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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06/21
    스타워즈 에피소드 3 - 시스의 복수 (2005)(4)
    자일리톨
  2. 2005/05/30
    추방된 사람들 - 토니 갓리프(2004)(4)
    자일리톨
  3. 2005/04/03
    아무도 모른다 - 고레에다 히로카즈(2004)(6)
    자일리톨
  4. 2005/01/31
    말아톤 - 정윤철(2005)(7)
    자일리톨
  5. 2005/01/11
    영웅 알베르 - 자끄 오디아르(1996)(2)
    자일리톨
  6. 2005/01/11
    룩앳미 - 아네스 자우이(20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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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4/12/26
    하울의 움직이는 성 - 미야자키 하야오(20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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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4/12/25
    완령옥 - 관금붕(19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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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4/12/12
    신성일의 행방불명 - 신재인(20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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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4/12/06
    마이 제너레이션 - 노동석(2004)(10)
    자일리톨

스타워즈 에피소드 3 - 시스의 복수 (2005)

 

언젠지 가물가물한 금요일

날이 제법 길어진 탓에 해가 중천(?)에 떴는데 그냥 집에 들어가기 싫다는 생각에 본 영화.

 

원래 스타워즈 시리즈는 어릴 적부터 좋아하기도 했었고, 그래서 몇번이고 다시 보고는 했었다. 형광등 빼들고 형들이랑 광선검이라며 칼싸움도 하고, 바가지 뒤집어 쓰고 우리 베이더형님 흉내도 내고 그랬었는데...

 

근데 에피소드 시리즈가 나와서 다시 보게 된 스타워즈는 왠지 쫌 그렇다. 그 엄청난 컴퓨터 그래픽과 물량공세는 여전히 놀랍지만, 엉성한 스토리전개, 너무나 전형적인 캐릭터들, 게다가 너무나 유치한 대사들까지... 요나가 뒷짐을 지고 엄숙하게 내뱉는 대사 ("음... 다시 어둠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어")는 얼마나 황당한가?

 

또한, 흑과 백이 명백히 갈리는 구도. 선과 조화의 상징인 제다이 기사들이 황제를 가리켜 암흑, 악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해를 하겠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황제조차 자신을 어둠의 힘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너무 웃기지 않은가? 이 세상에도 많은 대립과 갈등, 전쟁이 존재하지만 자기 자신을 가리켜 악이라고 일컫는 바보란 없다. 핑계없는 무덤 없듯이, 스스로 정당성이 없는 정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없으면 만들어 내기라도 하니까...)

 

게다가 의회시스템을 통해 통치되는 공화국이, 무소불위의 힘을 지닌 제다이 원탁회의를 통해 보호받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지... 일반인을 초월한 힘을 가진 소수의 엘리트란 항상 옳다는 것인지. 단순 명쾌한 헐리우드식 사고에 경배를~~

 

이 영화를 본 극장은 정동 스타식스

객석은 많이 비어있었다. 그런데 관광객처럼 보이는 외국인들이 듬성듬성 앉아 이 영화를 같이 보았다. 일본인 관광객, 중국인 관광객, 그리고 미군으로 보이는 다수의 백인들... 글로벌 시대의 취향의 획일화란 이런 것인지. 나는 왜 유년기에 스타워즈를 보게 되었고, 그토록 광분했던 것인지를 다시금 생각케 한 영화였다.

 

...

 

그리고 내가 이 영화를 다시 본다면 "당신이 내 애비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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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방된 사람들 - 토니 갓리프(2004)

 

지난주 토요일 우연히 친구의 전화를 받고 씨네큐브에 가서 봤다.

 

영화는 떠돌이 음악가 자노와 그의 애인 나이마가 파리에서 알제로 무턱대고 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프랑스-스페인-모로코-알제리로의 여정에서 그들은 유럽으로 가려는 수많은 아랍 이주노동자들을 거슬러 올라간다.

