포럼이 열리는 장소를 방문했다. 장소는 호텔에서 버스로 약 15분, 걸어서 한시간 정도 되는 거리에 있는 해안가였다. 아주 넓은 홀에 대규모로 회의가 진행될 거라는 예상과 달리 도착해서 본 포럼 장소는 폐공장과 잔디밭에 세운 천막들로 넓게 분산돼 있었다. 일요일에는 해안가를 따라 장신구 등 수제품을 파는 벼룩시장이 열리는데 마르가리타와 함께 그곳을 거닐고 아이쇼핑을 하며 시간을 때웠다.


산책을 마친 후 마르가리타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오는 다른 일행을 위해 포럼 참가자 명단을 확인해야 한다고 해서, 천막으로 세워진 안내데스크로 갔다. 기다리는 동안 나는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갑자기 ENG(야외촬영) 카메라를 든 카메라맨과 리포터로 보이는 사람들이 내게로 다가와서 인터뷰를 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나는 망설이다가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세계사회포럼에 어떻게 참가하게 됐느냐는 질문이었다. 나는 CCFD라는 단체를 통해 일주일전에 브라질에 도착해 브라질의 운동현장을 돌아봤고 아주 인상적이었다고 영어로 더듬더듬 말했다. 어찌나 엉성하게 말했는지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장면이 진짜 TV에 나오게 되면 큰일이다’ 생각하며 진땀을 흘렸는데, 다행히 리포터가 ‘당신 나라의 말로 다시 한번 얘기해 달라’고 주문했다. 한국말로 화면을 내보내고 영어로 말한 것을 통역해 포르투갈어로 자막을 내보내겠다는 생각이 들자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인터뷰가 끝난 후에야 정신이 들어 안내데스크에서 구경하고 있던 자원활동가에게 방금 다녀간 사람들이 어느 방송이냐고 물었더니, 브라질 연방 TV라고 대답해줬다. 세상에! 외국사람과 대화 한번 나눠보지 못한 내가 이 먼 곳으로 와서 TV에 출연하게 된 것이다. (나는 포럼기간 내내 만나는 일행들에게 TV에 출연했다고 자랑하고 다녔다)


세계사회포럼을 기대하며...


포럼이 열리는 날은 26일. 24~25일 1박 2일간은 호텔에서 CCFD가 주관하는 토론 프로그램에 참석했다. CCFD가 주관하는 세계화에 따른 경제적 빈곤과 북반부, 남반부 차별 문제에 관한 토론을 했는데, 대륙별 이슈를 중심으로 다루다보니 아시아는 칭과 나 달랑 두명밖에 없어서 다른 그룹의 토론을 청취하는 정도에 그쳐야 했고, 토론마저도 프랑스어로 이뤄져서 이틀간의 일정은 고역이었다. 그나마 틈틈이 진행되는 댄스, 노래 등의 친목 프로그램이 있어서 고된 일정을 버틸 수 있었다.


이틀의 일정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마음은 이미 처음 참가하게 되는 세계사회포럼에 대한 기대로 기울었다. 물론 10만명이 넘게 참가하는 행사에서 내가 뭘 듣고 배울 수 있을까, 대규모 행진 중에 길이라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한국 참가단을 잘 만날 수 있을까 등등 걱정이 앞섰다. 36~8도를 넘나드는 이 무더운 날씨와 뜨거운 땡볕 아래에서 한국에서도 백옥같이 지켜온 내 피부를 다 태우지는 않을까 하는 사소한 걱정도 함께.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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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세계사회포럼을 가다 ③


MST 깃발을 들고 서있는 마누엘 네토 캠프의 아이들

 

무토지 농민운동 공동체 사람들과의 소중한 만남

 

* 이 글은 참소리에 연재하고 있는데 한달이 다 지나가도록 이제 세편을 썼답니다. -_ㅠ 아직도 세편이 남았는데....

 

1월 19일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나흘간의 현장방문 일정을 위해 풀어헤쳐두었던 여행가방을 다시 정리해야 했다. 짐을 정리한 후 강당에 모여 설명회를 들은 후에야 내가 어디를 방문하는 지를 알게 됐는데, ‘땅없는 사람들 운동(Landless Movement, 정확히 하면 무토지 농민운동, 그러나 이 글에서는 필요에 따라 자의적으로 두 개 용어를 모두 표기하겠다)’ 캠프로 상파울로 시에서 약 10KM, 혹은 100KM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영문 표기된 안내서만 보고 전쟁, 내란 등의 상황으로 나라를 잃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인가 생각할 정도로 사전지식이 없었는데, 땅없는 사람들의 운동조직인 MST(Movimento Dos Travalhadores Rurais Sem Terra) 활동가가 진행한 설명회마저 구체적인 내용을 설명해주기 보다는, ‘브라질의 사회주의 정당운동과 대중운동의 관계’라는 어려운 내용으로 진행돼 나는 더욱 갑갑했다. 나중에야 가지고 간 세계사회포럼 관련 한글자료를 보고 이해할 수 있었고 일단 그 내용을 참조로 이들의 운동을 설명해보겠다.

 

 


♪ 마누엘네토 캠프 아이들의 노래 ♪

 



브라질 대중운동의 양대축 노총(CUT)와 MST, 그리고 정치권력과의 긴장관계

 

▲세계사회포럼 개막행진에서 MST 활동가들의 대열.
브라질의 특수한 상황에서 만들어진 MST 운동은 ‘새로운 브라질을 만드는 대안운동’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한국(남한)의 85배가 넘는 광활한 토지를 갖고 있지만 대지주에게로 땅이 집중되면서 수많은 이주농민들을 양산한 정부의 잘못된 토지관리정책. 이런 소유구조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80년대에 대지주의 미경작지를 땅없는 농민들에게 분배하도록 하는 조항을 만들었다. 그러나 세계은행 등 해외 자본의 압력으로 보수정권은 이 조항을 사문화하려 했고, 좌파정권이 들어선 현재에도 땅없는 농민들에 대한 정책은 커다란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

 

전체인구 1억 5천만 명 중 5백만 명의 농민이 땅이 없어서 빈곤층으로 전락했고, 농민들이 MST와 함께 대지주의 토지로 들어가 집을 짓고 무단경작하는 운동이 84년부터 시작됐는데, 이것이 무토지 농민운동이다. MST 자체 통계로 약 1백만명의 농민들이 대지주의 토지를 무단점유하고 있고, 대지주가 고용한 사립경호원과 경찰들과의 유혈충돌도 여러차례 일어났다. 그리고 20여년이 지난 지금 MST는 브라질 노총(CUT)과 함께 정부의 정책에 압력을 넣을 수 있는 힘센 대중조직이 됐다.

 

사회주의자들이 많은 브라질에서 MST는 조직 규모가 큰 만큼 이들의 현 좌파정권을 바라보는 시각도 제각기 다를 수밖에 없는데 현재 집권한 노동당(PT)식의 민주적 사회주의, 새로운 형태의 브라질식 사회주의, 쿠바식 사회주의 등 다양한 견해를 갖고 있다고 한다. 대체적으로 이들이 취하는 태도는 ‘PT당을 동맹세력으로 보지만 토지개혁을 위해 정부에 지속적으로 압력을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설명회에서 알아들은 대로만 요약한다면, “우리는 사회주의 운동의 위기를 조직적 위기, 이론의 위기, 그리고 (실천) 프로그램의 위기라고 판단한다. 현재 브라질에서 사회주의 정당이 집권을 했지만, 노동자를 조직하는 것은 정당이 아니다. 정당운동과 대중운동은 각자의 역할이 있다. 룰라 정권 하에서도 정당운동과 사회운동의 관계는 바뀌지 않는다. 우리의 무토지 농민운동은 운영구조, 실천과제 등에 대해 끊임없는 실험들을 해나가고 있고 대중운동을 양적, 질적으로 상승시킬 것이다. 무토지 농민운동을 계급투쟁과 별개의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있지만, 소유구조를 변화하고 사회변혁을 도모한다는 점에서 우리 운동은 계급투쟁의 일환이다”는 것이 MST 활동가의 말이다.

