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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차드 레빈스, 혁명의 재무장:험난한 시기, 이론의 임무

혁명의 재무장: 험난한 시기, 이론의 임무

 

리차드 레빈스


 

맑스주의 유물변증법의 방법으로 연구될 수 있는 매력적이고 흥미로운 많은 문제들이 있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곳에서 연구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날 여기에서, 이론과 실천이 이토록이나 잘 결합된 한 저작을 기념하는 행사에서, 우리는 혁명의 다음 물결을 준비하면서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재활성화에 필요한 과제들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이러한 기획을 진전시키는 데 있어, 이론은 다섯 가지 주요 과제를 가질 것이라 생각한다.

1. 순간의 사건들에 의해 너무 압도되지 말 것. 이러한 태도를 가질 때라야 우리는, 일시적 상황이 아무리 대단해 보이더라도, 그것으로부터 기본적 견해들을 재평가하도록 요구할만큼의 진정 역사적인 변화를 분별해낼 수 있다. 이러한 태도를 가질 때 우리는 현재를 비판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맥락을 갖게 되기도 하며, 오늘의 급박한 즉흥적 판단이 미래와 타협하게 될 수도 있는 원칙의 문제가 되는 걸 방지할 수 있다.

2. 무엇이 실제로 새로운 것이고 무엇이 익숙한 과정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인지 확인할 수 있도록, 오늘날의 자본주의를 분석할 것.

3. 사회주의의 경험을 분석할 것. 이는 우리 이론이 아직 미발전 상태로 남아 있는 부분이며, 우리가 이론과 실제 관찰 사이에서 가장 커다란 불일치를 발견하는 영역이다.

4. 의식 및 정치 투쟁에 관한 이론을 발전시킬 것.

5. 반동주의자의 공격과 맑스주의의 폐기를 원하는 이들의 왜곡으로부터 맑스주의를 방어할 것. 물론 이러한 방어는 교조적인 재론이 되어서는 안되며, 결함과 비판에 대한 진지한 고려를 전제로 하는, 방어뿐만 아니라 발전을 위한 작업이어야 한다.

현재의 상황을 일반화하지 말 것

세계 정세의 갑작스럽고 예기치 못한 변화에 직면하여, 사회주의 정당과 정부들은 모든 종류의 비상수단을 취해왔다. 미래를 잃어버리지 않고 오늘을 헤쳐 나아가기 위해, 우리는 많은 모순점들을 논해야만 한다. 간단하게 세 가지 사례를 들어보겠다.

1) 현 시점에서 쿠바의 경제적 생존을 위해서는 외국인 투자를 허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결국, 쿠바에 투자한 기업들이 쿠바 경제를 지원하는 셈이고, 만약 그들이 헬름스-버튼 법안과 미국의 봉쇄조치에도 도전한다면, 쿠바는 그들에게 진실로 고마워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쿠바에서 최대한의 잉여가치를 추출하고자 하는 착취자라는 사실, 자신들에게 이윤만 남는다면 기업 내의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를 기꺼이 부추긴다는 사실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쿠바 노동자 계급은 그들과 갈등/협력의 관계에 있다. 우리에게는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소거하지 않도록 하면서 이러한 모순의 양극점을 동시에 직시케 해주는 맑스주의적 관점이 필요하다. 한편, 중국의 성장 극대화 전략은 계급 투쟁을 부정하고, 신흥 부르주아지의 이데올로기를 위해 계급 이데올로기를 희생시키고 있다. 중국의 노동자 계급과 농민들은 그들 자신의 계급 정당 건설을 전면적으로 다시 시작해야 할런지 모른다.

2) 맑스주의자들은, 상호 존중과 공동의 헌신에 기반한 그리스도교 좌파와의 장기적 동맹 관계(alliance)를 발전시킬 것으로 보인다. 전적인 동맹은 아니더라도, 개인주의와 소비주의 및 군사적·경제적 전쟁의 위협에 대해 불편해한다는 점에서 종교적 핵심과의 매우 중요한 동맹 관계가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역사유물론이나 맑스주의적 종교 비판에 대한 포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실,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본 성경 연구와 종교사는, 혁명적 그리스도교도들이 우리와 오랜 동맹 관계를 맺고 있는 반면에 그리스도교 우파들이 이에 대항하여 종교를 이용하고 있는 이 세계에서, 모든 공산주의자들에게 교육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맑스주의-그리스도교의 조우(遭遇)에서, 우리는 후자의 최악의 오용들을 전자의 가장 숭고한 이상들과 동렬에 놓을 수는 없다. 이상과 이상 간의 비교, 실천과 실천 간의 비교 모두에서 그렇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호소하는 교황이 신학상의 이단자들을 입다물게 만들고, 주교와 목사가 교구민에 의해 선출되지 않으며, 교회가 수세기 동안 여성의 평등권을 거부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또한 우리는 종교에게 도덕의 영역을 양도할 수 없으며, 교회가 사회주의의 양심으로서 자신을 내세우는 것도 용납할 수 없다. 우리는 공산주의적 도덕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해야 하는 바, 공산주의적 도덕이란 일련의 설교들이 아니라, 영웅적 행위와 희생의 순간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일상의 결정 과정 속에서도 우리를 뒷받침할 수 있는 일관성있는 사회적·개인적 힘을 말한다. 또한, 여기서 투쟁이라는 말은 이중의 의미를 띠는 것으로, 한편으로 혁명적 연대와 사랑의 관념에 관한 원칙을 발전시키는 것이고, 또 한편으로 예시와 논증을 통해 그것을 전파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교도와 맑스주의자 모두, 공표된 이상과 실제의 실천 사이에 놓인 커다란 간극을 인식하고 있다. 그리스도교도들은 그 간극을 원죄와 타락의 개념으로 채운다. 반면에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 간극은 우리의 실천을 뛰어넘는 열정을 불러 일으킬 능력이 우리에게 있으며, '우리가 해야 할 것 what we might do'이라는 견지에서 '우리가 행하고 있는 것 what we do'을 끊임없이 비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예시해준다. 만약 우리가 표방한 이상이 실천과 완전히 부합한다면, 그것은 상상력의 완전한 고갈을 드러낸 것일 뿐이다.

우리가 지닌 관점과 종교적 우군들이 지닌 관점 간의 이러저러한 대조는 우리가 종교와 맺는 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건 아니다. 하지만 이런 대조들은, 모든 제휴에서 나타나는 모순적인 협동적/대립적 관계에 필수적인 부분이다.

3) 세계 자본주의의 명시적인 승리는 자본주의적 방식과 논리에 대단한 위세를 부여하고 있으며, 자본주의적 발전 경로에 '현대적'이라는 딱지를 붙여주고 있다. 심지어 '기업적인 business-like'이라는 단어에는 '탐욕적인,' '편협한,' '타락한,' '냉소적인' 같은 뜻 대신에, '현실적인,' '타당한,' '효율적인'이라는 의미가 따라붙는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경영 기술은 여전히 비인간적이다. 또한 '철저하게' 제한적인 그 효율성 개념이라든가, 농업, 건강, 산업, 주거 형태상의 자본주의적 발전 패턴은 모든 인류를 위협하는 만연된 생태-사회적 고통 증후군(distress syndrome)의 원천이다. 따라서 맑스주의는 이런 각각의 영역에서 자본주의의 사회적 경로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기술적 경로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개입해 들어가야 한다.

농업 분야에 관해서 말하자면, 우리는 노동집약에서 자본집약으로, 무작위적 다종재배에서 특정 작물의 단종재배로, 소규모 생산에서 대규모 농업기업으로, 자연에 대한 순종에서 자연에 대한 통제로, 전통적인 인습에서 근대 과학으로 향해가는 단일한 경로만을 진보라고 파악하는 것에 반대한다.

우리는 이러한 발전 경로가 계급 투쟁과 지식의 불균등한 상품전환에 의해 추동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맹목적인 자본집약을 넘어 지식-집약 저투입(low input) 생산으로, 단종재배의 외관상의 효율성을 넘어 모자이크식으로 정비된 각각의 농지에서 각자 생산물을 산출할 뿐만 아니라 다른 농지의 생산성 제고에도 기여하는 농업기업의 계획적 다종재배 방식으로 나아가는, 생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합리적인 경로를 추구함으로써 균형을 추구한다. 우리는 가능한 한 자기조정이 유지되도록, 생물학적-비료(bio-fertilizers), 질소고착미생물(nitrogen fixing microorganism), 광물성 균류(mineral-mobilizing fungi), 지렁이(invertebrate)를 이용한 쓰레기 재활용, 자연적 해충 관리 등의 수단을 이용하여 오히려 투입물을 줄이는 방식을 개발하고 있다. 우리는 농업적 지식과 과학적 지식 모두가 이러한 시스템의 기획에 기여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쿠바는 부분적으로는 확신에 기반하여 또 부분적으로는 특정 시기의 필요에 의해 이러한 발전 경로를 채택했으며, 그만큼 그 노력은 아주 현실적이고도 강력한 것이지만, 아직 튼튼하지는 못하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밝혀두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프로그램이 1만 평방 미터당 보다 적은 투입보다는 더욱 많은 투입을 요하는, 기술에 대한 자본주의적 요구와 대립한다는 점이다.

오늘날의 자본주의를 분석할 것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우리가 새로운 역사적 시대, 즉 포스트모던, 포스트산업주의, 포스트맑스주의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들의 주장에 어떠한 진지한 논거도 대지 않은 채, 사회주의 이론을 시대에 뒤떨어진 것, 낡은 것, 무의미한 것, '지겨운 것' 등으로서 폐기해버린다. 이러한 상황은 맑스가 이미 묘사했던 [자본주의 발전] 과정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들과, 진정으로 새로운 것들을 구별해야 한다는 과제를 우리에게 던져준다. 전자에는 이런 것이 있다.

― 세계의 가장 고립된 지역에까지 자본주의가 침투하는 것.

―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상품 형태가 우리 삶의 가장 깊숙한 측면에까지 침투하는 것. 안구와 신장이 매매되고, 자궁이 임대되며, 정서적 위안은 시간당으로 구매되고, 의료직의 프롤레타리아트화와 더불어 보건은 행정가에 의해 결정되는 상품이 되었다.

― 정보와 문화가 독점화되는 것.

― 연구가 지식산업으로서 조직되고 합리화되는 것. 그리고 자유무역이 무역상의 자유를 지배할 힘을 가진 이들에 의해 추동되는 것.

― 경기순환이 국제화되는 것(동아시아 경제의 붕괴는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을 기습공격한 셈인데, 왜냐하면 그들은, 피델[카스트로]이 이미 1983년 경에 제3세계 부채가 상환불가능함을 지적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의 번영이 끝없이 지속될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예측하지 못한 위기를 우리가 예견했다는 말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정태적인 세계관에서는 '정상적인 normal' 것으로부터의 놀라운 이탈로 여겨지는 것이, 자본주의 발전의 불안정성을 알고 있는 우리에게는 예측가능한 것이었다는 말이다.

유력한 비판자로서 사회주의 진영이 사라지자, 노동자 계급으로부터 소유자에게로 거대한 힘의 이전이 일어났다. 자본주의는 노동자들을 사랑한다는 시늉을 연출할 필요가 없어졌고 그 대신, 노동시간 연장을 요구하고 고용안정성을 침식하며 작업조건을 더욱 철저하게 통제하고 지난 세기에 이뤄진 성취를 거꾸로 되돌리려는 보다 강력한 운동능력을 사용함으로써 그들 편의 계급 투쟁을 공공연하게 수행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또한 새롭고 아직 연구되지 않은 현상들도 존재한다.

1) 천연자원의 소진, 대기·수질·토양 오염, 동식물 및 인간의 신종 질병 발생, 기후 변화 등 생산 확대가 미치는 환경적 영향. 맑스주의는 이러한 생태-사회적 고통증후들이 자본주의 논리의 결과라는 걸 보게 해 준다. 심지어 이것이 자본주의의 두번째 모순, 즉 자본주의와 자연 사이의 모순을 구성한다고 주장되기도 했다(동유럽 국가들이 남긴 끔찍한 환경파괴 기록은 환경위기가 자본주의의 산물이라는 우리의 주장과 모순된 것으로 보이며, 또한 외관만으로 판단한 일부 논자들은, 대신 '산업주의'에 책임을 돌리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처럼 과도한 발전들은 자본주의적 발전경로를 무비판적으로 추종하고 변증법적 관점 대신 기술관료적 '진보주의'의 발전관을 채택한 사회주의 체제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2) 생산과 재생산의, 그리고 상품과 사용가치의 노동을 겸하고 있는, 그러면서도 (남녀평등의 방향으로 큰 걸음을 내딛은 사회주의에도 불구하고) 어느 곳에서도 완전한 평등을 성취하지 못한 여성들의 지위에 대한 미해결 문제.

3) 민족주의의 놀라운 완강함(여기서 우리가 말하는 것은, 증오에의 자연스럽고 항구적인 경향을 가정하는 인종분쟁[ethnic conflict]이 아니라, 이를 역사적으로 틀 지워진 하나의 정치적 선택으로서 파악하는 민족주의 분쟁[nationalist conflict]에 관한 것이다).

4) 뉴스 및 문화적 생산과 판매의 거의 완전한 독점. 그것들은 대다수 사람들의 의식 속에, 주입되는 순간 품성을 타락시키며 동시에 결코 도달 가능하지 않은 그러한 욕망을 불어넣는다.

5) 전자 통신의 도움을 받지만 그것에 의해 대체되지는 않는 생산의 새로운 조직과 국제연대에 대한 함의.

6) 생산으로부터 여러 단계 떨어진 금융 수단에 의해 주로 발생하는 경제 위기의 새로운 동학. 부분적으로 이는 투자가들이 자본의 회전율을, 최고 수준의 기술적 합리화에서 가능한 실제 상품 생산의 회전율보다도 상회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한 결과이다.

7) 경제적 힘에서는 이미 2류국이 되었지만 군사적으로 여전히 최강국인 미국의 위험한 역할. 군사적 힘을 경제적 이득의 지렛대로 활용케 하려는 압력은, 미국을 점점 공격적인 국가이자 모든 인간성에 대한 주적(主賊)으로 만들 것이다(고대 메스포타미아에서 토양 염화[鹽化]의 결과로 농업 생산성이 하락하자, 높은 농업 수확에 기반했던 도시들은 군사적 확장으로 방향을 전환해야 했다).

