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에 해당되는 글 5건

  1. 퍼옴/ 우리 철도 노동자들의 강고한 투쟁은 그 비극위에 서 있습니다 2009/12/27
  2. 1917년 여름 스몰니에서 볼셰비키는 민중의 대표를 취사장에서 발견하다 2009/12/27
  3. 혼자서 밥 먹는 게 그렇게 부끄러워? 2009/12/25
  4. 물밑에서 와일드하게 팔을 뻗어! 2009/04/26
  5. 그까이꺼 아나토미 2009/04/26

퍼옴/ 우리 철도 노동자들의 강고한 투쟁은 그 비극위에 서 있습니다

철도노조 서울기관차, 용산기관차, 청량리기관차승무지부 교육선전부 소책자 머리말 퍼옴

 

철도 노동자 더이상 외롭지 않습니다.

 

 

12월 4일 복귀소식이 각종 언론에 전해지자 조중동을 비롯한 보수언론들은 일제히 철도노조가 백기투항을 했다며, 자신들의 승전보(?)를 전하기 바빴습니다. 파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던 인터넷의 누리꾼들도 철도노조의 복귀소식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보수언론들이 떠들듯 백기투항을 했는지 작전상 후퇴를 했는지는 3차 파업에 돌입하는 순간 명확하게 밝혀질테니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을 듯 합니다. 그보다 이번 철도노조의 파업 그리고 복귀과정에서 드러난 이전과는 다른 모습에 좀더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지도부의 지침에 따른 일사분란한 복귀도 전에 없던 진귀한 풍경이었지만, 이번 합법파업은 야4당을 포함하여 국민들의 지지가 이전보다 월등히 많아졌다는 사실입니다. 파업기간 내내 포털사이트 DAUM 의 토론방 아고라에서는 철도파업을 지지하는 글들이 봇물을 이루었고, 급기야 다급해진 철도공사는 아고라에 'KORAIL'이라는 닉네임으로 파업을 비판하는 글을 올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철도공사는 이로 인해 대다수 누리꾼들에게 뭇매를 맞아야만 했습니다. 더이상 말도 안되는 논리와 허위사실로 여론을 호도할 수 없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각종 블로그에서는 '불편을 참을테니 제발 이겨달라' 혹은 '나를 볼모로 꼭 승리하라'는 강도높은 누리꾼들의 메시지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 책자는 지난 8일간의 2차 파업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던 누리꾼들과 국민들의 적극적인 지지에 대해 감사드리며, 이러한 연대의 의미를 결코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남기는 기록입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철도 파업에 대한 여론이 이전보다 좋아졌을까요? 지난 여름 쌍용차 사태를 바라보며 그저 울분을 삼키며 멍하니 바라볼 수 밖에 없었던 그리하여 분노와 슬픔, 후회와 반성 등의 감정이 마구 엉켜버렸던 그날의 참혹했던 비극을 아직 기억합니다. 왜 갑자기 쌍용 이야기냐구요?

 

 

사실 지금의 우리 철도 노동자들의 강고한 투쟁은 그 비극위에 서 있습니다. 그 비극을 함께 경험했던 수많은 누리꾼들과 국민들의 아픈 가슴들이 모아져 오늘 우리의 합법적이고 정당한 싸움에 응원의 박수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쌍용차의 파업은 비록 패배했지만, 결코 패배한 싸움이 아닌 것입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비록 패배할 것을 알더라도 싸울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나의 승리는 역사적으로 수많은 패배했던 투쟁들이 그 밑거름이기에 혼자만의 승리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파업을 승리하라는 누리꾼들과 국민들의 메시지는 응원과 지지를 넘어 일종의 염원처럼 들립니다.

 

 

파업의 주체인 우리 철도 노동자들이 이 작은 책자를 통해 누리꾼들과 국민들의 지지를 다시한번 확인하고, 이후 3차, 4차 파업때는 더욱 넘치는 자신감을 얻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파업만 했다하면 바가지로 '욕'을 들으며 손가락질을 받아야했던, 그래서 항상 고립되어 외로울 수밖에 없었던 과거의 기억들도 훌훌 털어버릴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위대한 것은 보수 언론의 말마따나 '철도노조를 녹다운(?)시킨 이명박의 위대한 승리'가 아니라 복귀와 동시에 3차 파업을 결의해내며 언제든 또다시 싸울 수 있다는 철도노동자들의 확신에 찬 자신감이기 때문입니다.

 

 

철도노동자는 더 이상 외롭지 않습니다.

