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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이 뭔가?

동학농민혁명이 뭔가?

113년전인 1894년은 도내 곳곳에 농민혁명의 들불이 타올랐던 역사의 분기점이었다. 당시 도내 인구가 100만명 안팎이어던 실정에서 도내에서만 줄잡아 10여만명이 희생된 것만 봐도 혁명의 열기를 짐작할 수 있다.

 

나라의 곳간인 호남평야의 중심에 있던 고부와 배들평 농민들에 대한 수탈은 때마침 확산되고 있던 동학정신과 어우러져 혁명의 불씨를 당기게 했다. 만석보 축조를 위한 노동착취와 수세 징수로 촉발된 농민의 저항은 부정부패 척결이 당장의 목표였다. 그러나 집강소라는 자치기구를 가동해 민주주의를 실천하는가 하면 당시 일본이 민비 를 살해하면서 침략을 노골화하자 반외세 자주의 기치를 내걸었다. 

 

하늘을 찌를 농민봉기의 큰 불씨의 도화선이 된 정읍 고부땅이나,
만득부이 무주장수 당뫼골로 이동하여 혁명적 횃불을 밝힌 제 1차 봉기를 통한 동학농민군의 창의포고로 혁명적 체계를 갖춘 것이며,
백산 봉기를 통한 호남찬의소의 대장정,
그리고 4월 7일 황토현 대전적 이후 4월 27일 전주입성을 고비로 강화이후의 집강소정치,


또한 강화 불이행과 청일전쟁 발발로 9월 12일 삼례회의를 기점으로 9월 재봉기 단행, 우금치 폐전 이후 원평, 태인, 남원, 완주대둔산 등의 항전지를 열거해 본다면 우리 전북땅은 동학농민혁명 봉기에서부터 동학농민전쟁에 이르기 까지 가히 역사발전의 몸통이 되고 명실공이 자타가 공인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권운동의 요람지, 민주발전의 성지인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은 단순히 농민의 저항이 아니었다. 봉건체제를 부수고 근대화로 전환하는 역사의 분수령이었다. 그런데 동학농민혁명기념일 제정을 둘러싸고 이견이 있다.
정읍은 고부농민봉기 사발점으로 1월10일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고 고창은 역사,상징성이 있는 무장기포일인 3월20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오는 5월10일 이와 관련 정읍 황토현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서 학습토론을 한다고 하니 기다려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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