8) 특정한 투쟁들을 둘러싼 '시민사회'의 '신사회운동들'의 등장. 이러한 투쟁들은 때때로 매우 전투적이고 단호하지만, 체계적 전망이 부재하며 종종 상호 고립적이다. 이러한 운동들을 '정체성의 정치 identity politics'라고 기각해서는 안된다. 모든 반(反)제국주의자가 민족주의자는 아니며, 마찬가지로 모든 페미니스트 투쟁이 고립주의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신사회운동은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킨다. 첫째로, 자본주의 폐절의 전망을 결여하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 충돌을 빚을 수 있다. 만약 실업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수용된다면, 서로 다른 인종(ethnicity)들과 성(gender)들이 일자리를 놓고 다투게 될 것이다.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수용된다면, 깨끗한 공기에 대한 요구는 일자리 요구와 경쟁을 벌이게 될 것이다. 정당한 이유가 있는 해방적 투쟁에 임해서 그들은 너무도 적게 요구하며, 받아들일 수 없는 한계적 조건들을 주어진 것으로 수용하고 만다.

둘째로, 신사회운동이 과연 계급 투쟁을 대체하는가? '신사회운동' 유형의 투쟁이 상대적으로 두드러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미래의 변화 방향을 함축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그 운동들이 철저하고 지속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실패한 이유가, 활동 범위의 의도적인 제한에 기인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최근 신사회운동의 부각은, 오늘날의 노동자 계급 운동의 방향 상실과 상대적인 역량 부족을 반영하는 것이다. 많은 사회주의 운동들이 환경, 여성 평등 및 여타 해방적 투쟁의 주장들을 자신의 프로그램에 본질적인 것으로서 받아안는 데 실패한 것은, 노동자 계급 스스로의 해방 속에서 사회 전체를 해방시켜야 한다는 {공산주의당 선언}(이하 {선언})의 전언을 간과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는 포스트모더니트의 파편화(fragmentation) 프로그램의 적절성을 반증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아마도 이러한 [좁은] 시야가 불러일으킬 해악에 대한 경고일 것이다.

사회주의 경험을 분석할 것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9년이 지난 지금, 자본주의의 승리의 불꽃은 사그러들기 시작했다. 많은 곳에서 민중들은 "이윤이 아닌, 민중들을 위한 음식," "건강은 [당연한] 권리이지 특권이 아니다"와 같은,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을 알아차린 구호들을 외치고 있다. 환경주의자들은 기업의 탐욕이 환경보호와 상충한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으며, 새로운 투쟁성의 첫번째 징조들이 전세계 노동자 계급들 내부에서 발견되고 있다.

그러나 암묵적인 반(反)자본주의적 감정에도 불구하고, 광범한 대중들은 우리가 과거의 재앙, 실책, 범죄에 만족스럽게 대결하고 그것들이 재발하지 않게끔 보장하기 전에는, 공산주의 운동과 혁명운동을 신뢰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과거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하고, 그리고 전적으로 새로운 부르주아-민주주의 정당으로 행세한다고 해서 이를 달성할 수는 없다. 오히려 우리가 해야 할 바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1) 동유럽과 소비에트 연방에서 있었던 일을 해석해야 한다. 여기에는 해야 할 과제가 아주 많이 남아 있지만, 우리는 적어도 문제의 윤곽은 그릴 수 있다.

첫째, 동유럽과 소비에트 연방에서 발발한 것은 붕괴가 아니라 반(反)혁명이었다. [동]유럽 사회주의는 적어도 두 집단으로 구성된 초기 또는 성장 중인 부르주아지에 의해서 폐기된 것이다. 그 두 집단이란, 한 집단은 이미 재화와 용역에 대해 특권을 누리고 있었던 기업체 및 산업의 고위 경영자와 감독자들로, 특권을 통해 축적한 재화를 자본과 사적 소유의 기업으로 전화시키고자 했으며, 또 다른 한 집단은 국가경제의 붕괴 와중에 번창한 합법/반합법/비합법 부르주아지이다. 그들이 그 과정을 이끌었던 자들이었으므로, 그들은 자본주의의 재수립에 저항하지 않았다.

그러나 왜 노동자들과 농민들은 사회주의를 방어하기 위해 일어나지 않았는가? 그 이유는 주로, 민중이 장기간에 걸쳐 탈-정치화됐고, 사회주의적 민주주의가 아예 사용되지 않거나 계속 오용됨으로써 쇠퇴했으며, 대담하고 도전적이며 창조적인 변화의 철학인 맑스주의의 전유가 정책결정의 단순한 변명거리라든가 강단의 직업 또는 졸업학위의 요건 등으로 전락했기 때문이었다. 경제의 강제적 행진에 비해서 사회주의의 사회적 발전은 지체되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스탈린과 체 게바라 간의 사상적 차이를 볼 수 있다. 스탈린은 모든 비용을 감수해서라도 생산을 증대시키는 것이 최우선적으로 필요하며 그렇게 되면 사회는 그 변화들에 맞춰지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반면에, 체 게바라는 의식과 사회적 관계가 경제와 발맞춰 함께 진보하지 않으면 두 가지 다 잃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고, 그의 말은 옳았다.

이 말은 곧, 공산주의자가 민주주의에 개입해야 할 필요성은, 사회주의 건설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민중의 모든 집단적인 지혜를 동원하고, 사회주의 해체 과정에 저항할 최대한의 역량을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에서 도출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모든 실수가 방지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과제는 이전의 인류가 한 번도 시도하지 못했던 기념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주의 사회를 세우기 위한 최초의 시도를 끝내 좌절시킨 최악의 오용들, 범죄, 기회주의들을 막아낼 수는 있을 것이다. 또한 여기서 공산주의자가 지녀야 할 도덕의 핵심이 도출된다. 만약 대중이 역사를 건설한다면, 피상적 슬로건으로 그들을 조종한다거나, 그들을 기만한다거나, 현재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깨닫고 이해할 수 있는 그들의 능력을 제한시킨다거나, 의사결정 과정에 있어서 그들의 실제적 권위를 손상시킨다거나 하는 일은 허용될 수 없다.

2) 우리는 공산주의 정부와 정당에 의해 저질러진 오류와 범죄를 설명해야 한다. 우선, 우리는 오류과 범죄를 구별해야 한다. 먼저 경제를, 나중에 사회관계를 발전시킨다는 생각은 매우 해악적인 오류이긴 했지만, 어쨌든 하나의 오류였다. 그러나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와 합법성의 억압, 동지를 공격하는 음모들, 일부 최정예 간부들의 숙청, 폴 포트의 대량학살, 변명거리로 타락한 맑스주의, 우리 대오 내의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반(反)유대주의, 민족적 쇼비니즘의 용인 등은 범죄였다. 만약 우리가 그것들을 범죄로서 인식하고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그것들의 재발을 방지할 수단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혁명적이고 낙관적이며 용기있고 창조적인 그러한 대중운동을 결코 획득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 이제, 그 범죄들에 어떻게 맞서야 할까? 범죄를 부인하거나 단순한 '오류'로 치부하는 일은 용납될 수 없다. 우리는 그러한 범죄를 공산주의와 완전히 무관한 것으로 부정해버릴 수도 없고, 스탈린, 베리야, 폴 포트, 케이예타노(Cayetano), 밀로셰비치 등에게 떠넘겨 우리 사이에서 추방해버리고 손을 씻을 수도 없다. 그렇게 해서는 아무 것도 배울 수 없으며, 범죄의 재발을 방지할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적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러한 범죄적 행위들이 사회주의의 본질적 요소이며 사회주의의 실제적 정의라고 결론을 내릴 수도 없다.

농업에서 빌려온 한 이미지가 도움이 되겠다. 사탕수수 녹병은 사탕수수 자체가 아니라 사탕수수가 걸리는 병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사탕수수의 병이지 토마토의 병은 아니다. 이것[사회주의의 범죄]은 우리의 것이며, 우리의 것이 아니기도 하다. 다시 한번, 해결책은 우리가 모순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달려 있다.

물론 이것은 단지 첫걸음일 뿐이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운동이 그러한 왜곡에 왜 그렇게 취약한지 깨달아야 한다. 나는 로자 룩셈부르크가 올바른 방향에 서 있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과거로부터 계승된, 그리고 현재 존재하는 물적 조건을 가지고(그리고 우리 자신으로부터) 미래를 건설한다. 때문에 우리가 대체하려고 투쟁하는 사회의 오용들, 위계들, 기회주의와 실용주의들은 재생산되기 쉬운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다음의 이론적 과제를 안겨준다.

의식 및 그 변화에 대한 이론을 향하여

사회주의 나라에서든 자본주의 나라의 사회주의 운동에서든, 의식을 변화시키는 것은 혁명가의 과업이다. 혁명가의 임무는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라는 체 게바라의 지침에 비교하면 이는 퍽 온건한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첫 인상은 잘못이다. 첫째로 그것은 체 게바라의 사상이 지닌 복합성을 과소평가한 것이며, 둘째로 그 과정에 대한 맑스주의적 접근을 간과한 것이다. 의식을 변화시키는 것은, 의식이 변화한다고 설교하는 것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

의식은 슬로건의 묶음이 아니라, 서로가 뒷받침할 뿐만 아니라 서로가 상충되기도 하는, 새로운 경험들에 의해 강화되거나 약화되는, 믿음, 판단, 느낌들의 총체적인 체계인 것이다. 그것은 체계적 네트워크이다. 새로운 경험들은 그러한 네트워크를 통해 여과되며, 그 네트워크의 어떤 경로를 통해서 증폭되기도 하고 축소되기도 한다. 몇 가지 사고들이 바뀌더라도, 반면에 전체 이데올로기에 더욱 핵심적인 의견들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체계의 용량을 넘는 경험이 존재하지 않는 한, 바뀌지 않은 채로 그대로 남게 된다. 그러므로 의식을 바꾸기 위한 싸움은, 경험의 형태를 바꿀 기회를 제공하는 것, 그리고 동시에 그 경험을 해석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는 것에 달려 있다. 조언과 교육, 그리고 가장 영감을 주는 모델조차도 그것과 상충하는 경험의 벽을 넘을 수 없다. 그러나 매일의 일상이 어떤 이론적 입장을 뒷받침하게 될 때, 훌륭한 주장, 모델, 가르침은 승리할 것이다.

상호모순적이지만 대개는 한 의식 속에서 분리되어 있으면서 서로 만나지 않던 상이한 믿음들과 느낌들이 이제 갈등에 돌입할 때, 의식은 변화한다. 또는 새로운 경험이,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기존의 생각과 모순을 일으킬 때, 이데올로기의 재조정이 일어난다.

자본주의하의 당면 투쟁에서 중요한 것은 [기존의] 사고들이 생활에 의해 도전받는 교육적 계기를 창출하고 그 사건을 해석하는 데 도움을 주는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활동이 그 참여자와 반대자 및 구경하는 이들의 의식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 하는 관점에서 그 활동을 평가해야 한다.

사회주의하에서, 노동은 중앙집중적으로 조직화된다. 생산수단은 노동자 계급의 소유이지만, 그것이 국가적 계획 수준이나 국가적 필요에 의해 단지 선언만 될 뿐 작업장 수준에서는 기존의 명령/복종의 위계적 구조가 여전히 우세하다면, 그 결과는 사회주의의 수동적 수용을 입증하는 것이고,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참여보다는 냉소와 무관심을 초래할 것이다.

그러나 의식의 변화를 위해 투쟁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가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의식이 무엇인지, 이데올로기 체계를 구성하는 상호작용의 네트워크 내에서 사상과 감정들의 상호보족과 모순이 무엇인지를 잘 알아야 한다. 그람시, 브레히트, 파농, 프레이리, 그리고 체 게바라의 작업이 유용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

맑스주의의 방어

오늘날 맑스주의에 대한 공격은 두 가지 원천에서 나온다. 하나는 기존의 반동적 적들로서, 늘 그러했듯이, 우리를 영원히 제거하기 위한 운동 속에서 우리의 약점을 포착하여 이득을 취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또 다른 원천은 우리의 동지들로서, 예기치 못한 사건들에 의해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비생산적인 교조주의와의 갈등에서 깊이 상처입고 과거의 오류와 범죄의 폭로에 의해 좌절하여, 포스트모더니즘의 덧없는 현란함에 눈이 먼 채 맑스주의를 포기하려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맑스주의를 폐기하려면 그들은 먼저 맑스주의를 반박해야 하고, 또 반박하려면 먼저 반드시 맑스주의를 과잉단순화하고 왜곡시켜야만 한다. 그리고 나서야, 그들은 우리를 비생산적인 경직성의 최악의 사례로 치부하면서, 자신들이 보다 시대에 부응하고 개방적이며 유연하다고 내세울 수 있는 것이다.

맑스주의를 방어하는 것은 단순히 그것을 재확증하는 것이 아니다. 그 작업은 유연성, 자기비판, 창조적 발전을 전제로 한다. 온실의 맑스주의는 우리를 둘러싼 사상의 전장(戰場)에서 살아남을 수 없으며, 지구적/지역적 수준의 새롭고 불확실한 변화 물결 속에서 우리의 항해를 인도할 수도 없다. 그 작업은, 철학, 과학, 문화의 이슈들을 외면한 채 맑스주의를 단지 노동자에게 우호적인 정치경제학으로 축소시키려는 시도에 반대해야 한다. 맑스주의의 방어는, 그들이 허울좋은 상식으로 우리를 제압하지 못하도록, 모든 영역에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맞서는 것을 필요로 한다. {선언}은 공산주의자와 여타 사회주의자들과의 차이점이, 그 국제주의와 더불어, 운동의 전체적 조망에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현실의 어떤 측면도 영원히 우리의 시야 바깥에 남아 있어서는 안된다.

포스트모던의 궤적은 최근 몇 해 동안의 예기치 못한 사건들에 충격을 받은 이들에게 맑스주의의 포기를 호소할 뿐만 아니라,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해 세계 인식에 도움을 주는 어떠한 일반 이론의 가능성도 포기하도록 호소하고 있다. 그들은 이론을 '거대 담론'이라고 조롱하고, 어떠한 일반 이론도 ― 우연히도 무솔리니로부터 빌려온 용어인 ― '전체주의적'이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은 엄밀성이 결여돼 있으며, 유행하는 것들이긴 하지만 모호하기만 할 뿐인 개념들을 거리낌없이 사용하고 있다.

그들이 찬사의 용어로 사용하는 '다원주의'가 한 예이다. 그러나 다원주의는 몇 가지 아주 다른 의미를 포함한다.

