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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AAPP사무실에서

AAPP사무실에는 토요일의 이른 시간임에도 상근자들이 나와 일하고 있었다. 부찌가 나에게 상근자 하나하나를 소개시켜준다. 기가 막힌 건, 소개내용이 이름과 수감된 기간이라는 것이다. "이 사람은 XXX인데, OOO감옥에 △△△년간 있었지"라니... 4-5년 정도의 수감기간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버마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대표적인 정치범 사진들, 현재 약 1500명 정도의 정치범들이 수감되어 있다고 한다]

 

[버마의 감옥들의 위치를 표시해 놓은 지도, 그 수가 엄청나다]

 

[버마의 학생운동 지도자 민코나잉의 사진, 여기서 만난 대다수의 정치범들은 88년 민코나잉과 함께 일한 경험이 있다]

 

[부찌집의 앞마당, 뜨거운 햇볕을 막기 위해 보통 이곳 사람들은 마당에 차양을 친다]

 

오전에는 부찌가 주관하는 영어수업을 참관했다. 부찌는 버마 특유의 악센트가 심함에도 불구하고 영어가 참 능숙했다. 그가 영어를 배운 이력은 독특한데, 함께 수감되어 있던 정치범 중 영어가 능숙한 동료로부터 영어를 배웠으며 2주에 15분간 허용되는 가족과의 면회시간에 가족에게 부탁하여 영어교과서 종이로 음식물을 포장하여 감방에 반입한 후 거기에 나온 예문을 모두 암기하고 그 종이를 먹어버렸다 한다. 정치범들에게는 어떤 책이나 신문도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극한의 상황에서 배운 영어는 현재 그가 활동하는데 있어 큰 도움을 주고 있다. 그는 세계 각국 정부나 국제기구와 쉴 새 없이 버마의 상황에 대한 의견을 주고 받고 있으며, 버마에 대한 선택적 경제제제조치(버마산 티크와 보석류에 대한 target sanction)를 EU에 꾸준히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다른 정치범들은 영어를 배울 수 있는 조그만 행운조차 허용되지 못했다. 때문에 AAPP의 쉼터에 머무는 동안 함께 생활했던 다른 정치범들은 내게 그들의 수감기간까지만 말할 수 있을 뿐 여타의 상황에 대해서는 표현하지 못했다. 내가 내 방에서 쉬고 있을 때, 그들끼리 토론을 하는 소리가 들리곤 했는데, 그야말로 격론이 벌어지곤 했다. 저렇게 똑똑하고 할 말이 많은 사람들이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미소만 주고 받는 현실을 어떻게 견뎌내고 있을지...

 

따라서 이곳 메솟으로 넘어온 정치범들을 모아 부찌는 토,일요일 두차례 영어강습을 하고 있다. 메솟에 도착한 첫 날 난 이 수업을 참관할 기회를 얻었는데 그들은 뚜렷한 목적의식을 지니고 있었기에 수업분위기는 매우 진지했다. 이날의 수업교재는 동티모르의 정치지도자 구스마오와의 인터뷰 기사였는데 동티모르가 독립하기 전 인도네시아 정부의 간섭과 외교적 방해공작으로 인접국가로의 방문조차 허용되지 않던 상황을 구스마오가 어떻게 극복했는가가 주요 내용이었다. 아마도 부찌는 영어강습과 정치학습을 병행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동티모르 정치지도자들의 과거의 모습과 현재 자신들의 모습을 등치시켜 이해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런 부찌의 관점과 정치적 의도에 대해 난 별로 동의하고 싶지는 않지만, 나이가 40이 넘은 정치범들이 형형한 눈빛으로 모여 앉아 영어를 배우는 모습은 내게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다.

 

[사무실의 그늘에서 세상모르고 자고 있던 고양이,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일어났는데 보기와는 다르게 성질이 못됐다.-_-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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