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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세계사회포럼을 가다 ③


MST 깃발을 들고 서있는 마누엘 네토 캠프의 아이들

 

무토지 농민운동 공동체 사람들과의 소중한 만남

 

* 이 글은 참소리에 연재하고 있는데 한달이 다 지나가도록 이제 세편을 썼답니다. -_ㅠ 아직도 세편이 남았는데....

 

1월 19일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나흘간의 현장방문 일정을 위해 풀어헤쳐두었던 여행가방을 다시 정리해야 했다. 짐을 정리한 후 강당에 모여 설명회를 들은 후에야 내가 어디를 방문하는 지를 알게 됐는데, ‘땅없는 사람들 운동(Landless Movement, 정확히 하면 무토지 농민운동, 그러나 이 글에서는 필요에 따라 자의적으로 두 개 용어를 모두 표기하겠다)’ 캠프로 상파울로 시에서 약 10KM, 혹은 100KM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영문 표기된 안내서만 보고 전쟁, 내란 등의 상황으로 나라를 잃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인가 생각할 정도로 사전지식이 없었는데, 땅없는 사람들의 운동조직인 MST(Movimento Dos Travalhadores Rurais Sem Terra) 활동가가 진행한 설명회마저 구체적인 내용을 설명해주기 보다는, ‘브라질의 사회주의 정당운동과 대중운동의 관계’라는 어려운 내용으로 진행돼 나는 더욱 갑갑했다. 나중에야 가지고 간 세계사회포럼 관련 한글자료를 보고 이해할 수 있었고 일단 그 내용을 참조로 이들의 운동을 설명해보겠다.

 

 


♪ 마누엘네토 캠프 아이들의 노래 ♪

 



브라질 대중운동의 양대축 노총(CUT)와 MST, 그리고 정치권력과의 긴장관계

 

▲세계사회포럼 개막행진에서 MST 활동가들의 대열.
브라질의 특수한 상황에서 만들어진 MST 운동은 ‘새로운 브라질을 만드는 대안운동’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한국(남한)의 85배가 넘는 광활한 토지를 갖고 있지만 대지주에게로 땅이 집중되면서 수많은 이주농민들을 양산한 정부의 잘못된 토지관리정책. 이런 소유구조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80년대에 대지주의 미경작지를 땅없는 농민들에게 분배하도록 하는 조항을 만들었다. 그러나 세계은행 등 해외 자본의 압력으로 보수정권은 이 조항을 사문화하려 했고, 좌파정권이 들어선 현재에도 땅없는 농민들에 대한 정책은 커다란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

 

전체인구 1억 5천만 명 중 5백만 명의 농민이 땅이 없어서 빈곤층으로 전락했고, 농민들이 MST와 함께 대지주의 토지로 들어가 집을 짓고 무단경작하는 운동이 84년부터 시작됐는데, 이것이 무토지 농민운동이다. MST 자체 통계로 약 1백만명의 농민들이 대지주의 토지를 무단점유하고 있고, 대지주가 고용한 사립경호원과 경찰들과의 유혈충돌도 여러차례 일어났다. 그리고 20여년이 지난 지금 MST는 브라질 노총(CUT)과 함께 정부의 정책에 압력을 넣을 수 있는 힘센 대중조직이 됐다.

 