1) 미해결 문제에 대한 완전하고 자유로운 토론을 촉진시키는 의견의 다양성. 이는 모든 의견이 존재론적 상대주의에 입각하여 동등하게 유효하다는 것이 아니라, 과학의 경계를 넓혀나감에 있어 이미 승인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에 논쟁과 투쟁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또한 고무되어야 할 부분적인 정보, 막연히 그럴듯한 주장, 미검증 가설 등이 존재함을 인정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경계가 변동없이 그대로 유지된다거나 한 문제를 갖고 진척없이 논쟁이 지속된다면, 그것은 과학의 활기보다는 차라리 침체를 보여주는 것이다. 과학에 있어, 의심은 인식을 향한 한 걸음이지, [그 자체가] 상대적인 확실성보다 더 심오한 인식론적 목적인 것은 아니다.

여기서 확실성은 물론 상대적인 것이다. 정치에서처럼, 과학에서도 모든 이론들은 부분적이고 제한적이며, 오늘의 위대한 이론도 조만간 좀더 포괄적이고 깊이 있는 이론에 의해 대체되리라는 점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모든 이론이 제한되어 있다는 점에서 동등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단지 상대적으로 진리인 이론들과, 심각하게 잘못되어 있으면서 부당한 것을 부추기고 정당화하거나 또는 용인하는 이론들을 분별해야만 한다.

이론이 대체되는 과정 자체가 매우 복잡하다. 대개 그것은 하나의 이론을 기각시키는 새로운 사실의 발견에 의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것 또는 논리적 일관성의 상실에 직면하여 일어나는 어떤 이론의 임시방편적인 땜질의 누적 때문에 일어난다.

2) 한 질문에 대한 대답의 다양성을 종종 혼동하는 또 다른 종류의 다원주의가 있다. 농업을 공부하는 어떤 학생들이 생태계 측면에서 생산 체계를 분석하고, 다른 학생들은 농촌의 부당한 구조를 고찰하고, 또 다른 이들은 농촌 지역의 인구 구조를 조사하였다면, 이것은 서로 다른 의견 제출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의제를 다루는 것이다. 그러한 의제 모두는 자체의 목적상 분명히 합당한 것이며, 전체를 이해하기에는 불완전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다음 단계는 그러한 의제들을 교직(交織)하고, 그 의제들이 더 큰 전체로 보면 부분적이고 상대적으로만 옳다는 것을 보여주고, 계급구조와 토지보유가 생산기술에, 나아가 생태변화 등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 연구하는 일이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는 옛 이야기처럼, 그들은 각자 자신의 부분적인 관점에서 코끼리를 그려낸다. 그 이야기는, 모두가 자신의 고유한 현실을 갖고 있다는 결론으로 이용되곤 한다. 그러나 이와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그것들이 모인 것이 코끼리이고, 그들은 서로 대화해야 한다는 것으로. 만약 그 이야기가 네 명의 여성 장님의 이야기로 고쳐진다면, 그들은 코끼리에 대해 좀더 포괄적인 관점을 종합하게 될 것이다!

3) 모든 진보주의자들은,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착취, 동성애혐오에 맞선 투쟁을 인간해방 투쟁의 필수불가결한 구성요소로 인식한다. 그러나 오용들의 목록으로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동성애혐오, 계급차별' 등이 우리에게 제공될 때, 그것들이 그 해악에 있어서 동등하다는 도덕적인 관점에서 바라본다 하더라도, 그것들이 가진 동학이 매우 상이하다는 사실은 사태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하지만 해결책은 아주 다르다. 우리가 인종주의를 철폐하려고 할 때, 그것은 인종주의에 의해 확립된, 과학적으로 근거없는 '인종 race'이라는 범주 자체를 철폐하려는 것이다. 우리가 성차별주의를 철폐하려고 할 때, 그것은 남성과 여성을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불평등을 철폐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계급차별'의 분쇄는 어떤 나쁜 태도를 청산하자는 것이 아니라 계급착취체제를 철폐하자는 것이다.

4) 이해 관계의 다양성.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군인, 기업가, 농민과 전문직업인들의 공존 필요성을 이야기할 때, 그들은 직업과 계급들을 혼동하고 착취와 억압의 영속성을 옹호한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자유이지만, 관용이라는 가면 속에 숨겨진 그들의 제안의 진정한 의미를 혼동해서는 안된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사상에서 엄밀함이 결여되어 있는 것은 개인적 특징이 아니라, 원칙에 관련된 문제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회에 대한 과학이라는 개념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이 맑스주의를 부정하려고 할 때, 그들은 지난 시대의 역사와 이론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을만큼 세계는 새로워졌다고 주장하면서 맑스주의를 '시대착오적'이라고 선언하고는, 그리고나서 18세기 아담 스미스의 자유시장 경제학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들은 다당제(또는 미국 사례처럼, 양당제) 선거민주주의를 언급하면서 '민주주의'와 같은 현재의 부르주아 담론의 범주를 무비판적으로 채택하며, 실제로 민족주의의 갈등인 것을 두고 '인종분규 ethnic conflict'라고 이야기한다.

물론 최근 몇 십년의 사건들이 우리를 놀라게 했고, 우리의 과학이 초기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급격한 [역]이행을 적절하게 설명해주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이같은 현실은 진지한 정치적, 이론적 작업을 요청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계를 개선시키기에 충분할만큼 세계를 이해하려는 과학적 기획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어느 경우에든 과학적 사회주의의 슬로건을 부정하는 이들은 과학적 과정의 실재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다. 맑스주의는, 물리학이나 생물학이 그렇다고 간주되는 '실증과학'이 결코 아니며, 더욱이 물리학과 생물학 역시도 실증과학이 아니다! 과학적 연구의 목표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객관적 진실에 도달하는 길이라는 자연과학의 자화자찬을 액면 그대로 믿으면서, 그렇게 추정되는 과학의 확실성을 맑스주의와 일반적 사회과학에서의 이론적 혼란상과 대조시킨다. 그러나 과학은 확실성(certainty)이 아니다. 결국 모든 이론은 오류를 범하거나 부분적인 것으로 판명된다. 물질(matter) 이론들이 길어야 겨우 몇 년을 버티지 못하고, '근본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설명들에 잇따라 새로운 설명들 ― 쿼크, 글루온(gluons), 끈(string), 다차원 초끈(superstrings) 이론 등 ― 이 줄을 잇는 최근 물리학의 발달사를 보라. 우주론, 공중보건, 농업, 수학과 화학에서도 놀라운 일들이 꼬리를 물고 있다. 은하계에서 엄청난 양의 보이지 않는 물질의 발견, 하이테크 생산방식이 위험(risk)에 대하여 갖는 취약성, 수학적 카오스, '불활성' 희소기체들('inert' noble gases)의 화학적 활동성, 이 모든 것들은 과학의 오류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과학의 활력과 자기정정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맑스주의에도 해당된다. 자본주의에 대한 맑스주의의 기본적 분석은 150년 전이나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효력을 지니는 반면, 사회주의에 대한 분석은 아직 초보적인 상태에서 교정(矯正)의 도상에 있다.

과학의 오류가능성이 불가피한 까닭은, 우리가 미지의 것을 연구할 때 그것을 이미 알고 있는 지식과 같은 것이라 간주하고서 연구를 하기 때문이다. 미지의 지식은, 이미 알고 있는 지식과 마찬가지로 과학을 가능한 것으로 만들지만, 이미 알고 있는 지식과는 달리 과학을 필연적인 것으로 만들지는 못한다. 어떤 영역을 과학으로 인정받게 만드는 것은, 방법론, 새로운 것에 대한 반응능력, 새로운 도전을 검증할 수 있는 자기비판 능력 등이다. 여기에 필요한 과학적 정신은, 자신이 올바르다는 점이 아니라 상충되는 사실(contradiction)에 개방적이라는 점을 자부심으로 가지며, 현실에 조응하지 않는 이론에 집착하지 않되 싫증과 지루함 때문에 유효한 이론을 폐기하지 않는 정신이다. 마지막으로, 이는 외양 이면의 현실을 간파해내는 핵심적 개념을 포착하고 있을 정도로 과학적이어야 한다.

맑스주의는 또한 강단 과학이나 기술 과학과는 매우 다르다. 맑스주의는 학문 제도와 함께 거리와 작업장에도 모두 뿌리를 둔다. 맑스주의는 직업적 학자와 공인되지 않은 사상가 모두에 의해 생산된다. 솔직히 말해 맑스주의는 당파적이며, 불의를 고무하고 정당화하고 용인하는 모든 이론들은 잘못되었다는 작업가설을 기꺼이 채택하고자 한다. 맑스주의는 사상과 감정의, 어느 하나에 종속되지 않은 채로의 통일을 주장한다. 맑스주의는 사회적/생물학적, 무작위적/결정론적, 태생적/환경적, 물리적/심리적과 같은 잘못된 통속적 이분법을 기각한다. 맑스주의는 자신의 실천 자체가 연구의 대상이며 역사적 뿌리를 갖는 것의 일부라고 인식함으로써, 의식적으로 반성적이다. 따라서 이는 강단 분과학문에서 말하는 공식적 의미의 '과학'도 아니고, 세계의 일부를 인식할 목적으로 경험을 조직하기 위하여 자원과 제도가 따로 떨어진 채 이뤄지는 지식 생산의 특정한 국면으로서 '과학'도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세계를 변혁하기 위해서 세계를 인식하는 과학적 접근이다.

맑스주의의 방어는 보다 훌륭한 분석과 비판적 개방성으로, 지식의 전 영역에서 부르조아 이데올로기에 맞서는 것을 필요로 한다. 이전의 맑스주의가 독일 철학과 프랑스 사회주의, 그리고 영국 정치경제학을 자양분으로 흡수했던 것처럼, 이제는 생태학과 페미니즘 및 반인종주의 운동의 통찰력을 단지 정치적 슬로건으로서가 아니라 우리의 지적 구성에 대한 이론적 기여로서 인식해야 한다. "공산주의자들은……운동을 전체적으로 바라본다."

<뉴욕 맑스주의 학교 New York Marxist School>는 맑스주의의 재활성화 기관 중의 하나이다. 이 학교는 정당도 아니고 어느 한 정당에 소속되어 있지도 아니다. 활동가 단체도 아니다. 그러나 이 학교 공동체에 참여하는 이들은 활동가들이고, 그들은 매일의 정치적 실천 속에서 이론적 작업의 필요성을 인식하기 때문에, 그리고 현재에 맥락을 부여하고 넓은 범위의 프리즘을 통해 매일매일 지향해야 할 비전을 필요로 하기에 이 학교에 참여한다. 전세계의 동지들과 연대하는 국제주의자들이, 혁명의 재무장이라는 우리의 고된 과제에 동참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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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에서 말하는 서비스 향상이란.

미국과 라틴아메리카에서 사유화가 팽창되고, managed care가 보급되어 온 과정을 읽으면서 깨달은 바는 의료 시장화가 소비자의 선택권을 늘리고 다양한 형태의 의료 공급을 증가시켜서서 의료 서비스의 질을 높일 것이라는 전형적인 논리는 의료 시장화를 주장하는 어느 나라에서나 통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 의료서비스의 질이라는 것이 더 많은 환자들을 성공적으로 치료해내는 게 아니라 소파와 가구를 바꾸고 벽지를 깔끔하고 예쁜 것으로 사용해서 더 비싼 돈을 들여 인테리어를 하고, 병원의 의료기기, 컴퓨터를 최첨단으로 갈아치우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에서 '서비스의 질적 향상' 이란 건 언제나 이런 방식일까? 90년대 후반 이후 본격적으로 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화가 진행되면서 대학들이 경쟁하듯 분주히 새건물을 지어대고 강의실을 호텔처럼 꾸며대지만 돈안되는 과는 통폐합되고 자본이 필요한 과에만 자원이 집중되면서 학과 간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의료 서비스 질 향상과 그 현실의 모습과 꼭 닮아있지 않나. 거기다가 정작 수요자들(소비자, 학생  whatever!!)은 등록금 때문에 학교를 포기하거나 휴학하거나, 생존의 압박으로 공부를 전념하지 못하는 현실을 보면 흥미롭게도 '질의 향상'이라는 구호가 사회의 갖가지 영역에서 비슷한 양상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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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울대 법인화에 반대하는 이유

이번에 서울대 법인화에 반대하는 대학원생 모임을 한데에는 대학원 들어오기 전부터 지속되었던 고민이 있다. 사실 난 대학원에서 공부할만한 여력이 없는 사람이다. 학부 학자금 대출만 3천만원이 밀려 있고, 동생도 대학교 2학년 생인데 모든 학비는 대출로, 집에서 돈 버는 사람은 엄마 하나인 상태에, 아빠는...(더이상의 언급은 생략하고 싶다.) 동생, 엄마, 할머니, 사촌오빠, 모두가 내가 적당한 직장에 취직해서 돈을 벌기를 바랐다. 그리고 나 역시 많은 사람들이 좋아서 취직해서 일하는 게 아니라 조건이 그렇게 만들어져 공부가 하고 싶어도 포기하고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알고 있고, 내가 일종의 사치를 부리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난 아무래도 행복해질 것 같지 않았다. 하고 싶지 않은 일 해가면서 돈을 벌어서 아빠가 진 빚을 엄마와 함께 갚아가며, 그돈으로 결혼하고, 애도 낳고 사는 것. 그건 내가 생각했던 삶의 상은 아니었다. 내가 아빠의 빚을 갚기 위해 위해 쓴 돈을 생각하면 얼마나 더 가족들을 위해 살아야 할까? 그래서 대학원 길을 택했다. 아마 난 결혼도 못하고, 남들처럼 비싼 옷에 화장품은 못쓰겠지만 그래도 이 길을 택하는 것이 좀 더 행복할 것 같았고 실제로 취직한 친구들의 삶과 이야기를 들어 볼 때 확실히 그 길을 택했을 때보단 어느 정도 행복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내 고민의 끝은 아니었다. 애초에 노사관계론과 고민하다가 보건대학원 길을 택한 이유는 이것이 좀 더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자유롭게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노사관계론을 택한 내가 아는 몇몇 사람들은 좌파이고, 많은 고민 끝에 그 길을 택했지만 실은 자기 고민과는 별 상관없는 일들을 상당히 많이 해야 하고, 실제로 자신의 고민을 구체화하기에는 '경영학'이라는 학문의 특성상 상당한 어려움이 많은 곳이다. 그에 비하면 보건대학원은 어찌됐건 공공성을 표방하고 있고, 나와 비슷한 의지와 관심을 가진 동지들이 상당히 있는 곳이며, 그리고 무엇보다 내 연구의 결과물들이 실천적으로 쓰일 수 있다는 것은 가장 큰 장점이다.

