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상실의 시대

 

최근에 짬이 나서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다시 읽고 있다는 친구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나는 하루키를 좋아했다. 그의 소설 중에 처음으로 접했던 것이 상실의 시대였고, 그때 받았던 충격은 상당했던 듯하다. 당시 내가 몸담고 있던 동아리에는 나보다 4살 위의 매력적인 선배누나가 있었는데, 그가 내게 권해주었던 소설이 바로 ‘상실의 시대’였다. 지금와서 돌이켜보면 이 책을 권했던 그도 다소간 감정의 과잉 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 같은데, 그만큼 하루키소설의 문체와 분위기는 젊은 층에게 강렬하게 다가올 이유가 충분했다. 그 후로 하루키의 소설을 닥치는대로 읽었다. 그의 소설은 여름날 밤 원샷으로 읽는 게 제 맛인 까닭에, 대학교 1학년의 여름을 그렇게 흘려보냈다. 밤에는 그의 책을 읽었고, 낮에는 커튼을 치고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것 같다. 그 시절은 하루키의 소설로 내 기억에 남아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의 핀볼, 양을 쫓는 모험, 태엽감는 새, 댄스댄스댄스, 하루키 단편선 등등

 

그의 소설에는 항상 허무함이라는 냄새가 깊게 배어있다. 그의 소설 한켠에서 “죽음은 삶의 대극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일부로서 존재한다”라는 말을 반복해서 찾아냈던 기억이 있을만큼 그의 소설에서는 항상 죽음과 허무의 그림자를 볼 수 있다.

 

인간은 그가 겪었던 시공간의 경험을 통해 성장하기 마련인지라, 6-70년대 일본의 전공투는 그의 소설을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다. 전공투는 미일안보조약문제가 발단이 되어 6-70년대 일본열도를 뜨겁게 달구었으나, 너무나 어이없는 한편의 드라마로 끝나버린 극단적인 방식의 일본 학생운동으로 68년 세계혁명의 일부이기도 했다. 당시 감수성이 예민한 대학생이었던 하루키는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으며, 이 때문에 늦깍이로 대학을 졸업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일본내 전공투세대의 위치다. 유럽의 68혁명세대가 정치, 교육, 문화계에 대거 진출하여 극단적인 냉전대립과 자본주의의 모순을 개량하는, 체제내의 새로운 목소리이자 활력으로 작용한데 반해, 일본의 전공투세대들은 천황을 중심으로 한 국가주의를 추종하던 戰前세대와 풍요로운 물질적 성장을 기반으로 한 극단적인 개인주의자들인 신인류세대 사이에 끼여 제도권에 발을 붙일 수 없이 떠도는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 2차대전과 군국주의에 대한 반성의 부재, 인간성을 말살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맹종은 결과적으로 80년대의 일본을 극단적인 우경화의 길로 들어서게끔 만들었다. 하루키의 경험은 이러한 일본의 역사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젊은 시절 그가 그토록 열망했던 이상과는 정반대의 길로 들어선 일본의 모습 앞에 그는 한없는 상실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을 것이고, 이는 그의 문학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원제는 “노르웨이의 숲”이지만, 나는 위와 같은 이유에서 우리나라에 번역된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이 훨씬 더 낫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 와타나베는 기묘하지만 매력적인 인물이다. 그는 고등학생시절 친구인 기즈키의 죽음 이후, 세상과의 적극적인 소통을 포기한 채 살아간다. 혼자서 수업을 듣고, 혼자서 식사를 하고, 어디서건 혼자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등 그는 무인도에 떨어뜨려 놓아도 혼자서 능히 살아갈 수 있을 법한 自足적인 사람이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와타나베가 그리 재미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데 있다. 그는 미도리에게 “봄날의 곰만큼 네가 좋아”라는 기상천외한 고백을 할 줄 알며, 주변의 매혹적인 사람들(레이코여사, 하쓰미, 나가사와 등)을 자신에게 끌어당길 수 있을만큼의 매력을 지녔다. 그가 혼자인 이유는 더 이상 세상으로부터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스스로 사람들로부터 “일정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려는 행위의 결과일 뿐이다. 인간은 생명체이고, 생명체에게 죽음이란 어떤 위대한 사상이나 신념으로도 뛰어넘을 수 없을만큼 절대적인 것이다. 인간은 어차피 無인 죽음과 죽음 사이에서 정해진 만큼의 시간을 허가받은 유한한 존재에 불과하다. 젊은 시절, 신념의 좌절과 허무함을 맛보았던 그였기에, 인간의 본질에 대해 천착했고, 결국 그는 “죽음앞에 선 인간”이라는 무오류의 명제를 발견했는지도 모른다. 허무함에 빠진 주인공의 생존의 증거는 욕망이다. 정확히 말하면 섹스(!)에 대한 욕망. 중간중간에 섹스장면에 대한 세밀한 묘사와 서술이 등장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하루키의 다른 소설에서는 주인공의 여자친구가 주인공의 페니스를 가리키며 당신의 레종 데트르-raison d'etre-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소설의 결말부분, 레이코 여사와의 포만감이 깃든 몇 번의 섹스 이후, 와타나베는 빗속의 공중전화에서 미도리에게 전화를 건다. 미도리는 어디냐고 계속해서 묻지만, 와타나베는 대답하지 못한 채 흐느낄 뿐이다. 난 이 장면에서 마치 내 일인 것처럼 너무나 기뻤다. 사랑과 애정이 깃든 섹스를 통해, 와타나베는 비로소 자신이 궁극적인 無가 아니라, 욕망을 지닌 주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고, 자신의 둘레에 쳐둔 벽을 허물고 능동적인 소통을 시작했던 것이다.

 

나는 아직도 하루키를 좋아한다. 그러나 예전만큼은 아니다. 내 건방진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난 하루키가 동시대인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주제의식)는, 상실의 시대 이후 더 나아간 게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저 소설의 플롯과 등장인물들을 약간 변형시키고 판타지적 요소를 가미시킨 것 밖에는 없지 않나 싶다. 오히려 과장된 그의 기교가 독자들로 하여금 주제를 읽어내는데 더 난해함을 던져주고 있지 않은지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 문학평론가 김명인씨는 어느 글에서 “이성이 사라지면 소녀 취향만 남는다”라는 말을 듣고 무릎을 쳤다고 썼다. 나는 위의 경구와 하루키를 동시에 떠올리며 무릎을 쳤다. 어제 친구가 “해변의 카프카”를 빌려주기로 했다. 그 책 속에서 하루키의 더 나은 생각의 단편들을 찾을 수 있었으면 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