사회주의자들이 많은 브라질에서 MST는 조직 규모가 큰 만큼 이들의 현 좌파정권을 바라보는 시각도 제각기 다를 수밖에 없는데 현재 집권한 노동당(PT)식의 민주적 사회주의, 새로운 형태의 브라질식 사회주의, 쿠바식 사회주의 등 다양한 견해를 갖고 있다고 한다. 대체적으로 이들이 취하는 태도는 ‘PT당을 동맹세력으로 보지만 토지개혁을 위해 정부에 지속적으로 압력을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설명회에서 알아들은 대로만 요약한다면, “우리는 사회주의 운동의 위기를 조직적 위기, 이론의 위기, 그리고 (실천) 프로그램의 위기라고 판단한다. 현재 브라질에서 사회주의 정당이 집권을 했지만, 노동자를 조직하는 것은 정당이 아니다. 정당운동과 대중운동은 각자의 역할이 있다. 룰라 정권 하에서도 정당운동과 사회운동의 관계는 바뀌지 않는다. 우리의 무토지 농민운동은 운영구조, 실천과제 등에 대해 끊임없는 실험들을 해나가고 있고 대중운동을 양적, 질적으로 상승시킬 것이다. 무토지 농민운동을 계급투쟁과 별개의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있지만, 소유구조를 변화하고 사회변혁을 도모한다는 점에서 우리 운동은 계급투쟁의 일환이다”는 것이 MST 활동가의 말이다.

 

전기가 없는 오지로 떠나다

 

점심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 모두 언어에 따라 세 개 그룹으로 나뉘어져 세 개의 캠프를 방문하게 됐는데, 영어 그룹은 상파울로 시에서 약 35KM 떨어진 ‘마누엘 네토(Manuel Neto)’라는 이름의 캠프를 방문한다고 했다. (중간 정도 거리가 먼 캠프였는데, 나중에  10KM 떨어진 캠프를 방문한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없었고, 100KM 떨어진 캠프를 방문한 사람들은 중간에 차가 고장나 이동에만 하루를 꼬박 소비해야 했다는 소식을 듣고 운이 좋았다는 생각을 했다.)

 

그곳에서는 전기와 물이 나오지 않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캠코더, 카메라, 녹음기를 충전할 수 없고, 데이터를 백업할 용도로 가지고 온 노트북이 무용지물이 되는 상황이라 당황했다. 방법은 가지고 있는 배터리를 꽉꽉 충전시키고, 최대한 아껴서 사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브라질에서 가장 멋진 기억을 남겨준 일정이었는데 촬영 자료는 가장 적은 것이 지금도 아쉽다.)

 

나와 함께 그룹을 이룬 사람은 남아프리카에서 온 즈와인, 오스트리아에서 온 마르가리타, 그리고 프랑스에서 온 알라인(브라질 일정 총 지휘자), 크리스텔, 장 마레, 캐서린, 에디트, 장미쉘, 디더 등 총 10명이었다. 말은 영어 그룹이지만 10명의 멤버 중 7명은 프랑스 사람이어서 여전히 영어는 그룹 안에서 소수언어였다. 심지어 간단한 회의를 할 때마저 이들은 프랑스어를 사용해 나를 화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적은 인원으로 나흘간 공동생활을 하면서 서로에 대해 많은 걸 이해하고 친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MST 활동가인 마르셀로가 우리를 캠프로 안내해주고 통역을 해주었고 (마르셀로에 대한 ‘가슴 아픈’ 이야기는 다음 편에), 에릭이라는 잘생긴 백인 청년이 버스 운전을 위해 우리와 일정을 함께 했다.

 

차를 타고 상파울로 시 서쪽으로 약 한시간 반 정도 가니 드넓은 잔디밭처럼 보이는 논과 낮은 언덕에 젖소를 키우는 목장들이 나타났다. 캠프 입구로 보이는 문을 열고 숲길로 10분 정도 더 들어가니 드문드문 허름한 폐가들이 보였고 차는 거기에서 멈췄다. 목적지인 마누엘 네토 캠프에 도착한 것이다. 차에서 내려서 가장 먼저 본 것은 외부에서의 낯선 손님들을 신기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아이들이었다.

 

▲숙소에서 왈디르, 카르밈 부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그룹 멤버들.
이 캠프에서 집행부 역할을 하고 있는 왈디르, 카르밈 부부가 우리를 반갑게 맞아줬고, 머무를 숙소로 안내해줬다. 약 25평정도 면적에 나무로 지은 별장같이 예쁜 집이었다. 이 집을 보며 ‘땅없는 사람들이 사실은 별로 가난하지 않은건가’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이 캠프에서 가장 좋은 집이었고, 마을회관 같은 역할을 하고 있고 캠프를 방문하는 손님들을 위해서만 개방되는 특별한 건물이었다.