당장 만성병역학방에서는 한 선생님이 삼성반도체 공장의 작업조건과 노동자들의 질병 발생에 대한 패널 연구를 박사학위 논문으로 내려고 하고 있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건강상태나, 이주노동자들의 건강에 관한 이슈들 등 당장 벌어지고 있는 투쟁에 함께 할 수 있는 연구를 하시는 분들이 있다. 무엇보다 이 연구는 억압하는 계급에 의한 억압받는 계급을 향한 생명의 단축과 이 사회가 구조적으로 사람들을 어떻게 억압하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분야이다.

(주류는 안 그럴지라도) 어쨌든 대화될 수 있는 담론의 지평이 다른 분야보다는 훨씬 더 넓은 것이 사실인 듯하다.

 하지만 대학원에 입학한 후 구조적인 어려움들을 목격한다. 학자금대출을 받아 대학원에 등록한 뒤 남은 100만원으로 기숙사비를 냈다. 생활비가 없다. 프로젝트를 해야 한다. 상당수의 프로젝트들은 내 연구나 관심과 관련이 없다. 하지만 돈 벌려면 해야 한다. 정말 많은 대학원생들, 심지어는 교수님들도 겪는 문제이다. 멘토인 Waitzkin교수님조차 꼭 필요한 연구인데 펀딩소스를 구할 수가 없어서 의과대학에서 환자를 보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장 내 지도교수님도 별론 본인의 관심사도 아닌 저출산 문제에 집중해 있다. 게다가 저출산 대책에 대한 정책연구라고 해도 공무원집단에서 원하지 않는 결과들은 모두 커트되니 연구자들이 과연 보람찰까? 학진도 건강형평성에 대한 연구는 커트하는 경우가 많고, 민간재단이야 말할 필요도 없다. 서울대는 그나마 아니지만, 국내 다른 대학이나 미국대학의 보건대학원 연구들은 대부분 제약회사로부터 펀딩을 받으니 건강불평등이나 사회역학에 관한 연구자들은 어디서나 소수가 되고, 그나마도 재정문제와 고군분투해야 한다. 당장 이주자 건강에 대한 연구를 생각해보자. 국내에 들어와 있는 이주노동자 숫자나 그들의 열악한 작업조건과 임금, 90년대의 성비불균형으로 더욱 늘어날 국제결혼, 그리고 저출산으로 인한 인구감소와 그에 따라 더욱 늘어날 이민자를 생각하면 이 분야에 대한 연구가 매우 필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주제에 관한 연구는 현재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정부가 직접적으로 나서지 않는 한 어느 민간재단이나 기업이 여기에 펀딩을 하려 들까?

 이런 상황에서 법인화가 줄 파장은 명백하다. 보건대학원의 많은 교수님들이 법인화를 찬성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마 실제로 정책과에서 건강불평등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전공인 분들을 빼고 전부 법인화의 수혜를 입을 것이니 이해가 안되는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가뜩이나 돈 문제로 인해서 건강불평등이나, 사회역학과 같은 문제를 공부하고 싶어하는 연구자들이 대부분 포기하는 상황에서 이 분야에 대한 관심은 더욱 떨어질 것이다. 우리 연구실에서 'IMF경제위기와 그에 따른 한국 중념 알코올 사망 불평등 추이'라는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한 선배는 나에게  하고 싶은 연구는 교수가 되서 하고, 일단 지금은 돈 되는 공부를 하라고 말한다. 이 말을 들으면서 나는 교육 공공성이 왜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가치인지 되새겨보았다. 물론 공부하고 싶은 사람이 재정적 고민 없이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교육 공공성 없이는 (그닥 좋아하는 표현은 아니지만 자유주의적으로 말하자면) '학문의 다양성' 이 보장이 되지 않는다. 가장 먼저 퇴출될 것들은 물론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분과들이자 그 무자비함과 비윤리성, 비효율성을 고발하는 연구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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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왕 공공요금 인상 -_-b

안그래도 구미에서의 단수사태와 언론은폐로 불만이 고조되어가는 터에

오늘 아침 뉴스를 보니 서울시 지하철 버스요금 전기요금 수도요금 인상이 터져주시네.

예전에 NAFTA이후 멕시코를 소개했던 이강택 PD가

소득 대비 물가가 비싼 한국에서 그나마 체감 물가를 낮추고 있는 것이 싼 공공요금이라고 했는데..

 

당장 가스를 쓸 수 없어서 기름보일러를 사용해야 했던 사람들은

지난 겨울을 나는데 자기 대부분의 수입을 난방비에 써야 했다.

(등유 보일러를 쓰는 저소득층 가운데에는 그 추웠던 지난 겨울을 전기장판으로 떼우고 산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이쯤되면 정말 전민항쟁이 일어날때도 됐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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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이전에 주간경향에서 봤던 글을 발췌했던 것이다.

 

문제는 가난할수록 더 비싼 난방연료를 쓴다는 것이다. 최근 추장민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 연구위원의 발표에 따르면 저소득층이 주로 사용하는 등유 가격이 도시가스보다 3.5배 비싸 에너지 빈곤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추 연구위원이 지식경제부 자료를 분석한 ‘저소득계층의 기후변화 적응역량 강화를 위한 정책방안 연구’라는 보고서에 따르면 실내등유는 난방용으로 쓸 때 단위열량(㎉)당 가격이 122.1원으로 도시가스의 34.8원보다 3.5배나 더 비싸다. 하지만 무허가촌이나 노후주택의 저소득층에게 도시가스나 지역난방은 먼 나라 이야기. 반면 월 600만원 이상 고소득층은 도시가스(36.0%)와 지역난방(25.7%)을 주로 이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난한 계층일수록 혹한기를 버텨내기 힘들 뿐더러 난방을 할수록 빈부격차가 더 커지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광열비(전기료·연료비)를 기준으로 했을 때도 같은 결과다. 지식경제부가 작성한 자료에 따르면 2008년의 경우 50만원 미만 소득계층의 소득 대비 광열비 비중은 38.2%, 50만~100만원 미만 계층은 10.4%였다. 반면 300만~350만원 미만 계층은 광열비 비중이 3.2%, 600만원 이상 계층은 1.6%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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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학장학금 신청서를 쓸 때마다 느끼는 참담함.

대학에 들어오고, 또 대학원에 들어오고 나서 매학기 학비 면제 장학금 신청서를 냈는데, 매번 쓸 때마다 기분이 비참하다. 친구들에게 우리집 재정상태나, 내가 경제적으로 어떤 어려움에 처해 있는지, 우리집이 얼마나 문제가 많은지 그걸 설명할 땐 비록 힘들고 내 상태에 화도 나지만 그게 부끄럽거나 비참한 느낌은 아니었는데...

 

 점잖은 말로 아빠가 무직인데, 집에도 안 들어오고, 도박 중독에, 가정폭력도 행사하고...(차마 여기다 쓸 수 없는 이야기들).. 신용불량된지는 두 분 부모님 둘다 20년이 다되가니... 이런 이야기까지 구구절절 다 써야....

 

 솔직히 면학장학금 선정할 때 의료보험료와 소득세, 재산세로 선정할텐데.. 아무래도 이런 정량적 요소들로만 설명할 수 없는 어려움에 처해있는 학생들을 위해서 자기소개(라고 쓰고 자기구걸이라고 읽는다.)를 하게 하는 것이겠지만, 그리고 내가 그 돈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참 고마운 일이라는 것도 알지만.. 그래도 여전히 느껴지는 비참함은 어쩔 수 없는 것일까? 내가 누군가에게 동정의 대상이 되어 시혜대상이 된 듯한 느낌.

 

 내가 운이 좋았고 또 많은 걸 바라고 있는 걸 알지만서도.

 돈 없어도 어깨 펴고 당당하게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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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른타이 1922년: 날개 달린 에로스의 길을 열자: 젊은 노동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사회심리학적인 요소로서의 사랑




젊은 동지인 당신은 나에게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가 사랑에 어떠한 공간을 주었는지 물었는가? 당신은 현시기에 젊은 노동자들이 노동자공화국을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 하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기보다는 사랑이나 그와 관련된 문제들에 전념한다는 사실에 관심이 갈 것이다. 내가 거리를 두고 사건을 판단하는 것은 어렵지만, 이러한 상황에 대한 해답을 찾도록 시도해보자. 그러면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 안에서 사랑이 어떠한 공간을 차지하는지에 관한 첫 번째 질문에 답하기가 다소 수월해질 것이다.


소비에트 러시아가 시민전쟁의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투쟁의 주요 전역(戰域)은 지금 두 개의 이데올로기와 두개의 문화-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가 고군분투하고 있는 전방이다. 이 두 개의 이데올로기의 양립불가능성은 점점 명확해지고 있으며, 이 두 개의 근본적으로 다른 문화들 사이의 모순은 점점 더 격렬해지고 있다. 정치학과 경제학의 영역에서 공산주의자의 원칙과 이상이 승리함에 따라 노동자 계급의 감정과 내면세계에서의 혁명도 불가피하게 발생하고 있다. 삶, 사회, 노동, 예술, 삶의 규범(도덕)에 대한 새로운 태도가 이미 나타나고 있다. 성적인 관계에 있어서의 합의는 이러한 삶의 규범들의 한 양상이다. 우리의 노동공화국이 5년 넘게 실현되는 동안, 이러한 비군사적인 최전방에서의 혁명은 남성과 여성이 생각하는 방식을 크게 변화시켜왔다. 두 이데올로기 사이의 전쟁이 더 강해질수록 격렬할수록, 오로지 노동자 계급의 이데올로기만이 만족스러운 답을 줄 수 있는 새로운 “삶의 수수께끼”와 새로운 문제들이 불가피하게 대두되고 그 중요성이 점점 커진다.


여기 우리를 흥미롭게 하는 "사랑의 수수께끼"가 바로 그런 문제이다. 성별간의 관계에 대한 질문은 인간사회 그 자체만큼이나 오래된 미스테리이다. 역사상 발전의 각각 다른 단계에서 인류는 다른 방법으로 이런 문제의 해결에 다가갔다. 문제는 이전과 같이 남아있다; 해결의 열쇠도 변한다. 해결의 열쇠는 다른 획기적 사건들과 권력 있는 계급, 특정한 시대(다른 말로 문화에 의해)의 "정신"에 의해 주어진다.


러시아에서 최근 몇 년 동안의 격렬한 내전과 막연한 혼란 속에서 그 수수께끼의 근원에 관한 흥미는 거의 없었다. 노동계급의 남성과 여성은 다른 감정과 열정과 표현에 사로잡혀 있었다. 지난해 동안은 모든 사람들은 죽음의 그늘을 걸어다니고, 승리가 혁명과 진보로 귀결될지 반혁명과 반동으로 끝날지가 결정될 시기였다. 혁명의 위협에 직면하여, 미묘한 날개달린 에로스는 삶의 현장으로부터 달아나고 있었다. 시간도 없었고 사랑의 "기쁨과 고통"을 향한 내적 힘의 여분도 없었다. 이것이 인류의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에너지의 보존의 법칙이다. 전체적으로 힘은 항상 역사적 순간의 가장 긴급한 목표를 향하게 된다. 이 때, 러시아에서는 재생산의 생물학적인 본능과 본성에 대한 자연스러운 목소리 우세했다. 남성과 여성은 결합했고, 남성과 여성은 이전보다 더 쉽고 더 간단히 헤어졌다. 그들에게 엄청난 계약 같은 건 없었고, 눈물이나 후회도 없이 헤어졌다.


성매매는 사라졌고, 파트너들이 서로에게 복종하지 않고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꾸미지 않은 채 재생산의 본능에 충실할 수 있는 수많은 성적인 관계들이 증가했다. 이러한 사실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당시에 이러한 발전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미 존재하고 있던 관계들이 지속되고, 동지애와 지속적인 우정을 통해 남성과 여성은 결합하고 그것들이 순간의 진지함으로 관계를 좀 더 귀중하게 되기도 했지만, 순수한 생물학적인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시작되거나, 두 파트너들이 업무를 부수적인 것으로 여기거나 등한시해서 혁명을 위한 그들의 일이 방해되기도 했다.


이 꾸밈없는 성적인 충동들은 쉽게 자극되었지만 곧 소모되었다; 그래서 "날개없는 에로스"는 "날개달린 에로스"보다 조금 덜 내부적인 힘을 소모했다. 날개달린 에로스의 사랑은 모든 종류의 감정들의 미묘한 요소들로 짜여져 있다. “날개없는 에로스”는 잠 못드는 밤으로 사람을 괴롭히지 않는다. 의지를 약화시키지도 않고, 마음의 이성적인 작동을 뒤얽히게 하지도 않는다. 혁명의 클라리온이 울려 퍼졌을 때 투쟁하는 계급은 "날개달린 에로스"의 힘 아래로 떨어질 수 없었다. 그런 시기에 혁명에 직접적으로 작동하지 못하는 경험에 공동체 구성원들의 내적인 힘을 낭비해야 하는 것이 적절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개인적인 사랑은 그들의 마음을 결혼에 두게 하는 데, 이는 크나큰 내적인 에너지의 지출을 요구한다. 노동계급은 경제적으로 물질적인 부유함뿐만 아니라 각자의 지적이고 감정적인 힘을 보존하는 데에도 관심을 갖는다. 이런 이유로 혁명적인 투쟁이 고조되는 시기에는 별다른 요구는 지니지 않는 재생산 본능이 모든 것을 포용하는 “날개달린 에로스”를 대체한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변했다. 소비에트 공화국과 전진하는 인류 전체는 일시적이고 상대적인 침묵의 시기에 들어서고 있다. 이제껏 이루어졌던 성과와 목표물들을 이해하고 자신의 것으로 흡수하는 복잡한 업무가 시작되고 있다. 삶의 새로운 형식의 창조자인 프롤레타리아는 반드시 사회적 심리적인 현상들로부터 배울 수 있어야만하고, 이러한 현상들의 중요성을 움켜잡아야 하며 계급적 자기방어를 위해 무장할 수 있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물질적인 부의 창조를 가져오는 법뿐만 아니라 내적인 심리적인 세계의 법을 이해할 때, 부패한 부르주아 세계를 깨트려버리게 무장할 수 있다. 그럴 때만이 전진을 위해 노력하는 인류는 군대와 노동의 최전선에서뿐만 아니라 심리적-문화적인 최전선에의 승리를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혁명은 승리가 입증되었고, 더욱 강력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혁명적 돌진의 기운은 남성과 여성에게 조금의 여유를 허용하기 시작했다. 부드러운-날개달린 에로스가 어둠 속에서 출현하여 정당한 자리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날개없는 에로스”는 심리적인 욕구를 만족시킬 수 없게 되었다. 감정적 에너지가 축적되기 시작하였으나, 남성과 여성은 심지어 노동자계급까지도 아직 이러한 에너지를 집단의 내적 삶을 위해 어떻게 사용해야하는지 배우지 못했다. 이러한 여분의 에너지는 사랑의 경험에 있어 출구를 필요로 한다. 사랑의 신의 현이 많은 수금은 단조로운 “날개없는 에로스”의 목소리를 대신했다. 남성과 여성들은 이제 성적 본능을 순간적으로 충족시키기 위해서 결합할 뿐만 아니라 “러브 어페어”를 다시금 경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랑의 고통과 사랑이라는 행복한 기쁨에 대해서도 모두 알게 되었다.