 

 

 

2009년 12월 11일

서울/용산/청량리 기관차 교선부장 드림

 

===============================================================================

 

내일 철도 진상조사단 들어갈 것을 나름 준비한다고 철도노조 홈페이지로 공부중이었는데

계속 감동의 물결이랄까...ㅠㅠ

 

전경찰청장 허준영의 사장임명부터 예고된, 아니 이명박 대통령 취임부터 예정된

험난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끊이지 않는 현장순회로 조직을 다지고,

전국 지역본부와 지부에서 자발적인 투쟁을 결의하고

한번의 철도파업을 위해 수많은 시간을 전국을 뛰며 노력했던 흔적들을 홈페이지에서나마

쫓아가면서, 철도파업은 한번의 파업명령으로 가능했던게 아니구나 하는 걸 확인하고 배웠습니다.

 

2003년 파업이후 7년째 해고투쟁중인 철도해고자 동지들은

전조합원의 생존권을 건 파업투쟁에 선봉이 되고

전조합원은 해고조합원들의 복직문제를 절대 포기하지 않는

그런 기풍이 지금의 철도노조를 만들어온 힘이 아니었을까도 짐작만 해보았습니다.

 

헌신적으로 뛰어다니는 노조간부들도 감동적이지만,

이 투쟁을 가능케한 조합원들의 자발적인 힘을 엿볼 수 있었달까요.

 

그래서

철도노조의 힘을 알기에

허준영 전경찰청장 사장으로도 모자라, 이명박대통령까지 직접 나서 혈안이되어

철도노조 죽이기에 나서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위에 올린 글은 철도노조 기관차 지부들이 모여 펴낸 소책자의 머리말입니다.

 

나만의 투쟁, 우리만의 투쟁으로 생각하면 지치고 포기할 수 있지만,

선배들의 투쟁을 딛고 싸우고 있고, 우리의 투쟁을 딛고 후배들이 싸울거라고 생각한다면

순간 지치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읽으면서 머리가 멍해지며, 먹먹해졌습니다.

참 많은 걸 잊고 살고 있구나...싶어서요..

 

한편,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간부와 조합원이 있는 철도노조라면 믿을 수 있겠구나도 싶었습니다.

 

머, 그러니깐 혼자 읽기는 넘 아까워서 퍼왔다는 얘기 입니다..ㅎㅎ^^;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9/12/27 23:01 2009/12/27 23:01

1917년 여름 스몰니에서 볼셰비키는 민중의 대표를 취사장에서 발견하다

브레히트


혁명의 2월이 지나고 대중이
행동을 정지했을 때
전쟁은 아직 계속되고 있었다 농민에게는 토지가 없었고
공장노동자는 압제 밑에서 굶주리고 있었는데
다수에 의해서 선출된 소비에트 평의회는 소수를 대변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모든 것이 구태의연하게 무엇 하나 달라진 것이 없었을 때
볼셰비키는 평의회에서 백안시당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끊임없이 요구했기 때문이다 총구를
프롤레타리아트의 진짜 적 지배계급에게
향하라고

 

그로 인해 그들은 배신자로 간주당하고 반혁명이라 욕을 얻어먹고
강도 무뢰배 쓰레기라 일컬어졌다 그들을 지도하는 레닌은
매국노 스파이라 불리워지고 창고에 숨어있어야 했다
어디를 가나 그들과 눈이 마주치면
상대편은 눈을 돌리고 그들을 맞이한 것은 침묵이었다
대중은 그들과 별개의 깃발 아래서 행진하고 있었다
장군과 부호와 부르주아지들이 활개치고 다녔으며
볼셰비키 운동은 패배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그들은 끊임없이 활동했다
고함치며 비방하는 소리에 방황하지 않고 그들의 편이었던 대중이 공공연하게 이탈해가도 주눅들지 않고
끊임없이 반복하여 새롭고 새로운 노력을 거듭하여
최하층의 대중을 대표했다
그들이 유의했던 것은 그들에 의하면 이런 것이었다

 

스몰니 식당에서 그들은 알아차렸다.
빵이나 배추나 수프나 차를 건넬 때
집행위원들에게 서비스를 해주고 있는 병사가 다른 누구보다도
볼셰비키에게 보다 따뜻한 차를 보다 부드러운 빵을
건네주고 있음을 건네주면서 병사는
눈을 다른 데로 돌리고 있었는데 그것으로 그들은 인식했던 것이다
이 병사는
우리들에게 공감을 하고 있느나 상관 앞에서는
그것을 숨기고 있다고 마찬가지로
스몰니에 근무하는 하급직원은 모두가 분명히
위병도 전병도 보초병도 그들에게 기울어지고 있었다
이것을 보고 그들은 말했다.
'우리들의 운동은 그 반은 이루어졌다'고
즉 이와 같은 사람들의 사소한 움직임이나
발언과 시선과 침묵 그리고 눈의 방향 등이
그들에게는 중요하게 생각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사람들로부터
친구라고 불리워지는 것
그것이야말로 그들에게는 제일의 목표였던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9/12/27 22:27 2009/12/27 22:27

혼자서 밥 먹는 게 그렇게 부끄러워?