 

전기가 없는 오지로 떠나다

 

점심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 모두 언어에 따라 세 개 그룹으로 나뉘어져 세 개의 캠프를 방문하게 됐는데, 영어 그룹은 상파울로 시에서 약 35KM 떨어진 ‘마누엘 네토(Manuel Neto)’라는 이름의 캠프를 방문한다고 했다. (중간 정도 거리가 먼 캠프였는데, 나중에  10KM 떨어진 캠프를 방문한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없었고, 100KM 떨어진 캠프를 방문한 사람들은 중간에 차가 고장나 이동에만 하루를 꼬박 소비해야 했다는 소식을 듣고 운이 좋았다는 생각을 했다.)

 

그곳에서는 전기와 물이 나오지 않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캠코더, 카메라, 녹음기를 충전할 수 없고, 데이터를 백업할 용도로 가지고 온 노트북이 무용지물이 되는 상황이라 당황했다. 방법은 가지고 있는 배터리를 꽉꽉 충전시키고, 최대한 아껴서 사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브라질에서 가장 멋진 기억을 남겨준 일정이었는데 촬영 자료는 가장 적은 것이 지금도 아쉽다.)

 

나와 함께 그룹을 이룬 사람은 남아프리카에서 온 즈와인, 오스트리아에서 온 마르가리타, 그리고 프랑스에서 온 알라인(브라질 일정 총 지휘자), 크리스텔, 장 마레, 캐서린, 에디트, 장미쉘, 디더 등 총 10명이었다. 말은 영어 그룹이지만 10명의 멤버 중 7명은 프랑스 사람이어서 여전히 영어는 그룹 안에서 소수언어였다. 심지어 간단한 회의를 할 때마저 이들은 프랑스어를 사용해 나를 화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적은 인원으로 나흘간 공동생활을 하면서 서로에 대해 많은 걸 이해하고 친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MST 활동가인 마르셀로가 우리를 캠프로 안내해주고 통역을 해주었고 (마르셀로에 대한 ‘가슴 아픈’ 이야기는 다음 편에), 에릭이라는 잘생긴 백인 청년이 버스 운전을 위해 우리와 일정을 함께 했다.

 

차를 타고 상파울로 시 서쪽으로 약 한시간 반 정도 가니 드넓은 잔디밭처럼 보이는 논과 낮은 언덕에 젖소를 키우는 목장들이 나타났다. 캠프 입구로 보이는 문을 열고 숲길로 10분 정도 더 들어가니 드문드문 허름한 폐가들이 보였고 차는 거기에서 멈췄다. 목적지인 마누엘 네토 캠프에 도착한 것이다. 차에서 내려서 가장 먼저 본 것은 외부에서의 낯선 손님들을 신기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아이들이었다.

 

▲숙소에서 왈디르, 카르밈 부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그룹 멤버들.
이 캠프에서 집행부 역할을 하고 있는 왈디르, 카르밈 부부가 우리를 반갑게 맞아줬고, 머무를 숙소로 안내해줬다. 약 25평정도 면적에 나무로 지은 별장같이 예쁜 집이었다. 이 집을 보며 ‘땅없는 사람들이 사실은 별로 가난하지 않은건가’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이 캠프에서 가장 좋은 집이었고, 마을회관 같은 역할을 하고 있고 캠프를 방문하는 손님들을 위해서만 개방되는 특별한 건물이었다.

 

‘마누엘 네토’라는 캠프 이름은 이곳에 처음으로 온 활동가의 이름이고 그는 지난 2000년 죽었고,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해 지어졌다고 한다. 이 캠프에는 총 40가구, 1백 20여명의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우리가 머물렀던 숙소에는 전기를 꼽는 코드가 있어서 혹시나 충전할 수 있을까 살펴봤는데 전기는 들어오지 않았다. 땅없는 사람들 캠프 중 80%는 전기를 아예 쓰지 않으며 물이 나오지 않는 곳도 60%에 이른다고 한다. 이 캠프에서는 전기 대신 밤에 불을 밝히기 위해 기름 등을 썼고(그것도 한 두시간 정도로 제한된 시간만), 다행히 물은 잘 나왔다. 그러나 주민들의 소중한 재산을 낭비할 수 없다는 생각에 우리는 땀과 먼지로 뒤범벅이 됐지만 첫날에는 샤워도 하지 않을 정도로 조심스러워했다.

 

짐을 푼 후 어둑해진 숙소 거실에서 왈디르, 카르밈 부부에게 캠프 생활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다음은 이들의 설명을 인터뷰 형식으로 정리한 것이다.

 

▲왈디르(오른쪽), 카르밈(왼쪽) 부부.

- 한국에도 정부의 잘못된 개발정책으로 만들어진 철거민, 홈리스들이 있다.
우리는 땅없는 사람들(Landless)을 집없는 사람들(Homeless)과 구별하고 있다. 땅없는 사람들은 집이 없는 극빈층을 포함해 땅이 없어서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농민들을 말한다.

 

- 현재 농사로 생계가 유지되나?
완전한 자급자족은 되지 않고 있다. 아직도 필요한 생활물품의 대부분을 외부로부터 사와야 한다. 농산물을 물물교환하는 방식으로 생필품을 얻고 있다. 정부로부터는 쌀, 파스타, 우유 약간씩을 지원받는다.

 

- 캠프는 어떻게 운영되나?
캠프의 운영은 모든 가족이 회의를 통해 결정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데, 10가구당 한명씩 여성을 대표로 선출해 그들이 집행부 역할을 맡고, 회의 운영, 캠프 운영 등을 총괄한다.

 

- 각 집마다 아이들이 굉장히 많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우리 운동은 아이들을 활동가로 치지 않는다. 그들은 미래의 무토지 농민운동 활동가다. 아이들이 자라서 약 20세정도가 되면 결혼을 하고 새 가정을 꾸리게 되는데, 새로운 곳으로 이동해 땅을 점유하고 캠프를 늘려나간다. 우리 운동은 그렇게 성장해 왔다.

 

- 캠프생활을 하며 농사를 짓고 있는 당신들의 가치관은?
우리의 정착의 초점은 자연을 소유물로 여기지 않으며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새롭게 구성하는데 있다. 우리는 우리가 먹을 만큼을 생산하고 분배하지 이윤을 위한 경작을 하지 않는다. 또 땅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땅을 나누지만, 땅을 상품으로 판매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다.

 

소박하고, 정겹고, 다정한 사람들

 

대화가 끝나고 나니 캠프에서 제일 요리를 잘하는 아주머니 두 분이 우리를 위해 소박하지만 맛있는 식사를 만들어 줬다. 살림이 넉넉하지 않기 때문에 고기는 전혀 없고, 쌀과 감자스프, 토마토 상추 샐러드 같은 음식이 나왔는데 여느 브라질 음식과 다르게 너무 짜지 않고 담백해서 아주 만족스러운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맛있는 음식은 고기에 슬슬 물리기 시작한 내게 캠프에서 지냈던 시간이 가장 행복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두 번째 이유였다. 첫 번째 이유? 그 이유는 아래에 나온다.)

 

해가 완전히 저물고 캠프의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외지에서 온 방문자들을 위해 환영식을 해주기 위한 것이었다. 검게 그을린 피부로 흑인과 분간하기 힘든 외모의 사람들도 있었고, 전형적인 남미 백인의 얼굴도 있었다. 캠프에는 임신한 여성들과 어린이들이 많이 있었는데 한 가족 당 5~6명의 자녀를 두는 게 보통이라고 한다.

 

▲땅없는 사람들의 민중가요를 부르고 있는 캠프의 아이들.
통통~ 소리가 나는 독특하게 생긴 기타를 가진 중년 남자 두 명과 10대 남자아이 한명의 기타연주 공연이 시작됐다. 숙소 앞 현관에 등 하나를 달아 무대를 만들고 40여명의 주민과 우리가 동그랗게 둘러앉아 남미 특유의 서정적이고 때로는 흥겨운 노래를 감상했다.