소비에트 공화국에서는 지적이고 감정적인 욕구, 지식에 대한 욕망, 과학적인 문제와 예술 및 문학에서의 흥미가 의심할 여지없이 증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변혁을 향한 이러한 움직임은 불가피하게 사랑을 경험하는 것 또한 포괄하고 있다. 사랑의 신비인 성에 대한 심리학적인 질문들이 흥미를 자극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어느 정도까지는 사생활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사람들은 몇 년 전까지는 오직 Pravda 사설이나 보고서들만 읽는데 시간을 할애했던 당원들이 날개달린 에로스를 찬미하는 소설들을 읽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곤 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이 반동적인 단계인가? 혁명적 창조성이 쇠퇴하기 시작했다는 징후인가? 그 어느 것도 아니다! 지금은 우리가 부르주아들의 위선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야 할 때이다. 사랑은 강력한 자연적인 본성, 생물학적인 힘으로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요소라는 것을 솔직히 인식해야할 때이다. 본질적으로 사랑은 뿌리깊은 사회적인 감정이다. 인류 발전의 각 단계들에서 사랑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문화의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인 부분이었다. 사랑을 “사적인 문제”라고 보는 부르주아들조차도 계급적인 관심사로 사랑을 연결시켜왔다. 노동계급 이데올로기는 사랑의 중요성에 대해 더욱 큰 주의를 기울여야만 하는데, 사랑은 다른 심리적이거나 사회적인 현상들처럼 집단적인 이익으로 연결될 수 있는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절대 사랑하는 두 당사자들만의 “사적인” 문제가 아니다.; 사랑은 한 집단에 가치 있는 요소들을 결합하게 해준다. 역사적인 발전의 각각 단계들에서 사회는 어떠한 조건 하에서 사랑이 “적합한지”(주어진 사회의 집단적 이익에 부합하는) 죄악시되거나 범죄화되는지를(주어진 사회의 업무에 반하는) 정의하는 규범들을 마련했었다는 사실로부터 이는 더욱 명확해진다.







역사상의 기록




인류는 역사가 시작되고서부터 성적 관계 뿐 아니라 사랑 자체를 통제하기를 추구했다.


친족 공동체에서는, 혈연관계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겼다. 친족 공동체는 여성이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 희생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대신 형제 자매에 대한 애정이야말로 최고의 감정이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오빠의 시신을 매장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의 위험을 무릅쓴 안티고네는 당대에 영웅이었다. 근대 부르주아 사회는 누이동생이 이런 행동을 한다면 매우 이상하게 바라볼 것이다. 아직 국가가 발달되지 않은 단계인 부족 사회에서 가장 존중받는 사랑의 형태는 같은 부족의 두 구성원간의 사랑이었다. 사회집단이 막 친족 공동체에서 진화했지만 아직 새로운 형태로 출현되지 않았을 시점에는, 구성원간에 정신적, 감정적 유대를 형성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우애’가 유대의 가장 적합한 형태였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결혼한 쌍 사이에서가 아니라 부족 구성원 사이에서, 국가의 조직자와 방어자 사이의 접촉의 확대와 축적이 집단의 이해를 충족시키는 데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는 부족 남성들에게 통용되는 이야기였다; 물론 여성들은 당시 사회적 생활에 있어서 맡은 역할이 없었고, 여성간의 우정에 대해서도 이야기되지 않았다.) 남성과 여성의 사랑보다도 남성간의 “우정”이 훨씬 칭송되고 중요했다. Castor와 Pollux는 국가의 이익을 위해 수행했던 공로라기보다는 서로에 대한 충성심과 흔들리지 않는 우정으로 명성이 깊었다. 우정 혹은 그와 유사한 것을 위해 남성은 자신의 아내라도 지인 혹은 손님들에게 바쳤다.


고대 세계는 우정과 “무덤까지 가는 충성심”을 시민적인 덕목으로 여겼다. 근대적 개념에서의 ‘사랑’이 차지할 공간은 없었고, 시인 혹은 작가들도 사랑에 거의 주목하지 않았다. 당시의 지배 이데올로기는 사랑을 협소한 분야, 혹은 사회와는 관련 없는 개인적 경험으로 격하시켰다; 결혼은 편의에 근거한 것이었지 사랑에 근거한 것은 아니었다. 사랑은 단지 여러 오락거리 중 하나였다; 그것은 국가에 대해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시민들이나 누릴 수 있는 사치한 것이었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부르주아 도덕이 허용하는 선에서 한계 지우지만, 고대 사회는 이러한 감정을 미덕 혹은 긍정적인 인간 자질의 범주 안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위업을 달성하고 친구를 위해 그의 목숨을 희생한 사람들은 영웅으로 여겨졌고, 그의 행동은 “최고의 미덕”으로 칭송된 반면 사랑하는 여성을 위해 희생하는 남성은 멸시와 비난을 면치 못했다.


고대의 도덕은, 따라서, 남성으로 하여금 선행을 고무시켰던 사랑-봉건제 하에서는 칭송되었던-은 고려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고대에는 남성 구성원을 서로 가깝게 만들고 사회 구조를 더욱 안정하게 하는 감정만을 인식했다. 그러나 문명 발전의 다음단계에서는 우정이 더 이상 미덕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부르주아 사회는 개인주의와 경쟁을 기반으로 세워졌다. 그래서 우정이 미덕으로 여겨질 여지가 없었다. 우정은 어떤 점에서도 도움이 안되고, 부르주아의 계급적 이해를 달성하는 것을 방해할 지도 모른다; 이것은 불필요한 “감성”과 약함의 징후로 여겨진다. 우정은 조롱의 대상이 된다. 오늘날 뉴욕과 런던이라는 공간에서의 Castor와 Pollux는 비웃음만을 자아낼 뿐이다. 우정이 자질로서 교육되고 고무되었던 봉건제 사회에서는 그렇지 않은데 말이다.


봉건제는 귀족의 이해를 방어했다. 사회의 구성원 사이의 관계보다 가족과 전통에 대한 개인의 의무에 근거하여 미덕을 정의하였다. 결혼은 가족의 이해에 따른 계약이었다. 어느 소년이라도 (소녀는 아무런 권리가 없다)이러한 이해에 반하여 아내를 선택할 시에는 매우 비난받았다. 봉건시대에 가족의 이해보다 우위를 점하는 개인적 감정과 기질이라는 것은 없었다. 그랬다가는 ‘죄인’이라는 딱지를 면치 못했다. 도덕은 사랑과 결혼의 조화 따위는 요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간의 성적 관계는 무시되지는 않았다. 사실, 인류 역사 초기에도 이러한 인식은 있었다. 이 엄격한 금욕의 시대에, 조잡하고 잔인한 도덕의 시대에, 폭력과 폭력에 의한 지배의 시대에 사랑이 최초로 수용되었다는 것이 다소 이상해 보일런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속내를 좀 더 살핀다면 그렇게 수용할 수밖에 없는 명확한 이유를 알 수 있다. 특정한 상황과 환경에서 사랑은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지렛대로 작용하기도 한다. 기사도는 전장에서 구성원들에게 순수함과 용맹, 인내와 위업을 달성할 수 있는 힘을 요구했다. 전쟁에서의 승리는 군대의 조직력보다는 개인적인 참여자들의 자질에 의해 좌우되었다.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마음속의 숙녀’와 사랑에 빠진 기사는 더욱 쉽게 기적적인 용기를 보여주었고, 승리를 얻을 수도, 자신의 삶을 희생할 수도 있었다. 사랑에 빠진 기사는 빛을 발하여 자신의 사랑에게 주목을 끌고 싶은 욕망에 고무되었다.


기사도의 이념은 사랑을 봉건 계급의 이익을 위해 사용될 수 있는 심리적인 상태로 인식하였지만, 그럼에도 엄격한 틀 내에서 이러한 감정을 제한하려 했다. 남성과 그 부인 사이의 사랑은 가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왜냐면 기사의 성 혹은 러시아 특권 귀족의 terem 안에서 사는 가족은 감정적인 유대로 묶여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기사도적인 사랑의 사회적 요소는 여성을 사랑하는 감정에 의해 군사적 혹은 다른 영웅적 위업이 고무되는 가족 외부에서 작동되었다. 그 여성이 가까이 하기 어려울수록, 기사는 그녀의 호의를 얻고 그 계급 사회에서 가치 있는 미덕과 자질을 갖추어 위신을 세우는데 노력하였다. 기사들은 보통 가까이 하기 어려운 여성, 예를 들어 영주의 부인 혹은 여왕에게 접근하려 했다. 오직 “플라토닉한” 사랑만이 용감한 기적을 수행하는데 자극제가 될 수 있었고 그런 것만이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아무리 지위가 높고 접근 가능성이 낮다하더라도, 사랑의 대상으로 결혼하지 않은 여성을 선택하는 일은 거의 없었는데 결혼 가능성과 앞서 언급한 지렛대가 작동하지 않을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봉건제의 도덕은 금욕주의-성적 억제-와 미덕으로서의 사랑이라는 관념을 결합시킬 수 있었다.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랑에 대한 그의 욕망은 속세적이라고 죄악시되었다. 그러한 욕망을 생물학적인 것에서 완전히 분리하여 추상적인 감정으로 승화시키기 위해서 기사는 한번도 본 적 없는 여성을 선택하거나 성모 마리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랑을 하기도 하였다. 그 이상을 그는 나아갈 수 없었다.


봉건제 이데올로기는 사랑을 자극제, 사회적 결집을 지지하는 자질로 보았다; 정신적 사랑과 기사들의 동경은 귀족 계급의 이해에 봉사하였다. 기사의 아내가 다른 기사의 여성으로서 선택되었을 때 아내를 수도원에 보내거나 외도했다는 이유로 살해하려는 생각을 한다면 그 기사는 비아냥거림을 받게될 것이다. 그는 그녀의 플라토닉한 우정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그러나 정신적인 사랑을 그렇게 강조하면서도 봉건적 도덕에서는 사랑을 법적인 결혼 관계와 동일하게 보지는 않았다. 사랑과 결혼은 봉건제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분리된 채 존재한다. 14, 15세기에 출현한 부르주아 계급에서만 사랑과 결혼은 결합되었다. 따라서 봉건제 사랑에 대한 고상한 궤변만이 형언할 수 없는 조잡한 규범들과 함께 남아있었다. 결혼 안에서든 밖에서든 성적 관계는 사랑을 부드럽게 하고 고무시키는 요소를 결핍한 채, 봉건제적 사랑은 순전히 심리적인 행위로서만 남아있었다.


교회는 영성적인 사랑을 북돋우면서 “타락”과의 전쟁을 수행하는 척 했다. 그러나 이는 양성간의 조잡한 동물적인 관계를 북돋았다. 마음 속에서 여성이라는 상징을 떼버리지 않은 기사는 그녀의 영예를 위해 시를 짓고 그녀의 미소를 얻기 위해 목숨을 바치면서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도시에 사는 여성을 강간하거나 그의 집사로 하여금 그를 기쁘게 해줄 아름다운 소작농을 데려오게 시켰다. 기사의 부인들도 한편에서 음유시인들이나 봉건 기사 수행원들과 신선한 쾌락을 나눌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봉건제가 약화되고 부르주아의 이해에 의해 좌우되는 새로운 삶의 조건이 출현하면서, 양성간의 새로운 관계가 발달했다. 플라토닉한 사랑을 거부하면서 부르주아는 육체에 대한 권리를 방어했고, 사랑이라는 개념에 정신적, 육체적인 조화를 주입했다. 부르주아 도덕은 사랑과 결혼을 분리하지 않았다; 결혼은 커플 상호간의 매력의 표현이었다. 부르주아지들의 실천 과정에서 편의라는 명목 때문에 이러한 도덕적인 가르침을 배반하기도 했다. 그러나 동반자적 결혼이라는 사랑에 대한 인식은 심대한 계급적 기반을 갖고 있다.


봉건제 하에서는 가족은 귀족의 전통과 태생에 의해 견고하게 유지되었다. 교회의 권력에 의해 부부의 결혼은 성사되었고, 가장에게 무한한 권위가 부여되고, 가족의 전통과 영주의 입지가 확고해졌다; 이혼은 불가능했다. 부르주아 가족은 변화된 조건에 맞추어 진화되었다; 이 때의 가족의 기반은 ‘부에 대한 공동소유’라기보다는 ‘자본의 축적’이었다. 가족은 이러한 자본의 수호자였다; 자본의 축적이 가능한 신속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남성의 재산이 조심스럽게, 그리고 기술적으로 다루어져야 했다; 다시 말해, 여성은 좋은 가정주부 뿐 아니라 남편의 친구이자 조력자가 되어야 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관계와 부르주아 사회 체계의 성립에 따라, 가족이 안정적으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비용을 경제적으로 고려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부의 축적에 공통의 이해가 달려있는 가족 구성원들의 협력이 구축되어야만 했다. 그리고 이러한 협력은 남편과 아내, 부모와 아이가 강력한 감정적?심리적 유대로 묶였을 때 더욱 큰 효력을 발휘하였다.