혼자서 밥 먹는 게 그렇게 부끄러워?

오마이뉴스 | 입력 2009.12.25 12:01 | 수정 2009.12.25 12:29 | 누가 봤을까? 20대 여성, 부산

 

 




 

[오마이뉴스 박예슬 기자]"저 오늘 혼자 < 아바타 > 보고 왔어요. 극장에 온통 커플밖에 없더군요. 흑흑." "뭐 어때요. 저는 혼자 아웃백도 다녀 왔는데요."

"윗분, 그 정도 가지고… 저는 혼자 삼겹살에 소주도 먹는답니다." "다들 별 거 아니시네요. 전 놀이공원 갔다 왔습니다. 혼자." 인터넷 게시판이나 블로그에서 흔히 보는 대화들이다. 주로 혼자서는 선뜻 하기 어려운 일들을 해냈다는 '무용담'들이 경쟁하듯 속속 나오곤 한다. 개인 블로그의 경우 혼자서 패밀리레스토랑을 다녀왔다는 '인증샷'을 찍어 올리는 유저들도 있다.

사실 불과 몇 년 전에 비해 우리 사회가 '혼자 밥 먹는' 사람들에 관대해진 편이기는 하다. 아웃백 등 패밀리 레스토랑에서는 '싱글' 고객들을 위한 바(bar) 형 좌석을 마련하고 있다. 신촌의 일본라면 전문점 '이찌멘'에서는 혼자 오는 고객들이 중심이고, 2인석 이상은 '부수적'이다.

이곳에서는 무인 자판기로 주문을 하고, 독서실 좌석을 연상시키는 '칸막이형' 1인실에서 '주변 눈치를 보지 않고' 식사를 할 수 있다. 번화가 식당에서는 예전에 비해 혼자 밥 먹는 사람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왜 '칸막이'까지 쳐야 할까?





'혼자'인 고객들에게는 식당보다는 비교적 문턱이 낮은 카페. 바(bar)형 자리에는 싱글 고객들이 주로 앉는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책'과 '휴대폰'은 필수.

 
ⓒ 박예슬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는 '혼자 밥 먹는 것'을 포함한 혼자 '밖에서' 뭔가를 하는 것에 대해 사라지지 않는 선입견이 있다.

일전에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던 동기를 만난 적이 있다. 그런데 동기는 날 보자마자, "널 만나서 오늘은 점심을 먹을 수 있겠다"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평소에는 점심을 안 먹는다는 건가? 물어보니 그렇다고 한다. 하루는 너무 배가 고파 혼자 분식집에서 김밥을 먹다가, 우연히 아는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것이 그렇게 '부끄러울' 수 없더라는 것이다. 그 후로 동기는 '절대로' 밖에서 밥을 혼자 먹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인터넷에는 얼마 전 '혼자 밥 먹기 매뉴얼'까지 등장했다. 매뉴얼에는, 혼자 밥을 먹을 때는 사람이 많은 '러시 아워'를 피하고, 맛이 '검증된' 곳을 찾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가뜩이나 혼자 밥 먹어서 우울한데 맛까지 없으면 얼마나 암울하겠냐는 것이다. 또 휴대폰으로 친구와 통화를 하며 식당에 들어서라고 한다. 가능한 한 '큰 목소리'로 '불가피하게 혼자서 밥을 먹어야 하는 상황'을 설명해야 한다는 팁까지 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만반의 준비'를 거쳐도, 싱글 손님은 아무 메뉴나 선택할 수 없다. 닭볶음탕이나 부대찌개 등 많은 한식 메뉴들은 '2인분 이상'만 주문을 받기 때문이다.





찜이나 탕, 볶음 등을 파는 한식당은 최소 2인분 이상부터 판매하는 경우가 많다. 혼자 오는 손님들은 주문조차 어렵다.

 
ⓒ 박예슬


 
 
물론 모든 식당이 의무적으로 1인용 메뉴를 구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는 지나치게 모든 것을 '무리지어'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스스로에게 주입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혼자놀기를 특이하게 여기는 우리 사회의 모습은 '~는 모름지기 ~해야 한다'는 담론이 지배하는 '피곤함'을 나타내는 일면인지도 모른다.