 

더 나은 삶을 찾아 떠나는 아랍 이주노동자들의 삶은 그들이 밤이슬을 피해 하룻밤을 머무는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뒤틀린 오두막과도 같다. 하지만 그들은 머물 곳이 없는 친구에게 머물 곳을 주고, 담배가 없으면 담배를 주며, 음식이 없는 친구와 음식을 나누는 가난하지만 정이 있는 사람들로 그려진다.

 

자노의 아버지는 알제리로 건너간 프랑스인으로 프랑스 정부의 알제리 식민화정책에 반대했기에 프랑스 본국으로 추방당했고 다시는 알제리에 가보지 못하고 사고로 죽는다. 자노의 애인 나이마는 알제리인으로 프랑스 시민권을 가지고 있으나, 아랍어를 알지 못하고 자신이 프랑스인이라고 생각하며 산다.

 

아버지를 잃은 충격과 허무함 속에서 자노가 알제리에 가자고 했을 때 나이마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지만, 결국에는 알제리로의 여정에 함께 하게 되고, 알제리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조금씩 찾게 된다.

 

이토록 스산한 내용과는 구별되게 이 영화는 테크노음악의 강렬함, 등장인물들의 엉뚱한 행동들, 황당한 상황설정으로 어느 정도는 유쾌함을 준다.

 

하지만 왠지 "뿌리를 찾아야 해"라는 영매의 대사와, 프랑스인 자노를 환영하는 알제리 아주머니들의 오버스러운 행동, 그리고 스페인에서 나이마에 대한 자노의 폭언은 마음에 걸린다. 좀더 생각의 정리가 필요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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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른다 - 고레에다 히로카즈(2004)

 

부모에게 버림받은 4남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답답한 현실을 무척이나 담담한 시선으로 잡아내고 있다.

 

제각각 아버지가 다른 4남매에게 "나도 행복해지면 안되니?"라고 말하며 떠난 어머니와 "나도 요즘 사정이 안좋아"라고 말하며 푼돈을 쥐어주며 돌아서는 아버지들... 오히려 아이들같이 무책임한 어른들의 모습과 뿔뿔이 흩어지지 않기 위해 현실의 어려움을 담담하게 겪어내는 어른스러운 아이들의 모습이 묘한 대조를 이룬다.

 

보는 내내 많은 관객들이 눈물을 흘렸지만 감성이 부족한 나는 그냥 한숨만 나오더라. 영화 속의 일은 비단 일본에서 어쩌다가 한번 일어난 일이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 주변 어느 곳에서나 일어나고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가난에 찌들리고 집에서 쫓겨날까봐 조용히 그림자처럼 집안으로 스며드는 4남매 앞에서 "댁의 아이는 이번 성적 제대로 나왔어요? 우리 애는 국어가 원체 약해서..."라고 대화를 나누는 어른들처럼, 나 자신도 일부러 그러한 현실을 애써 무시한 채 배부른 고민만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영화보다 더한 현실이 우리 주위에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정말 "아무도 모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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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아톤 - 정윤철(2005)

* 이 글은 알엠님의 [말아톤] 에 관련된 글입니다. 

 


여자친구(내 여친은 조승우 광팬-_-;;)한테 끌려가서 봤는데, 우연히 영화 시작하기 전에 감독과 주연배우들이 나와서 관객들에게 인사하는 팬서비스까지 받았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우아한 매력이 더해가는 김미숙씨를 보며 헤벌레해 있던 나는 다른 주연배우들에게 조금 미안한 감정까지 들었는데, 그 이유는 조승우가 등장하니까 상영관이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말아톤은 매우 잘 만들어진 영화였다. 단순한 줄거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감동적인 에피소드들을 군데군데 삽입해놓아서 지루함을 느낄 새가 없었고, 특히 조승우와 김미숙의 뛰어난 연기덕에 많은 관객들이 울고 웃으며 2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조승우... 데뷔후 놀라울정도로 성장해 버린 것 같다. 오늘 영화를 보며 앞으로 주목해야 할 남자배우 1순위에 올려놓았다. 물론 나의 0순위에는 벌써 이얼, 김강우, 박해일, 김병석라는 4명이 들어차 있지만 말이다. ㅎㅎㅎㅎ