14세기 말 15세기 초, 삶의 새로운 경제적 방식이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발생시켰다. 사랑과 결혼에 대한 개념은 점차 변했다. 종교개혁가 루터, 다른 사상가들과 르네상스와 사회개혁의 공적 인물들은 사랑의 사회적 힘을 완벽하게 이해했다. 가족의 안정성-부르주아 체계에서의 경제적 기본단위를 유지하는-을 인식하게 되자, 경제적인 연계 이상의 무엇으로 가족구성원을 결속하는 것이 필요해졌다. 부상하는 부르주아들의 혁명적인 이데올로기는 사랑에 대한 새로운 도덕적 이상-육체와 정신의 동시적 결합-을 선전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개혁가들은 성직자의 독신주의에 도전했고, 기사가 지속적인 염원하지만 그의 감각적 욕구 충족은 부정당했던 기사도의 ‘정신적 사랑’을 비웃었다. 부르주아와 개혁 이데올로기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육체적 욕구의 정당성을 인식했다. 그러므로, 봉건제에서는 성적 행위로서의 사랑-결혼 내에서나 내연 관계에서-과 정신적, 플라토닉한 사랑-기사와의 관계와 그의 마음속의 여성- 이 분리되었지만, 부르주아 계급들은 육체적 매력과 감정적 애착을 모두 사랑이라는 개념 안에 포함하였다. 부르주아 사회에서는 결혼과 사랑이 분리될 수 없었다. 물론 실제 부르주아 계급은 이러한 이상으로부터 언제나 패퇴해왔다; 그러나 파트너들간의 의향에 대한 질문들이 봉건제도 하에서 제기되지 않았지만, 부르주아 도덕은 편의의 결혼에서조차 파트너들은 위선을 실행하고 애정을 가장해야만 함을 요구하였다.


결혼과 사랑에 대한 봉건적 전통의 흔적과 태도가 수세기 동안 살아남아 부르주아 계급의 도덕에 순응한 채 우리에게도 남아있다. 귀족 가족과 상류 계급은 아직도 이 낡은 규범에 따라 살고 있다. 이 사회에서는 사랑에 기초하여 결혼하는 것은 “어색하기”보다는 “우스운” 것으로 간주된다. 이 세계의 왕자와 공주들은 아직도 그들과 관계없는 사람들을 위해 정치와 출산의 요구에 응해야만 한다.


빈농 가족에서는 가족과 경제적 고려가 결혼이라는 합의에 커다란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농촌 가족에서는 결혼이 경제적인 한 노동 단위를 꾸리는 것이라는 점에서 도시 산업 부르주아의 결혼과 다르다; 구성원들은 경제적인 환경에 의해 단단히 결속되어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 내적인 결속은 부차화된다. 중세 장인들에게 사랑 같은 건 결혼에 있어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거나, 길드체계에서 가족이란 한 생산 단위였기 때문에 이러한 경제적인 논리만이 안정성을 보증하였다. 결혼에 있어서 사랑에 대한 이상 (또는 관념)은 부르주아지의 등장과 함께, 가족이 그 생산적인 기능을 잃고 소비 단위로 전락하였을 때 나타나기 시작하여 결국 축적된 자본의 보존을 위한 전달매체로서만 기능하였다.


비록 부르주아적 도덕이 전통에 반항하면서까지 “사랑하는 두 사람”이 결혼할 권리를 옹호하고, 또한 사랑을 결혼의 기초라고 주장하면서 “영적인 사랑”과 금욕주의를 비판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 도덕은 사랑을 매우 협소하게 정의하였다. 사랑은 결혼 내에서만 허용되었다. 합법적인 결혼 외의 사랑은 부도덕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한 생각들은 대개 경제적 고려 속에서 또 사생아에 대한 재산 분배를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서 구술되었다. 부르주아 도덕 전체는 자본 축적을 위한 것이었다. 복지향상을 위해, 각각의 가족 구성원의 부를 증가시키기 위해 함께 일하는, 사회로부터 분리된, 결혼한 커플이야말로 이상적이었다. 가족의 이익과 사회의 이익이 충돌하는 곳에서 부르주아지 도덕은 가족의 이익을 지지했다. (cf.부르주아 도덕의 인정적인 태도-비록 법에 의해 정해지지는 않았지만 가족의 이탈자에게 그리고 그들 가족의 이익을 위해 주주들을 파산케 한 사람들에게 조차) 공리주의적인 경향을 띈 부르주아의 이러한 도덕은 사랑의 장점을 결혼의 주요한 구성인자로 만들어 가족을 강화하였다.


사랑은, 물론,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론자들에 의해 규정된 테두리에 갇히지 않는다. 감정적인 갈등은 커지고 다층화되어, 부르주아 계급에 의해 발전된 문학의 새로운 형태-소설-안에서 감정적인 갈등은 존재한다. 사랑은 끊임없이 법적 혼인 관계라는 좁은 테두리로부터 자유로운 관계와 간통으로 나아간다. 그러한 관계는 비난을 받지만 지속되고 있다. 사랑에 대한 부르주아적 이상은 가장 많은 인구를 차지하는 노동자 계급의 요구에 부합하지 못한다. 그것은 또한 인텔리겐차 노동자의 삶의 양식에도 적합한 것이 아니다. 이것이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노동자들이 성과 사랑의 문제에 대하여 그리고 해명되지 않는 미스테리의 열쇠를 찾는데 관심을 보이는 이유이다. 어떻게 개인적-사회적 행복의 총합을 증가시킬 수 있는 남성과 여성의 관계가 발전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소비에트 러시아의 청년 노동자들은 지금 바로 이 순간 이러한 질문에 직면하고 있다. 연애-결혼의 관계에 관한 간결한 통찰을 진전시켜보면, 사랑이 처음 얼핏 보기에는 사적인 문제라고 보일 수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젊은 동지들이 깨달을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사랑은 중요한 사회적 경제적 요소이며 사회는 항상 본능적으로 이를 사회의 이익으로 조직해왔다. 마르크스주의 과학과 역사의 경험으로 무장한 남성과 여성 노동자들은 새로운 사회 질서에서 사랑이 차지할 공간을 발견하고, 그들의 계급적 이해에 부합하는 사랑의 이상을 결정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동지애적 사랑


새로운 공산주의 사회는 동지애와 연대의 원리에 의해 구성되고 있다. 연대는 공통의 이해관계에 대한 자각뿐만 아니라 집합 구성원들의 지적이고 감성적인 관계들에 의해 구성된다. 사회체계가 연대와 협동에 의해 건설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사랑과 따뜻한 감정을 지니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는 노동자 계급으로 하여금 같은 계급내의 동료들이 가지는 고통과 요구를 감당할 수 있는 능력과 다른 이들을 이해할 수 있는 민감함 그리고 집단에서 개인간의 관계가 가지는 의식을 통찰할 수 있도록 교육하고 독려해야 한다. 이런 모든 “따뜻한 감정”-감성, 연민, 공감 그리고 책임감-은 한 가지 원천에서 파생된다; 이것은 사랑의 좁은 의미에서의 성적인 무엇이 아니라 단어의 넓은 의미에서의 사랑의 양상이다. 사랑은 결합되는 감정이고 따라서 조직될 수 있다는 성질을 지닌다. 부르주아는 이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고 있었고, 따라서 안정한 가족 제도를 창조하기 위하여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결혼하는 사랑”을 도덕적 미덕으로 확립했다; “좋은 가장”이 되는 것은 부르주아의 눈에는 상당히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이었다. 프롤레타리아트 역시 사랑이, 광의의 의미와 양성간의 관계라는 두 가지 의미 모두에서, 가족-결혼 연결고리를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 연대를 발전시킬 수 있어야 하고 반드시 그럴 수 있는 심리적이고 사회적인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을 해명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상적인 사랑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미 각 시대에는 그 고유한 이상이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각각의 계급은 그들의 이해에 적합한 도덕적 내용으로 사랑을 개념화하기 위해 노력한다. 각각의 시대의 문화적 발전에 따라, 더욱 풍부해진 지적이고 감정적인 경험들에 의한 문화적 발전에 따라, 에로스의 이미지는 재정의 되어 왔다. 경제적 사회적 삶의 발전의 성장기에 사랑의 이상이 변화했다; 감정의 그늘이 더 중요한 의미를 갖기도 하고 오히려 소멸되기도 하였다.





수 천년의 인류사회의 역사의 과정에서, 사랑은 단순한 생물적 본능-고등동물부터 하등동물까지 모든 피조물들에게 고유한 재생산에 대한 압박-으로부터 끊임없이 새로운 지적이고 감정적인 양상을 획득하여 가장 복잡한 감정으로까지 발전해왔다. 사랑은 심리적이고 사회적인 요소가 되었다. 경제적, 사회적인 힘의 영향 아래에서, 재생산을 위한 생물학적 본능은 정반대의 대립된 방향으로 변화되었다. 한 편으로 건강한 성적 본능은 자본주의의 기괴한 사회 및 경제적 관계에 의해 건강치 못한 음욕으로 왜곡되어버렸다. 성적인 행위는 그 자체로 목적이 되고 있다. -이를테면, 폭음이나 폭식 등에 의해 돋구어지는 욕망이라든지 왜곡된 음욕과 같은, 즐거움을 얻은 방식처럼 말이다. 남성은 건강한 성적 본능에 의해서라면 그를 이끌리게 하는 특정한 여성과 굳이 성관계를 갖지는 않는다; 남성은 비록 특정한 여성에 대하여 어떤 성적 욕망도 갖지 않더라도 그녀를 통해 그의 성적인 만족과 감정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어떤 여성에게든지 접근한다. 매춘은 이렇게 왜곡된 성욕 충족의 조직화된 표현이다. 만약 여성과의 성교가 기대한 쾌락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면 남성은 모든 종류의 타락으로 빠져든다.





이러한 건강하지 않은 음욕으로의 탈선은 관계를 생물적 본능이라는 원천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반면, 세기를 넘어 인류 사회적 생활과 문화가 변화함에 따라 감정적이고 지적인 경험들의 조합이 성에 대한 육체적 본능을 둘러싸게 되었다. 사랑의 현존하는 형태는 몸과 마음의 복합적인 상태이다; 이것은 본래의 원천인 재생산을 위한 생물학적 본능과 분리되어왔을 뿐 아니라 종종 첨예한 갈등을 일으켰다. 사랑은 우정, 정열, 모성적 따뜻함, 매혹, 모성적 포근함, 동정, 경애, 친밀함 그리고 다른 많은 감정의 면모들이 조합되어 얽혀있는 것이다. 감정이 관계한 범위가 넓어서 육체적 매력과 감정적 친밀함이 용해되어있는 속에서 본래의 “날개달린 에로스”와 “날개없는 에로스”간의 직접적인 관계를 해명하는 것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육체적 매력의 요소는 결여하고 있는 동지애적 사랑, 한 사람의 일에 대한 애정 혹은 그것을 원인으로 하는 사랑, 그리고 집단에 대한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은 ‘영성화된’ 그리고 그 생물적인 기초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정도로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한다.





현대사회에서는 다양한 감정의 표현들 사이에 첨예한 모순과 충돌이 자주 발생한다. 인간의 노동에 있어서 지적, 감정적인 관여는 특정한 남성이나 여성에 대한 사랑과 조화되지 못할 수도 있고, 집단을 위한 사랑은 남편과 아내 또는 아이들에 대한 사랑과 분쟁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한 개인에게 있어 동지애적 사랑(love-friendship)은 다른 사람의 열정과 조화를 이루기란 쉽지 않다; 한 경우는 우월하게 지적인 조화에 기초해 있다. 다른 경우는 육체적인 조화에 기초해 있다. “사랑”에는 다양한 측면과 양상이 있다. 시대를 거쳐 발전되어 오고 동시대인들에 의해 경험되고 있는, 감정의 드러나지 않는 다양한 측면들이 그러한 일반적이고 부정확한 용어에 의해 은폐될 수는 없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와 자본주의적 삶의 규칙 아래서 사랑의 복잡다단함은 갈등과 풀기 어려운 일련의 문제들을 낳는다. 19세기 말에는 작가들이 심리 묘사를 통해 사랑의 다양한 면을 흥미로운 주제로 다루곤 했다. 둘 혹은 심지어 세 명이 사랑에 관계하고 있었으며 이는 많은 부르주아 문화의 대표자들을 당혹케 했다. 지난 60년대에 우리 러시아의 사상가이자 작가였던 Alexander Herzen는 그의 소설 ‘누가 유죄인가?' (Who is guilty?)에서 이 내면 세계의 복잡함과 감정의 이중성을 폭로하려고 노력했고 Chernyshevsky는 같은 문제를 그의 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 (What is to be done?)에서 다루었다. Goethe와 Byron 같은 천재 시인 그리고 성별간의 관계라는 영역에서 대담한 선구자였던 George Sand는 그들의 생전에 이러한 문제들을 다루었다; '누가 유죄인가’의 저자 역시 다른 위대한 사상가, 시인, 공적 인물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의 삶의 경험 속에서 이러한 문제를 발견했다. 이 때 많은 “소시민”들은 사랑의 어려움에 힘들어했고 부르주아 사고의 테두리 안에서 헛되이 해결책을 구하려 했다. 하지만 문제의 해결의 열쇠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손아귀에 있다. 새로운 노동자간의 유대라는 삶의 양식과 이데올로기만이 이 감정의 복잡한 문제를 해명할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사랑의 양면성 즉 "날개달린 에로스"의 복잡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이는 한 남자가 많은 여자와 혹은 한 여자가 많은 남자와 갖는 "에로스 없는" 성적 관계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개인적 감정이 관여되지 않은 관계는 불운하고 해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공동체를 피폐화하는 문제. 성적인 문제 기타 등등) 그러나 얼마나 그들이 얽혀있더라도 그들은 "감정적으로 극적인 상태“를 느끼지 않는다. 이러한 ”극적인 상태“와 갈등들은 다양한 그늘이나 사랑의 징후가 나타날 때 시작된다. 여성은 남자의 사고, 희망과 염원이 그녀의 것과 맞을 때 이끌리며 정신적으로 매혹된다; 그녀는 다른 이에게는 육체적으로 이끌린다. 한 남성이 한 여성에게서 공감과 보호해주고픈 부드러움을 느낄 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른 여성에게서는 그의 지식 추구의 노력에 대한 지지와 이해를 발견할 지도 모른다. 그는 둘 중 어느 여성에게 그의 사랑을 주어야 하는가? 두 유형의 내적인 결합을 추구하기만 하면 삶의 충만함이 가득할텐데, 왜 그는 그 자신을 갈라놓으며 내적으로 불구가 되어야 하는가?