'보이기 위한' 삶보다 '나'의 즐거움을 찾아야

조금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 보자. 고작 밥을 먹고, 영화를 보는 일상적인 생활을 하는데도 '애인이나 친구'등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곧 '언제나 어디서나 남에게 초라하게 보이기 싫다'는 생각과 맞닿아 있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들이 얼마나 '나 자신의 즐거움'보다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잘 보일지'를 생각하고 있는지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 '다른 사람의 시선'은 확고하게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우리는 식당이나, 영화관에서 내 앞자리에 앉은 사람의 동행인이 누구인지, 그 사람이 심한 민폐를 끼치지 않는 한 거의 신경쓰지 않는다. 사실 '혼자'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실제로 남의 '지탄'이 두려워서라기보단 스스로 남에게 어떻게 보일 것인가를 신경쓰는 데서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혼자 밥을 먹거나, 영화를 보면 '애인도 없고, 친구도 없어' 보일까봐 두려운 것이다.

이제는 타인의, 그리고 나 자신의 '혼자놀기'에 대한 과장된 선입견과 두려움을 깨야 할 것이다. 혼자 노는 것은 '자랑스러운 무용담'도, '부끄러워 숨겨야 할 일'도 아니다. 그것은 독립된 사람이 살아가는 자연스러운 생활의 일면일 뿐이기 때문이다.

[☞ 오마이 블로그]
[☞ 오마이뉴스E 바로가기]
- Copyrights ⓒ 오마이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9/12/25 16:01 2009/12/25 16:01

물밑에서 와일드하게 팔을 뻗어!

물밑에서 와일드하게 팔을 뻗어!
[매거진 Esc] 임경선의 이기적인 상담실
 
 
한겨레  
 
 
» 일러스트레이션 최수연.
 
Q 마흔살 독신 직장여성입니다, 혼자 노는 게 너무 싫어요

마흔살 독신 직장여성입니다. 만족스러운 직장생활을 하고 있으며,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이 없습니다. 책읽기와 여행이 취미입니다. 그런데 큰 고민이 하나 있습니다. 친구가 없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함께 여행을 떠나고 취미생활을 할 마음 맞는 친구가 없다는 것입니다. 함께 어울릴 직장동료·선후배·학교동창은 많지만 그냥 술친구거나 가정생활에 매여 외출을 못 나오죠. 운동도 함께하고, 산에도 같이 가고, 여행도 함께 떠날, 마음이 맞는 친구가 없어 너무 심심하고 답답합니다. 동호회 같은 데 가서 모르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쑥스럽고, 굳이 그래야 되나 싶고요. 한편, 저와 처지가 비슷한 직장동료이자 친한 친구가 한 명 있는데 문제는 저와 성격이 딴판이라는 겁니다. 휴일에는 집에서 편히 쉬는 것을 최고로 여기는 타입이라 억지로 함께 여행도 가고 이런저런 계획도 세워 봤지만, 어쩔 수 없이 좇아오는 친구도 불만이고, 저 역시 편치 않습니다. 열심히 일한 만큼 함께 재미나는 일을 계획하고 나눌 마음에 맞는 친구를 구할 수는 없을까요?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어요. 혼자 노는 것은 너무나 싫어요.

 

 

A 서점에 가면 오지여행이니 테마여행이니 하며 이런저런 잡다한 여행책이 많이 보입디다. 붐인가 봅니다. 나는 저런 책들이 갑자기 많아진 틈새적 이유가 실은 당신처럼 ‘여행갈 상황은 되는데, 같이 갈 인간이 마땅찮아서’가 아닐까 슬쩍 의심해 봅니다. ‘에라, 책이나 뚝딱 한 권 쓰자!’ 식의 이유있는 여행이면 혼자 용기내 들어간 식당에서도 밥 기다릴 동안 메모 끄적대는 흉내내면 왠지 좀 있어 보이고 외로움도 글빨로 승화되잖아요. 인세도 벌어 심지어 막 생산적이야. 어쨌든 나이 좀 잡수신 싱글녀 치고 만만한 여행친구 찾는 거 그거 누구에게나 보통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게다가 당신 같은 에너자이저 커리어우먼, 듣자하니 쉴 때도 만만치 않겠는데요? 일 좀 한다는 여자분들, 대략 두 타입이시죠. 평소에 ‘달리니까’ 여가에는 시체놀이하시는 분(그 직장동료처럼), 아니면 당신처럼 ‘이 아깝고 소중한 시간’을 최고로 의미있는 시간으로 만들고자 ‘일’처럼 뽕을 빼시는 분. 후자들이 오버하면 잰걸음으로 여기저기 ‘찍고’ 돌아다니는 건 기본이요, 시간별 동선 짜고 될수록 사이사이 셀카는 부지런히 찍으시지요. 여행계획 짜기 위해 기본 여행서 세 권은 비교분석해 줘야 직성도 풀리시죠. 퇴근 후, 재즈댄스 중급반 같은 곳에서 만났다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꼭 맨앞 중간 자리 사수하며 땀 뻘뻘 팔 훠이훠이 휘두르며 추실 그 분들이시죠. 팔 닿을까봐 옆 사람 더 저리 비키라고 눈치주고 …. 본인들은 그저 열심일 따름이지만 옆사람 좀 피곤하겠죠?