 

오늘 관객들의 반응을 지켜보며, '예술의 힘'이랄지 그런 것도 생각해봤다. 글이나 인터넷홍보 등을 통해 "자폐는 병이 아니에요. 장애일 뿐이에요", "장애우를 위한 부담을 그 가족에게 모두 떠넘기는 것은 불합리해요"라고 아무리 외쳐도 들은 척도 안 했던 많은 사람들의 의식을, 이 영화 한방이 많이 바꾸어 놓은 것같다. 소설, 연극, 영화 등등의 내러티브 장르는 대중들의 감동체험을 그 목적으로 한다. 감동에서 인식의 전환을, 그리고 행동의 전환을 이끌어 내는 작품이 많이 나올 수 있기를 바란다. 한국의 모든 영화인들에게 희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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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알베르 - 자끄 오디아르(1996)

지난주 EBS세계의 명화에서 봤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어머니로부터 "너의 아버지는 1차대전의 영웅이었어"라는 말을 듣고 자라난 알베르는 그 자신도 영웅이 되기를 갈망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의 아버지는 술로 세월을 탕진하다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을 뿐이다. 가난한 어머니는 아버지를 영웅으로 만들어 정부로부터 연금을 타낼 속셈으로 알베르를 속였던 것이다.

그러다 2차대전이 발발하고 알베르의 마을에 독일군이 진주했다가 다시 연합군에 밀려 후퇴한다. 소심한 직물영업사원으로 전쟁에서 몇발자국 비껴나있던 알베르는 자신의 장인과 아내가 레지스탕스, 즉 영웅이었음을 뒤늦게 알게 되고, 이에 굴욕감을 느낀 알베르는 무단가출(?)을 하여 파리로 향한다.

독일군의 지배로부터 갓 해방된 당시의 파리는 온갖 영웅담이 난무하고 있었다. 레지스탕스의 일원으로서 무언가(?)를 했던 사람들은 누구나 영웅이 되었으며, 출신별로 분파를 만들어 서로 대립한다. 애국심과 국가주의를 통해 부풀려진 이들의 영웅담은 런던에서 '자유프랑스의 소리'를 방송하며 소일했던 망명건달이든, 한적한 시골농가에서 영국공군 조종사를 몇일간 숨겨주었던 농부이든 할 것 없이, 악의제국 독일에 대항한 투사로서 추앙받는다.

이때 파리에서 구걸을 하며 살아가던 알베르는 여러곳에서 주워들은 무용담을 가공하여 그 자신도 영웅의 대열에 합류한다.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은 상황임에도 파리는 레지스탕스 조직별로 모임이 성황을 이루며 나름의 정치조직으로 변모해가고 있었고, 그들 사이의 권력투쟁이 본격화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레지스탕스조직에 가입해본 적이 없어 특정조직과 연관이 없던 알베르는,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이유 때문에 프랑스 육군 중령으로 임관을 하게 되고 그는 '공식적인' 전쟁영웅이 된다.

이에 자신의 권력을 만끽하던 알베르는 독일로 끌려간 프랑스인 SS병사들을 체포하게 되고, "프랑스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총살명령을 내리게 된다. 이 일로 충격을 받은 알베르는 자신의 거짓을 털어놓고 당국에 자수하지만, "프랑스의 명예"가 실추될 것을 우려한 프랑스 정부는 이 일을 쉬쉬하며 덮어버리고 만다.

지역이든, 종족이든, 민족이든, 국가이든… 그것은 울타리를 어디다 칠 것인가의 문제일 뿐이다. 인간을 억압하고 파괴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정의라면, 그 울타리를 어디다 치느냐에 따라서 정의가 뒤바뀌고, 불의를 저지른 죄인이 영웅으로 둔갑해서는 곤란하다.

