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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4/10/07
    13. 방콕구경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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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4/10/07
    12. 방콕구경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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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4/10/04
    04. AAPP사무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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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방콕구경3

태국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체크아웃이 12시라 늦잠을 자려했는데 8시도 안 되서 그냥 눈이 떠졌다. 대충 씻고 짐을 다시 싸고 데스크에 짐을 맡겨두고 저녁에 다시 찾으러 오겠다고 말해놓고 가벼운 차림으로 나섰다.

 

태국에서의 마지막 날인만큼 태국음식으로 아침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람부뜨리 거리의 노점에서 치킨카레를 먹었다.(카레는 인도음식인가...?-_-a) 우리나라 돈으로 750원에 근사하게 한끼가 해결된다니 태국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쑤언 두씻"으로 갔다. 번역하면 "극락정원"정도 될라나? 암튼 출라롱콘 대왕이 서유럽을 여행한 후 돌아와 1900년부터 자신이 거주할 궁전으로 건설한 정원으로 주변에 다른 왕족들의 집들도 드문드문 있고, 1980년대 이후부터는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외국인 방문객이나 현지인의 발길이 뜸해서 조용하게 걸을 수 있다고 하길래 찾아갔는데, 정말 조용하고 아름다운 길을 혼자 걸을 수 있다.

 

[조용한 극락정원?]

 



하루 두번 태국 전통무용공연을 무료로 해준다는데 난 운 좋게도 시간에 딱 맞춰서 갔다. 공연은 단촐하면서도 관객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다. 한가한 왕궁의 한구석에서 무료로 이루어진 공연인만큼 관객들은 느긋하고 진지하게 공연을 즐겼던 것 같다.

 

20세기 태국왕들이 살았다는 위만멕 궁전만 들어가서 구경을 했는데 혼자 구경하다가 3층에서 딱 걸렸다. 15분마다 중국어, 영어, 일본어 순서로 가이드가 인솔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데 당신은 어떻게 혼자 들어올 수 있었느냐고 묻는다. 그걸 낸들아냐? 그럼, 1층입구에 크게 써붙여 놓던가 해야지. 내가 다시 1층현관으로 가서 기다렸다가 올라와야 하느냐고 묻자, 혼자서는 이동할 수 없으니 일단 기다리란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서 있는데 마침 한 무리의 중국인 관광객이 지나간다. 거기 가서 같이 다니라고 하길래 난 중국인이 아닐뿐만 아니라 중국어를 하나도 모른다고 했는데도 일단 다니다 보면 영어가이드를 만나게 될 거라며 그냥 가란다. 이런 걸 두고 행정편의주의라고 해야하나? -_-;; 아마도 혼자서 다니지 못하게 하는 것은 수많은 유물 때문일 것이다. 세계 최대의 단일 티크건물이라는 위만멕 궁전은 그 안의 호사스러움이 가히 유럽의 어느 왕실에 뒤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왕후장상의 씨는 따로 있나보다.-_-ㅋ

 

덕분에 40분동안 중국어 실컷 들으면서도 뭔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모르게 됐다. 대신 혼자서 개인플레이하면서 유물 밑의 설명만 대강 읽었다. 히로히토랑 찍은 사진도 있더만...

 

태국 왕실의 존재는 이 곳에서 정말 대단한가 보다. 이 정도의 재정지원에 딴지거는 인간들은 없었나 모르겠다. 일본은 자신의 국가에 아직도 천황이 있다는 것에 영국 등 서유럽국가와 역사적으로 대등하다는 (여타 아시아국가와는 구별되는) 심리적 우월감을 느낀다던데 태국도 비슷할까? 태국에서 길을 가다보면 항상 국왕과 왕비, 공주, 왕자들의 사진을 볼 수 있다. 그것도 거대한 황금빛 왕실문장장식 안에 대문짝만하게 그려놓았다.

 

[교차로의 왕실사진, 큰길 가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면 무조건 이런 거다]

 

30년전의 젊고 매력적인 시절의 왕실가족 사진을 붙여두고 저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태국이 타이족 이외에 다양한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 있고 국가차원에서 이들간의 통합을 위해 얼치기 선전을 하는 것이라면 이해하겠지만, 람부뜨리의 초라한 덮밥집과 허름한 이발소, 심지어 구멍가게에조차 자발적으로 왕실가족 사진을 붙여놓는다는 건 황당한 일이다.

 

태국어로 절 혹은 사원을 '왓'이라고 하는데, 내가 방콕에 입국하면서 태국관광청부스에서 얻은 방콕 관광지도에는 무수히 많은 왓이 표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오늘 '왓 사켓'의 전망대에서 본 방콕의 모습은 사원들의 붉은색 기와지붕으로 울긋불긋해 보였다. 난 그 모습에서 밤이면 붉은 십자가로 뒤덮여 마치 거대한 공동묘지처럼 변하는 서울의 야경을 떠올렸다. 방콕이나 서울이나 그런 면에서는 동일하다. 그 풍경을 보니 괜히 우울했다.

 

[왓 사켓에서 바라본 방콕시가지, 붉은 지붕들은 거의 사원이다]

 

그 우울함 때문에 왓 사켓의 전망대에서 좀 잤다. 혼자 꾸벅꾸벅 졸다가 배가 고파서 시계를 보니 오후 3시. 뭘 좀 먹고 어디서 시간을 보내얄 것 같아서(비행기가 자정이었거든) 카오산 근처의 삔까오로 가서 푸드코트에서 대충 밥 먹고 거리의 사람구경 좀 하다가 짐 찾아서 무려 비행기이륙시간 5시간 전에 도착했다. 인제 뭘하지? -_-;;;

 

7일간이라는 짧은 기간이기는 하지만, 태국의 빈부격차는 심하다고 느껴졌다. (밥이나 국수를 기본으로 하는) 길거리음식의 값은 저렴하고 언제나 이걸로 배를 채우는 사람들로 넘쳐나지만, 부촌에는 우리나라돈으로 3000원 이상을 주고 햄버거 하나와 콜라를 먹는 사람들도 존재하고 싸얌의 디스커버리쎈터엔 이들이 느긋하게 쇼핑을 즐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 길거리엔 요란한 소음과 매연을 내면서 달리는 오토바이와 툭툭이와 함께 도요타, 혼다, 벤츠의 물결을 볼 수 있다. 도시의 매연에 찌든 70년대 청계천과 2000년대 서울 강남의 공존. 이러한 격차에 대한 대중의 반발을 왕실에 대한 선전과 종교로 효율적이고도 자발적으로 통제하는 사회분위기... 이것이 7일간 내가 느낀 태국의 모습이다.