 

‘마누엘 네토’라는 캠프 이름은 이곳에 처음으로 온 활동가의 이름이고 그는 지난 2000년 죽었고,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해 지어졌다고 한다. 이 캠프에는 총 40가구, 1백 20여명의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우리가 머물렀던 숙소에는 전기를 꼽는 코드가 있어서 혹시나 충전할 수 있을까 살펴봤는데 전기는 들어오지 않았다. 땅없는 사람들 캠프 중 80%는 전기를 아예 쓰지 않으며 물이 나오지 않는 곳도 60%에 이른다고 한다. 이 캠프에서는 전기 대신 밤에 불을 밝히기 위해 기름 등을 썼고(그것도 한 두시간 정도로 제한된 시간만), 다행히 물은 잘 나왔다. 그러나 주민들의 소중한 재산을 낭비할 수 없다는 생각에 우리는 땀과 먼지로 뒤범벅이 됐지만 첫날에는 샤워도 하지 않을 정도로 조심스러워했다.

 

짐을 푼 후 어둑해진 숙소 거실에서 왈디르, 카르밈 부부에게 캠프 생활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다음은 이들의 설명을 인터뷰 형식으로 정리한 것이다.

 

▲왈디르(오른쪽), 카르밈(왼쪽) 부부.

- 한국에도 정부의 잘못된 개발정책으로 만들어진 철거민, 홈리스들이 있다.
우리는 땅없는 사람들(Landless)을 집없는 사람들(Homeless)과 구별하고 있다. 땅없는 사람들은 집이 없는 극빈층을 포함해 땅이 없어서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농민들을 말한다.

 

- 현재 농사로 생계가 유지되나?
완전한 자급자족은 되지 않고 있다. 아직도 필요한 생활물품의 대부분을 외부로부터 사와야 한다. 농산물을 물물교환하는 방식으로 생필품을 얻고 있다. 정부로부터는 쌀, 파스타, 우유 약간씩을 지원받는다.

 

- 캠프는 어떻게 운영되나?
캠프의 운영은 모든 가족이 회의를 통해 결정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데, 10가구당 한명씩 여성을 대표로 선출해 그들이 집행부 역할을 맡고, 회의 운영, 캠프 운영 등을 총괄한다.

 

- 각 집마다 아이들이 굉장히 많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우리 운동은 아이들을 활동가로 치지 않는다. 그들은 미래의 무토지 농민운동 활동가다. 아이들이 자라서 약 20세정도가 되면 결혼을 하고 새 가정을 꾸리게 되는데, 새로운 곳으로 이동해 땅을 점유하고 캠프를 늘려나간다. 우리 운동은 그렇게 성장해 왔다.

 

- 캠프생활을 하며 농사를 짓고 있는 당신들의 가치관은?
우리의 정착의 초점은 자연을 소유물로 여기지 않으며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새롭게 구성하는데 있다. 우리는 우리가 먹을 만큼을 생산하고 분배하지 이윤을 위한 경작을 하지 않는다. 또 땅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땅을 나누지만, 땅을 상품으로 판매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다.

 

소박하고, 정겹고, 다정한 사람들

 

대화가 끝나고 나니 캠프에서 제일 요리를 잘하는 아주머니 두 분이 우리를 위해 소박하지만 맛있는 식사를 만들어 줬다. 살림이 넉넉하지 않기 때문에 고기는 전혀 없고, 쌀과 감자스프, 토마토 상추 샐러드 같은 음식이 나왔는데 여느 브라질 음식과 다르게 너무 짜지 않고 담백해서 아주 만족스러운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맛있는 음식은 고기에 슬슬 물리기 시작한 내게 캠프에서 지냈던 시간이 가장 행복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두 번째 이유였다. 첫 번째 이유? 그 이유는 아래에 나온다.)