남한만큼 수많은 전쟁영웅이 존재하는 나라도 드물다. 그리고 국민들의 집단적 콤플렉스 때문인지 그들에 대한 애착도 상상을 초월한다. 김훈의 “칼의노래”나 드라마“불멸의 이순신”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전쟁영웅은 항상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같다. 영웅을 좋아하기에 앞서, 우리는 영웅을 누가 만들어냈는지, 왜 영웅을 만들어냈는지부터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아닐까 곰곰이 생각해 본다. 이순신 동상은 다까끼 마사오가 광화문 앞에 건설했다지 아마?

 

*첨언 : 이 영화에서는 마띠유 카소비츠가 주인공 알베르역을 맡아 열연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사실 전 "증오"보고 별다른 느낌이 없었는데, 왜 그렇게 충격적으로 봤다는 사람들이 많은지 난 잘 모르겠어요.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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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앳미 - 아네스 자우이(2004)

* 이 글은 해미님의 룩앳미 내 목소리로 말하기

   사슴벌레님룩앳미,

   리버미님의 룩앳미-인간관계내 권력들여다보기에 관련된 글입니다.


 

 

 

한가한 토요일, 집에 있으면 뭐하나싶어 그냥 혼자 나가서 봤다.

 

영화가 시작되고 나서 등장인물을 보니 어디서 많이 보던 사람이다. 가만히 보니 영화"타인의 취향"의 매력적인 "마니"(아네스 자우이)였다. 그 옆에 보니 같은 영화의 대머리아저씨(장 피에르 바크리)도 있네? 나중에 알고보니 실제로 둘이 부부이며 시나리오작업도 같이 했다고 한다. 암튼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아네스 자우이를 다시 보게 된 것은 행복한 일이다. 왜? 너무 매력적이니까~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해미님이 아주 정확하게 지적해 주셨다. 그 사람의 권력이 아닌 그 사람 자체를 보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또한, 조그마한 권력조각을 쥔 사람이 타인의 호의를 진심으로 바라보기란 훨씬 더 어려운 것임을 이 영화를 통해 실감했다.

 

영화의 후반부, 실비아선생과 세바스티앙은 에띠엔의 권위의 城(?)으로부터 과감히 벗어나는 길을 택한다. 멋있는 장면이다. 하지만 나라면 과연 그 길을 선택할 수 있을까? 레니가 군훈련소에 입대했을 때 차렷!이라는 구령에 자신의 몸이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보냈던 20여년의 교육은 바로 이 순간을 위한 것이었구나"라고 자조적으로 말했듯이, 나도 20여년간 권력관계를 파악하고 그에 최대한 적응할 것을 교육받아왔다. 내게 있어서도(특히, 내 몸에 있어) 권력은 여전히 저항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순응해야 할 대상이다. 그것이 아무리 미시적인 권력일지라도.

 

그런데 애매한 것은 에띠엔느를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이다. 주인공 롤리타의 아버지인 에띠엔느는 극히 자기중심적인 인간이기에 주변 사람들을 자기가 소유한 권력으로 붙들어매어두고 상처를 입히지만, 그가 하는 많은 행동들은 때로는 예쁜 악동처럼 코믹하게 그려지기도 한다. 권력은 취향의 문제는 아닐터인데... 감독은 에띠엔느를 통해서 무엇을 말하려고 한 것일까?

 

참, 위에서 레니를 인용한 것은 영화를 보고나서 광화문쪽으로 걷다가 우연히 레니와 마주쳤기 때문이다. 예의 그 김영하스러운 웃음을 짓고서 내가 나온 극장안으로 사라진 레니... 마치 화장실칸에서 나오다가 마주친 친구처럼 어색했다. 그때가 눈이 흩날려서 그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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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울의 움직이는 성 - 미야자키 하야오(2004)

* 이 글은 노란리본님의 [하울의 움직이는 성] , 탈주선님의 [빗나간 느긋함] , 여우비님의 [하울의 움직이는 성] , 시와님의 [하울의 움직이는 성], 엔데노이넷님의 [하울의 움직일 수 밖에 없는 성] 에 관련된 글입니다.