그렇다고, 보아하니 당신 좀 피곤한 스타일 같은데, 대충 그 나이면 혼자 알아서 좀 놀아, 이 말을 “현대의 성숙한 여성은 혼자 여행하는 것이 스타일리시하다”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하고 싶진 않습니다. 동반자 없이도 너끈히 활개치며 잘 살 것 같은 이런 분들이 실은 타인을, 혹은 관객을 더더욱 필요로 하니깐요. 다만 그 진심을 보이는 것에 인색할 뿐 - 잘난 내가 초라해 보이는 게 싫거든요.

사실 ‘여가친구 찾기’의 가능성은 널려 있지만 일일이 가능성 타진하는 게 치사하고 번거로워서 못해먹는 겁니다. 절박하게 정을 구걸하는 것처럼 보일까봐,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거절당할까봐 두려운 거지요. 꼭 올드미스라서 그런 게 아니라 이건 우리 모두의 딜레마. 평소엔 혼자서도 멀쩡하다가 꼭 무슨 생일이나 크리스마스 이브나 휴가 같은 특별할 때만 사람 찾는 공황발작을 일으키지요. 당신이 처음부터 가능성을 배제한 그 직장동료·동창·선후배들에게도 엇비슷한 경우가 존재할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종종 묻지 않고 지나가기에 그냥 늘 나 빼고 남들은 즐겁게, 바쁘게 보낸다고 착각하며 지레 토라지곤 합니다. 그간 당신을 동반해 준 그 직장동료도 조금만 그녀의 취향을 반영해 본다면 창의적인 절충안 나올 수 있습니다. 동호회요? 오프라인에서 잘 자리잡으신 분들, 굳이 수평적 관계를 가장하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태생도 모르는 연하 것들에게 ‘님’자 붙여가며 맞춰주는 거 솔직히 짜증나죠. 그렇다면 아예 직접 동호회나 클럽을 만들어서 본인 위주로 하우스룰을 설정해서 이기적으로 운영해 볼 수 있잖아요! 당신과 유사한 에너자이저 골드미스 언니들(더불어 운 좋으면 골드미스터들), 오프라인으로 서로 접점 찾기가 힘들어 곳곳에 안쓰럽게 센 척 서식하고 있으니 평소의 업무 추진력으로 단결시켜 볼 만합니다.





번거로워 보이나요? 인간관계, 그거 원래 좀 번거롭습니다. 혹시나 해서 주변의 마흔 전후 싱글 언니들에게 휴가여행에 대해 물어보니 죄다 번거로워서 ‘걍 혼자 갔다’고 토로하더군요. 다만 덜 초라해 보이려고 이 언니들 꾀 써서 일거리를 일부러 만들어 ‘출장’으로 둔갑시켜 휴가갔다 합디다. 저에겐 이런 꼼수가 훨씬 더 번거로워 보입니다.

현대인들의 특징은 내가 남들을 먼저 소외시켜 놓고서는 내가 외롭다고 징징대는 거지요. 외롭다는 그 말도 대부분 직접 못하고 기껏해야 엄한 개인홈피에서나 불특정 다수에게 어리광을 부려보며 누가 내 마음을 알아주고 나에게 맞춰주길 바라지요. 원스톱 효율성(이거 순전 당신의 직업병)으로 운동·등산·여행의 팔방미인 짝궁이 돼 주면서도 내 입맞에 맞는 사람이라니! 당신이 예의 적극성을 발휘해 먼저 팔을 뻗어본다면 가능성이 없진 않겠죠? ‘사람찾기’도 ‘노는 것’처럼 해 보시길. 겉으로 우아해 보이려면 물밑에선 더 와일드하게 들이대야 하는 겁니다.