 

해가 완전히 저물고 캠프의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외지에서 온 방문자들을 위해 환영식을 해주기 위한 것이었다. 검게 그을린 피부로 흑인과 분간하기 힘든 외모의 사람들도 있었고, 전형적인 남미 백인의 얼굴도 있었다. 캠프에는 임신한 여성들과 어린이들이 많이 있었는데 한 가족 당 5~6명의 자녀를 두는 게 보통이라고 한다.

 

▲땅없는 사람들의 민중가요를 부르고 있는 캠프의 아이들.
통통~ 소리가 나는 독특하게 생긴 기타를 가진 중년 남자 두 명과 10대 남자아이 한명의 기타연주 공연이 시작됐다. 숙소 앞 현관에 등 하나를 달아 무대를 만들고 40여명의 주민과 우리가 동그랗게 둘러앉아 남미 특유의 서정적이고 때로는 흥겨운 노래를 감상했다.

 

 

나중에는 아이들도 모두 무대로 나서 노래를 불렀는데, 노래 제목은 잘 모르지만 땅없는 사람들의 애환과 투쟁의 의지를 담은 민중가요라 했다. 입을 방긋거리며 열심히 노래하는 아이들의 모습도 귀여웠고 음악이 어찌나 구슬프면서도 감성적이던지, 배터리가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도 나는 카메라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노래공연이 끝나고 우리를 소개하는 시간이 됐다. 자기가 온 나라와 고유의 음식을 소개하고, 자기 나라의 음악을 들려주면 된다고 했다. ‘아리랑’을 할까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를까 이것저것 고민하는 중, 첫번째로 남아프리카에서 온 즈와인이 자기 소개를 하고 아프리카 빈곤층이 부르는 민중가요를 노래했다.(그의 노래를 듣고 나는 모든 흑인은 노래를 잘한다는 편견을 깨게 됐다.) 그런데 즈와인의 음악도 어찌나 느리고 조용하던지 두번째로 인사를 하는 나마저 그런 노래를 하면 분위기가 ‘다운’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일어나서, “나는 한국에서 왔고, 한국 사람들은 밥과 ‘김치’를 먹습니다. 배추에 매운 고추로 만든 잼을 넣고, 땅 밑에 보관해 신맛이 나게 만든 것이 김치인데, 한국사람들은 하루라도 김치를 먹지 않고는 못삽니다. 그러나 나는 매운 음식을 많이 좋아하지 않아서인지, 여러분이 만들어준 음식이 너무 맛있고 마음에 듭니다.”라고 말했다. 주민들은 음식을 땅밑에 넣어서 보관한다는 얘기에 신기해했고, 브라질 음식이 좋다는 나의 ‘간사한’ 발언에 너무 기뻐해줬다. 노래를 부를 차례가 됐고, 나는 문득 떠오른 ‘뽀뽀뽀’ 노래를 율동과 함께 열심히 불렀다. (‘뽀뽀뽀’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나는 손을 입에 댔다가 관중쪽으로 뻗는 율동을 했는데 그 와중에도 젊은 청년들을 찾아서 손을 내밀었다)

 

또 그룹 멤버 중 한국에서 3년을 살았다는 장 마레 라는 프랑스 인이 나서서, ‘한국에서는 인사를 하거나 감사 표시를 할 때 허리를 숙인다’고 말해, 나는 ‘고맙습니다’와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법을 주민들에게 가르쳐주기도 했다.

 

소개가 끝나자 아시아인이 나 하나여서인지 더 크게 박수를 받았지만, 앉고 나서 ‘너무 가볍개 소개하고 가벼운 노래를 부른 것이 아닌가’ 후회가 들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우리나라 민중가요 중에 ‘우리에게 땅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울 어머니 살아 생전에 작은 땅이라도 있었다면...’으로 시작되는 땅없는 설움을 노래한 ‘땅’이라는 제목의 노래가 생각났고, ‘다시 노래하겠다고 할까’하고 후회가 밀려왔다. 그러나 환영식이 모두 끝나고 사람들이 노래가 재미있고 좋았다고 다시 여러번 칭찬을 해줘서 금새 ‘뭐 괜찮겠지’라며 아쉬움을 떨쳤다.