 

 

모처럼만에 본 재미있는 에니메이션이었다.

오늘 여자친구하고 손 붙잡고 정말 재미있게 봤다. 극장에 사람들이 너무 많더라. 연인들부터 아이들을 데리고 온 아저씨 아줌마까지... 이 영화는 대중적으로나 메시지측면에서 꽤 성공적인 영화임에 틀림없다.

미야자키 하야오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부터 영화음악을 함께해온 '히사이시 조'여서 그런지 영화음악이 가장 좋다. 영화전편에 흐르는<인생의 회전목마>라는 왈츠는 특히 그렇다. 

너무 산만하게 이야기가 전개되어서 "왜"라는 의문을 가지면서 영화를 본다면 재미가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냥 있는 그대로 "이런 황당한 이야기도 있을 수 있다"는 가정하에 본다면 코믹하다 못해 뒤집어진다. 특히 영화의 맨 마지막에 밝혀지는 허수아비아저씨의 정체란~~^^

애니메이션의 문제는 역시 기획이다. 아마도 이 영화를 만든 기획진들은 수년간 수많은 나라들의 전설과 민담을 채록하고 조사했을 것이다. 등장인물들 중 황야의 마녀, 불의 악마 캘쉬퍼 등등의 캐릭터만 놓고 봐도 그렇다. 그것은 아마도 일본 내부에 쌓여있는 인문학적 내공을 통해서 가능한 일일 것이다.

공부하고 싶은 사람들이 맘편하게 공부할 수 있고, 외부의 지식을 자신의 능력을 통해 가공한후 아무런 댓가도 받지않고 일본내부에 끊임없이 공급해주는 지식노동자층이 두터운 한 일본애니메이션의 미래는 밝다하겠다.

 

헉!!! 이 글 쓴 다음에 이 영화제목으로 검색을 해보니 원작소설이 있었네?! @.@;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1986년 영국에서 출간된 판타지 소설이다. 일본에서는 1997년에, 미국에서는 2000년에 번역 출간됐다. 2000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이후 은퇴를 선언했던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을 다시 일선에 복귀하도록 만든 작품이기도 하다(출처:인터넷서점 알라딘) "란다. 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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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령옥 - 관금붕(1991)

 

배우 완령옥

 

영화를 본 후, 완령옥은 전통적인 여성상과 신여성 사이의 경계를 위태롭게 걸어간 배우라는 느낌이 들었다. 영화의 시작부분 사우나탕의 부르주와 남성들간의 대화장면에서, "야한 역은 완령옥이 제격이지"라는 말은 데뷔초기 완령옥의 이미지를 그대로 표현하는 말이다. 완령옥은 풍부한 표정연기(당시에는 무성영화의 시대였으므로)를 통해 요염한 첩, 상류층 여성의 이미지를 대표하는 배우로서 확고한 자리를 잡는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선지 이후 완령옥은 사실주의적인 극영화에 출연하면서 강인한 신여성의 이미지로 변화해간다. "강인한 공장여성노동자역할을 해낼 수 있겠느냐?"며 의구심을 표하는 감독에게 립스틱을 지우며 "할 수 있다. 내가 책임진다"며 완령옥은 배역을 따내고 <현대3여성>, <신여성> 등의 작품에 출연한다.



신여성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극 중의 "신여성"이라는 것이 요즘 우리의 기준으로 보기에는 너무 어설퍼보이는 전근대여성으로 그려진다는 데 있다. 이것은 당시와 현재 사이의 엄청난 사고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고, 그러한 말도 안되는 이유로 영화속의 "신여성들"은 비극적인 최후(자살하거나, 맞아죽거나, 병으로 죽거나...)를 맞는다.