 

이번여행... 첫번째 여행치곤 좋았다. 한 10년쯤 지난 다음에 또 한번 갈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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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방콕구경2

여행은 역시 혼자 다녀야 맛인가보다. 전날의 반일투어에서 벗어나 싸얌(남한으로 치면 명동)에 있는 "짐톰슨의 집"을 구경하러 갔다. 일찍 일어났더라면 "쑤언 두씻"을 보러 갔을 텐데, 일어나 보니 벌서 9시여서 싸얌으로 방향을 돌렸다. 택시를 타고 도착하니 아직 이른 시간이라 사람들이 그리 많지는 않다.

 

짐 톰슨의 집에 가서 보니 한 인간 때문에 먹고 사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구나 싶더라. 짐 톰슨은 CIA의 전신인 OSS에서 일했던 인간으로 2차대전이 끝나자 태국에 눌러 앉았단다. 그 이유는 태국산 수공품 실크에 매료되어서라나? 암튼 개과천선을 했는지 어쨌는지 이 인간의 손을 통해 전통적인 수공품으로 찬밥신세를 당하던 태국산 실크는 되살아났고, 영화 "왕과 나"의 등장인물들이 걸치고 나오기도 했단다.

 

이 인간은 대학시절 건축학을 전공한 사람답게 아유타야와 태국 각지에서 뜯어온 건축자재로 자신의 집을 치장했다. 그것도 동양의 유물과 전통을 그 나름의 오리엔탈리즘적인 눈으로 소화해내어 기이하게 재창조했는데, 차이나타운에서 뜯어온 전당포 문짝을 자신의 복도에 붙여 놓기도 하고, 태국 전통 가옥에서는 볼 수 없는 테라스를 내서 집의 기능성을 살리기도 했으며, 버마산 도자기를 뒤집에서 램프 스탠드로 사용하기도 했더라. 게다가 6동으로 이루어진 저택은 태국의 고서화와 비석들, 중국산 도자기, 일본산 탁자들로 가득차 있어 볼거리는 참 많았다. 이거 고마워해야하나 욕을 해야 하나.



이런 저런 설명을 들으면서 1시간 남짓 서 있었더니 다리가 아프다. 가이드가 끝난 후에 짐 톰슨의 집 안에 있는 카페테리아에서 태국식 홍차를  한 잔 시켰다. 보기에는 걸쭉해 보이지만 마셔보니 씨원허다. 70밧(2,100원). 태국에서는 매우 비싼 편이다. 덕분에 분위기는 끝내준다. 완전 호텔라운지다. 앉아서 담배 2대를 피우고 남은 홍차를 마시며 좀 쉬었다. 바람도 살랑살랑 불고 해도 구름 뒤로 모습을 감춰 상쾌하다. 방콕에서 느낀 최초의 청량감이었다. 나가는 길에 화장실엘 들렀다. 좋은 화장실이 드물고 유료화장실이 많은 이곳에서는 호텔이든 박물관이든 쇼핑센터든 들어가기만 하면 화장실에 들르는 편이 낫다. 이런 곳의 화장실은 거의 초특급 화장실(이곳 기준으로)인데다 무료이기 때문이다.

 

[짐 톰슨의 집, 정원에서 바라본 저택의 모습]


 

짐 톰슨의 집을 나와 싸얌 근처에 있는 출라롱콘 대학엘 갔다. 지척에 있는 가장 큰 대학이어서이기도 하고 원래 대학교가 싸고 경제적으로 시간 때우기도 좋지 않은가? 학교는 꽤 규모가 큰 편이었는데 밖에 나다니는 학생들이 별로 없다. 날씨가 더워 다들 도서관에서 나오지를 않는건지 아니면 시험기간인가? 태국은 대학생들까지 교복을 입고 다닌다. 아래는 남색, 위는 흰색. 왠지 깔끔해 보이기는 한데 캠퍼스 전체가 경직되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학생들도 우리처럼 아무데나 걸터 앉아 담배피우고 희희덕거리기 보다는 책 펴 놓고 뭔가를 하고 있다. 얘기할 때도 소곤소곤 지네들끼리만 얘기하고 말이다. 재미있는 건 학생들도 어쩔 수 없이 교복을 입긴 입되, 스탠다드형으로 입고 다니는 사람도 있고 사이즈를 확 줄여 쫄바지에 쫄남방, 혹은 미니스커트 차림으로 입고 다니는 학생들도 많다는 거다. 우리가 학교에서 혹은 군대에서 어떻게 해서든 주어진 룰에 파격을 가했듯이 인간의 개성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표출되는 것인가 보다.

 

반바지에 면티 한장 달랑 걸친 나를 수위아저씨들이 계속 쳐다보며 눈치를 주길래 쉬지도 못하고 출라롱콘 대학을 빠져나왔다. 근데 교문을 나서자마자 엄청 후회했다. 갑자기 해가 나타나더니

따가운 햇살을 사정없이 내리꽂는다. 마침 점심시간도 지났고 태국에 와서 너무 길거리음식만 먹고 다니는 것 같아 싸얌에 있는 유명한 해산물 음식점인 "씨파"에 갔다. 우리나라돈으로 만원 정도 주고 새우조림을 먹었는데 맛이 그럴 듯 했다. 양이 좀 적어서 그렇지...