부르주아 체제 하에서 내적 감정 세계를 그렇게 분할하는 것은 필연적인 고통을 수반한다. 수천 년 동안 인류 문화 -소유제도에 바탕을 둔-는 사랑이 소유의 원칙들에 연관되어있다고 사람들에게 가르쳐왔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사랑, 상호간의 사랑이 연인에 대한 절대적이고 불가분한 소유권을 부여한다고 주장해왔다. 남편과 아내간의 “모든 포용하는 사랑”이라는 이상과 한 쌍의 결혼이라는 정형화된 형식의 자연스러운 결과는 그렇게 배타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이상이 노동자 계급의 이해에 부합할 수 있겠는가? 프롤레타리아의 관점에서 볼 때, 사람들의 감정이 넓고 풍부한 영역으로 발전하는 것이 중요하고도 바람직하지 않은가? 인간 내면의 복잡함과 감성적인 경험의 다양한 측면이, 공동체를 더욱 강화하려는 사람들 사이의 감성적이고 지적인 결합을 발달시키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하지 않는가? 사람들을 함께 묶어주는 내적 연결지점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연대감이 확고해지고 우애와 결속력이라는 노동자계급의 이상 실현이 더 수월해진다.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는 배타성과 “모든 것을 포용하는 사랑”을 수용할 수가 없다. “날개달린 에로스”의 다양한 형식과 측면에 위선적인 부르주아지 공포와 도덕적 분개를 느끼는 것과 달리, 프롤레타리아트는 그렇지 않다; 오히려, 프롤레타리아트는 사회 환경들의 복잡한 작동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이 감정들을 공산주의 사회 건설을 위해 투쟁하는 계급에게 유리하게 작동하게 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사랑의 복잡함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이해와 충돌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미 발전 중인 동지애의 이상을 승리로 이끄는 것을 용이하게 한다.





부족사회시기에 사랑은 혈족 관계에서의 애착(형제자매간의 사랑, 부모에 대한 사랑)으로 간주되었다. 크리스트 이전 시기의 고대 문화에서는 사랑-우정을 다른 어떤 것보다도 상위에 뒀다. 봉건제 사회는 결혼 외부에서의 이성 사이의 플라토닉한 우아한 사랑을 이상화했다. 부르주아지는 일부 일처제의 결혼관계에 있는 사랑을 이상적으로 간주하였다. 노동자계급은 노동에서의 협동과 남성 여성 모두의 프롤레타리아트를 묶어주는 내적인 연대에서 그것의 이상을 찾았다; 이러한 이상의 형식과 내용은 다른 시대에 존재하던 사랑의 개념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동지애에 대한 옹호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위한 투쟁의 시기에 노동자계급이 속박적인 이데올로기를 채택하여 이성간의 교제에서의 부드러운 감정의 흔적들을 무자비하게 제거하고자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노동자계급의 이데올로기는 “날개달린 에로스”를 파괴하려 하지 않으며, 오히려, 심리학적이고 사회적인 힘으로서의 사랑의 가치에 대해 명료히 인식한다.





부르주아 문화의 위선적인 도덕은 에로스의 자유를 단호하게 제한하며, “법적으로 혼인한 부부”에게만 오직 협조적이다. 결혼 외부에서는 돈으로 사거나 (성매매의 경우) 은밀한 (간음의 경우) 일시적이며 기쁨이 없는 성적인 관계인 “날개없는 에로스”의 여지만이 남는다. 노동자계급의 도덕은, 반면에, 이미 공식화되어있는 한에서 성적인 관계들의 외부의 형식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노동자계급의 사회적 목표는, 사랑이 오랜 공식적인 결합을 취할지, 일시적인 관계를 취할 것인지에 의해 조금도 영향 받지 않는다. 노동자계급의 이데올로기는 사랑에 있어서의 어떤 형식적 제약도 두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노동자계급의 이데올로기에서는 이미 사랑의 내용적 측면과 감성적인 경험의 부분에 대한 사려 깊은 태도가 취해지고 있다. 이 점에서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는 부르주아의 도덕보다 엄격하고 단호한 방법으로 “날개없는 에로스”를 추방할 것이다. “날개없는 에로스”는 노동자계급의 이해에 모순된다. 우선 그것은 불가피하게 과잉을 포함하며 그로 인해 육체적 황폐함을 가져온다. 이는 사회에 유용한 노동 에너지 자원을 고갈시킨다. 둘째, 영혼을 피폐하게 해, 내적인 결속과 건강한 감성의 발전과 강화를 억누른다. 셋째, 그것은 항상 성적 관계에서의 권리 불평등, 남성에 대한 여성의 종속, 남성 자기만족과 무감각을 남겨두고 이는 의심할 바 없이 동지애의 발전을 방해한다. “날개달린 에로스”는 이와 완전히 다르다.





분명히 성적인 매력은 역시 “날개달린 에로스”에 기반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점은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새로운 문화-민감성, 책임감과 타인을 돕길 바라는 욕구-의 생산자로서 필수적인 내면적 자질을 획득한다는 것이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한 사람의 파트너와의 관계에서만 그러한 자질을 드러낼 것을 요구한다.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의 목표는 남성과 여성이 선택된 한 사람 뿐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에 관하여 이러한 자질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날개달린 에로스에서 우월한 감정의 그늘과 뉘앙스에는 관심이 없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이러한 감정이 동지애의 발달과 강화를 촉진한다는 것이다. 사랑-동지애라는 이상은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에 의해 끊임없이 진척되어오면서 부르주아 문명의 배타적인 전쟁과도 같은 사랑을 대체해왔다. 이것은 타인의 개성에 대한 고결함과 권리, 확고한 상호 지지와 감정적 공감, 타인의 욕구에 대한 책임성에 대한 인식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동지애적 이상은 절대 독재 타도를 위한 투쟁의 중요하고도 어려운 이 시기에 프롤레타리아에게 필수적이다. 그러나 공산주의 사회를 실현하면서 사랑이 변화하고 선재하지 않았던 양상을 띠게 될 것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 때가 되면 새로운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간의 “공감적 유대”는 더욱 성장하고 강화될 것이다. 사랑의 잠재력은 더욱 증가될 것이며, 사랑-연대는 부르주아 체계에서 경쟁과 자기애가 그러했던 것처럼 새로운 사회의 주축이 될 것이다. 정신적 집단화는 자본주의 체계에서 사람들을 사랑과 결혼으로 도피시키도록 유도했던 개인주의적 자족과 “내적 외로움이라는 고립”을 사라지게 할 것이다. 남성과 여성을 더욱 친밀한 감정적, 지적인 접촉으로 이끌어줄 많은 연결선들이 발달할 것이며, 사적인 영역에서 발생한 감정들은 공적인 영역으로 이전될 것이다. 양성간의 불평등과 남성에 대한 여성의 의존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과거의 희미해져 가는 기억으로 남게 될 것이다.


새로운 집단적 사회에서는 즐거운 조화와 동지애를 바탕으로 사람들간의 관계가 발달할 것이고, 에로스는 인간의 행복을 다층화하는 감정적 경험들로서 영광스러운 지위를 자치하게 될 것이다. 이 변화된 에로스의 본성은 무엇이 될까? 제아무리 대담한 환상을 편다할지라도 이 질문에 답을 제공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가지는 명확하다; 새로운 인간들의 지적, 감정적 유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현재의 세계에서의 사랑이라는 여지는 더욱 적어질 것이다. 현대의 사랑은 항상 죄악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랑하는 마음”의 사고와 느낌을 모조리 흡수해 버리고, 집단으로부터 사랑하는 이를 분리시키기 때문이다. 미래사회에서는 이러한 분리는 불필요한 것이 될 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 될 것이다. 새로운 세계에서 수용되는 성적 관계 규범은 (왜곡과 과장 없는) 자유롭고, 건강하고, 자연스러운 이끌림과 “변화된 에로스”에 기초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두 문화사이에 서있다. 그리고 모든 최전방에서의 이 두 세계들의, 이데올로기적인 것을 포함하는, 전투에 참가하는 이 전환점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이해는 “공감적인 느낌”을 가능한 빨리 축적하는데 최선을 다하는 데 있다. 이 시대에는 관계를 정의하는 도덕적 이상은 꾸밈없는 성적 본능이 아니라 동지애에 대한 다면적인 사랑 경험이다.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도덕에 의해 공식화된 요구에 답하기 위해서 이러한 경험들이 세 가지의 주요 원리에 합치해야만 한다; 1. 관계에 있어서의 평등 (남성이기주의와 여성 개인에 대한 노예적 억압의 종식) 2. 타인의 권리와 타인의 마음과 영혼을 소유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 (부르주아 문화에 의해 고무되는 소유 관념) 3. 동지적 감성, 사랑하는 이의 내적 움직임을 이해할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능력 (부르주아 문화는 오로지 여성에게만 이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러한 “날개달린 에로스”의 권리를 요구할 때, 동시에 노동 계급의 이상은 이러한 사랑을 집단에서의 사랑-의무라는 더욱 강력한 감정보다 중요시하지 않는다. 아무리 집단의 두 구성원간의 사랑이 위대할지라도, 두 개인을 집단에 결합시켜주는 유대가 항상 선행할 것이고, 더욱 강해지고, 더욱 복잡하고 유기적이게 될 것이다. 부르주아 도덕은 모든 이에게 사랑할 사람을 필요로 한다. 프롤레타리아 도덕은 모든 이에게 집단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나는 나의 젊은 동지인 당신이 동지애가 노동계급의 이상이 된다 할지라도, 이 새로운 감정의 “도덕적인 척도”가 성적 관계에 있어 새로운 압박이 되지 않겠는가 라며 반대한다고 들었다. 우리는 아직 부르주아 도덕이라는 족쇄로부터 사랑을 해방시키지 못하고 그것을 다시금 노예화시키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 나의 젊은 동지인 당신은 옳다.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는 부르주아 “도덕”을 사랑-결혼 관계에서 거부한다. 그럼에도 그것은 불가피하게 고유의 계급적 도덕과 행동규범을 발전시키게 된다. 그것은 노동계급의 업무에 더욱 긴밀하게 부합하고 특정한 방향으로 감정을 교육한다. 이런 방식이라면 감정이 다시금 속박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의심할 바 없이 부르주아 문화의 날개를 꺽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 과정을 유감스럽게 하는 짧은 견해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새로운 계급은 선행하지 않았던 미, 힘, 광채를 지닌 감정의 다양한 측면들을 발전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사회의 문화적, 경제적 기초가 변하면 사랑도 변화할 것이다.


맹목적이고, 모든 것을 포괄하고 요구하는 열정은 약해질 것이다; 소유 관념, 파트너를 “영원히” 눈멀게 하는 이기적인 욕망, 남성의 자기 만족과 여성의 자기 단념은 사라질 것이다. 동시에, 사랑의 가치 있는 면과 요소는 발달할 것이다. 타인의 인격의 권리를 더욱 존경하게 될 것이고, 상호 감성은 교육을 통해 배우게 될 것이다; 남성과 여성은 키스와 포옹으로서 뿐만 아니라 공동의 창조와 활동에 의해서 그들의 사랑을 표현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의 임무는 사회적 생활로부터 에로스를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 형성에 따라 그를 재무장시키는 것, 그리고 동지애적인 연대라는 새롭고 위대한 심리적 힘을 지닌 영혼들의 관계로서 성적 관계를 교육시키는 것이다.


나는 사랑이라는 문제에 직면해있는 젊은 노동자들의 관심이 “타락”의 증후는 아니라는 것을 당신이 명확하게 이해하길 바란다. 나는 젊은 노동자들간의 관계에서 사랑이 반드시 점유되어야 하는 공간을 지녀야 한다는 것을 당신이 견지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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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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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지는 슬프지만 아름다운 계절.

일년 중에 봄을 좋아하지만 자꾸만 춘래불사춘이라는 문구 그대로 아름다움에 마냥 기뻐할 수 만은 없다.

절망을 느끼는 사람에게 아름다운 계절이란 삶을 더욱 서럽게 만드는 요소이다.

(말그대로 나는 죽겠는데 왜 날씨며 풍경이며 이렇게 찬란한거야-_-)

이 세상 사람들 모두 마음 편히 봄을 즐길 수 있는 날이 왔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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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의 딸..?

예전에 대륙의 딸을 읽었는데..

그 작가의 관점이나 사실 왜곡이나 정치적 포지션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할머니-어머니-자신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나도 써보고 싶었다.

 

우리 할머니가 겪었던 개인적이지만 한국 현대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이곳에서는 너무나 특별하지도 않은 어느 집이나 가지고 있는 그런 이야기를 꼭 써보고 싶었다.

 

 

만약에 내가 필력이 좋았다면.

문학적 감수성이 뛰어났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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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의료분야를 좌파적 관점에서 공부하고 싶은 분들을 찾습니다.

공부를 하기로 마음을 먹고 대학원을 왔는데,

이 분야를 급진적 관점에서 공부하려는 동기들을 찾기가 어려워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제가 현재 리딩 리스트를 작성 중이긴 한데 대충 이런 분들의 단행본과 논문들을 읽을 생각입니다.

 

주로 Howard Waitzkin (맑스주의자이시며 라틴아메리카 연구를 많이 하셨고, 질병을 구성하는 사회적 원인이 주목받기 훨씬 전부터 있었던 엥겔스나 비르효같은 문헌들을 연구하기도 하셨습니다. 국제무역, 세계화가 어떻게 제 3세계 민중의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하셨스니다. 또 환자-의사 커뮤니케이션을 최초로 연구한 분이기도 하시고요. 그냥 커뮤니케이션이 아니라 SES-사회적 지위, 수입, 교육수준-에 따라서 어떻게 커뮤니케이션의 양과 질이 차이가 나는지에 대한 연구도 하셔습니다. 보건의료분야에서 제가 아는 한 가장 진보적인 학자이십니다. 활발한 사회운동가이시며 1960년대부터 꾸준히 저술활동과 정치활동을 병행해 오셨습니다.

 

Richard Wilkinson 평등한 사회일수록 건강하다는 주장을 실증적으로 가장 먼저 주장하신 분입니다. 상대적 불평등과 절대적 불평등이 어떻게 건강수준에 영향을 미쳤는지 연구하셨습니다. 제가 아직 이분 저작이나 논문을 읽어보지 못했는데 Waitzkin교수님 말로는 질병의 사회적 원인에 관한 연구에서는 전세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분이라고 하십니다.

 

Kate pickett:  윌킨슨 교수와 The spirit level이란 책을 함께 썼는데  경제적 불평등과 건강, 그리고 기타 사회문제에도 관심이 있습니다. 공동저술이 많으니 윌킨슨 책을 읽으면 참고할 일이 많을 듯 합니다.

 

Anne Emmanulle Birn 토론토 대학의 여성학자인데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로 여성건강, 보건의료정책 비교연구, 보건 정치학, 라틴아메리카의 보건의료 역사 등에 관해 저술하셨고 특히 제 3세계의 여성건강에 대해서 심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Michael Marmot: 역시 사회역학 분야에서 가장 저명한 분 중 한 분이십니다. 윌킨슨과 공저를 많이 했고요. 사회역학에서 윌킨슨과 쌍벽을 이루는데 둘다 영국출신이신데 원래 사회역학쪽이 영국에서 많이 발달했다고 합니다.....