 

 

나중에는 아이들도 모두 무대로 나서 노래를 불렀는데, 노래 제목은 잘 모르지만 땅없는 사람들의 애환과 투쟁의 의지를 담은 민중가요라 했다. 입을 방긋거리며 열심히 노래하는 아이들의 모습도 귀여웠고 음악이 어찌나 구슬프면서도 감성적이던지, 배터리가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도 나는 카메라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노래공연이 끝나고 우리를 소개하는 시간이 됐다. 자기가 온 나라와 고유의 음식을 소개하고, 자기 나라의 음악을 들려주면 된다고 했다. ‘아리랑’을 할까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를까 이것저것 고민하는 중, 첫번째로 남아프리카에서 온 즈와인이 자기 소개를 하고 아프리카 빈곤층이 부르는 민중가요를 노래했다.(그의 노래를 듣고 나는 모든 흑인은 노래를 잘한다는 편견을 깨게 됐다.) 그런데 즈와인의 음악도 어찌나 느리고 조용하던지 두번째로 인사를 하는 나마저 그런 노래를 하면 분위기가 ‘다운’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일어나서, “나는 한국에서 왔고, 한국 사람들은 밥과 ‘김치’를 먹습니다. 배추에 매운 고추로 만든 잼을 넣고, 땅 밑에 보관해 신맛이 나게 만든 것이 김치인데, 한국사람들은 하루라도 김치를 먹지 않고는 못삽니다. 그러나 나는 매운 음식을 많이 좋아하지 않아서인지, 여러분이 만들어준 음식이 너무 맛있고 마음에 듭니다.”라고 말했다. 주민들은 음식을 땅밑에 넣어서 보관한다는 얘기에 신기해했고, 브라질 음식이 좋다는 나의 ‘간사한’ 발언에 너무 기뻐해줬다. 노래를 부를 차례가 됐고, 나는 문득 떠오른 ‘뽀뽀뽀’ 노래를 율동과 함께 열심히 불렀다. (‘뽀뽀뽀’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나는 손을 입에 댔다가 관중쪽으로 뻗는 율동을 했는데 그 와중에도 젊은 청년들을 찾아서 손을 내밀었다)

 

또 그룹 멤버 중 한국에서 3년을 살았다는 장 마레 라는 프랑스 인이 나서서, ‘한국에서는 인사를 하거나 감사 표시를 할 때 허리를 숙인다’고 말해, 나는 ‘고맙습니다’와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법을 주민들에게 가르쳐주기도 했다.

 

소개가 끝나자 아시아인이 나 하나여서인지 더 크게 박수를 받았지만, 앉고 나서 ‘너무 가볍개 소개하고 가벼운 노래를 부른 것이 아닌가’ 후회가 들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우리나라 민중가요 중에 ‘우리에게 땅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울 어머니 살아 생전에 작은 땅이라도 있었다면...’으로 시작되는 땅없는 설움을 노래한 ‘땅’이라는 제목의 노래가 생각났고, ‘다시 노래하겠다고 할까’하고 후회가 밀려왔다. 그러나 환영식이 모두 끝나고 사람들이 노래가 재미있고 좋았다고 다시 여러번 칭찬을 해줘서 금새 ‘뭐 괜찮겠지’라며 아쉬움을 떨쳤다.

 

비닐과 흙으로 만든 집, 우주비행장 옆 작은 농장

 

▲캠프에서의 둘째날 아침. 꼬마 마테우스의 집 뒤로 펼쳐진 풍경이 아름답다.

다음날 20일, 한국에서는 8시 이전에 일어나는 게 기적이었던 내가 브라질에 와서는 7시 정도에 일어나는 생활을 했는데, 캠프의 맑은 공기 때문이었는지 6시부터 일어나 숙소 주변을 산책했다. 장마철이라 틈틈이 내린 비가 그친 후 맑게 갠 하늘, 온통 풀밭과 나무들로 뒤덮인 마을, 울음소리도 희한한 닭들이 대여섯마리씩 떼를 지어 산책을 다니는 평온한 풍경에 나는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기에 바빴다.

 

두번째 날에는 캠프 주민들이 살고 있는 집과 농장 등을 둘러보는 일정이 마련돼 있었다. 먼저 귀염둥이 막내 마테우스를 비롯해 다섯명의 자녀를 두고 있는 집에 찾아 갔다. 나무로 구조를 세우고 검은 비닐천을 여러겹 씌워 만든 집. 안으로 들어가니 일곱 식구가 사는 방은 침대가 빼곡히 들어서 있을 뿐 여유공간이 전혀 없었다. 한켠에는 부엌이 있었는데, 수도시설을 해놓지 않아 멀리 강가에서 물을 길어다 큰 통에 받아두고 쓴다고 했다.

 

다른 집도 비슷했는데 황토흙으로 벽을 댄 집, 주변에서 가져온 중고 쇼파와 침대 같은 것들이 어지럽게 놓여있었는데 이곳 역시 먹고, 자는 기본적인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만이 있었다. 숙소로 머물렀던 집이 좋아서 평균적인 삶을 살고 있으리라 짐작했던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마누엘 네토 캠프는 집구조를 그나마 갖추고 있는 편, 나중에 방문한 인근의 ‘오거배나류’ 캠프는 땅 소유주와의 긴장 관계가 더 심각한 상태였는데, 캠프 주민들이 돌아가며 보초를 서는 삼엄한 경비 초소를 지나 도착한 이 캠프는 완전히 텐트촌이었다.)

 

▲흙으로 지어진 집, 그리고 부엌.

▲둘째날 방문했던 또 다른 캠프 '오거배나류'. 텐트에서의 원시적인 삶에 토지주와의 긴장감이 흐르고 있지만, 사람들에 얼굴엔 웃음이 가득하다.

마누엘 네토 캠프의 주민들은 선조 때부터 대대로 농부였고 아버지들 또한 농사를 짓다가 땅이 없어서(땅값이 너무 비싸 소유할 수 없다) 캠프에 정착하게 됐다고 한다.

 

이들은 캠프 인근에는 우주비행실험을 하는 비행장이 세워져 있는데 그 바로 밑에 땅을 개간해 호박, 콩, 옥수수, 마뇨크 등의 작물을 소규모로 키우고 있었다. 쌀농사는 대규모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들이 할 수 없다고 했다. 마뇨크는 마뇨크 식물의 뿌리 부분을 잘라내 껍질을 벗긴 것으로 조리된 음식을 먹으면 감자와 비슷한 맛이 나는데, 방문한 농장에서 건네준 마뇨크를 생으로 먹어보니 생고구마 맛이 났다.

 

▲땅없는 사람들의 농장.

엄청난 고압전기를 사용하는 우주비행장이 바로 옆에 있다는 사실을 내가 실감하게 된 것은  작은 에피소드 때문이었다. 비가 조금씩 흩뿌리고 있었고 여름 햇살이 따가운지라 나는 들고 간 우산을 양산 대신 사용했다.

 

우산을 쓰고 있더 나를 본 왈디르가 통역자인 마르셀로에게 뭐라고 수군거렸다. ‘고압전기가 흐르고 있어서 우산을 쓰고 있으면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황급히 우산을 접고 주변을 둘러보고 그제야 녹색 풀밭과 낮은 언덕 위로 고압전선과 철물구조들이 흉측하게 늘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웅웅거리는 소리가 계속 귓가에 맴돌고 있었던 것은 그 고압전선에서 나는 소리였다.

 

▲돼지 축사.
캠프의 주민들은 농작물과 함께 돼지와 닭을 키우고 있었다. 축사도 방문했는데  10대 후반의 남자아이들이 돼지 키우는 일을 맡고 있었다.

 

 넓은 축사였지만 돼지는 20여 마리로 그다지 많지 않았다. 돼지들은 코에서 콧물을 질질 흘리고 있었고 축사 안에서 설명을 듣고 있던 우리들에게 불쑥 불쑥 다가와 깜짝 놀라게 만들기도 했다. 가끔 성난 돼지가 우르르 뛰어오기도 했는데, 아이들은 능숙하게 돼지를 제지시키고 자리에 눕혀 쓰다듬어 주는 등 전문가적 소질을 발휘했다.

 

TV, 컴퓨터가 없어도 즐거운 캠프의 아이들

 

세번째날(21일)이 되자 가끔씩 내리던 비가 장마비로 바뀌어 야외활동이 불가능한 상황이 됐다. 오후까지 내동 숙소에만 머물러 있어야 했던 우리는 브라질 현지 탐방에만 여념이 없던 마음을 놓이며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고, 캠프를 떠나는 날 주민들에게 전해줄 선물을 무엇을 할까를 논의하며 오전 시간을 보냈다.

 

나는 한국에서의 활동을 소개하기 위해 평화운동자료와 부안 반핵투쟁 자료를 사진과 영문소개글로 엮은 스크랩북을 가지고 갔는데, 보여줄 기회가 없다가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를 묻기에 바로 스크랩북을 사람들에게 보여줬다.