 

[싸얌 쇼핑몰앞의 불단, 태국식 가옥의 한켠에는 항상 불단이 마련되어있어 향을 피우고 음식을 넣어 둔다. 이곳 쇼핑센터 앞도 마찬가지였다. 행인들 중 몇몇은 앞에가서 합장을 하기도 했다. 이런 걸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밥을 먹고 싸얌스퀘어 그늘에서 가만히 앉아 있다가 할 게 없어서 인근의 쇼핑몰 건물로 들어갔다. 싸얌은 우리나라의 명동과 대학로를 합쳐놓은 것 같은데, 오후가 되니 학생들로 그야말로 미어터진다. 쇼핑몰 안에는 한국에서도 듣도 보도 못한 값비싼 수입품들이 가득차있다. 한국에서도 쇼핑이라면 치를 떠는 내가 여기와서 쇼핑에 정을 붙일리 만무하고 돈도 없고 해서 4시쯤 BTS(태국 지상철)를 타고 선착장으로 갔다.

 

태국의 젖줄 챠오프라야, 방콕을 감싸 흐르듯 하는 이곳에는 4개의 다리밖에는 없다. 강 서안보다는 강 동안에 구시가지와 신시가지 모두가 밀집되어 있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한데, 년중 수량이 일정해서인지 수로운송이 상당히 발달되어 있다. 학교를 마친 학생들이나 직장인들이 강의 상,하류를 왕복하는 모습, 게다가 강의 서안에 위치한 여러 사원들 너머로 해가 뉘엿뉘엿 지는 모습은 그럴듯하다. 이날 싸얌관광코스 중 10밧(300원)짜리 르아두언(시내버스 배)을 탄 것이 가장 환상적이었다.

 

[챠오프라야강의 벌건 흙물]

 

[챠오프라야강에서 물놀이를 하는 아이]


 

선착장에 내린 후 시간이 좀 남아서 숙소로 바로 오지 않고 파쑤멘 요새(왕궁 서쪽을 지키는 망루) 근처의 카페에서 노닥거렸다. 게스트하우스를 겸해서 식당과 바를 운영하는 곳인데 분위기도 깔끔하고 저렴하다. 태국 사람이 운영하는 곳인데, 내가 첫여행이라 한국사람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에 묵은 걸 후회했다. 15밧(450원)짜리 콜라 하나 시켜놓고 한시간을 개겼다. 베낭여행객들도 드문 드문 앉아서 혼자서들 꾸역꾸역 뭘 하고 있다.

 

[콜라하나 마시면서 노닥거린 게스트하우스, 저렴하면서도 깔끔하다]

 

카페에서 노닥거리던 중 하늘을 보니 먹구름이 갑작스럽게 밀려드는게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다. 파쑤멘 요새에서 걸어서 20분 걸리는 길을 숨을 헐떡거리며 뛰어왔다. 우산이 있어도 이곳의 비를 막기엔 속수무책이다.(게다가 내 우산은 접이식 3단우산이었거든-_-;) 뛰어오는데 주위를 둘러보니 국수며 덮밥 가판대 아줌마 아저씨들이 장사를 접고 있다. 하긴 이 비에 국수 먹으러 오는 사람도 없을테니 장사를 일찌감치 접는 게 상책일 것 같다. 이곳의 비는 대단하다. It never rains but it pours라는 말이 태국속담에서 나온 말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내가 방콕에 머문 3일동안 저녁나절에 주로 퍼붓는 것 같은데 번개가 내리치면서 그냥 양동이로 들이붓듯 내린다. 태국 건물의 지붕은 우리나라의 밀짚모자처럼 중간부분이 굉장히 높고 급경사인데 반해 처마로 내려갈 수록 거의 수평에 가깝게 퍼져있다. 아마도 우기때 빗물이 잘 흘러내리게 해서 지붕의 파손과 누수를 막고, 여름의 뜨거운 햇빛을 피하는 차양을 드리우기 위함인 것 같다. 또 한가운데 지붕이 높은 것만큼 한낮에 달궈진 지붕의 복사열을 피할 수도 있고 말이다. 특히 이곳의 넓은 처마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사방에 높은 산이 없던 메솟에서는 오후 5-6시만 되면 그야말로 뜨거운 햇볕이 방안으로 거의 수평으로 들어오더라. 방안에 있는 사람은 등줄기에서 땀방울이 주르륵 흐르는 건 물론이고 말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정원에 각종 나무들을 가득 심어놓는 것이겠지. 그러고 보면 사람들은 주어진 자연환경에 조화롭게 잘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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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방콕구경1

아침 일찍 메솟을 출발했는데 밤이 되서야 방콕에 떨어졌다. 베낭여행객들의 천국이라는 카오산 거리를 거슬러 올라와서 겨우 숙소를 찾았다. 쌩판 모르는 곳에서 뭘 처음하는 게 이렇게 힘든 것인지 절감했다. 그리고 그냥 방에 쓰러져 잤다.

 

[방콕에서 머물렀던 게스트하우스, 2평 남짓한 방에 침대하나만 덩그라니 있다]

 

 



아침 9시 반에 눈이 떠졌다. 오랫만에 푹 자긴 했는데 몸은 오히려 찌뿌둥하다. 그래서 람부뜨리 거리로 나가 타이마사지를 받았다. 여행매뉴얼에 짜이디 마사지가 그나마 낫다고 하길래 그곳으로 곧장 갔다. 한국 사람들에게 입소문이 난 집이어서 그런지 "Are you Korean?"이라고 묻더니만 대략적인 한국말을 한 단어씩 더듬더듬(누워요, 일어나요, 돌아요 등등..)한다.

 

마사지사는 헬스클럽 주인 아저씨 같은 다부진 몸매의 태국인 청년인데 얼굴만큼은 순박하게 생겼다. 이마에 '나 착해요'라고 써붙인 것 같다고나 할까? 태국 마사지는 사원에서부터 전승된 것이라고 하는데, 병든 사람의 상태에 따라 경락에 자극을 줌으로써 병을 치료하는데 사용됐다고 한다. 그 동기로서나 개방된 큰 홀에 매트리스를 주욱 깔아놓고 하는 환경만큼이나 건전하며 대중적이다. 다리부터 시작해서 마사지를 해주는데 동작이 거의 레슬링을 하는 것 같다. 그때마다 단말마의 비명이 터져 나오는 걸 겨우 참았다.