 

비닐과 흙으로 만든 집, 우주비행장 옆 작은 농장

 

▲캠프에서의 둘째날 아침. 꼬마 마테우스의 집 뒤로 펼쳐진 풍경이 아름답다.

다음날 20일, 한국에서는 8시 이전에 일어나는 게 기적이었던 내가 브라질에 와서는 7시 정도에 일어나는 생활을 했는데, 캠프의 맑은 공기 때문이었는지 6시부터 일어나 숙소 주변을 산책했다. 장마철이라 틈틈이 내린 비가 그친 후 맑게 갠 하늘, 온통 풀밭과 나무들로 뒤덮인 마을, 울음소리도 희한한 닭들이 대여섯마리씩 떼를 지어 산책을 다니는 평온한 풍경에 나는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기에 바빴다.

 

두번째 날에는 캠프 주민들이 살고 있는 집과 농장 등을 둘러보는 일정이 마련돼 있었다. 먼저 귀염둥이 막내 마테우스를 비롯해 다섯명의 자녀를 두고 있는 집에 찾아 갔다. 나무로 구조를 세우고 검은 비닐천을 여러겹 씌워 만든 집. 안으로 들어가니 일곱 식구가 사는 방은 침대가 빼곡히 들어서 있을 뿐 여유공간이 전혀 없었다. 한켠에는 부엌이 있었는데, 수도시설을 해놓지 않아 멀리 강가에서 물을 길어다 큰 통에 받아두고 쓴다고 했다.

 

다른 집도 비슷했는데 황토흙으로 벽을 댄 집, 주변에서 가져온 중고 쇼파와 침대 같은 것들이 어지럽게 놓여있었는데 이곳 역시 먹고, 자는 기본적인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만이 있었다. 숙소로 머물렀던 집이 좋아서 평균적인 삶을 살고 있으리라 짐작했던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마누엘 네토 캠프는 집구조를 그나마 갖추고 있는 편, 나중에 방문한 인근의 ‘오거배나류’ 캠프는 땅 소유주와의 긴장 관계가 더 심각한 상태였는데, 캠프 주민들이 돌아가며 보초를 서는 삼엄한 경비 초소를 지나 도착한 이 캠프는 완전히 텐트촌이었다.)

 

▲흙으로 지어진 집, 그리고 부엌.

▲둘째날 방문했던 또 다른 캠프 '오거배나류'. 텐트에서의 원시적인 삶에 토지주와의 긴장감이 흐르고 있지만, 사람들에 얼굴엔 웃음이 가득하다.

마누엘 네토 캠프의 주민들은 선조 때부터 대대로 농부였고 아버지들 또한 농사를 짓다가 땅이 없어서(땅값이 너무 비싸 소유할 수 없다) 캠프에 정착하게 됐다고 한다.

 

이들은 캠프 인근에는 우주비행실험을 하는 비행장이 세워져 있는데 그 바로 밑에 땅을 개간해 호박, 콩, 옥수수, 마뇨크 등의 작물을 소규모로 키우고 있었다. 쌀농사는 대규모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들이 할 수 없다고 했다. 마뇨크는 마뇨크 식물의 뿌리 부분을 잘라내 껍질을 벗긴 것으로 조리된 음식을 먹으면 감자와 비슷한 맛이 나는데, 방문한 농장에서 건네준 마뇨크를 생으로 먹어보니 생고구마 맛이 났다.

 

▲땅없는 사람들의 농장.

엄청난 고압전기를 사용하는 우주비행장이 바로 옆에 있다는 사실을 내가 실감하게 된 것은  작은 에피소드 때문이었다. 비가 조금씩 흩뿌리고 있었고 여름 햇살이 따가운지라 나는 들고 간 우산을 양산 대신 사용했다.

