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11. 방콕구경1

아침 일찍 메솟을 출발했는데 밤이 되서야 방콕에 떨어졌다. 베낭여행객들의 천국이라는 카오산 거리를 거슬러 올라와서 겨우 숙소를 찾았다. 쌩판 모르는 곳에서 뭘 처음하는 게 이렇게 힘든 것인지 절감했다. 그리고 그냥 방에 쓰러져 잤다.

 

[방콕에서 머물렀던 게스트하우스, 2평 남짓한 방에 침대하나만 덩그라니 있다]

 

 



아침 9시 반에 눈이 떠졌다. 오랫만에 푹 자긴 했는데 몸은 오히려 찌뿌둥하다. 그래서 람부뜨리 거리로 나가 타이마사지를 받았다. 여행매뉴얼에 짜이디 마사지가 그나마 낫다고 하길래 그곳으로 곧장 갔다. 한국 사람들에게 입소문이 난 집이어서 그런지 "Are you Korean?"이라고 묻더니만 대략적인 한국말을 한 단어씩 더듬더듬(누워요, 일어나요, 돌아요 등등..)한다.

 

마사지사는 헬스클럽 주인 아저씨 같은 다부진 몸매의 태국인 청년인데 얼굴만큼은 순박하게 생겼다. 이마에 '나 착해요'라고 써붙인 것 같다고나 할까? 태국 마사지는 사원에서부터 전승된 것이라고 하는데, 병든 사람의 상태에 따라 경락에 자극을 줌으로써 병을 치료하는데 사용됐다고 한다. 그 동기로서나 개방된 큰 홀에 매트리스를 주욱 깔아놓고 하는 환경만큼이나 건전하며 대중적이다. 다리부터 시작해서 마사지를 해주는데 동작이 거의 레슬링을 하는 것 같다. 그때마다 단말마의 비명이 터져 나오는 걸 겨우 참았다.

 

한 시간의 마사지가 끝나고나니 이상하게 몸이 개운하다. 하지만 내 몸이 괜찮아진만큼 마사지사의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혀있다. 그만큼 이 직업도 힘든 일인 것이다. 한시간당 요금은 160밧(한화로 4,800원). 거기서 이 사람의 월급은 얼마나 될까? 태국 노동자의 1일 법정 최저임금이 U$3.40인 걸 감안하면 하루에 U$5.00정도 받을텐데. 미안한 마음에 거스름돈으로 받은 40밧을 "It's just for you"라고 말하며 건네주었다. 그러나 "컵쿤캅"을 연발하며 문까지 배웅해준다. 아... 이건 아닌데...-_-;;; 괜히 더 미안해지쟎아...

 

마사지를 받은 후 2시에는 왕궁, 2개의 사원을 가이드가 인솔해주는 1/2日투어를 신청했다. 아무래도 그런 곳은 설명해주는 누군가가 필요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같이 동행할 한국 사람들이 여럿 생겼다. 나까지 모두 6명이다. 가이드는 현지인으로 니키와 리나라는 여성들이다.

 

왕궁과 왓프라깨우부터 돌기 시작했는데 태국의 사원은 기본적으로 화려함을 특징으로 하는 것 같다. 황금스투파를 가까이서 보니 황금빛 모자이크 타일을 하나하나씩 나란히 붙여놓았다. 이런 화려한 스투파들과 불상으로 가득찬 사원안에서 과연 해탈을 이룰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싯다르타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황금 왕궁을 버리고 보리수 나무 아래로 들어갔지만 사람들은 그를 다시 황금 사원안에 에메랄드빛 옥으로 만들어 모셔놓았다. 이 얼마나 역설적인가.