 

한 시간의 마사지가 끝나고나니 이상하게 몸이 개운하다. 하지만 내 몸이 괜찮아진만큼 마사지사의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혀있다. 그만큼 이 직업도 힘든 일인 것이다. 한시간당 요금은 160밧(한화로 4,800원). 거기서 이 사람의 월급은 얼마나 될까? 태국 노동자의 1일 법정 최저임금이 U$3.40인 걸 감안하면 하루에 U$5.00정도 받을텐데. 미안한 마음에 거스름돈으로 받은 40밧을 "It's just for you"라고 말하며 건네주었다. 그러나 "컵쿤캅"을 연발하며 문까지 배웅해준다. 아... 이건 아닌데...-_-;;; 괜히 더 미안해지쟎아...

 

마사지를 받은 후 2시에는 왕궁, 2개의 사원을 가이드가 인솔해주는 1/2日투어를 신청했다. 아무래도 그런 곳은 설명해주는 누군가가 필요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같이 동행할 한국 사람들이 여럿 생겼다. 나까지 모두 6명이다. 가이드는 현지인으로 니키와 리나라는 여성들이다.

 

왕궁과 왓프라깨우부터 돌기 시작했는데 태국의 사원은 기본적으로 화려함을 특징으로 하는 것 같다. 황금스투파를 가까이서 보니 황금빛 모자이크 타일을 하나하나씩 나란히 붙여놓았다. 이런 화려한 스투파들과 불상으로 가득찬 사원안에서 과연 해탈을 이룰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싯다르타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황금 왕궁을 버리고 보리수 나무 아래로 들어갔지만 사람들은 그를 다시 황금 사원안에 에메랄드빛 옥으로 만들어 모셔놓았다. 이 얼마나 역설적인가.

 

에메랄드 붓다가 모셔진 사원 앞에서 왠 양키 아저씨가 우리 가이드에게 말을 건다. 말하는 것인즉, "나는 동남아시아의 역사를 공부하는 학생인데, 태국에는 정말 화려한 사원과 왕궁이 많다. 근데 이러한 것들을 만드는 비용은 다 누가 지불했냐? 다 사람들이 낸 세금이다. 그것도 한번만 지었느냐? 아유타야가 버마의 침공으로 불타버린 후 태국의 왕들은 자신들의 왕궁과 사원을 짓고 짓고 또 지었다. 그 때문에 밑에 있는 사람들만 죽어났다. 더군다나 1930년대부터 왕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상징적인 존재일 뿐이다. 그런데도 어딜가나 국왕일가의 사진이 넘쳐난다. 나는 태국인들의 왕가에 대한 태도가 이해가 안간다... 블라블라블라"

햐.. 이 양키 아저씨 말 한번 시원하게 잘 한다. 들으면서 고개를 연신 끄덕끄덕했다.

 

[왕궁과 왓프라깨우, 왓은 태국어로 사원이란 의미다]

 

 

 

화려한 왕궁과 와불, 여러 스투파들을 본 후 챠오프라야 강을 배를 타고(요금이 3밧, 90원이어서 놀랬다) 건너 새벽사원으로 간다. 챠오프라야강은 열대우림의 라테라이트 토질을 가득 담고 있어서인지 시뻘건 흙물이었다. 이런 챠오프라야강이 태국의 비옥한 델타지대를 만들었겠지.

 

새벽사원은 외관상 태국의 스투파와 상당히 다르다. 그래서 태국사람들도 이것을 스투파로 부르지 않고 '쁘라 프랑'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가이드에게 이 양식이 어디로부터 왔는지 물으니 크메르양식을 모방해 지은 것이라고 한다. 태국의 아유타야 왕국이 강성해서 크메르지역까지 그 영향권 아래에 두었을 때 크메르 양식이 많이 유입되었다고 한다. 왕궁에 '앙코르 왓'의 축소모형이 있는 것도 같은 이유인 것 같다. 크메르의 언어와 문자가 태국과 많이 다르냐고 묻자 상이한 언어와 문자를 쓴다고 한다.

 

[챠오프라야강을 건너면서 본 새벽사원, 태국의 스투파와 그 형태에서부터 많이 다르다]

 

주워들은 바로는 태국의 주민족인 타이족은 중국의 서남부에 살다가 송대 이후 한족들에 의해 중국 강남이 개발되자 현재의 태국으로 밀려난 것이고, 인도차이나 반도의 선주민이던 몬-크메르족은 이들에 의해 더 깊은 밀림지대인 현재의 캄보디아로 밀려났다고 한다. 또한 버마족은 몽고족의 일족으로 징기즈칸이 유라시아의 패권을 장악했을 때 몽골에 밀려 현재의 버마로 밀려갔다고도 하고...

 

그러고 보면 단편적으로만 이해하고 있던 세계사적 지식은 문화의 결절지역들(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에서 다시 만나 통합된 하나의 역사를 이루는 것 같다. 예전에 [동서문명교류사]라는 강의를 들을 때, 중앙아시아사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3개국어 이상의 외국어실력이 요구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이처럼 역사과정이 복합적으로 서로 얽혀있다면 3개국어로는 부족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이와 같은 이유로 이 지역의 역사연구가 어려서부터 엘리트교육을 받은 일군의 서구 부르주아들에 의해 연구되었고 연구되고 있다는 것은 상당히 우려되는 대목이다.(다른 분과학문의 상황도 비슷하지 않겠는가마는...)

