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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방콕구경2

여행은 역시 혼자 다녀야 맛인가보다. 전날의 반일투어에서 벗어나 싸얌(남한으로 치면 명동)에 있는 "짐톰슨의 집"을 구경하러 갔다. 일찍 일어났더라면 "쑤언 두씻"을 보러 갔을 텐데, 일어나 보니 벌서 9시여서 싸얌으로 방향을 돌렸다. 택시를 타고 도착하니 아직 이른 시간이라 사람들이 그리 많지는 않다.

 

짐 톰슨의 집에 가서 보니 한 인간 때문에 먹고 사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구나 싶더라. 짐 톰슨은 CIA의 전신인 OSS에서 일했던 인간으로 2차대전이 끝나자 태국에 눌러 앉았단다. 그 이유는 태국산 수공품 실크에 매료되어서라나? 암튼 개과천선을 했는지 어쨌는지 이 인간의 손을 통해 전통적인 수공품으로 찬밥신세를 당하던 태국산 실크는 되살아났고, 영화 "왕과 나"의 등장인물들이 걸치고 나오기도 했단다.

 

이 인간은 대학시절 건축학을 전공한 사람답게 아유타야와 태국 각지에서 뜯어온 건축자재로 자신의 집을 치장했다. 그것도 동양의 유물과 전통을 그 나름의 오리엔탈리즘적인 눈으로 소화해내어 기이하게 재창조했는데, 차이나타운에서 뜯어온 전당포 문짝을 자신의 복도에 붙여 놓기도 하고, 태국 전통 가옥에서는 볼 수 없는 테라스를 내서 집의 기능성을 살리기도 했으며, 버마산 도자기를 뒤집에서 램프 스탠드로 사용하기도 했더라. 게다가 6동으로 이루어진 저택은 태국의 고서화와 비석들, 중국산 도자기, 일본산 탁자들로 가득차 있어 볼거리는 참 많았다. 이거 고마워해야하나 욕을 해야 하나.



이런 저런 설명을 들으면서 1시간 남짓 서 있었더니 다리가 아프다. 가이드가 끝난 후에 짐 톰슨의 집 안에 있는 카페테리아에서 태국식 홍차를  한 잔 시켰다. 보기에는 걸쭉해 보이지만 마셔보니 씨원허다. 70밧(2,100원). 태국에서는 매우 비싼 편이다. 덕분에 분위기는 끝내준다. 완전 호텔라운지다. 앉아서 담배 2대를 피우고 남은 홍차를 마시며 좀 쉬었다. 바람도 살랑살랑 불고 해도 구름 뒤로 모습을 감춰 상쾌하다. 방콕에서 느낀 최초의 청량감이었다. 나가는 길에 화장실엘 들렀다. 좋은 화장실이 드물고 유료화장실이 많은 이곳에서는 호텔이든 박물관이든 쇼핑센터든 들어가기만 하면 화장실에 들르는 편이 낫다. 이런 곳의 화장실은 거의 초특급 화장실(이곳 기준으로)인데다 무료이기 때문이다.

 

[짐 톰슨의 집, 정원에서 바라본 저택의 모습]


 

짐 톰슨의 집을 나와 싸얌 근처에 있는 출라롱콘 대학엘 갔다. 지척에 있는 가장 큰 대학이어서이기도 하고 원래 대학교가 싸고 경제적으로 시간 때우기도 좋지 않은가? 학교는 꽤 규모가 큰 편이었는데 밖에 나다니는 학생들이 별로 없다. 날씨가 더워 다들 도서관에서 나오지를 않는건지 아니면 시험기간인가? 태국은 대학생들까지 교복을 입고 다닌다. 아래는 남색, 위는 흰색. 왠지 깔끔해 보이기는 한데 캠퍼스 전체가 경직되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학생들도 우리처럼 아무데나 걸터 앉아 담배피우고 희희덕거리기 보다는 책 펴 놓고 뭔가를 하고 있다. 얘기할 때도 소곤소곤 지네들끼리만 얘기하고 말이다. 재미있는 건 학생들도 어쩔 수 없이 교복을 입긴 입되, 스탠다드형으로 입고 다니는 사람도 있고 사이즈를 확 줄여 쫄바지에 쫄남방, 혹은 미니스커트 차림으로 입고 다니는 학생들도 많다는 거다. 우리가 학교에서 혹은 군대에서 어떻게 해서든 주어진 룰에 파격을 가했듯이 인간의 개성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표출되는 것인가 보다.

 

반바지에 면티 한장 달랑 걸친 나를 수위아저씨들이 계속 쳐다보며 눈치를 주길래 쉬지도 못하고 출라롱콘 대학을 빠져나왔다. 근데 교문을 나서자마자 엄청 후회했다. 갑자기 해가 나타나더니

따가운 햇살을 사정없이 내리꽂는다. 마침 점심시간도 지났고 태국에 와서 너무 길거리음식만 먹고 다니는 것 같아 싸얌에 있는 유명한 해산물 음식점인 "씨파"에 갔다. 우리나라돈으로 만원 정도 주고 새우조림을 먹었는데 맛이 그럴 듯 했다. 양이 좀 적어서 그렇지...