 

영화속의 완령옥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하녀로 일하는 부잣집 아들인 장달민과 어린시절부터 동거해 왔으나, 그의 도박, 술, 여자문제로 지쳐서 그를 떠나 부유한 영화제작자인 당계산과 함께 살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신여성>의 감독인 채초생에게 사랑을 느끼지만, 장달민, 당계산과의 스캔들사건이 터지자 자살하고 만다.

 

완령옥이 주연하고, 채초생이 감독한 <신여성>은 스캔들로 자살한 한 여배우의 일을 극화한 것인데, 채초생은 "신문기자들이 그녀를 죽였다"고 말하며 자신의 분노를 표현한 바 있다. 당시의 사회나 현대의 사회나 "착한 여성상"에서 벗어난 여성은, 특히 그녀가 공인이라면 죽기를 각오해야 한다.

 

완령옥은 이런 사회분위기 때문에 많은 상처를 입은 당사자이기도 하지만, 그녀는 당시 "완벽한 가정(남편, 아내, 그리고 아이들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가족?)"이라 간주된 가족형태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역설을 보여주기도 한다. 장달민과 결혼하지 못하자 양녀 소옥을 입양하여 키웠고, 장달민 혹은 당계산과의 결혼을 원하기도 했다. 자신의 욕망이 사회적 편견과 맞부딪쳐 힘들고 지치고 자신감이 없어질 때마다, 친구들에게 "제가 좋은 사람인가요?"라고 되물었던 건 아니었을까?

 

완령옥에게 자신을 구원할 새로운 남성을 찾지말고 혼자서 저 길을 걸어가라고 말하는 것은 당시의 상황에서 너무 무리한 부탁일까? 에혀~

 

못난 남성 장달민 + 바람둥이 당계산 + 소심남 채초생

 

영화에는 3인의 남성이 등장하는데, 그 중 장달민은 가장 황당한 인물이다. 누가 뭐라 말려도 난 얘만큼은 용서가 안된다. 얘는 한마디로 무뇌아다. 부잣집 도령으로 태어난 이 인간은 집이 몰락하자 완령옥과 살게 되는데, 완령옥이 벌어오는 돈을 도박과 술, 여자에 탕진하며 살아간다. 이에 지친 완령옥이 당계산과 가까워지자 "돈주면 헤어지겠다"고 말하며 돈을 뜯어간다. 마지막에 스캔들을 터뜨려 완령옥을 궁지에 몰아놓고는 "아직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또라이다. 완령옥이 자살하자 완령옥, 장달민, 당계산 3인의 이야기로 극본을 써서 팔아먹고, 영화화시키기도 한단다. 그나마 이런 인간이 폐암에 걸려 일찍 죽은 건 인간세상에서 더이상 민폐끼치지 말라는 하늘의 뜻이었겠지?

 

영화제작자로 등장하는 당계산은 돈많은 부르주아이며 소문난 바람둥이이기도 하다. 완령옥 가족에게 돈으로 환심을 사고 정성을 보이지만, 본부인과 이혼할 마음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업에 완령옥을 이용한 것은 아니었을까 의구심이 든다. 완령옥은 이런 당계산을 정말 사랑했을까?

 

남자배우중에 가장 괜찮은 놈이 채초생이다. 완령옥을 죽음으로 몰고간 영화 <신여성>의 감독이기도 한 채초생은 대사나 행동, 이후의 행적을 보면 사회주의자일 것 같다. 하지만 검열에 걸려서 영화의 일부를 자르라는 당국의 명령에 순응하기도 하고, 같이 홍콩으로 도망가자는 완령옥의 요구를 거부하는 등 우유부단하고 소심한 일면을 보이기도 한다.