 

새벽사원 구경을 마치고 투어가 끝났는 줄 알았는데 가이드가 보석가게에 들러야 한단다. 알고 보니 우리가 타고 다녔던 봉고차도 보석가게에서 무료로 대절해 준 미니버스였다. -_-; 태국의 여행사에서 판매하는 여행상품 중에 보석가게 방문이 의무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실제로 내가 겪으니 기분이 나쁘다. 그래서 보석가게 입구에 내려 난 보석이 필요없다며 담배한대를 피워물었다. 기분이 더럽다. 보석가게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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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메솟을 떠나며

원래는 밤차를 타고 늦게 메솟을 출발하려 했지만, 어젯저녁 부찌에게 아침 일찍 떠나겠노라고 말했다. 부찌는 방콕에 일이 있어서 그러는 거라면 아쉽지만 그렇게 하라고 했다. 어젯밤에 그렇게 말해 놓고서 부찌에게 편지를 썼다. 여기서 지낸 3일동안 내가 보고 들은 것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힘들었다고, 나는 정말로 평범한 한국에서 온 젊은이라서 당신의 상황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한국으로 돌아가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겠다고 썼다. 그리고 당신이 몸담고 있는 조직과 당신이 하고 있는 활동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훌륭한 가치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고 썼다.

 

솔직히 3일동안의 메솟에서의 생활은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것이었다. 그곳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슬픔을 모아놓은 곳 같았다. 말이 제대로 통하지 않음에도 그렇게 느껴졌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그런데도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 참담함이라니... 그래서인지 메솟에 있는 내내 나는 두통에 시달렸다. 마치 뒷골에 심장이 있는 것 마냥 머리가 두근거렸고, 사흘째 되던 날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내일 아침 이곳을 떠나겠노라고 말했던 것이다.

 

밤차로는 메솟에서 방콕으로 가는 직행편이 있지만, 아침에는 직행편이 없어서 인근 대도시인 탁(Tak)으로 가서 방콕행 버스를 갈아타야 한다. 부찌가 오토바이로 터미널까지 바래다 주었다. 차를 기다리며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는 내가 출발일정을 앞당긴 것에 뭔가 안 좋은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인지 걱정하는 눈치다. 어젯밤에 당신에게 편지를 썼다고 하면서 편지를 건네주었다. 그가 나중에 사무실에 가서 꼭 읽어보겠다며 나를 향해 웃는다. 그렇게 악수를 하고 그와 헤어졌다. 이런 전쟁터가 아닌 평화로운 곳에서 그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해 보았다.

 

메솟이 고원과 같은 지대에 위치해 있어서인지 메솟에서 탁으로 나오는 길은 가파른 내리막길이 많다. 탁으로 가는 도중 3번의 검문을 받았다. 2번은 군인이, 1번은 경찰이 버스를 세웠다. 그들은 탑승승객 전원의 신분증을 확인하고 나서야 출발사인을 보냈다. 그만큼 버마 난민의 유입은 태국정부로서도 골치 아픈 일인 것이다. 내 여권을 보더니 "Korean?... why..."라고 얼버무리더니만 내 여권을 돌려준다. 검문은 한국에서건 외국에서건 끔찍히 하기 싫은 경험이다.

 

탁에서 방콕으로 가는 버스에서 '청계천8가'를 콧노래로 흥얼거렸다. 마지막으로 들어본지도 오래, 마지막으로 불러본지는 더 오래된 노래인데, 왜 갑자기 콧노래로 흥얼거렸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산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가를"이라는 대목의 가사가 가슴에 와 닿는다. 어떤 상황에서건 자신의 인생의 무게를 묵묵히 견뎌낸다는 것, 그렇게 살아간다는 건 정말로 위대한 것이다.

 

[탁에서 방콕으로 오는 버스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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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영치우노동자협회의 모 스웨를 만나다

이번 여행 중 가장 인상깊었던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YCOWA(Yaung Chi Oo Workers Association, 영치우노동자협회)의 "모 스웨"일 것이다. 그의 경력은 상당히 이채롭다. 올해 나이 40인 그는 양곤공과대학을 다니다 급진적인 지하학생운동에 참여했고 1990년 총선거의 결과가 버마군사정부에 의해 부정되자 학생중심의 무장투쟁조직인 ABSDF(All Burma Students' Democratic Front, 버마총학생민주전선)에 참여해서 정글에서 무장투쟁을 벌이다 2000년 조직을 떠나 메솟에 정착했다.

 

그는 메솟일대의 200여개의 의류공장에서 일하는 8만여명의 버마 이주노동자의 권익단체인 영치우노동자협회의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데, 이곳에서 그는

 

- 태국 민변(Law Society of Thailand)의 도움을 받아 노동자들의 노동환경개선과 법률상담

- 씬시아클리닉마저도 가지 못하는 노동자들을 위한 이동진료소 운영

- 실업상태에 있는 노동자들을 위한 쉼터제공

-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노동권 교육

 

등의 업무를 하고 있다. 작년 그가 펼쳐낸 성과는 대단했다. 열악한 작업환경개선과 최저임금을 보장하라고 요구하는 Nasawat社 노동자들을 규합해 파업을 벌였고, 파업이 분쇄되고 버마이주노동자들이 본국으로 강제추방을 당한 후 그들을 매일 20명씩 다시 메솟으로 불러서(버마의 미야와디와 메솟간에는 하루짜리 비자가 발급된다) 조사보고서와 고소장을 작성해서 마침내 Nasawat社 사장이 벌금 및 임금보전 처분을 받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그의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 그는 라면박스 2개분의 서류를 보여주며, "그동안 손가락 하나 꿈쩍 않던 태국 노동청 녀석들이 저걸 다 검토하느라 몇일밤을 샜을 거다. 그래서 일부러 길게 쓰려고 노력했다."라고 말하며 껄껄 웃었다.