 

함께 책이나 논문을 읽고 한국상황을 해석하거나, 혹은 논의가 놓친부분, 비판지점들을 찾아볼 생각입니다.

관심있으신 분들은 저에게 메일(lucyinthesky0816@gmail.com)주시거나 이 곳에 메일 주소를 남겨주시면 제가 연락드리겠습니다.

 

안타까운 것이 이쪽 분야가 한국어로 번역된 책이나 논문들이 거의 없습니다.(ㅠㅠ)

있다고 해도 예전에 써진 것들이 대부분이구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모두 영어로 읽을 수 밖에 없네요.

윌킨슨 교수의 책은 평등해야 건강하다...정도가 번역이 되어 있는데 2009년에 나온 The spirit level이 최고의 저서라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한글로 나와있는 건 한글로 읽고 없으면 어쩔 수 없이 영어로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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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 순위 별 출산 증가 요인 분석, 이성용; 요약 및 간단메모

2010년 3월 3일 본 논문

 아직 로지스틱 분석이나 다변량 분석 같은 통계적 방법론이 익숙치 않아서 자료 해석에 관해서는 문제제기 하기 어렵다

자료에서 끌어낸 함의들을 읽고 몇가지 든 의문점들은

 1)출산회복기인 2007년과 2008년에 경제적 상황이 나아졌다는 인식을 토대로 경제적상황과 출산율간 관계를 추정하고 있는데, 자신의 '인식'과 실제 경제적 상황이 일치할까?

 2)셋째 아이를 낳는데 자신의 가구 경제상황에 대한 인식이 유의미한 상관관계를 끼치지 못했다고 했는데,  글쓴이가 지적한대로 독립변수와 종속변수가 바뀌어 아이를 낳고 난 이후에 가계상황이 나빠졌을 확률이 있다. 특히 한국처럼 영유아에 대한 지원이 미미하고 유아에 대한 사교육이 성행하는 나라에서는 더욱. 게다가 셋째 아이 출산에 경제적 개선이 별 쓸모가 없다면 셋째 아이에 대한 지원이 있어도 효과는 미미하다는 결론을 낳게 되는데 실제로 그럴까?

 3)페미니즘의 목표와 인구학적 목표는 상반되어도 괜찮은 것일까? 대체수준의 인구를 유지하기 위해서 전통적 가족이데올로기를 강화하고, 여성의 결혼을 앞당기기 위해서 성차별적 정책을 도입하는 것이 정당화되는가?  

 4)북서유럽의 모델이 한국에 적용불가한 이유가 서유럽여성들은 주체적이라는데 이는 매우 모호한 설명이며 한국여성의 경향은 변화가 어려운 것일까? 한국의 남성들이 가계책임자란 인식이 강한 이유는 성차별적 노동시장(이는 정규직 대기업의 중상류 여성들과 비정규직을 모두 포함하여)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공적영역의 성차별의 시정은 한국여성의 남성에 대한 경제의존성을 낮출 것이다. 이 경우 페미니즘의 목표와 인구학적 목표가 일치될 수 있을 것이다.

 5)이 연구 결과 대체적으로 교육수준이 낮고, 저소득이며, 나이가 젊은 여성일수록 다산을 할 가능성이 높은데 이들집단과 이데올로기 효과(여성이 집안일, 자녀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 전통적 가족이데올로기 충성) 집단은 동질적인가에 관한 추가 연구가 있으면 좋을 것 같다.

6)경력관리가 가능한 여성들이 출산을 기피하는 원인이 무엇일까? 경력에 차질이 생기기 때문이다. 아이를 낳고 직장에 복귀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 다른 나라는 어떨까? 비교연구 하면 좋겠다. 북서유럽 말고.

출산순위별 출산증가 요인 분석

 

1. 들어가는 글

 -한국의 합계출산율은2005년1.08, 2006년1.13 2007년1.26으로 증가함

 -총 출생아 수도438,100->451,500->496,700으로 증가

 -상승의 원인: 코호트 여성들(1979-82년)이2005년 이후 주된 가임 연령층에 진입, 사회경제적 요인으로 자녀 출산을 연기했던 여성들이 자녀출산을 재개한 것으로 해석가능(Bongaarts and Feeney, 1998)

 -사회경제적 회복이 출산에 미치는 영향은 개인마다 차이가 날 수 있음.

 -개인의 이데올로기적 요소, 개인의 경제적 상황에 대한 인식, 개인의 사회문화적 특성들이2006년 이후2008년까지 출산회복기의 출산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쳤는지 분석하겠음
 -이러한 특성들이 출산에 미치는 영향은 출생아 수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

 

2. 출산의 원인에 대한 이론적 배경

 -개인의 합리적인 출산 행위나 태도는 그 개인이 속한 사회적 환경에 의해 영향을 받음

 -저출산에서 초저출산으로의 하강은 혼인 연령의 상승으로 인한 출산연기와 무자녀의 증가로 설명됨(bongaarts, 2002; Caldwell and scindlmayr 2003; perelli-harris, 2005)

 -출산연기를 합리적으로 만든 사회적 기제: 1)여성의 경제적 독립(Brewster and Rindfuss, 2000)

 2)개인주의 이데올로기 확산)Van de Kaa, 1987, 2001; :estaeghe, 1995) 3)경제적 불안정(Ahn and Mira, 2001; Ranjan, 1999)

 -여성의 대학 진학률 증가->취업 증대와 개인주의 확산이 초저출산의 주된 원인

 -남유럽 특히 이탈리아와 스페인은 북유럽보다 덜 산업화되고 개인주의보다 가족주의가 강조되지만 북유럽은 초저출산 수준 이하로 떨어지지 않음.

 -초저출산의 출산변천이론: 청년실업률이 높은 시기의 남유럽의 실업률과 저출산 사이의 관계에 초점을 맞춤(높은 청년 실업률->노동시장의 진입을 어렵게 만듬->높은 교육을 받게 함or낮은 임금의 비정규직->노동시장 불확실성은 청년이 부모 집에 머무는 나이를 상승시키는 현상 야기->혼인연령 첫출산 연령 증가)

 -동유럽 국가들도 사회주의에서 시장경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야기된 경제적 불안정으로 인해1990년대 초저출산 수준으로 떨어지기 시작. 체코 우크라이나 알메니아는 합계출산율이1.1로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을 보임. 이 기간 고용불안과 실업, 비누격차가 증가함

-스칸디나비아 국가에서 최근 출산율이 상승한 배경에는 높은 수준의 성평등 가족 지향 사회제도가 있다는 주장이 있음(Mcdonald, 2000)->여성에게 자녀 출산 양육에 호의적인 환경 조성

-우리 정부는 북서유럽 국가의 영향을 받아 가족 친화적, 여성 우호적 출산장려 정책을 통해 출산율은 향상시키려 하지만 문화적 차이로 동일한 사회정책이라도 그 효율성이 다를 수 있음(예: 일본과 프랑스, 일본은 출산 후 직장 그만두면 노동시장에서의 기회비용 상실이 발생하기 때문)

 -성평등 이데올로기, 경제적 상황에 대한 인식, 여성의 사회경제적 특성이 출산회복기인2007년 출산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3. 자료 및 출산순위별 다변량 분석

(1)분석 자료의 구성 및 변수들

 -분석자료는2008년8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서 조사한 ‘2007년 전국출산동향 조사’

  2007년도에 출산한 여성1467명과2007년에 출산하지 않은 여성1000명으로 구성

  출산가구 표본은 전국16개 시와 도 저출산 담당부서를 통해 확보

  2007년 비출산가구 표본은 전화번호부를 이용한 전화면접조사를 통해 실행

 -2007년에 자녀를 낳은 여성들의 출산에 미치는 이데올로기 요인, 경제상황에 대한 느낌, 개인의 사회경제적 특성들의 영향이 출산순위에 따라 차이가 나는지를 분석; 1)2008년 자녀 없는 여성들과2007년 첫째 출산한 여성들2)2008년 자녀 한명인 여성들과2007년에 둘째아 출산한 여성들3)2008년 조사 당시 자녀 둘인 여성과2007년에 셋째 아이 출산한 여성들로 구성

 종속변수는2007년에 첫 자녀를 출산해서2008년에1명의 자녀를 둔 여성들:1 아닌 여성은0

 2007년에 둘째 자녀를 출산해서2008년에2명 자녀를 둔 여성들:1 아닌 여성은0

 2007년에 셋째 자녀를 출산해서2008년에3명 자녀를 둔 여성들:1 아닌 여성은0

-자료1의 분석대상 수는743명, 그 중91.5%가 출산회복기 시기에 첫째아 출생, 8.5%는 출생하지 않음. 자료2는47.8%가 출산회복기 시기에 둘째아를 출생, 52.2%는 출생하지 않음. 자료3은27.9%가 출산회복기 시기에 셋째아를 출생, 72.1%는 출생하지 않음

-독립변수는 자녀의 당위성, 집안일은 부인, 출산장려 분위기, 경기가 좋아짐, 가구경제, 부인 연령, 부인 교육수준, 소득 수준, 부인직업, 부인의 종사상 지위 전자5개는t-test로 나머지는 교차분석으로

-자료1에서1번 여성은0번 여성에 비해 자녀의 당위성에 대해 높은 찬성률 하지만0.1수준에서 유의미함. 자료2와3에서 모두1번 여성은0번 여성에 비해 당위성에 높은 찬성률0.01수준에서 유의미

-집안일은 부인도 모든 출산순위에서 유의미함

-자료1에서1번 여성은 집안일을 여성이 더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함. 0.1수준에서 의미, 자료2와3에서는0.01수준에서 유의미

-출산장려분위기는 자료3에서만 유의미한 경향을 나타냄. 0.01수준

-경기좋아짐도 자료3에서만 유의미(경기가 좋아졌다고 느낀다.) 0.01수준

-가구 경제(막내를 갖기로 결정한 시기를 전후로 비교해 볼 때 댁의 경제상황은 좋아졌는가? 자료3에서만 유의미0.01수준

-모든 출산순위에서 부인연령과 출산과는 유의미한 관계

-출산순위가 높아질수록 고졸이하의 응답자 비율 증가,

-모든 출산순위에서 가구소득과 출산은 유의미한 관계

-부인직업과 출산회복기 출산 행위 사이의 관계는 자료2와3에서만 유의미

-부인의 지위가 상용근론자일 경우 출산순위가 올라갈수록 비율이 감소함.

(2)첫째 출산에 대한 다변량 로지스틱 분석

 -개인의 사회경제적 특성을 통제해도 자녀의 당위성은 첫째아 출산에 유의미한 영향을 끼침, 부인집안일 변수와 출산장려 분위기 변수는 유의미한 영향 없으

-첫째 출산과 부인 연령, 소득, 부인의 종사상 지위는 유의미한 영향, 교육수준과 직업은 영향 무

-35세 이상 여성은35세 미만 여성보다 첫째 출산 기피

-자영업자, 고용주, 상용근로자인 여성은 다른 여성보다 첫째 출산 할 가능성 낮음

(3)둘째 출산에 대한 다변량 로지스틱 분석

 -사회경제적 특성 통제상태에서 자녀필요와 부인집안일 등의 이데올로기적 변수가2007년 출산회복기의 둘째아 출산에 긍정적 영향

 -34세 미만 여성이 둘째아 출산할 가능성 높음

 -부인 교육수준, 가구소득, 부인 지업은 영향 무

 -경력 관리하는 지위를 가진 부인은 둘째아 덜 출산

 

(4)셋째 출산에 대한 다변량 로지스틱 분석

-이데올로기 변수가 출산회복기 영향 미침, 출산장려 분위기 조성 이데올로기 변수는 셋째 아에서만 유의미한 영향(반대로 셋째 출산한 여성이 자신의 다산 행위를 합리화 하려는 동기)

-경제 상황에 대한 긍정적 인식이 셋째아 출산에 부정적 영향을 미침(우크라이나 등 동유럽 연구결과와 상반됨) 하지만 이는 독립변수와 종속변수의 인과적 순서가 바뀐 결과로 해석가능.(자녀 양육하는데 돈 많이 필요->다자녀 출산 여성에게 경제적 지원 정책 필요)

-결혼 빨리할수록 일찍 첫째, 둘째 애를 출산할 확률이 높고, 셋째도 가질 확률 높아짐

-교육수준은 첫째, 둘째아보다 셋째아에서 유의미한 영향

-첫째아 출산할 때 가구소득이 높으면 가능성 낮아지지만 둘째아에서는 영향 없음, 셋째아에서는 가구소득이 최상인 여성이 최하층의 여성들을 제외한 다른 여성들보다 가능성이 높음

-부인 직업은 셋째아 출산에 유의미한 영향 없음

 

5. 마치는 글

-이데올로기, 경제적 상황, 사회경제적 특성 요인들이 출산 행위에 미치는 영향은 출산순위에 따라 차이가 나므로 출산순위에 따라 출산을 장려하는 정책이 차별화될 당위성을 제시함

-출산장려 정책은 전통적 가족이데올로기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음.이는 가족 내 성평등이 출산을 상승시킬 것이라는 맥도날드의 주장과 상반되는 발견

-한국에서 페미니즘 이데올로기가 출산억제를 장려하기 위해 사용됐는데 출산장려를 꾀하는 인구정책에서도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음à이상함

-서구에서는 여성의 경제적 독립성을 강조, 한국은 남성이 일차적 가계 경제 책임자 인식, 독립적으로 자녀를 키우는 사회경제적 환경을 제공할 시 서구에서는 출산율을 높일 수 있지만 한국에서는 중상류층 여성에게 특혜가 지중되고 중하류층 여성이 불이익을 받음. 하지만 이 자료에서 중하류층 여성의 출산율이 더 높기 때문에 이것이 떨어져서 우리나라 전체 출산율이 하강할 위험이 있음.

-서구는 부모의 책무가 유한하고, 자식을 애완동물처럼 여기지만 한국은 부모의 책무가 무한하고 부모와 자녀는 공동의 운명체임. 따라서 초저출산 극복을 위해 평등주의, 페미니즘보다 전통적 가족주의 이데올로기에 기초할 필요성 제기

-한국 여성의 혼인 연령을 낮추는 정책이 필요

-소득수준이 높으면 첫째아를 출산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으나 일단 낳으면 다산을 하는 경향 그래서 정부의 경제적 지원은 첫째 둘째보다 셋째아 출산에 유의미

-개인주의 삶을 뒷받침할 수 있는 직업을 가진 여성이 아닌 여성보다 출산할 가능성이 낮음

-셋째아 낳는데 경제 상황에 대한 긍정적 인식이 효과가 없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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