 

인상깊은 점 : 다큐멘터리기법을 곁들인 점

 

장만옥, 유가령, 양조휘 등이 당시의 일을 극으로 재현하는 것이 중심기둥이기는 하지만, 중간중간 관금붕감독이 배우들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 당시 배우로 활동했던 실존인물들의 인터뷰내용이 흑백톤으로 삽입되어 있는데, 이것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특히, 완령옥을 데뷔시킨 손유 감독이 완령옥의 앨범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가슴이 찡했다. 조선인 배우 김염처럼 문혁때 고생했었고 그것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중풍을 심하게 앓아서 말을 할 수 없는 감독 손유...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장면

-완령옥 : (쪼그려 앉아 담배를 피우는 채초생을 바라보며) 그렇게 앉는 걸 좋아하나요?

-채초생 : 중국인들의 2/3는 이런 습관이 있지요. 나리들이 일을 보러 들어가면 이렇게 문간-에 앉아 기다리다가, 때리기라도하면 그냥 앉아서 맞는거죠.

-완령옥 : (웃으며) 그리고 그렇게 앉아서 쉬기도 하지요.

-채초생 : 언제 마지막으로 이렇게 앉아보았죠?

-완령옥 : 데뷔했을 때요. 저는 단역이라 제 차례가 올 때까지 그렇게 앉아 기다리곤 했지요.

-채초생 : 한번 이렇게 앉아봐요.

(그리고 나란히 쪼그려 앉은 뒷모습이 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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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일의 행방불명 - 신재인(2004)

 

 

<엄마>를 본 후에 "여기까지 왔는데 프로그램 하나만 보고 가기는 아쉽다"는 생각에 봤다. <엄마>를 본 후 바로 이어서 했거든. 보고나서 내 생애 한 선택중 두번째로 잘한 선택같아 가슴이 뿌듯뿌듯(첫번째 선택은 비밀~) 한마디로 너무 잘 만들었다.

 

기발한 상상력, 중간중간 박혀있는 블랙유머, 보고 난 후 드는 의미심장함, 원장역을 맡은 예수정씨의 출중한 연기... 캬~~

 

영화의 공간은 황량한 시골에 위치한 고아원 <천사의 집>. 아이들에게 주는 밥값마저 착복하여 사리사욕을 채우는 고아원 원장은 아이들에게 식욕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도록 종교로 세뇌를 시켜버리고, 때문에 아이들은 쵸코파이 하나, 우유하나를 먹더라도 냄새나는 화장실 칸에 들어가 주기도문을 외우고서야 먹는다.

 

이곳에서 음식을 먹는 모습을 남에게 보여준다는 것은 치욕스러운 일이고, 남이 먹는 모습을 지켜본다는 것은 구역질나는 일이다. 그러면서도 원장과 수위는 기도실에 들어가 아이들 몰래 맛나게 밥을 먹고, 자신의 아이들에게 맛난 걸 먹이고 좋은 옷을 입혀 좋은 학교를 보낸다.

 

그러던 와중에 주인공인 고아 신성일은 아무리 먹지 않으려 해도 살이 찌는 자신이 혐오스러워 자발적인 금식에 들어가고, 원장은 이것을 아이들의 세뇌에 다시 이용한다. 한편, 신성일의 친구 김갑수를 비롯한 몇몇의 아이들(조직명:레드썬)이 원장의 착취에 대항하여 일어나게 된다.

 

어차피 인간은 욕망을 느끼면서 살아갈 수 밖에 없고, 욕망을 하나씩 충족시켜가는 것 자체가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지구를 몇개씩 파괴할만큼 무한한 인간의 욕망이 무조건 충족되어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착취구조를 은폐하기 위해 일반인들을 종교나 교육을 통해 세뇌시킨다는 건 누가보더라도 때려죽일만한 행위다. 이 영화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참칭한 원장은 자신의 비열한 지배를 종교를 통해 교묘하게 위장한다.

