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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세계사회포럼을 가다 ④

CCFD 일행이 MST 대학을 방문해 풍경을 둘러보고 있다.

 

* 이 글은 참소리에 연재하고 있는데, 이제 네편째... 헥헥~ 두편 남았습니닷!!


새로운 브라질을 만든다- MST 대학

 

 

땅없는 사람들 캠프에서의 세 번째 날(21일), 저녁 무렵이 되자 장대처럼 쏟아지던 비가 멈추고, 일행들은 어딘가로 이동해야 한다고 전해 들었다. ‘Mystic Ceremony’라는 표현에 ‘일행이 모두 천주교인들이니까 종교행사를 하나 보다’ 생각하고, 종교를 갖고 있지 않은 나는 망설이다가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숙소에서 1백여미터 떨어진 곳으로 걸어가니 커다란 폐공장 처럼 생긴 건물이 보였고 문 앞에 있던 캠프의 아이들이 우리 일행에게 다가와 한명씩 손을 잡고 안으로 안내했다.

아이들과의 아쉬운 작별

건물 안에는 캠프의 주민들이 동그랗게 원을 만들어 기다리고 있었고 전기불 대신 자동차 헤드라이트로 불을 비춘 행사장이 마련돼 있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떠나는 우리들을 위해 송별행사를 준비해준 것이었다. 우리 일행은 들어서면서 장미꽃 하나씩을 선물로 받았고 주민들 사이에 서서 함께 원을 만들었다. 원 안에는 색깔을 입힌 왕겨(탈곡 후 벼 껍질)로 세계지도가 그려져 있었고, 포르투갈어로 프랑스, 아프리카, 한국 등 나라 이름이 쓰여져 있었다.



▲왕겨로 만든 세계지도와 정성스레 송별행사를 치러준 캠프의 주민들.

주민들은 우리에게 “땅없는 사람들의 캠프를 방문해 줘서 고맙다. 앞으로도 연대하자”는 메시지와 함께 선물을 주었다. 나중에 열어보니 직접 나무를 깎고 쌀알로 장식하고 ‘마누엘 네토’ 캠프 이름이 새겨 넣은 조그만 탁상용 장식장, 귀여운 곡괭이 모형, MST에서 발간하는 ‘TERRA(땅)’라는 월간잡지, 어린이들의 포르투갈어 동요집 등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나무를 깎아 만든 반지를 하나씩 받았는데, 이 반지는 ‘사회정의를 위해 나는 신과 결혼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했다.


예상치 못한 정성스러운 선물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 지 머뭇거리는 사이, 주민들이 준비한 노래공연이 진행됐다. 아코디언, 조그만 기타 등을 든 연주자들의 흥겨운 노래가락에 맞춰 주민들과 나를 비롯한 일행들은 함께 춤을 췄다. (사람들은 젊은이들끼리 어울려 두손을 맞잡고 친밀하게 춤을 췄지만, 카메라를 들고 있었던 탓인지 아무도 나에게 춤을 권하지 않았다. 나중에야 카메라를 가방에 집어넣고 여자아이들 서너명과 함께 원을 만들어 빙글빙글 돌며 춤을 췄는데, 청년들과 춤을 추고 있는 마르가리타, 크리스텔이 그리 부러울 수가 없었다.) 두시간 정도 행사가 진행되고 몇몇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갔지만 젊은이들과 아이들은 숙소 앞에 남아 늦은 시간까지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며 밤이 깊어갔다.


▲떠나기 전 모두 함께 기념사진 촬영.
마지막 날(22일) 아침에도 주민들은 이른 시간부터 숙소에 모여서 떠나는 우리를 배웅해줬다. 특히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던 건 함께 여러 가지 놀이를 했던 아이들이었는데, 엄지손가락과 중지손가락을 부딪쳐 ‘딱’ 소리를 내는 것을 잘 하지 못했던 아이 완더스는 며칠을 연습해 조그만 소리를 낼 수 있게 됐다며 버스가 출발할 때까지 우리 옆에서 소리내기를 계속했다. 기념사진을 몇 장 촬영하고, 사람들은 아쉬운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만남과 작별인사 모두 껴안고 양볼에 서로 키스하는 것이었는데, 어색해서 껴안기만 했던 나도 이번엔 아이들 하나하나를 꽉 껴안고 진하게 뽀뽀를 해줬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면서, 아이들의 노래를 녹음한 것을 반복해 들었다. 옆자리에 앉은 마르가리타와 함께 노래를 들었는데, 마르가리타도 “캠프에서 만난 아이들이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것 같다”며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땅없는 사람들, 10년 프로젝트로 스스로 학교를 만들다


차량 소통이 거의 없던 캠프를 벗어나 조그만 마을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우리는 MST 대학에 도착했다.