임경선 칼럼니스트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9/04/26 23:53 2009/04/26 23:53

그까이꺼 아나토미

그러니 이 땅에서 어떻게 살 건지는 스스로 깨치는 수밖에 없다. 그러자면 가장 먼저 필요한 게 자신이 무엇으로 만들어진 인간인지부터 아는 거다. 언제 기쁘고 언제 슬픈지. 무엇에 감동하고 무엇에 분노하는지. 뭘 견딜 수 있고 뭘 견딜 수 없는지. 세상의 규범에 어디까지 장단 맞춰줄 의사가 있고 어디서부턴 콧방귀도 안 뀔 건지. 그렇게 자신의 등고선과 임계점을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윤곽과 경계가 파악된 자신 중, 추하고 못나고 인정하기 싫은 부분까지, 나의 일부로,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전혀 멋지지 않은 나도 방어기제의 필터링 없이 고스란히 받아들이게 되는 지점, 그런 지점을 지나게 되면 이제 한 마리 동물로서 자신이 생겨먹은 대로의 경향성, 그런 경향성의 지도가 만들어진다.

 
거기서부턴 더이상 자신에 대해 관심이 없어진다. 더이상 자기합리화나 삶에 대한 하찮은 변명 따위에 에너지 소모하는 일, 없어진단 이야기다. 그리고 그때부터 모든 에너지는 생겨먹은 대로의 나를 세상 속에서 구현하는 것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된다. 더이상 눈치 보거나 두리번거리지 않고. 그 다음부턴 쉽다. 꿈이니 야망이니 거창한 단어에 주눅 들거나 현혹되거나 지배당하지 말고, 그저 자신이 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것들, 가보고 싶은 곳들, 만나보고 싶은 자들 따위 리스트를 만들라. 그리고 그 리스트를 하나씩 지워가라. 사람이 왜 사느냐. 그 리스트를 지워가며 삶의 코너 코너에서 닥쳐오는 놀라움과 즐거움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최대한 만끽하려 산다. 최소한 나는 그렇다. 건투를 빈다.

 

물론 부모 욕망에 응답코자 하는 건 모든 아이의 숙명이다. 그리고 거기 부응치 못한 자책감으로부터 완벽히 자유로운 자도 없고. 거기까진 정상이다. 사실 인간은 평생을 그렇게 누군가의 욕망에 호응하느라 부산하다. 삶 자체가 인정 투쟁이라고. 하지만 모든 건 결국 밸런스의 문제다.
  
우리나라엔 남의 욕망에 복무하는 데 삶 전체를 다 쓰고 마는 사람들, 자기 공간은 텅텅 빈 사람들, 너무나 많다. 당신만의 노선을 찾고 그리고 거기서 자존감, 되찾으시라. 시간이 오래 걸릴지도 모른다. 쉽지도 않다. 하지만 그 길은 당신 스스로 찾는 수밖에 없다. 다만, 결코 친절해지진 말라는 거. 오히려 이제부턴 차근차근, 남의 기대를 저버리는 연습을 하라는 거. 남의 기대를 저버린다고 당신, 하찮은 사람 되는 거 아니다. 반대다. 그렇게 제 욕망의 주인이 되시라. 어느 날, 삶의 자유가, 당신 것이 될지니.

 

덧붙임- 사람이 나이 들어 가장 허망해질 땐, 하나도 이룬 게 없을 때가 아니라 이룬다고 이룬 것들이 자신이 원했던 게 아니란 걸, 깨달았을 때다.

 

존재에 대한 예의란 게 친절하고 상냥하다고 지켜지는 게 아니다. 아무리 무뚝뚝하고 불친절해도 각자에겐 고유한 삶에 대한 배타적 권리가 있으며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그 경로를 최종 선택하는 것이란 걸 온전히 존중하는 것, 그게 바로 인간에 대한 예의다. 가족의 간섭과 제재는, 아니 사실은 애정까지도, 그 선을 넘어선 안 되는 법이다. 그 어떤 자격도 그 선을 넘을 권리는 없다. 가족 사이엔 아예 선이 없단 착각은 그래서 그 자체로 폭력이다.