 

각종 차별과 탄압에 맞서 싸우고 있는 이들이기에 정부정책의 폭압성과 에너지정책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쉽게 공감했다. 그러나 유독 묻는 질문은 아주머니들의 삭발투쟁 사진을 보며 ‘머리를 깎는 것이 어떤 의미냐’는 것이어서 유교사상까지 거론하며 삭발의 의미를 설명해줘야 했다. 많은 사람들이 유심히 자료를 살펴봤고, 부안투쟁을 승리로 이끈 주민들의 힘에 대해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또 통역자 마르셀로로부터 브라질 사람들의 특성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브라질 사람들은 천성이 느긋해서인지 어떤 회의를 2시에 하기로 했다면 그 회의는 3시에 시작하는 걸로 간주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브라질 사람들의 ‘Yes'를 곧이곧대로 들어서는 안되며 확실히 하기 위해서는 세번을 되물어야 한다고 한다.

 

나는 한국사람도 그렇다고 맞장구를 치고 코리안타임이라는 것과 예의를 차린다면서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점에 대해 설명했다. 그러나 대화가 축구에 대한 얘기로 넘어가면서 한국도 축구를 좋아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았고 내가 “한국 사람들은 대개 축구를 좋아한다. 그러나 나는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일절의 관심도 없다”고 단호하게 대답했더니, 사람들은 “오! 당신은 한국사람답지 않군요!”라며 웃었다.

 

▲하루종일 비가 내린 셋째날. 무료한 이들을 위해 숙소 앞 현관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점심식사 후 오스트리아에서 온 마르가리타와 나는 계속 내리는 비를 감상하며 숙소 앞 현관에 앉아있었는데, 캠프의 아이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귀여운 5살짜리 꼬마 마테우스에서부터 돼지 농장에서 만났던 10대 후반의 청소년들까지. 아이들 인권교육 프로그램 기획을 담당하고 있다는 마르가리타가 먼저 포르투갈어 사전까지 뒤져가며 아이들과 대화를 나눴고, 짧은 단어로 오가던 대화는 어느덧 손뼉치기 놀이 등 각종 놀이로 변해갔다.

 

‘소코소코 파치파치, 소코소코 비라비라’라고 읍조리며, 손바닥과 손등을 마주치는 놀이(우리나라로 치면 쎄쎄쎄 정도?)에서부터 시작해, 휘파람 불기, 실뜨기, 사방치기, 숨은 반지 찾기 놀이까지 서로 알고 있는 모든 놀이는 다 꺼내서 손짓발짓으로 설명하며 놀이를 즐겼다. 재미있는 건 사방치기는 방법은 약간씩 다르지만 거기 모인 각국의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 놀이였고, 실뜨기는 유럽 사람들은 모르지만 브라질과 한국에서는 방법이 똑같았다는 것이다.

 

여러 놀이를 하다가 나는 ‘전기놀이’를 생각해냈고, 아이들에게 전기가 오도록 만들어주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전기놀이는 손목을 잡고 피가 통하지 않게 만든 후에 자기 나이만큼 손을 쥐었다 편 후 천천히 손목을 풀며 손바닥 위에 손가락으로 원을 그리면, 피가 통하면서 마치 전기에 감전된 듯한 느낌을 갖게 하는 것. 처음 보는 놀이에 아이들은 모두다 해달라고 달려들었고, 10명 정도 되는 아이들을 다 해주고 났더니 어깨가 뻐근해졌다.

 

그런데 우리 식사를 준비해주시는 덩치가 큰 아주머니도 자기에게 해달라고 한다. 한손으로 잡히지 않는 손목을 부여잡고 나이를 물었더니 ‘49세’. 진땀을 빼며 작업을 하자, 아주머니도 신기하다며 웃었고, 그 후 10여분 동안 나는 팔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이들이 계속해서 새로운 게임을 생각해 내 정신없이 함께 어울려 놀다가 문득 내가 컴퓨터를 쓰지 않은지가 이틀이 됐는데 그에 대한 생각은 전혀 떠올리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 갖추고 있지만, 아이들은 이 자연 속에서 얼마든지 즐거운 놀이꺼리들을 고안해내고 그걸로 즐기고 생각하며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버스운전으로 우리와 함께 한 에릭이 영어를 조금 할 줄 알아서, 10대 후반의 남자아이들과도 대화를 나누게 됐다. 근처 공립학교에 다니고 있는 그들은 조그만 라디오를 갖고 있었는데, 전기를 쓸 수 없는 곳에서 라디오만이 대중문화를 접할 수 있는 창구로 보였다. 어떤 가수를 제일 좋아하냐고 물어봤더니 서슴치 않고 ‘브리트니 스피어스’라고 답했다. 이유를 물었더니 예뻐서란다.

 

이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학교를 다니면서 동시에 부모님의 일손을 돕는다. 그러나 캠프의 주체로는 치부되지 않는다. 이들이 약 20세가 되면 결혼을 해서 새로운 가정을 꾸리게 된다. 그리고 독립해서 다른 지역에 정착하게 된다. 그 때 새로운 캠프의 활동가가 되는 것이다.

 

아이들과 지냈던 시간이 많았고 또 즐거워서 캠프에서의 일정은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고, 아쉬운 작별의 시간이 다가왔다. (다음 편에 계속)

 

▲바닥에 분필로 아이들 얼굴을 그려줬더니 아이들이 저마다 기념사진 촬영을 요청했다. 말은 하나도 안통하고 바디랭귀지로 모든 걸 해결했지만 아이들의 사랑스러움과 친밀함은 마음깊이 전해져 왔다. 브라질을 다시 가고 싶은 곳으로 만든 첫번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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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세계사회포럼을 가다 ②

 

상파울로 시의 한 빈민가 풍경

 

브라질의 이면을 보다 : 실업운동

 

 

* 이 글은 참소리에 연재하고 있는데 한달이 다 지나가도록 이제 세편을 썼답니다. -_ㅠ 아직도 세편이 남았는데....

 

17일, 브라질에서의 두근거리는 두 번째 아침이 밝았다. 일어나자마자 마주치는 룸메이트 칭을 비롯해 세면장, 식당에 가면서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Good Morning'이라고 인사하는 것은 한국에서는 ‘밥먹었냐?’라고 인사도 잘하지 않는 내게는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프랑스 사람들은 괜시리 지나치면서 ‘사봐?’라고 묻는다. 칭에게 물어보니 영어로 치면 ‘How are you?'로 안부를 묻는 인사란다. 처음엔 영어로 ‘I'm Fine!, I'm OK!'라고 대답했다가 그냥 프랑스어로 ‘사봐’라고 대답하면 된다는 것을 알고 그렇게 했더니 그들은 놀라면서도 무척 기뻐해줬다.) 조그만 바게트 빵과 햄, 치즈, 샐러드로 아침식사를 하고 더부룩해진 배를 안고 본격적인 브라질 현장체험 프로그램에 참가하기 위해 강당으로 갔다.

 

▲이틀간의 일정을 마치고 제출한 평가용지에 끄적거린 그림.
전편에서 말했듯 언어의 문제는 시작부터 고역이었는데, 둘째날이 돼서야 개인에게 닥친 더 큰 어려움을 깨닫게 됐다. 프랑스어, 포르투갈어, 스페인어, 영어 총 4개 국어로 진행되는 설명회, 거기에다 영어도 잘 못하는 내가 기록을 남기기 위해 설명회 도중에도 캠코더와 카메라, 녹음기를 들고 이쪽저쪽을 움직이느라 영어 통역자 옆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일단 음성녹음기는 통역을 맡아준 또 다른 ‘안나’라는 이름의 여성에게 맡겨놓기는 했지만 현장에서 곧바로 설명회 내용을 이해하고 노트에 메모할 수 없으니 이만저만 심란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또 나중에 약 40시간 가량 녹음된 내용을 확인하려니 음질도 이상하고 시간도 오래 걸리고 장난 아닌 상황이었다)

 

이렇듯 언어의 문제를 다시 꺼내는 이유는 읽는 이들에게 뭔가 정보가 부족한 느낌이 든다면 그건 순전히 이런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변명하기 위해서다. 어쨌건 17일 오전 브라질 상황을 개괄적으로 소개해주는 설명회가 시작됐다.

 

 




브라질, 풍요롭지만 풍요롭지 않은 나라

 

설명회는 브라질의 사회, 정치, 경제적 상황과 가톨릭 실업운동과 여성운동에 대해 소개하는 내용으로 진행됐다.