 

이런 세뇌의 힘은 너무나도 커서 아이들은 쉽게 "레드썬"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고, 더군다나 원장에게 계속해서 자발적인 복종(음식먹는 벌칙을 지켜보며 아이들은 구역질을 한다)을 하기까지 한다. 한편, 우리의 주인공 신성일... 아이들이 봉기한 고아원에서 도망을 쳐 바깥세상에 나오지만, 원장의 충실한 신하인 신성일은 부끄러움도 없이 버젓이 음식을 먹는 바깥세상의 인간들에게 혐오감을 느끼고 순교직전까지 간다. (이 장면에서 웃어야 할지 슬퍼해야할지 알 수가 없더라. 물론 나는 엄청 웃었지만...-_-;)

 

중간에 원장에 반하는 "레드썬"조직이 아이들을 봉기시키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장면에서 우리의 "레드썬"은 너무나 어설프게 그려진다. 그들이 아이들을 선동하는 방식은 강압적이고 폭력적으로 그려지며, 아이들의 손에 몽둥이와 작대기를 쥐어주며 뛰어나가게 하지만 정작 그들은 아이들과 함께 나가지 않는다. 그리고 "레드썬"의 결말은 신성일의 환상(억지로 박재에 밥을 먹이는 행동, 계속해서 밥만 먹다가 배가 터져 죽는 아이들)을 통해 그려진다. 아마도 감독은 우리 현실세계의 운동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개개 욕망과 자유를 충실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러한 운동의 한계는 자명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에구구. 너무 나가부렀다.-_-;;)

 

신재인 감독은 <잊혀진 아이들> 시리즈를 계획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 1편이 <신성일의 행방불명>이었고, 2편 <김갑수의...>, 3편 <심은하의...>도 만들 예정이라고 한다. 재정적인 지원이 되어서 시리즈가 만들어지기를 간절히 기대해 본다.

 

*사족 : 이영화에는 신성일, 김갑수, 이영애, 심은하는 절대 나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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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제너레이션 - 노동석(2004)

 

<참고> 노동석감독 인터뷰기사 : http://blog.naver.com/pssora21/100008008948

 

이 영화보고 나서 들었던 감정은 정말 깝깝하다는 거다. 분노도 아니고, 슬픔도 아니고, 그저 이시대의 갑갑함만이 느껴졌다.

 

병석은 갈비집에서 숯불피우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가끔씩 결혼식 비디오를 찍지만 자신이 찍은 필름은 악평을 듣고, 형이 꾼 돈 때문에 사채업자에게 혼쭐이 나기도 한다. 그런 그에게 위안이 있다면 그의 여자친구 재경과 큰 돈을 들여 장만한 카메라다.

 

재경은 병석보다 더 우울하게 생겼다. 얼굴이 우울하다고 하루만에 직장에서 짤리기까지 한다. 그래도 돈을 벌어보겠다며 인터넷쇼핑몰에서 물건을 팔아보려하지만, 남은 건 카드빚뿐이다. 어쩔 수 없이 빚을 갚기 위해 재경은 카드깡을 하게 된다.

 

영화속 주인공들의 갑갑한 삶처럼 영화의 전체화면도 흑백톤으로 처리되어 있다. 하지만 남자주인공 병석이 카메라를 통해서 바라볼 때만은 화면이 총천연색이다. 병석은 그의 미래와 꿈과 욕망을 카메라를 통해서 확인하고 바라본다. 하지만 그 카메라도 이젠 그의 것이 아니다.

 

이 영화에서 재미있는 점은 사채업자의 사무실과 재경이 카드깡을 하는 생경한 과정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묘사된다는 거다. 오히려 그 장면들이 코믹해서 웃음이 피식 나올 정도다. 오늘날 빚을 통해서 하루하루의 삶을 연장해 나가는 서민들의 모습이 당연한 것이라고 영화는 말하는 것만 같다.

 

사족)난 영화배우중에 반데라스처럼 튀는 배우도 좋지만, 특히 진중하고 분위기있는 남자배우를 좋아하는 것 같다. 지금 3명만 꼽으라면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이얼', 드라마<나는 달린다>의 '김강우' 그리고 이 영화속의 '김병석' 정도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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