 

그는 이 사건으로 인해 작년 12월부터 올해 5월까지 잠적해 있어야 했다. 메솟의 폭력배들이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수소문하고 다닌다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메솟일대 기업주들의 청부를 받았을 것이라고 그는 추측했다. 5월들어 그가 활동을 재개하자마자 그와 그의 덴마크인 동료는 폭력배들에 의해 린치를 당했다. 메솟 시내의 야시장에서 폭력배들이 칼을 휘둘렀던 것이다. 그의 덴마크인 동료는 복부를 칼에 찔렸지만 그는 무사했다. 다행히 칼이 그의 허리벨트를 뚫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내게 당시의 상황을 말해주면서 "My good and thick leather belt saved my life"라고 말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런 그의 말에 같이 따라 웃어주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난 알 수 없었다. 그의 덴마크인 동료가 린치를 당한 다음날, 덴마크인 동료를 버스터미널까지 배웅해 주러갔던 다른 동료들도 린치를 당했고 이런 일은 여러번 반복됐다. 태국 경찰당국은 철저한 수사를 약속했지만 아직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그는 "나와 함께 다니는 외국인은 매우 위험하다"고 주의를 주었다. 그의 이런 얘기를 들은 후, 난 그의 오토바이 뒷좌석에 탈 때마다 뒤를 돌아보는 버릇이 생겼다.(아.. 나라는 인간은 왜 이리도 소심한지...-_-;;;)

 

이곳 이주노동자들의 상황은 상상을 초월한다. 2002년 30명의 버마이주노동자들이 사망했는데 모에 스웨는 실제 숫자는 이보다 훨씬 더 많아서 적어도 일주일에 1명은 죽는 걸로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들의 죽음의 원인은 열악한 작업환경과 과로, 기업주들의 폭력 등으로 인한 것이지만, 작년 5월에는 6명의 버마노동자가 총에 맞아 죽은 후 타이어 더미 속에서 불에 탄 채 발견되기도 했다. 이는 고용주에 의해 살해되었을 수도 있고, 버마군정보국의 프락치가 이주노동자로 위장하여 메솟에 잠입했다가 정체가 폭로되어 KNU(카렌민족동맹, 버마내 소수민족인 카렌족의 무장투쟁조직)에 의해 처형당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단다. 이곳 메솟은 겉으로는 평온한 전쟁터나 다름없다.

 

그의 사무실에서 내게 자료들을 보여주던 그가 전화 한 통을 받더니 심각한 얼굴로 어디를 빨리 가봐야겠단다. 60여명의 버마노동자들이 아무런 이유없이 해고를 당했다며 같이 가겠느냐고 묻는다. 얼떨결에 그의 오토바이 뒤에 타고 메솟빈민가로 향했다.

 

양철판으로 만든 대문을 열자, 잡초가 무성한 마당한켠으로 다 쓰러져가는 폐가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그에게 전화를 한 버마청년과 반갑게 악수를 했고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100% 목재로 이루어진 3평 남짓한 방에는 창문조차 없다. 나무 널빤지로 잇댄 벽의 틈 사이로 환기가 이루어지고 마침 저녁 나절이라 방은 몹시도 어두웠다. 그리고 마루 널빤지 사이로 보이는 풀들과 수많은 담배꽁초들이라니...

 

그가 방한구석에 자리를 잡자 10여명의 해고된 젊은이들이 우루루 몰려들어왔다. 버마어로 이런저런 얘기들이 오가고 갑자기 모 스웨가 땅을 치며 크게 소리를 질렀다. 내가 놀란 줄 알았는지 그는 내게 "사장이 한번에 다 자르면 일이 커질까봐 시차를 두고 소규모 그룹을 지어 해고했단다. 그걸 듣고 사장 욕 좀 했다."고 말해준다. 20여분간 대화를 주고 받더니만 연락처를 교환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와의 만남은 그렇게 끝났다.

 

학생시절엔 급진적인 지하학생운동, 그후 이어진 정글에서의 무장투쟁, 그리고 40대엔 이주노동자운동이라니... 도대체 그의 삶은 왜 이리도 팍팍한건지. 가슴이 답답해서 한동안 말이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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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씬시아 클리닉

메솟 외곽에 위치한 씬시아 클리닉을 방문했다. 이곳은 병이 있어도 불법이주노동자라는 신분 때문에 태국병원에 가지 못하는 노동자들을 위해 무료로 의료지원을 하는 곳이다. 이병원의 원장인 씬시아 마웅은 버마의 소수민족인 카렌족 출신으로 간호사로 일하다 난민들의 충격적인 상황을 목격하고 진료가방을 메고 밀림을 헤치며 난민들을 도왔던 것이 씬시아 클리닉의 시작이었다.

 

이후 여러곳으로부터의 지원을 통해 상당히 큰 규모의 병원이 만들어졌지만, 아직 전문적인 의료진이나 의약품의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씬시아 마웅 원장은 매우 바쁜 분인 걸 알고 있으니 그냥 병원만 둘러복 싶다고 말하고 그냥 병원구경만 했다.

 

끊임없이 유입되는 난민들로 인해 창궐한 말라리아, 버마 정부군이 매설한 지뢰로 인한 다리절단, 총상환자, 이주노동자들의 각종 산재로 인해 병원은 북새통이었다. 그나마 이주노동자 단속을 위해 태국경찰이 씬시아 클리닉 주변에 잠복하고 있어 이주노동자 환자가 많이 줄어든 상황이라는데도 병원은 환자들이 많았다.(태국경찰은 버마이주노동자를 체포하면 최소한 200밧, 한화로 6000원 이상의 뇌물을 요구한다. 이는 몇일분의 일당을 합친 액수이다. 약자들의 등을 쳐먹는 악인은 어디에나 존재하나보다)

 

의수와 의족을 만드는 조그만 작업장도 둘러보았는데 한켠에 걸려있는 환자리스트를 보니 눈물이 울컥하고 치밀었다. 리스트에는 환자의 이름과 나이옆에 절단(지뢰), 절단(지뢰), 절단(총상)...이라고 나란히 씌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단어들은 그들이 겪은 고통과 충격에 비해 너무나도 담담히 나열되어 있었다. 마치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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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영치우 학교를 가다

NLD에서 나와 부찌의 오토바이를 타고 영치우학교에 갔다. 영치우란 "새벽빛, 여명"을 뜻하는 버마말로 아이들이 버마의 희망이라는 뜻에서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이 학교는 원래 버마이주노동자단체에서 만든 학교이지만, 현재는 교육사업에 뜻을 둔 민트 아웅과 쵸쵸 카잉 부부에 의해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버마이주노동자들의 자녀들을 위해 무료로 운영되는 이 학교는 1999년 23명의 학생들로 시작해 186명으로 학생들의 숫자가 늘어났고 현재 저학년과 고학년으로 건물을 나누어 운영되고 있다.