잘못된 토지관리정책에 반대하며 시작된 이들의 운동은, 이제 토지점유를 넘어 브라질 전체의 농지개혁과 새로운 주체들을 만들기 위한 투쟁으로 확장되고 있다. 친환경적이고 공동체적인 농경법의 개발, 농산물 유전자조작에 대한 반대운동, 그리고 각종 사회개혁운동 등. 그리고 MST 대학을 스스로의 손으로 세워 보다 폭넓은 활동을 위한 주체들을 재생산하고 있었다.


▲언덕위에서 본 MST 대학의 일부풍경. MST 대학에 다닐 학생들이 학교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담은 신문을 판매하고 있다.
우리가 학교를 방문했던 날은 마침 MST 대학이 정식으로 문을 열기 전날이었다. 학교는 들어가는 입구부터 공사가 마무리되지 않아 포크레인이 길 한가운데 들어서 있고, 군데군데 땅이 파여진 흔적이 있었다. MST 기념품을 판매하는 곳에서 물건을 사고, 각자 흩어져서 학교를 구경하며 돌아다녔다.


학교에는 공사하는 사람과 함께 10대에서부터 4~5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있었고 넓은 운동장 한 켠에는 약 1천여명이 모여 집회와 같은 행사를 하고 있었다. 눈에 띄는 것은 컴퓨터를 이용할 수 있는 휴게실이었는데, 학생들이 사용하고 있는 컴퓨터 화면을 보니 운영체제가 윈도우가 아니라 리눅스였다. 이 학교에 있는 컴퓨터는 모두 리눅스냐고 물어봤더니 그렇다고 말했다. 컴퓨터 운영체제에 있어서도 독점적인 윈도우를 지양하고 대안적인 운영체제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다. (일행에게 이 사실을 얘기했더니 리눅스가 뭔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대개의 국가에서 8~90% 이상을 윈도우 운영체제가 차지하고 있다 보니 당연한 반응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강의실로 보이는 공간에는 브라질 각지의 캠프에서 온 사람들의 침낭과 짐들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중에 들은 설명으로는, 이 MST의 무토지 농민운동 활동가들은 이 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10년을 준비했다고 한다. 기획작업에 수년 건물 토대를 만드는 데만 4년이 걸린 이 학교 설립을 위해 전국 각주의 캠프에서 60여명씩 사람들을 보내고, 이들이 흙과 돌을 재료로 해 몇 차례의 오류를 거치며 가장 친환경적인 공간을 구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학교의 한 실무자는 “전문가들이 하는 게 아니다 보니 건물을 짓는 것도 설계작업에 문제가 있어서 2번을 새로 지었다. 그런 오류를 통해 지금은 어느 건물보다 친 환경적이고 훌륭한 건물이 됐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학교를 연 후에는 MST 활동가와 캠프의 주민들이 이 대학에 다니며 농업, 언어, 컴퓨터 등 다양한 학과목을 배우며 보다 체계적인 활동을 펼칠 계획이다. 이들은 학교의 교육자 양성을 위해 1백여명의 활동가를 해외로 7년간 유학을 보내는 등 치밀한 준비작업을 거쳤고, 상파울로 국립대학에서도 교수들이 파견을 나와서 학생들을 가르친다고 한다.


▲돈 토마스 발드로.
다른 캠프를 방문했던 CCFD 그룹 멤버들까지 모두 함께 모인 자리에서 MST 대학의 책임자이자 천주교 사제인 돈 토마스 발드로(Don Thomas Balduro)씨는 이렇게 말했다.


“브라질의 땅없는 사람들은 새로운 관계를 만들고 있다. 가난한 이들은 운동가들의 활동 대상이 아니라 주체로 다시 서고 있다. 그들은 역사의 주체이며 자신의 미래를 바꿀 힘을 갖고 있다. 나아가 우리는 땅없는 사람들을 비롯해 남미 전국가의 빈곤계층의 운동, 인도의 달리트 운동(카스트 제도의 최하위 계급의 차별철폐운동), 국가가 없는 사람들의 운동 등 인종차별, 성차별 등 모든 차별에 반대하는 운동에 함께 하며 함께 연대할 것이다. 땅은 자연 공동체의 상징이고, 우리의 운동은 다른 사회,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운동이다.”


브라질 좌파정권의 우경화 경향은 외부의 보수언론들로부터 ‘보라! 좌파정권도 이렇듯 훌륭한 정책을 하고 있지 않느냐’며 칭송받고 있지만, 그들로부터 권리를 박탈당한 이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투쟁을 일구어가며 정부의 편향을 바꾸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드는 길을 열어나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아~ 마르셀로


여기에서 잠깐, 앞에서도 언급했던 우리 일행의 가이드 마르셀로에 관한 가슴 아픈 에피소드를 얘기하고 넘어가야겠다. 캠프에서의 사흘, MST 대학에서의 하루로 꼬박 나흘간 우리와 함께 하며 자질구레한 대화까지 친절하고 차분하게 통역해주었던 MST 활동가 마르셀로.