 

이런 인간들, 고민상담 안한다. 사람들이 자기 고충을 털어 놓는 건 문제를 대신 해결해달라는 게 아니라, 자신의 처지를 동정하고 공감해 달라는, 일종의 투정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 그러는 거 엄살이라 여긴다. 하여 이런 자들, 혼자 간다. 동지로 든든하다. 인장강도 대단하니까. 근데 당신은 바로 그게 야속하다. 연인이라면, 주요한 삶의 결정들과 자신에 대한 애정은 결코 별개일 수 없다고 믿으니까. 그녀가 중요한 결정을 혼자 했다는 데서 소외감과 배신감을 느끼는 건 그래서다. 연인의 삶이 나와 별개로 진행된다는 건 사랑이 온전하지 않다는 방증이니까. 그래서 당신은 신뢰와 존중을 거론한다. 그러나 그렇게 다그쳐봐야 그녀는 그런 말을 할 필요의 유무와 타이밍의 적절성에 대해 논증할 게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긋난 거냐. 당신이 그녀의 문제해결방식을, 당신에 대한 본질적 애정과 연결해버린 지점부터. 그랬다는 건, 당신은 그녀가 그렇게 생겨먹었단 자체를, 당신에 대한 배신으로 간주했다는 소리다. 듣고 보니 웃기지 않나. 근데 당신 같은 사람, 적지 않다. 왜 그런 구린 오판들을 하는 걸까.

 

인간들이 그만큼 사랑의 합일성과 완전성을 신화화해온 덕이다. 그래서 사랑한다면 둘 사이에 어떤 ‘별개’도 존재해선 안 되고, 사랑한다는 자신의 감정은 만유인력에 필적할 무슨 우주적 정당성이라도 되는 줄 아는 거다. 하지만 오해는 풀고 가자. 사랑한다는 자신의 감정은 그저 다른 모두의 감정만큼만, 딱 그만큼만 중요할 뿐이다. 게다가 완전하기는커녕 가장 불완전한 감정이 바로 사랑이다. 그러니 사랑한다고 제발 유난 좀 떨지 마시라. 사랑이 때때로 위대해지는 건 완전해질 때가 아니라, 서로 불완전한 걸 당연한 걸로 받아들일 때니까.

 

결혼, 그 사람이 아니라, 아차 그 사람인 줄 안 자와 하는 거다. 제 욕망이 영사한 홀로그램에 지가 넘어가는 거지. 하여 사기당했단 결혼 후 원망은 애초 자신의 착시에 그 본원적 귀책사유 있는 거다. 기실 따지고 보면 그런 쌍방 오판 없인 결혼의 성사 빈도 자체가 현격히 낮아질 게다. 불완전한 인간이 제한된 정보와 시간 안에 다른 불완전한 인간 하나를 평생 동지로 간택하는 일대 도박을 감행하는 데 그 정도 착시조차 없다면 대체 어느 간 큰 인간이 결혼을 하겠나. (그 맥락에서 이 착오는 그저 실수가 아니라 어쩌면 종의 보존을 위해 전략적으로 진화된 인간 심리의 능동적 자기기만일지도 모른다.) 결국 제 수용한계 안에 있는 착시였냐 하는 문제만 남는 거다.

 

우리가 온전히 통제할 수 있는 건 상대가 아니라 상대에 대한 자신의 대응뿐이다.

 

첫째, 연애는, 능력이다. 저절로 주어지는 게 아니다. 습득하고 연마해 획득하는 능력이라고. 그러니 닥치는 대로 연애하시라. 왕자가 우박이냐. 하늘에서 떨어지게. 모집단을 확대하시라.
둘째, 연애는, 연애 자체가 목적이다. 두근대는 기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긴장, 사랑받고 있단 포만, 뜻대로 안 될 때의 탄식, 섹스하는 격동…. 그 모든 걸 오감으로 누리는 거다. 그 외는 다 잡소리.
셋째, 결혼은 운명이 아니라 제도다. 당신, 재산세 내러 태어난 게 아닌 것처럼 결혼하러 태어난 게 아니라고. 관계의 목표가 결혼인 자들, 기껏 결혼밖에 못한다. 대다수가 결혼하고서야 그걸 깨닫는다만.

 

 

자신감은 사실 동전의 양면처럼 패배의식을 동반한다. 외부에서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조건이 제시되면 무너질 수밖에 없으니까. 예를 들어 공부 잘해 남에게 인정받아 만들어진 자신감은 나보다 공부 잘하는 놈 앞에서 무너지게 되어 있다. 하지만 스스로 구축한 자존감은 남의 승인이 필요 없다. 물론 남이 날 좋게 봐 줬으면 하는 거야 누구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아니어도 자존감이 튼튼하면 나는 그대로다.