 

우리나라(남한) 면적의 85배가 되는 면적으로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나라로 1억 5천의 인구를 가진 브라질. 세계 15%의 물을 차지하고 있고, 자국 필요 90% 이상의 석유를 생산하고 있다. 15개 이상의 언어가 있지만 오랜기간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아 이들은 포르투갈어를 사용하고 있다.

 

교육문제에 대해서도 얘기해줬는데 문맹률이 12%로 교육받지 못하는 국민들이 많이 있으며, 공립학교가 85%를 차지하고 있지만 사립학교 문제가 브라질에서도 심각하게 떠오르고 있는 문제라고 한다. 좋은 직업을 갖기 위해서는 한달에 1천 달러를 내며 사립학교에 다녀야 하는 실정으로 교육에 있어서도 빈부의 격차가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브라질 여성들의 조건을 설명하고 있는 활동가와 2004년 브라질 정당들에 대한 지지율.
경제적 상황에 대한 브라질 실업운동단체 활동가의 입장은 단호하다. “룰라가 당선됐을 때 많은 사람들은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룰라가 대통령이 된 후, 약 3백만개의 많은 일자리를 빼앗겼다. 우리는 정부로부터 기대하지 않고 우리 힘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그리고 정부에게 압력을 불어넣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여성운동단체의 활동가도 브라질에서의 여성들의 조건을 설명하며 정부와 집권당에 대한 불신을 크게 표출했다. 브라질 전체 여성 중 8%만이 대학을 다니고 있으며, 5%만이 인터넷을 사용하고 있으며 약 30%정도는 인터넷 자체가 무엇인지 모른다고 한다. 전체 여성중 26.7%가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처지이지만, 41%의 여성이 직업을 갖고 있고 나머지 인구는 일자리를 갖지 못한 상태다. 그녀는 여성 불평등을 악화시키는 조건으로 여성의 일자리를 위협하는 신자유주의와 성적대상화의 상품으로 브라질 여성을 세계에 알리는 미디어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함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가톨릭 단체 중 하나인 PO에서도 가톨릭 사회운동의 현황을 설명했다. 그들은 “브라질의 교회가 싸워야 할 첫 번째 과제는 ‘경제적 정의’”라고 말한다. 사회적 약자를 위해 싸웠고, FTAA에 반대하는 투쟁 등에도 함께 하고 있는 이들은 브라질에서 가장 커다란 종교가 가톨릭이지만 대부분의 소속 단체들이 사회변화에는 관심이 없음을 안타까워하며 가톨릭 사회운동 이론정립에도 힘쓰고 있다고 전한다.

 

한국을 떠나기 전 얼핏 읽었던 자료에 ‘더운 나라 국민의 특성상, 풍요로운 환경이지만 일을 열심히 하지 않아 경제적으로 풍요롭지는 않다’는 내용이 적혀져 있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알아들은 내용들이었지만) 이들의 얘기를 들으며 엄청나게 왜곡된 정보였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보수 기득권층이 집권해 있다가 변화를 맞은 정치상황이지만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전세계적 흐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측면에서 한국과 브라질의 정치적 상황과 서민들의 삶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물론 집권한 좌파정권에 대한 기대와 이 좌파정권이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을 강도 높게 진행하면서 민중들이 받은 배신은 한국의 그것보다 훨씬 크리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브라질 상파울로에서의 실업운동 : 우리 힘으로 대안을 만든다

 

▲반갑게 방문객들을 맞아준 재활용공장의 사람들. 이들은 모두 실업자였다.
세시간 가량의 설명회가 끝나고 점심식사를 마친 후, 상파울로에 있는 실업운동단체(Worker Pastoral, 우리말로 하면 천주교 노동사목 정도) 현장을 방문하는 일정이 시작됐다. 세 개의 그룹으로 나뉘어져 이틀간에 걸쳐 약 다섯 개의 현장을 돌았다.

 

봉고차 정도 크기의 미니버스를 타고 상파울로 시내 인근을 제대로 돌아볼 수 있었는데, 운전사 안토니오라는 50대 남성 역시 실업자로 있다가 실업운동단체를 통해 버스운전을 하게 됐다고 한다. 그는 평소에는 학생들을 태워서 학교로 이동시킨다고 한다. (상파울로에 있는 동안 그를 계속 볼 수 있었는데, 아시아에 관심을 갖고 있었는지 나와 뭔가 대화를 하고 싶어 했지만, 그는 영어를 몰랐던 관계로 인사말만 겨우 나눌 수밖에 없었다.)

 

실업운동단체 현장이 있는 곳은 부유층이 살고 있는 지역 바로 옆의 이피랑가(Ipiranga)라고 하는 빈곤지역이었다. 버스를 타고 가며 매우 길목도 구불구불 복잡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통역자 안나는 브라질에서 있었던 경험을 얘기하며 “인구 3백69만의 인구가 살고 있는 대도시인 상파울로는 지나친 도시확장의 부작용으로 어떤 목적지에 도시 중심부를 통과해서 오후 2시까지 도착하려면 새벽 3시에 일어나야 한다”고 설명해준다. 다소 과장된 감도 있지만 차가 가득 들어서 있는 도로를 보며 그럴 수도 있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활용 공장. 잡지 등 종이 폐품과 가전제품들이 이곳에서 다듬어져 다시 판매된다.

첫 번째 들른 곳은 버스로 20분 정도를 타고 도착한 허름한 공장. 재활용 공장이라 했는데, 플라스틱병, 폐지, 가전제품 부품 등을 수거해 분리하고 그걸 되파는 일을 하고 있었다. 일을 하고 있던 서너명의 아주머니, 아저씨들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줬다. 상파울로에 있는 많은 실업자들을 조직해 운영하고 있는 공장으로 이 근방에 있는 대부분의 실업자들은 이 재활용 공장을 통해 생계를 유지해나가고 있다고 했다. 이들의 조직구조는 의외로 탄탄했는데 조직분야에서부터 자신들을 인터넷 홍보하는 역할까지 세분화된 역할분담을 하고 있었고, 이는 대개 여성(주부)들이 담당하고 있었다.

 

▲실업운동단체에서 눈에 띄인 귀여운 아이들. 인터넷 홍보를 담당하고 있는 엄마 덕에 카메라는 익숙할텐데도 낯선 동양인이 카메라를 들이대니 잔뜩 긴장해버렸다.

 

▲상파울로 이피랑가 지역에 있는 빈민가. 앞쪽의 건물들이 이들이 직접 지은 집.
두 번째로 방문한 곳은 빈민촌이었다. 안내를 해준 에드워드는 이곳이 완전 슬럼가는 아니라고 설명해줬지만 마을은 마치 공장폐부품을 모아놓은 것처럼 언덕들에 빼곡히 허름한 집들이 들어차 있었고, 그 외곽에는 깨끗한 집들이 가지런히 늘어서 있었다. 처음엔 이 깨끗한 집들과 허름한 집들이 빈부의 격차를 드러내주는 것인가 생각했는데, 이 주변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직접 자신의 집을 새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처음엔 정부지원을 요청했지만 정부는 말을 들어주지 않았고 직접 자신들이 결단을 내려 집을 지었다.

 

딸과 둘이 살고 있는 한 독신여성 활동가의 집을 직접 둘러봤는데, 약 13평 정도(내가 살고 있는 원룸과 거의 크기가 비슷해 보였으므로)되는 2층집으로 흙과 도색제 등을 직접 칠해 환경적으로 이로울 수 있는 집을 꾸몄다고 한다. 조직적으로 진행된 집짓기 작업. 그러나 빈민가 건물에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그들은 그냥 거기가 좋다고 새집으로 이사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이상하지...)

 

마을 주변의 공터에서는 아주 낯익은 풍경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아이들이 연날리기를 하고 있었다. 연날리기 풍경은 이곳저곳에서 목격할 수 있었는데 어린이들이 아주 좋아하는 놀이로 보였다.

 

▲거리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아이들의 연날리기.