▲마르셀로.
며칠을 함께 있다 보니 일행들과 사적인 대화를 나눌 기회도 꽤 있었는데, 31살의 이 남성은 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하고 졸업한 후 브라질에서 가장 큰 규모라는 한 언론사에서 저널리스트로 일하다가 3년 전부터 땅없는 사람들 운동에 뛰어들게 됐다고 한다. 마르셀로는 자신도 직접 캠프 생활을 하면서 우리와 같은 방문자들에게 땅없는 사람들의 운동을 설명해주고, 또 운동을 조직하는 일에 힘쓰고 있었다.


가족에 대한 얘기도 들을 수 있었는데, 마르셀로는 자신이 캠핑하고 있는 곳을 직접 방문한 어머니가 “왜 하필 네가...”라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해주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운동의 대의에는 동의하지만 자식의 고생스러운 생활을 보기 안타까워하는 어머니가 있다면 누구나 괴로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잘나가는’ 언론사에서 직업으로 의무화된 기자일을 하는 것보다 사람들을 만나며 새로운 것을 만드는 현재 자신의 일에 만족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영어 전공에 저널리스트로 활동했다는 경력과 나이도 비슷하고, 게다가 ‘체 게바라’를 연상케 하는 외모 등으로 개인적으로 큰 관심(!)을 갖게 됐는데, 함께 했던 일행의 나머지 4명의 여성들도 예외는 아니었나 보다. 가장 젊은 크리스텔이 대뜸 ‘아이가 몇 명 있느냐’고 질문하자, 마르셀로는 자신은 독신이고 결혼의 계획이 없다고 말했다. 이때부터 일행 여성들이 마르셀로의 옆에서 친밀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는데, 사적인 대화는 익숙지 않은데다가 영어가 잘 되지 않는 나로서는 그런 상황을 연출할 수가 없어서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각오를 확실히 세운 것은 이때가 아니었나 싶다.)


그러나 MST 대학을 방문하던 날. 영어가 제일 짧은데다 촬영을 한다는 이유로 일행에서 이탈해 길을 잃어버리는 일이 잦았던 나를 잘 챙겨주던 마르셀로 옆에 낯선 빨간머리의 여성이 서 있었다. 어디로 이동하든지 마르셀로 옆에 꼭 붙어있어 우리를 눈살 찌푸리게 만들었던 그 여성은 나중에 알고 보니 함께 MST 활동을 하고 있는 그의 오래된 여자친구였다. 나를 비롯한 일행 여성들은 “그는 독신이라고 말했지만 결코 혼자는 아니야”라고 수군거리며 가슴 아파해야 했다.


MST 대학에서의 일정이 끝나고 상파울로 시로 돌아가야 할 시간. 우리는 마르셀로를 위해 새 다이어리 북에 각자 감사의 메시지를 자기 나라의 말로 적어서 작별의 선물을 전했다. 이메일 주소 등도 교환하고, 나는 마르셀로에게 캠프에서 찍은 아이들의 사진을 보낼테니 꼭 전해달라고 당부하며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성실하고 친절한 브라질의 한 열성 활동가와의 만남은 그렇게 끝났지만, 남미의 운동 그리고 세계화에 반대하는 운동을 계속하는 한 그와의 조그만 인연은 계속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작은 희망을 가지며 우리는 자리를 떠났다.


드디어 세계사회포럼이 열리는 포토알레그레(Porto Alegre)로


23일 일주일여간 머물렀던 상파울로 시를 떠나 제5회 세계사회포럼이 열리는 도시 포토알레그레로 출발했다. 각자 미리 비행기표를 끊었기 때문에 개별적으로 이동을 해야 했는데, 다행히 아폴로니에라는 프랑스 흑인 청년과 비행기가 같아서 그의 도움으로 두시간의 비행기 여행은 수월하게 이뤄졌다. 그는 영어를 못하고 나는 프랑스어를 몰랐지만 의사소통에는 그다지 무리가 없었다.


포토알레그레 시는 브라질 남부에 위치해 있는데, 상파울로에 비해 훨씬 한적하고 조그만 도시였다. 공항에 도착하고 보니 각국 각지의 단체들이 피켓을 들고 방문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니 세계사회포럼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실감했다. 우리는 안내인이 나오지 않아 직접 택시를 타고 숙소인 리터 호텔로 이동했다.