 

학교는 말이 학교지 빈민촌 가운데 양철판과 나무판자로 얽어서 만든 가건물에 가깝다. 이 곳에서 일하는 선생님은 모두 여덟분으로 모두 자원활동가다. 이 중에는 전 정치범으로 옥고를 치른 후 국경을 넘어 이곳으로 흘러든 분도 있고, 버마에서 지하학생운동을 하다가 더 나은 활동공간을 위해 메솟으로 오신 분도 있다. 선생님은 모두 자원활동가이긴 하지만, 선생님일을 전업으로 하고 있기에 선생님들에게는 한달에 한화로 5만원 정도의 월급이 지급되고 있다.(메솟에서 4인가족의 최저생활비로 U$200이 든다고 하므로 이들에게 지급되는 돈의 액수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다)

 

한 선생님이 저학년 학생들과 수업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는데 칠판에 쓴 글씨를 손으로 지우는 것을 보고 부찌가 왜 손을 지워요?라고 물으니 선생님이 "칠판지우개가 없거든요"라고 말하며 멋적게 웃는다. 이곳의 교장인 민트 아웅은 내년부터 미국의 한 단체로부터의 지원이 끊기게 되어 걱정이 크단다.

 

한국에서는 이곳을 지원하는 APEBC(Assistance Program of Education for Burmese Children)이라는 모임이 있다. 한국에 있는 버마이주노동자들이 한달에 5천원, 1만원씩 자신들의 월급에서 각출해서 송금해주는 모임으로, 사회의 가장 밑바닥 생활을 하는 이주노동자들이 그나마 얼마되지도 않는 자신의 월급에서 기부금을 낸다니 얼마나 역설적인가? 이 모임에서 총무역할을 하고 있는 친구 마웅저는 일본에는 한국보다 10배나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생활하고 있지만, 한국의 모임만 같지 못하다며 정치에 대한 한국인들의 관심과 역동성이 한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친 것 같다고 했다.

 

하여간 갈수록 메솟으로 유입되는 버마이주노동자들이 증가하고, 휴일도 없이 종일 일터에 매여 있어야 하는 노동자 부모가 많아질수록 영치우학교의 존재의미와 역할은 막중해진다. 태국에서, 특히 메솟과 같은 국경도시에서는 아동에 대한 불법적인 인신매매가 횡행하고 있으며 그렇게 구입된(?) 아이들은 마약밀수단의 운반책과 판매책, 성매매, 구걸과 각종범죄에 이용되고 있다. 끔찍한 일이다.

 

[영치우 학교 저학년 학생들의 수업모습, 양철판과 합판으로 얽어만든 학교는 위태위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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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NLD-LA 메솟지부를 방문하다

9월 27일(월)

 

부찌가 아침에 오더니 오늘은 NLD, 영치우학교, 씬시아 클리닉 3군데를 방문할 예정이라고 미리 스케쥴을 말해준다. 부찌는 자신의 업무가 많음에도 내 스케쥴을 일일이 짜주며 나를 데리고 다닌다고 무더위에 너무 많은 고생을 했다. 그한테 너무 미안했다.

 

아웅산 수찌 여사의 NLD는 버마내의 본부와 구별하여 자유지역(Liberated Area)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NLD-LA메솟지부라고 부른다. 오토바이를 타고 그곳에 도착하니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있어 놀랐다. 자신을 부의장이라고 소개한 노인이 오늘은 NLD창립 16주년 기념행사가 있는 날이라고 말해주었다. 전날 DPNS에서 많은 운동가들에게 둘러싸여 곤혹스러웠던 나는 적이 안심을 했다. 부찌와 맨 뒷줄에 앉으려고 했는데, 외국에서 온 손님이라고 맨 앞에서 둘째줄 좌석에 앉으라고 한다.(아.. 이건 아닌데...-_-;;) 주위를 둘러보니 푸른 눈의 외국인이 딱 한명 앉아 있다. 근데 가만 보니 방콕에서 메솟으로 들어올 때 함께 차를 탔던 그 사람이다. 괜히 혼자 반가웠다.

 

행사의 분위기는 엄숙했다. 부찌가 모든 행사진행이 버마어로 이루어지므로 내겐 틈틈이 영어로 통역을 해주겠다고 했는데 분위기가 너무 엄숙해서 그조차 가만히 앉아 있었다. 먼저 당지도부의 버마 내부의 정세에 대한 연설이 있었는데, 정부 요인이 모두 장군들로 구성되어 있어 그랬는지 들리는 건 "제네럴... 제네럴...제네럴..."뿐이었다. 각기 다른 연설자들로 이루어진 3시간 반동안의 연설... 조금 지나니 연설은 자장가로 바뀌었고 난 그 엄숙한 분위기에서 꾸벅꾸벅 졸았던 유일한 참석자가 되었다.(아.. 나라는 인간의 한심함이란...-_-;;)

 

이곳 메솟에서 영어가 유창한 사람은 드물었다. 그래서 난 행사가 끝난 후에도 묵묵히 그들이 내미는 볶음밥을 먹고 혼자 담배를 피우며 시간을 보내야 했다. 또한 1세계에서 오는 방문객들이 3개월 혹은 그 이상의 자원활동을 예정으로 이곳에 오는 것과는 달리 한국인들은 그저 하루 혹은 몇일간의 수박겉핥기식 방문이 주종을 이룬다. 그렇기에 그들 또한 나와 같은 한국인에게 그들의 상황을 열성적으로 말해줄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암튼 NLD-LA지부의 방문은 그렇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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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쉼터에서의 대화

부찌의 집에서 점심을 먹고 나서 쏟아지는 잠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부찌가 쉼터에 가서 좀 쉬라고 하며 오토바이로 바래다 주었고 난 3시간의 꿀맛같은 낮잠을 즐겼다.

 

일어나서 거실로 나오니 태툰이라는 아저씨가 혼자서 TV를 보고 있다. 그는 학생시절 지하학생조직의 지도부로 일하다 투옥되었고, 수감기간 중 계속된 고문으로 허리의 주운동신경 하나가 끊어져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우리는 어눌한 영어로 오래도록 대화를 나누었는데 주로 그의 가족사와 그가 한 활동, 수감기간에 겪은 경험에 관한 것이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내가 지지하는 정당이 뭐냐고 묻는다.