 

[싸얌 쇼핑몰앞의 불단, 태국식 가옥의 한켠에는 항상 불단이 마련되어있어 향을 피우고 음식을 넣어 둔다. 이곳 쇼핑센터 앞도 마찬가지였다. 행인들 중 몇몇은 앞에가서 합장을 하기도 했다. 이런 걸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밥을 먹고 싸얌스퀘어 그늘에서 가만히 앉아 있다가 할 게 없어서 인근의 쇼핑몰 건물로 들어갔다. 싸얌은 우리나라의 명동과 대학로를 합쳐놓은 것 같은데, 오후가 되니 학생들로 그야말로 미어터진다. 쇼핑몰 안에는 한국에서도 듣도 보도 못한 값비싼 수입품들이 가득차있다. 한국에서도 쇼핑이라면 치를 떠는 내가 여기와서 쇼핑에 정을 붙일리 만무하고 돈도 없고 해서 4시쯤 BTS(태국 지상철)를 타고 선착장으로 갔다.

 

태국의 젖줄 챠오프라야, 방콕을 감싸 흐르듯 하는 이곳에는 4개의 다리밖에는 없다. 강 서안보다는 강 동안에 구시가지와 신시가지 모두가 밀집되어 있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한데, 년중 수량이 일정해서인지 수로운송이 상당히 발달되어 있다. 학교를 마친 학생들이나 직장인들이 강의 상,하류를 왕복하는 모습, 게다가 강의 서안에 위치한 여러 사원들 너머로 해가 뉘엿뉘엿 지는 모습은 그럴듯하다. 이날 싸얌관광코스 중 10밧(300원)짜리 르아두언(시내버스 배)을 탄 것이 가장 환상적이었다.

 

[챠오프라야강의 벌건 흙물]

 

[챠오프라야강에서 물놀이를 하는 아이]


 

선착장에 내린 후 시간이 좀 남아서 숙소로 바로 오지 않고 파쑤멘 요새(왕궁 서쪽을 지키는 망루) 근처의 카페에서 노닥거렸다. 게스트하우스를 겸해서 식당과 바를 운영하는 곳인데 분위기도 깔끔하고 저렴하다. 태국 사람이 운영하는 곳인데, 내가 첫여행이라 한국사람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에 묵은 걸 후회했다. 15밧(450원)짜리 콜라 하나 시켜놓고 한시간을 개겼다. 베낭여행객들도 드문 드문 앉아서 혼자서들 꾸역꾸역 뭘 하고 있다.

 

[콜라하나 마시면서 노닥거린 게스트하우스, 저렴하면서도 깔끔하다]

 

카페에서 노닥거리던 중 하늘을 보니 먹구름이 갑작스럽게 밀려드는게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다. 파쑤멘 요새에서 걸어서 20분 걸리는 길을 숨을 헐떡거리며 뛰어왔다. 우산이 있어도 이곳의 비를 막기엔 속수무책이다.(게다가 내 우산은 접이식 3단우산이었거든-_-;) 뛰어오는데 주위를 둘러보니 국수며 덮밥 가판대 아줌마 아저씨들이 장사를 접고 있다. 하긴 이 비에 국수 먹으러 오는 사람도 없을테니 장사를 일찌감치 접는 게 상책일 것 같다. 이곳의 비는 대단하다. It never rains but it pours라는 말이 태국속담에서 나온 말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내가 방콕에 머문 3일동안 저녁나절에 주로 퍼붓는 것 같은데 번개가 내리치면서 그냥 양동이로 들이붓듯 내린다. 태국 건물의 지붕은 우리나라의 밀짚모자처럼 중간부분이 굉장히 높고 급경사인데 반해 처마로 내려갈 수록 거의 수평에 가깝게 퍼져있다. 아마도 우기때 빗물이 잘 흘러내리게 해서 지붕의 파손과 누수를 막고, 여름의 뜨거운 햇빛을 피하는 차양을 드리우기 위함인 것 같다. 또 한가운데 지붕이 높은 것만큼 한낮에 달궈진 지붕의 복사열을 피할 수도 있고 말이다. 특히 이곳의 넓은 처마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사방에 높은 산이 없던 메솟에서는 오후 5-6시만 되면 그야말로 뜨거운 햇볕이 방안으로 거의 수평으로 들어오더라. 방안에 있는 사람은 등줄기에서 땀방울이 주르륵 흐르는 건 물론이고 말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정원에 각종 나무들을 가득 심어놓는 것이겠지. 그러고 보면 사람들은 주어진 자연환경에 조화롭게 잘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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