순조로웠던 이날 나의 여행은 호텔에 도착한 순간 난관에 부닥쳤다. 프론트에서 CCFD 일행으로 단체예약이 돼 있을 숙박객 명단에 나의 이름이 없어서 방을 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다른 일행들은 도착하지 않았고, 무거운 짐을 들고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발을 동동 굴렀지만, 포럼이 시작되는 시기에다가 여름이어서 성수기인 호텔에서 함부로 방을 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브라질로 오기 전 꿨던 악몽이 현실로 나타났나 보다, 이제 혼자 따로 떨어져서 브라질을 헤매야 하는가보다 생각하며 불안에 떨었다.


로비에서 기다린 지 두 시간 정도 지나서야 호텔 측에서는 명단 입력에 오류가 있었다며 새로운 방의 룸키를 건네주었다. 뒤늦게 도착한 베트남 친구 칭과 또 다시 한방을 쓰게 됐는데, 이런 우여곡절이 있었던 탓인지 다른 일행은 3~5명씩 비좁게 쓰는 방을 나와 칭은 두명이 넓고 편한 방을 쓸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브라질 방송에 출연하다!


▲세계사회포럼이 열리기 사흘 전. 메인 행사장 풍경
짐을 풀고 난 후 땅없는 사람들 캠프 방문을 친해진 마르가리타와 크리스텔 등 일행들과 함께 세계사회포럼이 열리는 장소를 방문했다. 장소는 호텔에서 버스로 약 15분, 걸어서 한시간 정도 되는 거리에 있는 해안가였다. 아주 넓은 홀에 대규모로 회의가 진행될 거라는 예상과 달리 도착해서 본 포럼 장소는 폐공장과 잔디밭에 세운 천막들로 넓게 분산돼 있었다. 일요일에는 해안가를 따라 장신구 등 수제품을 파는 벼룩시장이 열리는데 마르가리타와 함께 그곳을 거닐고 아이쇼핑을 하며 시간을 때웠다.


산책을 마친 후 마르가리타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오는 다른 일행을 위해 포럼 참가자 명단을 확인해야 한다고 해서, 천막으로 세워진 안내데스크로 갔다. 기다리는 동안 나는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갑자기 ENG(야외촬영) 카메라를 든 카메라맨과 리포터로 보이는 사람들이 내게로 다가와서 인터뷰를 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나는 망설이다가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세계사회포럼에 어떻게 참가하게 됐느냐는 질문이었다. 나는 CCFD라는 단체를 통해 일주일전에 브라질에 도착해 브라질의 운동현장을 돌아봤고 아주 인상적이었다고 영어로 더듬더듬 말했다. 어찌나 엉성하게 말했는지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장면이 진짜 TV에 나오게 되면 큰일이다’ 생각하며 진땀을 흘렸는데, 다행히 리포터가 ‘당신 나라의 말로 다시 한번 얘기해 달라’고 주문했다. 한국말로 화면을 내보내고 영어로 말한 것을 통역해 포르투갈어로 자막을 내보내겠다는 생각이 들자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인터뷰가 끝난 후에야 정신이 들어 안내데스크에서 구경하고 있던 자원활동가에게 방금 다녀간 사람들이 어느 방송이냐고 물었더니, 브라질 연방 TV라고 대답해줬다. 세상에! 외국사람과 대화 한번 나눠보지 못한 내가 이 먼 곳으로 와서 TV에 출연하게 된 것이다. (나는 포럼기간 내내 만나는 일행들에게 TV에 출연했다고 자랑하고 다녔다)


세계사회포럼을 기대하며...


포럼이 열리는 날은 26일. 24~25일 1박 2일간은 호텔에서 CCFD가 주관하는 토론 프로그램에 참석했다. CCFD가 주관하는 세계화에 따른 경제적 빈곤과 북반부, 남반부 차별 문제에 관한 토론을 했는데, 대륙별 이슈를 중심으로 다루다보니 아시아는 칭과 나 달랑 두명밖에 없어서 다른 그룹의 토론을 청취하는 정도에 그쳐야 했고, 토론마저도 프랑스어로 이뤄져서 이틀간의 일정은 고역이었다. 그나마 틈틈이 진행되는 댄스, 노래 등의 친목 프로그램이 있어서 고된 일정을 버틸 수 있었다.


이틀의 일정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마음은 이미 처음 참가하게 되는 세계사회포럼에 대한 기대로 기울었다. 물론 10만명이 넘게 참가하는 행사에서 내가 뭘 듣고 배울 수 있을까, 대규모 행진 중에 길이라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한국 참가단을 잘 만날 수 있을까 등등 걱정이 앞섰다. 36~8도를 넘나드는 이 무더운 날씨와 뜨거운 땡볕 아래에서 한국에서도 백옥같이 지켜온 내 피부를 다 태우지는 않을까 하는 사소한 걱정도 함께.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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