 

- 니가 지지하는 정당이 뭐냐?

+ 응, 민주노동당이야

- 아~ 나도 그거 안다. 김대중씨가 리더 아냐? (democratic이라는 말을 듣고 오해한 듯)

+ 아니, 그건 자유주의자가 주축을 이룬 다른 당이고, 내가 지지하는 당은 이번에 국회의원이 새로 10명 나온 노동자를 위한 당이야.

- 그래? 한국에는 당이 많군. 김영삼에 대한 한국인들의 생각은 어때?

+ 그가 7-80년대에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건 맞지만, 그 이후 그는 노동자와 학생들을 탄압하고 권력을 남용했어. 심지어 그 아들은 여러군데서 뇌물받아 먹다 걸려서 지금 감옥에 있지

- 그래? 어쩌다 그 사람이 그렇게 됐어?

+ 뭐.. 나도 잘 모르겠지만, 원래 권력이라는 것의 속성이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것 아닐까?

- 그래... 근데 노동자를 위한 당이라... 니 정치적 색채가 뭐냐?

+ 나? 흠........ democratic socialist

- socialist???

 

그가 큰 소리를 지르더니만 이내 똥씹은 표정이 된다. 그래, 난 버마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사회주의자라는 말을 쓰지 않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해 왔던가. 48년 버마가 독립한 이후 버마체제의 근간은 사회주의였다. 또한 이후 쿠데타 세력은 북한과 같은 폐쇄적인 계획경제체제를 도입하며 그것을 "버마식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봉건적 통치체제일 뿐 사회주의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버마의 재야인사들을 감옥에 쳐넣고 고문했던 사람들은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로 호명했던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현재 버마의 재야세력에게 "사회주의자"라는 말은 경멸에 가까운 뉘앙스를 지니는 것 같다. 테툰씨의 반응에 놀란 나는 just like the french and german이라는 수식어를 애써 갖다붙였다. 그러자 몇 분후 나는 그와 대화를 재개할 수 있었다. 아... 사회주의를 참칭하는 독재는 짜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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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AAPP사무실에서

AAPP사무실에는 토요일의 이른 시간임에도 상근자들이 나와 일하고 있었다. 부찌가 나에게 상근자 하나하나를 소개시켜준다. 기가 막힌 건, 소개내용이 이름과 수감된 기간이라는 것이다. "이 사람은 XXX인데, OOO감옥에 △△△년간 있었지"라니... 4-5년 정도의 수감기간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버마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대표적인 정치범 사진들, 현재 약 1500명 정도의 정치범들이 수감되어 있다고 한다]

 

[버마의 감옥들의 위치를 표시해 놓은 지도, 그 수가 엄청나다]

 

[버마의 학생운동 지도자 민코나잉의 사진, 여기서 만난 대다수의 정치범들은 88년 민코나잉과 함께 일한 경험이 있다]

 

[부찌집의 앞마당, 뜨거운 햇볕을 막기 위해 보통 이곳 사람들은 마당에 차양을 친다]

 

오전에는 부찌가 주관하는 영어수업을 참관했다. 부찌는 버마 특유의 악센트가 심함에도 불구하고 영어가 참 능숙했다. 그가 영어를 배운 이력은 독특한데, 함께 수감되어 있던 정치범 중 영어가 능숙한 동료로부터 영어를 배웠으며 2주에 15분간 허용되는 가족과의 면회시간에 가족에게 부탁하여 영어교과서 종이로 음식물을 포장하여 감방에 반입한 후 거기에 나온 예문을 모두 암기하고 그 종이를 먹어버렸다 한다. 정치범들에게는 어떤 책이나 신문도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극한의 상황에서 배운 영어는 현재 그가 활동하는데 있어 큰 도움을 주고 있다. 그는 세계 각국 정부나 국제기구와 쉴 새 없이 버마의 상황에 대한 의견을 주고 받고 있으며, 버마에 대한 선택적 경제제제조치(버마산 티크와 보석류에 대한 target sanction)를 EU에 꾸준히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다른 정치범들은 영어를 배울 수 있는 조그만 행운조차 허용되지 못했다. 때문에 AAPP의 쉼터에 머무는 동안 함께 생활했던 다른 정치범들은 내게 그들의 수감기간까지만 말할 수 있을 뿐 여타의 상황에 대해서는 표현하지 못했다. 내가 내 방에서 쉬고 있을 때, 그들끼리 토론을 하는 소리가 들리곤 했는데, 그야말로 격론이 벌어지곤 했다. 저렇게 똑똑하고 할 말이 많은 사람들이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미소만 주고 받는 현실을 어떻게 견뎌내고 있을지...

 

따라서 이곳 메솟으로 넘어온 정치범들을 모아 부찌는 토,일요일 두차례 영어강습을 하고 있다. 메솟에 도착한 첫 날 난 이 수업을 참관할 기회를 얻었는데 그들은 뚜렷한 목적의식을 지니고 있었기에 수업분위기는 매우 진지했다. 이날의 수업교재는 동티모르의 정치지도자 구스마오와의 인터뷰 기사였는데 동티모르가 독립하기 전 인도네시아 정부의 간섭과 외교적 방해공작으로 인접국가로의 방문조차 허용되지 않던 상황을 구스마오가 어떻게 극복했는가가 주요 내용이었다. 아마도 부찌는 영어강습과 정치학습을 병행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동티모르 정치지도자들의 과거의 모습과 현재 자신들의 모습을 등치시켜 이해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런 부찌의 관점과 정치적 의도에 대해 난 별로 동의하고 싶지는 않지만, 나이가 40이 넘은 정치범들이 형형한 눈빛으로 모여 앉아 영어를 배우는 모습은 내게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다.

 

[사무실의 그늘에서 세상모르고 자고 있던 고양이,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일어났는데 보기와는 다르게 성질이 못됐다.-_-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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