세 번째로 들른 곳은 실업운동센터로 앞서 둘러본 곳들을 포함해 실업자들을 위한 여러 가지 활동을 지원하는 단체였다. 그곳에는 방문자들을 위한 판매 부스도 있었는데 십자수, 손인형 등 수공예품이나 빵과 과일 음료수를 만들기도 한다고 했다. 주어진 일자리를 찾는 일도 하지만, 이 단체들은 대개 떨어지는 일을 기다리기보다는 직접 생계를 위한 일거리를 만들어내는 활동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에게도 고민이 있는데, 요즘 젊은이들은 실업문제, 사회문제의 심각성을 별로 느끼지 못하고 이 운동에 동참하지 않아 젊은 세대가 많이 없는 것이 참 아쉽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현장을 둘러보면서 아주머니, 아저씨들과 어린이들은 많이 발견할 수 있었지만 젊은이는 다음날 들른 연대의 집(Solidarity House)에서 본 몇명밖에 없었다.

 

자급자족이 1차적 목표, 실업자들의 농장

 

다음날 오전 연대의 집에서는 브라질 활동가들과 나를 포함한 방문자들간의 교류행사가 있었다. 브라질을 나누는 ABC 지역이라는 곳에 대한 설명을 들었는데, 이때 녹음기에 이상이 생기는 바람에 구체적으로 어떤 곳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지리적으로, 자연기후적으로, 문화적으로 구분되는 구역이라는 정도로 개략적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내가 이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길이 없다.

 

▲고기로 가득찬 접시. 또 한그릇의 샐러드가 위장을 달래주고...

이들이 준비한 브라질 토속춤을 구경하고 함께 어우러져 춤추며 오전 시간을 마쳤고(정말 이 사람들은 춤추고 노래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안내해준 커다란 레스토랑에서 뷔페식으로 차려진 화려한 점심식사를 했다. 한국에서도 늘 그렇지만 뭘 담아야 효과적일지 한 번 먹어서는 알 수 없는 나는 맛있어 보이는 음식마다 다 담았는데 나중에는 접시가 가득차서 적당량을 먹고 있는 다른 사람들 앞에 접시를 내놓기가 창피할 정도였고, 이걸 다 먹어치우는 것도 고된 일이었다. 차려놓은 음식을 보니 닭고기, 돼지고기로 만든 요리가 대부분, 조리법도 튀기거나 소스와 함께 삶는 것이 대부분이어서 맛의 차이를 거의 구분하지 못했다.

 

▲실업자들의 농장. 넓지는 않지만 오밀조밀한 공간에 야채들을 정성스레 키우고, 건물도 세우며 모양새를 갖춰나가고 있다.
점심식사를 마친 후에는 실업운동단체에서 직접 운영하는 농장을 방문했다. 짧은 귀로 자동차 산업 공단을 들른다고 들은 것 같았는데 알고보니 자동차 공장 등에서 해고된 실업자들이 공단 인근에 약 2년 전 직접 만든 농장을 들른다는 얘기였다. 농장은 그다지 넓지 않은 크기에 서너개씩의 줄을 이어 채소들을 심어놓았고, 이를 관리할 사람이 들어가 쉴 수 있는 조그만 움막 정도 였다.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인지 채소들은 아직 자라기 직전이었다. 거기에서 디젤오일을 만들 수 있는 열매도 봤다. (한국에서 몇 년 살았다는 장 마리 씨가 장난기 섞인 얼굴로 설명을 해줬기 때문에 이것도 사실인지 아닌지 가늠할 수 없었다)

 

이들이 택하고 있는 방식은 친환경적인 유기농. 직접 농사를 짓고 농작물로 빵을 만들어 파는 일을 한다는 것이다. 농장이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은 빵의 재료를 외부에서 사와야 하는 상황으로 완전한 자급자족은 할 수 없지만, 머지않아 완전한 자급자족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이들의 희망이다.

 

여러 가지 얘기를 듣고 싶었지만 시간이 촉박해 더 들을 수 없어 아쉬움이 남았다. 그러나 적어도 이들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생계유지 차원을 넘어 더 나은 브라질의 미래를 만들기 위해 고민하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이틀간의 일정을 마무리 하고...

 

이틀간의 실업운동단체 현장방문 프로그램이 끝이 나고 평가 시간을 가졌다. 토론시간이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각자의 소감을 종이에 적어 제출하는 것이었다. 나는 기록을 남기는데 무척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내용의 그림(맨 위)을 그리고, 한국과 브라질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이 매우 흡사하다는 것을 느꼈으며, 브라질에서 '스스로 대안을 만들려는 노력들'을 보며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적었다. (문법이 엉망이어서 죄송하다는 말도 빼놓지 않고)

 

▲브라질 젊은이들의 퍼포먼스 공연.
이어서 또 한번의 문화공연이 펼쳐졌는데, 브라질의 젊은이들이 토속적인 분장을 하고 춤과 퍼포먼스로 꾸며진 내용이었다. 거센 북소리에 맞추어서 춤을 추며 서로 싸우던 네명의 젊은이들이 싸움에 지쳐 서서히 쓰러져갈 무렵, 평화를 상징하는 여신인 듯 한 사람(통역자 안나였다)이 무대로 올라와 이들에게 푸른 잎사귀를 댄다. 이들은 다시 살아나 평화의 춤을 춘다.

 

브라질 단체활동가들에게 고맙다는 마음을 담은 각국의 단체 다이어리와 술(!) 등 선물을 전달하고, 스페인에서 온 이들의 주도로 함께 '연대'를 상징하는 노래를 부르고 첫번째 이틀간의 일정을 마쳤다.

 

▲이틀간의 일정을 마친 후 마무리 행사.

내일(19일)부터는 3일간의 일정으로 땅없는 사람들의 운동 현장을 방문한다고 한다. 전기도 없고, 물도 간혹 나오지 않을 수 있으니 채비를 잘 해가지고 가라는 충고. 전기없는 삶은 정전될 때 빼고 겪어보지 않았던 내가 무려 사흘간의 일정을 버텨낼 수 있을 것인가! 기대보다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그토록 브라질을 매력적으로 느끼게 해줄만한 사람들과 풍경을 만날 줄 누가 알았으랴.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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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세계사회포럼을 가다 ①

 

나홀로, 먼길을 떠나다

 

* 이 글은 참소리에 연재하고 있는데 한달이 다 지나가도록 이제 세편을 썼답니다. -_ㅠ 아직도 세편이 남았는데....


<편집자 주>제5회 세계사회포럼(World Social Forum)이 지난 1월 26일부터 31일까지 5박 6일의 일정으로 브라질 남부의 포토 알레그레라는 소도시에서 열렸다. 2001년 브라질 좌파 활동가와 대중조직들을 중심으로 처음 제안된 세계사회포럼은 다보스 포럼 등 자본이 주도하는 반민중적인 세계화에 저항하기 위해 처음 시작됐으며, 해가 지날수록 세계 각국의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민중들과 활동가들의 열광적인 지지와 참여를 얻었다.

 

‘경제적 빈곤과 차별 강화’를 주요 의제로 다섯번째 열린 이번 포럼에 참석한 15만명(세계사회포럼 조직위원회 추산발표)은 각기 다양한 토론 등을 통해 세계화 반대, 빈곤국가 외채탕감, 이라크 전쟁 반대를 외쳤다. 약 150여명의 한국 참가단도 여러 포럼과 캠페인, 집회 등을 통해  FTA에 대한 아시아 민중의 공동대응, 전쟁반대, 파병군 철수 등을 비롯한 3.20 국제반전행동 등 아시아민중행동을 적극적으로 제안하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성과를 이뤘다.

 

기자는 한국 참가단과는 별개로 세계사회포럼의 주요 후원단체 중 하나인 프랑스 CCFD의 초대로 포럼에 참가하게 됐다. 이 글은 세계사회포럼 참가기를 포함해 포럼 시작 전 일주일간 브라질 운동단체들과의 교류 프로그램 등을 통해 접한 브라질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기위해 작성된 글이다. 언어 문제 등 여러 조건의 문제로 세밀하고 자세한 이야기보다는 개괄적인 분위기와 개인적인 감상에 그칠 지 모르지만 브라질에서 느꼈던 여러가지 생각꺼리들이 독자들에게도 조금은 공감대를 불러올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며, 총 6회에 걸쳐 연재한다.