 

우산을 쓰고 있더 나를 본 왈디르가 통역자인 마르셀로에게 뭐라고 수군거렸다. ‘고압전기가 흐르고 있어서 우산을 쓰고 있으면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황급히 우산을 접고 주변을 둘러보고 그제야 녹색 풀밭과 낮은 언덕 위로 고압전선과 철물구조들이 흉측하게 늘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웅웅거리는 소리가 계속 귓가에 맴돌고 있었던 것은 그 고압전선에서 나는 소리였다.

 

▲돼지 축사.
캠프의 주민들은 농작물과 함께 돼지와 닭을 키우고 있었다. 축사도 방문했는데  10대 후반의 남자아이들이 돼지 키우는 일을 맡고 있었다.

 

 넓은 축사였지만 돼지는 20여 마리로 그다지 많지 않았다. 돼지들은 코에서 콧물을 질질 흘리고 있었고 축사 안에서 설명을 듣고 있던 우리들에게 불쑥 불쑥 다가와 깜짝 놀라게 만들기도 했다. 가끔 성난 돼지가 우르르 뛰어오기도 했는데, 아이들은 능숙하게 돼지를 제지시키고 자리에 눕혀 쓰다듬어 주는 등 전문가적 소질을 발휘했다.

 

TV, 컴퓨터가 없어도 즐거운 캠프의 아이들

 

세번째날(21일)이 되자 가끔씩 내리던 비가 장마비로 바뀌어 야외활동이 불가능한 상황이 됐다. 오후까지 내동 숙소에만 머물러 있어야 했던 우리는 브라질 현지 탐방에만 여념이 없던 마음을 놓이며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고, 캠프를 떠나는 날 주민들에게 전해줄 선물을 무엇을 할까를 논의하며 오전 시간을 보냈다.

 

나는 한국에서의 활동을 소개하기 위해 평화운동자료와 부안 반핵투쟁 자료를 사진과 영문소개글로 엮은 스크랩북을 가지고 갔는데, 보여줄 기회가 없다가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를 묻기에 바로 스크랩북을 사람들에게 보여줬다.

 

각종 차별과 탄압에 맞서 싸우고 있는 이들이기에 정부정책의 폭압성과 에너지정책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쉽게 공감했다. 그러나 유독 묻는 질문은 아주머니들의 삭발투쟁 사진을 보며 ‘머리를 깎는 것이 어떤 의미냐’는 것이어서 유교사상까지 거론하며 삭발의 의미를 설명해줘야 했다. 많은 사람들이 유심히 자료를 살펴봤고, 부안투쟁을 승리로 이끈 주민들의 힘에 대해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또 통역자 마르셀로로부터 브라질 사람들의 특성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브라질 사람들은 천성이 느긋해서인지 어떤 회의를 2시에 하기로 했다면 그 회의는 3시에 시작하는 걸로 간주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브라질 사람들의 ‘Yes'를 곧이곧대로 들어서는 안되며 확실히 하기 위해서는 세번을 되물어야 한다고 한다.

 

나는 한국사람도 그렇다고 맞장구를 치고 코리안타임이라는 것과 예의를 차린다면서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점에 대해 설명했다. 그러나 대화가 축구에 대한 얘기로 넘어가면서 한국도 축구를 좋아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았고 내가 “한국 사람들은 대개 축구를 좋아한다. 그러나 나는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일절의 관심도 없다”고 단호하게 대답했더니, 사람들은 “오! 당신은 한국사람답지 않군요!”라며 웃었다.