 

에메랄드 붓다가 모셔진 사원 앞에서 왠 양키 아저씨가 우리 가이드에게 말을 건다. 말하는 것인즉, "나는 동남아시아의 역사를 공부하는 학생인데, 태국에는 정말 화려한 사원과 왕궁이 많다. 근데 이러한 것들을 만드는 비용은 다 누가 지불했냐? 다 사람들이 낸 세금이다. 그것도 한번만 지었느냐? 아유타야가 버마의 침공으로 불타버린 후 태국의 왕들은 자신들의 왕궁과 사원을 짓고 짓고 또 지었다. 그 때문에 밑에 있는 사람들만 죽어났다. 더군다나 1930년대부터 왕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상징적인 존재일 뿐이다. 그런데도 어딜가나 국왕일가의 사진이 넘쳐난다. 나는 태국인들의 왕가에 대한 태도가 이해가 안간다... 블라블라블라"

햐.. 이 양키 아저씨 말 한번 시원하게 잘 한다. 들으면서 고개를 연신 끄덕끄덕했다.

 

[왕궁과 왓프라깨우, 왓은 태국어로 사원이란 의미다]

 

 

 

화려한 왕궁과 와불, 여러 스투파들을 본 후 챠오프라야 강을 배를 타고(요금이 3밧, 90원이어서 놀랬다) 건너 새벽사원으로 간다. 챠오프라야강은 열대우림의 라테라이트 토질을 가득 담고 있어서인지 시뻘건 흙물이었다. 이런 챠오프라야강이 태국의 비옥한 델타지대를 만들었겠지.

 

새벽사원은 외관상 태국의 스투파와 상당히 다르다. 그래서 태국사람들도 이것을 스투파로 부르지 않고 '쁘라 프랑'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가이드에게 이 양식이 어디로부터 왔는지 물으니 크메르양식을 모방해 지은 것이라고 한다. 태국의 아유타야 왕국이 강성해서 크메르지역까지 그 영향권 아래에 두었을 때 크메르 양식이 많이 유입되었다고 한다. 왕궁에 '앙코르 왓'의 축소모형이 있는 것도 같은 이유인 것 같다. 크메르의 언어와 문자가 태국과 많이 다르냐고 묻자 상이한 언어와 문자를 쓴다고 한다.

 

[챠오프라야강을 건너면서 본 새벽사원, 태국의 스투파와 그 형태에서부터 많이 다르다]

 

주워들은 바로는 태국의 주민족인 타이족은 중국의 서남부에 살다가 송대 이후 한족들에 의해 중국 강남이 개발되자 현재의 태국으로 밀려난 것이고, 인도차이나 반도의 선주민이던 몬-크메르족은 이들에 의해 더 깊은 밀림지대인 현재의 캄보디아로 밀려났다고 한다. 또한 버마족은 몽고족의 일족으로 징기즈칸이 유라시아의 패권을 장악했을 때 몽골에 밀려 현재의 버마로 밀려갔다고도 하고...

 

그러고 보면 단편적으로만 이해하고 있던 세계사적 지식은 문화의 결절지역들(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에서 다시 만나 통합된 하나의 역사를 이루는 것 같다. 예전에 [동서문명교류사]라는 강의를 들을 때, 중앙아시아사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3개국어 이상의 외국어실력이 요구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이처럼 역사과정이 복합적으로 서로 얽혀있다면 3개국어로는 부족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이와 같은 이유로 이 지역의 역사연구가 어려서부터 엘리트교육을 받은 일군의 서구 부르주아들에 의해 연구되었고 연구되고 있다는 것은 상당히 우려되는 대목이다.(다른 분과학문의 상황도 비슷하지 않겠는가마는...)

 

새벽사원 구경을 마치고 투어가 끝났는 줄 알았는데 가이드가 보석가게에 들러야 한단다. 알고 보니 우리가 타고 다녔던 봉고차도 보석가게에서 무료로 대절해 준 미니버스였다. -_-; 태국의 여행사에서 판매하는 여행상품 중에 보석가게 방문이 의무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실제로 내가 겪으니 기분이 나쁘다. 그래서 보석가게 입구에 내려 난 보석이 필요없다며 담배한대를 피워물었다. 기분이 더럽다. 보석가게라니...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