 

 

컴퓨터의 세계는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다. 이진수 0과 1 사이엔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인간은, 디지털이 아니다. 자연의 인간은 그렇게 단속적일 수가 없다. 인간 자체가 유전적 연속성의 산물이다. 0과 1 사이에도, 무수한 관계, 촘촘히 실재한다. 그저 그 사이 존재하는 관계들에 각각의 제목이, 따로 존재하지 않을 뿐이다. 왜? 무서우니까. 내 연인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다른 누군가에 남다른 관심 주는 자와의 관계, 불확실하다. 그러니 두렵다. 그러다 상처 받으면 어쩌고 나만 손해 보면 어떡해. 그렇게 보호본능에 본전의식으로, 인간들, 0과 1에만 제목 달아뒀다. 제목 달지 않음으로써 그러한 위협 자체를 부정하고, 넉넉한 안전거리를 확보해두자 했다. 그렇게 탄생한 배타적 단어, 연인, 실제 사고 자체를 그리 속박하는 힘, 분명 있다. 모든 애정 관계는 모름지기 연인이거나 연인이 아니거나, 그 확고한 이분의 범주 내에 있는 게 마땅하다 믿게 하는 힘, 그렇게 제목의 유무로부터 시작된다.


문제는 제목을 달지 않았다 해서, 그렇게 외면해버린다 해서, 그런 속성의 관계까지 자동 소멸해버리는 건 아니라는 데서 비롯된다. 따로 정해진 항목이 없어 대략 0.64짜리 연인이라 해야 할 관계, 세상에 실재한단 말이지. 서로 아끼고 때론 섹스 하지만 1짜리 연인은 딱히 아닌 관계, 혹은 섹스는 없되 연인 이상 소통 연대하는, 결코 0이 아닌 관계, 존재한단 말이지. 실재하는데, 이거 대체 어쩔 거냐고.


기실 이거, 단순한 연애의 문제, 아니다. 삶의 불확실성 앞에 나를 얼마나 열어둘 것인가, 그 위험 앞에서 나를 얼마나 잠글 것인가. 그렇게 삶의 공포와 대면하는 근본적인 삶의 태도 문제인 게다. 그리고 그 태도에는, 옳고 그름 따윈 없는 거다. 0과 1로만 한정해도, 틀렸다 말할 권리, 누구에게도 없다. 그 리스크를 누가 대신 감당해 줄 건가. 그리고 바로 같은 이유로 해서 0.64도, 스스로 그 비용을 감당해 가는 한, 그저 제목 없단 이유만으로, 틀렸다 말할 권리, 누구에게도 없는 거다. 그 관계로 향유할 수 있었던 환희와 탄식, 기쁨과 절망, 그 삶의 풍성함은 누가 보상해줄 건가


하여, 두 사례에 대한 내 생각은 그렇다. 그 관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관계가 제 나름의 생명력으로 자라가는 데까지, 한번 따라가 보라고. 제목이 없단 건, 사람들에게 그 관계를 설명할 방도, 찾기 어렵단 소리다. 있는 제목에 욱여넣으란 사회 압력도 작용한다. 쉽지 않단 말이다. 허나 익숙하지 않을 뿐, 0.64도 그 나름의 엄연한 관계규범 가진, 1짜리만큼이나 온전한, 하나의 관계다. 애초부터 출발이 잘못된 게 아니라고. 1짜리로 시작해 결혼으로 끝맺는 게 유일하게 유의미한, 관계의 방정식 아니라고. 누구 맘대로 그걸 정하나.


그러니 그 불안, 누구에게도 떠넘기지 않고 스스로 감당할 요량이라면, 가 보는 거다. 그렇게 가다 보면, 어느 순간 0과 1 사이 어딘가에서, 듣도 보도 못한 관계의 궤도를, 둘이서만 돌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럼 그 관계는 나름의 내적 완성 이룬 거다. 그리고 그로 인한 즐거움은, 1짜리에, 뒤지지 않는다. 당연하다. 이름을 모른다고, 꽃이 절로 못생겨지더냐.

 

스킨십 없지만 연인 이상으로 소통 연대 집착하는 관계, 있을 수 있다. 반대도 가능하다. 그런데 우린 그런 관계, 연인이거나 혹은 연인이 아니거나, 양단간에 하나로만 판정하려는 조바심 있다 했다. 왜. 적확한 제목, 명료히 안 떠오르니까. 불편해서. 두려워서. 그러나 그렇게 낯설다 해서 관계가 실재하지 않는 건 아니다. 그리고 그 이유만으로 그 관계가 불완전하거나 비정상이 되는 건 더욱 아니다. ‘제목 없는 관계’는, 그저 제목만 없을 뿐, 그 나름의 내재적 논리와 생명 가진 하나의 완성된 관계라 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9/04/26 22:52 2009/04/26 22: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