 

▲하루종일 비가 내린 셋째날. 무료한 이들을 위해 숙소 앞 현관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점심식사 후 오스트리아에서 온 마르가리타와 나는 계속 내리는 비를 감상하며 숙소 앞 현관에 앉아있었는데, 캠프의 아이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귀여운 5살짜리 꼬마 마테우스에서부터 돼지 농장에서 만났던 10대 후반의 청소년들까지. 아이들 인권교육 프로그램 기획을 담당하고 있다는 마르가리타가 먼저 포르투갈어 사전까지 뒤져가며 아이들과 대화를 나눴고, 짧은 단어로 오가던 대화는 어느덧 손뼉치기 놀이 등 각종 놀이로 변해갔다.

 

‘소코소코 파치파치, 소코소코 비라비라’라고 읍조리며, 손바닥과 손등을 마주치는 놀이(우리나라로 치면 쎄쎄쎄 정도?)에서부터 시작해, 휘파람 불기, 실뜨기, 사방치기, 숨은 반지 찾기 놀이까지 서로 알고 있는 모든 놀이는 다 꺼내서 손짓발짓으로 설명하며 놀이를 즐겼다. 재미있는 건 사방치기는 방법은 약간씩 다르지만 거기 모인 각국의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 놀이였고, 실뜨기는 유럽 사람들은 모르지만 브라질과 한국에서는 방법이 똑같았다는 것이다.

 

여러 놀이를 하다가 나는 ‘전기놀이’를 생각해냈고, 아이들에게 전기가 오도록 만들어주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전기놀이는 손목을 잡고 피가 통하지 않게 만든 후에 자기 나이만큼 손을 쥐었다 편 후 천천히 손목을 풀며 손바닥 위에 손가락으로 원을 그리면, 피가 통하면서 마치 전기에 감전된 듯한 느낌을 갖게 하는 것. 처음 보는 놀이에 아이들은 모두다 해달라고 달려들었고, 10명 정도 되는 아이들을 다 해주고 났더니 어깨가 뻐근해졌다.

 

그런데 우리 식사를 준비해주시는 덩치가 큰 아주머니도 자기에게 해달라고 한다. 한손으로 잡히지 않는 손목을 부여잡고 나이를 물었더니 ‘49세’. 진땀을 빼며 작업을 하자, 아주머니도 신기하다며 웃었고, 그 후 10여분 동안 나는 팔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이들이 계속해서 새로운 게임을 생각해 내 정신없이 함께 어울려 놀다가 문득 내가 컴퓨터를 쓰지 않은지가 이틀이 됐는데 그에 대한 생각은 전혀 떠올리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 갖추고 있지만, 아이들은 이 자연 속에서 얼마든지 즐거운 놀이꺼리들을 고안해내고 그걸로 즐기고 생각하며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버스운전으로 우리와 함께 한 에릭이 영어를 조금 할 줄 알아서, 10대 후반의 남자아이들과도 대화를 나누게 됐다. 근처 공립학교에 다니고 있는 그들은 조그만 라디오를 갖고 있었는데, 전기를 쓸 수 없는 곳에서 라디오만이 대중문화를 접할 수 있는 창구로 보였다. 어떤 가수를 제일 좋아하냐고 물어봤더니 서슴치 않고 ‘브리트니 스피어스’라고 답했다. 이유를 물었더니 예뻐서란다.

 

이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학교를 다니면서 동시에 부모님의 일손을 돕는다. 그러나 캠프의 주체로는 치부되지 않는다. 이들이 약 20세가 되면 결혼을 해서 새로운 가정을 꾸리게 된다. 그리고 독립해서 다른 지역에 정착하게 된다. 그 때 새로운 캠프의 활동가가 되는 것이다.

 

아이들과 지냈던 시간이 많았고 또 즐거워서 캠프에서의 일정은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고, 아쉬운 작별의 시간이 다가왔다. (다음 편에 계속)

 

▲바닥에 분필로 아이들 얼굴을 그려줬더니 아이들이 저마다 기념사진 촬영을 요청했다. 말은 하나도 안통하고 바디랭귀지로 모든 걸 해결했지만 아이들의 사랑스러움과 친밀함은 마음깊이 전해져 왔다. 브라질을 다시 가고 싶은 곳으로 만든 첫번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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