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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영치우노동자협회의 모 스웨를 만나다

이번 여행 중 가장 인상깊었던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YCOWA(Yaung Chi Oo Workers Association, 영치우노동자협회)의 "모 스웨"일 것이다. 그의 경력은 상당히 이채롭다. 올해 나이 40인 그는 양곤공과대학을 다니다 급진적인 지하학생운동에 참여했고 1990년 총선거의 결과가 버마군사정부에 의해 부정되자 학생중심의 무장투쟁조직인 ABSDF(All Burma Students' Democratic Front, 버마총학생민주전선)에 참여해서 정글에서 무장투쟁을 벌이다 2000년 조직을 떠나 메솟에 정착했다.

 

그는 메솟일대의 200여개의 의류공장에서 일하는 8만여명의 버마 이주노동자의 권익단체인 영치우노동자협회의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데, 이곳에서 그는

 

- 태국 민변(Law Society of Thailand)의 도움을 받아 노동자들의 노동환경개선과 법률상담

- 씬시아클리닉마저도 가지 못하는 노동자들을 위한 이동진료소 운영

- 실업상태에 있는 노동자들을 위한 쉼터제공

-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노동권 교육

 

등의 업무를 하고 있다. 작년 그가 펼쳐낸 성과는 대단했다. 열악한 작업환경개선과 최저임금을 보장하라고 요구하는 Nasawat社 노동자들을 규합해 파업을 벌였고, 파업이 분쇄되고 버마이주노동자들이 본국으로 강제추방을 당한 후 그들을 매일 20명씩 다시 메솟으로 불러서(버마의 미야와디와 메솟간에는 하루짜리 비자가 발급된다) 조사보고서와 고소장을 작성해서 마침내 Nasawat社 사장이 벌금 및 임금보전 처분을 받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그의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 그는 라면박스 2개분의 서류를 보여주며, "그동안 손가락 하나 꿈쩍 않던 태국 노동청 녀석들이 저걸 다 검토하느라 몇일밤을 샜을 거다. 그래서 일부러 길게 쓰려고 노력했다."라고 말하며 껄껄 웃었다.

 

그는 이 사건으로 인해 작년 12월부터 올해 5월까지 잠적해 있어야 했다. 메솟의 폭력배들이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수소문하고 다닌다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메솟일대 기업주들의 청부를 받았을 것이라고 그는 추측했다. 5월들어 그가 활동을 재개하자마자 그와 그의 덴마크인 동료는 폭력배들에 의해 린치를 당했다. 메솟 시내의 야시장에서 폭력배들이 칼을 휘둘렀던 것이다. 그의 덴마크인 동료는 복부를 칼에 찔렸지만 그는 무사했다. 다행히 칼이 그의 허리벨트를 뚫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내게 당시의 상황을 말해주면서 "My good and thick leather belt saved my life"라고 말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런 그의 말에 같이 따라 웃어주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난 알 수 없었다. 그의 덴마크인 동료가 린치를 당한 다음날, 덴마크인 동료를 버스터미널까지 배웅해 주러갔던 다른 동료들도 린치를 당했고 이런 일은 여러번 반복됐다. 태국 경찰당국은 철저한 수사를 약속했지만 아직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그는 "나와 함께 다니는 외국인은 매우 위험하다"고 주의를 주었다. 그의 이런 얘기를 들은 후, 난 그의 오토바이 뒷좌석에 탈 때마다 뒤를 돌아보는 버릇이 생겼다.(아.. 나라는 인간은 왜 이리도 소심한지...-_-;;;)

 

이곳 이주노동자들의 상황은 상상을 초월한다. 2002년 30명의 버마이주노동자들이 사망했는데 모에 스웨는 실제 숫자는 이보다 훨씬 더 많아서 적어도 일주일에 1명은 죽는 걸로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들의 죽음의 원인은 열악한 작업환경과 과로, 기업주들의 폭력 등으로 인한 것이지만, 작년 5월에는 6명의 버마노동자가 총에 맞아 죽은 후 타이어 더미 속에서 불에 탄 채 발견되기도 했다. 이는 고용주에 의해 살해되었을 수도 있고, 버마군정보국의 프락치가 이주노동자로 위장하여 메솟에 잠입했다가 정체가 폭로되어 KNU(카렌민족동맹, 버마내 소수민족인 카렌족의 무장투쟁조직)에 의해 처형당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단다. 이곳 메솟은 겉으로는 평온한 전쟁터나 다름없다.

 

그의 사무실에서 내게 자료들을 보여주던 그가 전화 한 통을 받더니 심각한 얼굴로 어디를 빨리 가봐야겠단다. 60여명의 버마노동자들이 아무런 이유없이 해고를 당했다며 같이 가겠느냐고 묻는다. 얼떨결에 그의 오토바이 뒤에 타고 메솟빈민가로 향했다.

 

양철판으로 만든 대문을 열자, 잡초가 무성한 마당한켠으로 다 쓰러져가는 폐가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그에게 전화를 한 버마청년과 반갑게 악수를 했고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100% 목재로 이루어진 3평 남짓한 방에는 창문조차 없다. 나무 널빤지로 잇댄 벽의 틈 사이로 환기가 이루어지고 마침 저녁 나절이라 방은 몹시도 어두웠다. 그리고 마루 널빤지 사이로 보이는 풀들과 수많은 담배꽁초들이라니...

 

그가 방한구석에 자리를 잡자 10여명의 해고된 젊은이들이 우루루 몰려들어왔다. 버마어로 이런저런 얘기들이 오가고 갑자기 모 스웨가 땅을 치며 크게 소리를 질렀다. 내가 놀란 줄 알았는지 그는 내게 "사장이 한번에 다 자르면 일이 커질까봐 시차를 두고 소규모 그룹을 지어 해고했단다. 그걸 듣고 사장 욕 좀 했다."고 말해준다. 20여분간 대화를 주고 받더니만 연락처를 교환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와의 만남은 그렇게 끝났다.

 

학생시절엔 급진적인 지하학생운동, 그후 이어진 정글에서의 무장투쟁, 그리고 40대엔 이주노동자운동이라니... 도대체 그의 삶은 왜 이리도 팍팍한건지. 가슴이 답답해서 한동안 말이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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