비행기 좌석에서 쥐가 나도록 다리를 웅크리고 앉아 있은 지 10시간. 목적지인 브라질에 도착하려면 두 시간 후에 갈아타서 12시간을 더 가야 한다. 업무처리와 여행 준비 때문에 며칠 날밤을 샌 터라 처음엔 잠을 푹 잘 수 있었지만 이젠 눈이 말똥말똥 해져서 비행기 밖만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어야 했다. (창가 쪽으로 좌석배치를 받은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내가 브라질로 홀로 떠난 이유

 

브라질 세계사회포럼 참가는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결정됐다. 세계화에 따른 빈곤과 인권문제를 다루고 있고 세계사회포럼의 주요 후원단체 중 하나인 프랑스의 가톨릭 국제연대 단체인 CCFD(Comite Catholique Contre La Faim Et Pour Le Developpement)는 지난해 인도 뭄바이에서 4회째 열렸던 세계사회포럼에 문정현 신부님을 초청했었고, 문정현 신부님은 활동가인 오두희 선배님과 함께 인도를 방문했었다. 올해 역시 CCFD는 문 신부님을 초청했지만, 평택 미군기지 싸움이 긴박해지고 있고 평화바람 활동으로 몸이 많이 안좋아지신 신부님은 다른 젊은 사람을 추천하기로 했다.

 

기왕 평화운동을 함께 한 동지가 참석하면 좋겠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고, ‘기자의 의무’로 돌아와서 보고서를 작성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판단이었는지 나에게 제안이 들어왔다. 가는 데만 하루가 넘게 걸리는 먼 거리에 한국 사람으로는 딱 한명이 가야 하니 심적인 부담이 따를 수밖에 없었고, 처음엔 ‘한번 가보지 않겠냐’는 제안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해외에는 일본 단체방문에 꼽사리를 끼어서 1주일 편하게 가본 경험밖에 없는데, 지구 반대편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는 그리 흔치 않은 기회겠다 싶어 다른 사람 추천하려던 상황을 뒤집고 ‘내가 가겠다’고 사정을 해 브라질 방문이 결정이 됐다.

 

해외를 꼭 가보겠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결정을 하고 나니, 준비기간이 2주일여밖에 남지 않았다. 20여일의 긴 공백에 대비하기 위한 참소리 업무 이월작업, CCFD에 선물할 용도로 오두희 선배님이 촬영한 작년 인도방문 기록영상을 편집하는 작업, 세계사회포럼과 브라질 현황에 대한 사전자료조사, 그리고 해외여행에 기초적으로 필요한 생활영어 공부 등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낯선 이국땅, 브라질

 

▲세계사회포럼 중 열혈 룰라 지지자로 보이는 이들의 행진.
브라질은 나에게는 무척 낯선 나라였다. 개인적으로 서양의 문화와 역사에는 통 관심이 없는지라, 축구황제 펠레가 있다는 것과 노동당(PT) 룰라가 대통령에 당선돼 좌파정권이 들어섰다는 것 정도밖에 사전지식이 없는 머나먼 땅은 생소하기 그지없었다.

 

조사해보니 나 하나만 아니라 한국과 브라질의 관계도 그러한 듯 했다. 미국으로 직행하는 비행기는 수도 없이 많지만 한국에서 브라질까지 직통하는 비행기 편은 하나도 없다. 미국이나 유럽을 거쳐서 비행기를 갈아타야만 도착할 수 있는 나라. 정보를 찾기 위해 서점을 들러보고 인터넷을 검색해 봐도 다른 나라에 대해서는 문화, 역사, 생활상이 자세하게 나오지만 남미의 개별국가에 대해서는 지극히 형식적인 관광정보 뿐이다. 전문관광책자도 남미만 유독 없다. 그만큼 브라질은 먼 나라였다.

 

그런 나에게 눈에 들어온 정보는 ‘브라질은 치안상태가 좋지 않으므로 여행자 티를 별로 내서는 안된다’, ‘차를 타고 갈 일이 있을 때는 총을 맞을 수도 있으므로 꼭 창문을 닫아야 한다’는 무서운 얘기들 뿐. 그날 밤부터 나는 해외에 나가 객사하거나 미아가 돼 정처 없이 떠도는 악몽을 꿨다.

 

그래도 브라질 현황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을 몇 개 찾을 수 있었다. 먼저 해년마다 세계사회포럼 한국참가단을 조직해왔던 단체 중 하나인 사회진보연대에서 내놓은 자료집을 보며 브라질의 정치현황이 우리나라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똑같이 IMF를 겪었고 경제위기가 닥쳐 있으며, 비교적 진보적 성향이라 할 수 있는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과 룰라 좌파정권이 들어선 시기가 유사하며, 그 후 정부가 펼치는 정책들이 국민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우편향적인 성향을 보이며 많은 비판을 얻고 있다는 점 등이다. 물론 노무현과 룰라를 동일선상에 넣고 짜맞추는 것이 무리스러운 측면도 있지만, 한국의 보수언론들이 노무현 정권을 비판하면서 인용하는 것이 좌파정권 룰라가 신자유주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일정한 동일성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브라질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와 세계사회포럼에 직접 참가해 분위기를 파악한 후로는 좌파성향 민중들의 룰라에 대한 실망과 분노는 한국에 소개된 것 이상으로 크다는 것을 알게 됐다.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편에.)

 

▲콜럼버스에서 룰라까지
또 한편의 자료는 전북대 정치외교학과 송기도 교수가 쓴 책 <콜럼버스에서 룰라까지>였다. 여행을 떠나기 직전에야 구할 수 있었던 책으로 비행기를 타고 가며 읽기 시작했는데, 지난해 노무현 대통령이 남미를 방문하기 전 필독했다는 이 책에는 미국 중심의 시각으로 왜곡된 남미를 남미의 눈으로 재해석하는 내용들이 담겨 있다. 미국, 영국 등 강대국들의 침략사와 남미 각국의 독립과정과 정치적 특수성 등을 구체적인 사례들과 함께 엮어서 편하게 책장을 넘길 수 있었다.

 

영어! 영어!! 영어?

 

해외로 떠나는데 또 한가지 두려움은 언어 문제였다. 영어영문학을 전공해 10년을 넘게 영어를 배워서 읽는 것과 듣는 것은 가능하지만, 외국인을 만나면 'How do you do'라고 해야 할지 ‘How are you'라고 해야 할지도 헷갈릴 정도로 영어는 나에게 익숙지 않았다.(문제투성이 한국 영어교육의 산실이 바로 나.) 부랴부랴 영어회화책을 장만하고 회화 테잎을 들었지만 2주일안에 문제가 해결될 리는 없고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한국에서 경유지인 영국까지 12시간을 비행하는 동안에는 걱정이 없었다. 아시아나 항공을 타고 가니 한국어만 써도 충분했으니까. 그러나 영국 공항에서 내린 후부터는 도움을 구하려면 영어를 써야 하는 상황. 영국 공항은 네 개의 건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브라질 행 비행기를 타려면 셔틀버스를 타고 이동해야 했다. 아시아나 항공사에서 쥐어준 공항 약도를 들고 직원 한명에게 “How can I go to terminal 3?”라고 더듬더듬 말을 걸었다. 내가 처음으로 외국인에게 처음으로 말하게 되는 역사적인 순간. 대머리의 험상궂은 인상의 영국인은 의외로 친절하게 ‘15분후에 버스가 오니까 타면 된다’고 답해줬다. 그때의 감동이란...

예매권을 가지고 티케팅을 하는 창구에서도 ‘Yes', 'No'만을 사용하며 무사히 표를 끊고 브라질 행 비행기를 무사히 탄 후에는 ’문제없어‘라며 자신감이 가득 차게 됐다. 그러나 창피한 에피소드는 비행기 안에서 생겼다. 스튜어디스가 틈만 나면 식사와 음료수를 제공하는데, 뭘 마시겠냐고 물어서 나는 자신있게 “커피!”라고 대답했다. 브라질에 살고 있는 일본 여성으로 보이는 스튜어디스는 못 알아듣겠다며 다시 물어본다. 액센트의 문제였다. ’코피‘라고 발음하고 ’피‘에 강세를 줘서 발음해야 했던 것이다. 당황한 나는 움츠러들었다. 스튜어디스가 다시 뭐라고 물어보는데 ’Where are you from?(어디에서 왔냐)'이라고 물어본 듯했다. 자신있게 “I'm from Korea”라고 답했다. 이상하다는 듯 쳐다본다. 아뿔싸! ‘(커피에) 프림을 넣겠느냐’고 물어본 것이었다.

 

작은 사고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몇 시간이 지난 후 다른 스튜어디스가 또 음료수를 들고 오면서 “뭘 먹겠냐”고 물어봤다. 나는 “콜라”라고 말했다. 스튜어디스가 “쿠울라?”라고 다시 물어봐서 “예스”라고 했더니 ‘구알라’라고 하는 브라질 산 탄산음료를 건네 줬다. ‘코카콜라’, 혹은 ‘코크’라고 말했어야 했나보다.

 

한국을 떠난 지 30시간 만에 목적지인 브라질 쌍파울로에 도착했다. 브라질 입국 절차는 입국신청서와 여권을 넘기기 전에 입국창구에 늘어선 줄 사이에서 안내요원들이 미리 입력사항을 체크해줘서 한국 출국 절차보다 훨씬 간편했다. 이제 출구에서 기다릴 CCFD 사람만 만나면 무사히 도착완료였다. 만나서 건넬 영어 문구를 미리 생각해둔 후 나가니 ‘CCFD'라고 쓰인 안내판을 들고 있는 중년 여성이 보인다. 반갑게 아는 척을 하며 한국에서 왔다고 말하니 브라질 여성은 더듬더듬 말한다. 자기는 영어를 못한다고...

 

그 여성은 공항을 나와 영어통역을 해줄 이탈리아 여성 안나를 소개시켜 줬다. 나 외에도 다섯 명의 사람들이 더 있었는데, 베트남, 알제리, 남아프리카 등에서 왔고 그들은 모두 프랑스어를 쓰고 있었다. CCFD 소속 회원들과 세계 각국에서 온 20여명의 사람들을 합해 총 50여명이 있는데 프랑스어를 쓰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브라질에서 사용하는 포르투갈어, 스페인어를 쓰는 사람들이 있으며, 영어를 쓰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 딱 세 명이란다. 영어 문구 몇개를 공부해 가면 20일 생활하는데 문제가 없으리라는 예상은 보기 좋게 어긋나버렸다.

 

브라질에서의 첫날 : CCFD 사람들과의 만남

 

영어를 모르는 브라질 여성 두 명이 모는 차를 타고 쌍파울로 시내로 향했다. 도시의 외곽은 도로 한쪽은 높게 세워진 빌딩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다른 한쪽은 낡고 허름한 주택들이 황량하게 서 있어 대조적인 인상을 줬다. (스프레이로 온통 낙서가 돼 있는 주택가의 외관은 더욱 빈곤한 느낌을 받게 했는데, 브라질의 낙서문화는 의미없는 문구에서부터, 소규모 상가들의 홍보수단이자, 나아가서는 브라질 젊은 층의 정치적 표현 예술임을 도시 곳곳을 둘러보며 알게 됐다.) 처음에 시내로 들어가면서는 쌍파울로 도시의 규모를 전주 정도로 예상했는데 도시 중심부로 들어설수록 서울 못지않은 커다란 도시라는 걸 느끼게 됐다.

 

도착한 곳은 공항에서 차로 약 30분정도 걸리는 위치에 있는 ‘Solidarity Center'라는 카톨릭 교육관이었다. 방을 배정받았는데 룸메이트는 베트남에서 온 ’칭‘이라는 젊은 여성이었다. 나와 같은 나이인데 베트남의 한 대학에서 프랑스어 교수를 하고 있는 이 능력있는 젊은 여성은 영어를 아주 잘하고 브라질에 있는 동안 꼬박 룸메이트로 함께 생활하며 큰 도움을 줬다.

 

▲CCFD 참석자들과 함께 한 오리엔테이션.
짐을 풀고 점심식사를 하고 나자(브라질도 쌀을 주식으로 하고 콩으로 만든 죽같은 스프를 밥에 비벼먹는데, 쌀이 길다랗고 푸석푸석할 뿐 한국에서 먹던 밥과 크게 차이 나지 않아 음식문제로는 크게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곧바로 오리엔테이션이 시작됐다. 큰 세미나실에 의자를 빙 둘러놓고 서로 소개를 하는 시간이었다.

 

CCFD 소속의 회원들, CCFD와 교류하고 있으며 브라질의 실업운동, 여성운동 단체 등에서 활동하는 사람들, 남아프리카의 빈곤운동단체에서 온 사람 등 50여명이 차례대로 자기 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막바지쯤 내 차례가 다가올수록 온몸에 식은 땀이 흘렀다. 나를 소개할 영어 문구는 미리 준비해놓지 않은 것이다. 그제야 머릿속으로 단어를 꿰어 맞추기 시작했다. 드디어 순서가 다가오고 나는 경직되고 어정쩡한 자세로 입을 열었다.

 

“Nice to meet you. I am In Hwa. I came from Korea, Jeonbuk province, I am a media activist. I am a reporter of internet newspaper, at Jeonbuk province. I'm so nervous, because I don't know french, spanish, even I am not good at english. but i'll try and try, and will show your organization, and your activities by movie, photo, and articles, to Korean people. Thank you.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한국, 전북지역에서 온 최인화라고 합니다. 저는 미디어 활동가로, 전북지역 인터넷 신문사의 기자입니다. 무척 긴장됩니다. 왜냐면 저는 불어도 모르고, 스페인어도 모르고, 심지어는 영어도 잘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열심히 노력해서 한국사람들에게 여러분의 활동을 영상, 사진, 글로 전하겠습니다. - 전하고 싶었던 말은 이것인데 문법이 맞는 줄도 모르고 그냥 내뱉었다.)"

 

소개 시간이 끝나고 나자, CCFD에서 마련한 이번 프로그램에 대한 참가자들의 기대를 대자보와 퍼포먼스로 표현하는 코너가 진행됐다. 통역자 안나, 남아프리카에서 온 흑인 즈와인, 룸메이트 칭 등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 네명이 함께 구성된 우리 팀은 ‘연대’를 주제로 여러사람이 어깨동무를 하고 걸어가는 그림을 그리고 바닥에 씨앗을 뿌리는 퍼포먼스를 했다. 다른 팀들도 각기 이색적인 퍼포먼스를 준비했는데 한 팀은 각자 허리띠를 풀러서 대자보에 천처럼 지그재그로 엮어놓고 모두 기차놀이처럼 줄을 늘어섰는데 늘어진 허리춤을 뒷사람이 추켜올려주는 방식으로 해서 행진을 벌여, 멋진 아이디어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는 별로 익숙하지 않은 인권교육 혹은 교류 프로그램이 짜임새 있게 진행되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대목이었다.

 

이어서 세계사회포럼 전에 진행될 프로그램과 생활하면서 필요한 정보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앞으로 1주일간 브라질 정치현황과 쌍파울로에 있는 실업운동, 땅없는 사람들의 운동에 대해 설명회를 갖고 직접 현장을 방문한다고 했다.

 

▲브라질 젊은이들의 흥겨운 공연.

 

저녁식사를 마친 후 각국에서 온 이들을 환영하는 문화행사가 열렸다. 남미 특유의 정서를 느낄 수 있는 기타연주와 브라질 젊은이들로 구성된 한 밴드의 흥겨운 공연이 진행됐는데, 북의 일종인 잠베이의 통통거리는 소리와 단조로우면서도 경쾌한 노래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사람들도 신이 났는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20대 젊은이부터 60대 노인까지 세대를 가리지 않고 흥겹게 어울리는 자리였다. 앉아서 촬영하며 구경을 하다 보니 누군가 레몬주스같은 음료수를 건네줬는데 마셔봤더니 엄청나게 독한 술이었다.

 

술을 홀짝거리다보니 기분도 알딸딸해지고 용기가 생겨서 노래 공연을 마친 한 가수에게 다가가서 ‘음악CD를 선물로 사가지고 가고 싶은데, 브라질의 좋은 음악이 있으면 추천해 달라’고 부탁했다. 로키라는 이름의 이 가수는 말을 잘못 알아들었는지 자기들은 음반을 아직 내지 않았다며 이달 말에 첫 음반이 나오면 선물로 보내주겠다고 한다. 한국 주소를 영문을 적어서 전달해줬더니 한국어로 자기 이름을 써달라고 했다. 메모장에 반듯반듯하게 ‘로키’라고 썼더니 굉장히 신기하고 재미있어 했다. 한국어는 재미있는 글씨였나 보다.

밤 10시가 돼서 문화행사가 끝이 나고 시차적응이 덜 돼 피곤한 몸을 침대에 눕혔다. 금세 스르르 잠이 들었고, 브라질에서의 첫날은 이렇게 무사히 마무리 됐다. 눈코 뜰 새 없이 정신없는 일정은 다음날부터 시작됐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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