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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4/10/03
    03. 부찌와 만나다
    자일리톨
  2. 2004/10/03
    02. 메솟으로(2)
    자일리톨
  3. 2004/10/03
    01. 출발하기까지
    자일리톨

03. 부찌와 만나다

1시간 정도 기다린 후 날이 완전히 밝았을 때 부찌에게 전화를 했다. 생각했던 것하고 그의 실제 목소리는 영 딴판이다. 지금 갈테니 한 10분 정도 걸릴 거라고 했다. 하릴 없이 또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러는 사이 그가 오토바이를 타고 도착했다.(이곳의 주요 이동수단은 오토바이다. 심지어 택시까지도) 그는 사진에서 보던 모습보다 훨씬 피곤하고 수척해 보였다.

 

[부찌의 모습]

 

부찌는 1964년 버마의 양곤에서 태어나 양곤대학을 다니던 1988년 학생운동에 가담했다가 2차례 8년여의 옥고를 치른 바 있다. 3번째 투옥을 피해 국경을 넘은 그는 1999년 이후부터 AAPP(Assistance Association for Political Prisoners in burma)라는 단체의 공동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이 단체는 버마 국내외의 정치범들을 지원하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특히 이곳 메솟지역으로 들어온 전 정치범들에게 3개월간의 숙소와 식량 등을 제공한다. 버마의 정치범들은 장기간 옥고와 고문으로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태국이라는 이국땅에서 혼자 살아가는 것에 많은 어려움이 따르기 때문이다.(특히 태국어와 버마어는 완전히 이질적이다. 심지어 문자마저도 완전히 다르다. 이러한 언어문제는 버마의 정치범들이 메솟에서 활동하는 데 많은 제약조건으로 작용한다.)

 

부찌가 AAPP사무실로 가기전 아침을 먹고 가자며 티샵(teashop)으로 가잖다. 그의 오토바이를 타고 신나게 달렸다. 메솟은 생각보다 훨씬 작은 소읍이다. 하지만 시장에 가까이 가자 엄청난 사람들과 오토바이들이 힘차게 질주하는 모습은 역동적이었다.

 

[메솟의 AAPP사무실 근처모습]

 

 

내가 아침을 먹었던 티샵은 버마인이 운영하는 식당으로 이곳에서 살아가는 버마인들에게 사랑방과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다. 이곳의 주인은 무슬림이라 TV에서나 보았던 서남아시아 스타일의 음식을 팔았다. 밀가루 떡을 화덕에 넣어 굽고 걸쭉한 국물을 끓이고 들어오는 손님도 많고 하여간 부산스럽다. 처음 먹어보는 이 곳 음식은 그 냄새나 맛이 내 입맛과는 잘 맞지 않는다. 밤새 비행기와 버스를 타고 달려왔기에 혀도 깔깔하다. 음식을 다 먹고 나자 부찌가 큰 보온병의 차를 따라 내게 준다. 이곳 사람들에게 홍차는 거의 일상인 것 같다.(그들은 이 차를 그린티라고 불렀다) 부찌가 카운터에 손짓을 하자 담배 세 개비를 플라스틱컵에 담아온다. 느끼한 음식을 먹고 따뜻한 차에 묵직한 맛의 담배 한대라.. 맘에 들었다.

 

다시 오토바이를 타고 내가 묵을 게스트하우스로 갔다.(이곳은 메솟으로 넘어온 정치범들에게 3개월간의 쉼터로 쓰이는 곳이다) 이른 시간이라 거의 다 자고 있었지만, 일어나 있는 몇몇 멤버들이 반갑게 맞아준다. 수많은 사람들 중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어 서로 눈을 마주칠 때마다 미소만 지으며 뻘쭘하게 앉아 있었다. 내가 묵을 방에 배낭을 던져두고 AAPP사무실로 갔다.

 

[내가 묵었던 AAPP의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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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메솟으로

9월 24일 금요일 저녁 8시경 방콕 돈 므앙 공항에 내렸다. 예정시간보다 30분 정도 일찍 도착했고 입국심사도 일사천리로 끝나서 시간에 여유가 있다. 택시 승강장으로 가서 택시기사에게 "North Bus Terminal"이라고 했더니 못 알아 듣는다.(내 발음이 그렇게 후지나?-_-a) 태국말로 “콘 쏫 머칫 썽”하니 그제서야 “아~오케오케”한다.

 

택시를 타고 바라본 방콕의 거리풍경은 참 을씨년스럽다. 매연으로 그을린 서울의 청계천 일대를 보는 것 같다. 터미널 앞에서 U턴을 하다가 교통경찰에게 잡혔다. 기사가 뭐라뭐라 얘기하더니 20바트(600원)짜리 지폐를 슬며시 건넨다. 그걸로 끝이었다. 태국경찰의 부패가 심하다더니 책에만 있는 내용은 아닌갑다.

 

버스터미널에 내리자마자 유니폼을 입은 청년이 뭐라뭐라 한참을 떠는다. “Maesot, I wanna go to Maesot"이라고 하니 매표소로 데려다 준다. 참 편리한 시스템이다. 표 파는 아주머니가 태국말로 묻는데, 난 그저 ”the last bus to maesot, tonight"만 말했다. 아주머니가 두 번 세 번 오늘밤 맞냐, 마지막 차 맞냐, 메솟가는 거 맞냐라고 확인에 확인을 거듭한다. 그러더니 모니터 화면을 내게로 돌려서 가격과 시간을 확인하라고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맞다고 하자 표를 끊어주면서 승강장 번호까지 손수써서 저 뒤로 돌아가라고 손가락으로 가르쳐준다. 아주머니가 너무 친절히 잘 대해주길래 “당신은 너무 친절하다. 너무 고맙다”라고 큰 소리를 지르니 아주머니가 흰 이를 드러내고 웃는다. 태국을 가리켜 ‘미소의 나라’라고 하더니 정말 그런 것 같다.

 

버스 기다리는 데 여유가 있어 화장실에 갔는데 3바트(90원)을 내란다. 뭐 화장실 갈 때 돈 내는 거야 유럽에서는 일반적인 현상이고 화장실을 깨끗하게 유지하는데 최소한의 비용이 드는 것이야 이해가 가지만 그럼 그 돈마저 못 내는 노숙자들은 오줌도 싸지 말라는 것인지 갑갑했다. 더군다나 여기는 버스터미널이라는 공공장소지 않은가.

 

10시 30분에 메솟행 버스에 올랐다. VIP버스라는데 좌석도 넓고 등받이가 거의 180도 뒤로 제껴지는게 8시간의 버스여행이 그리 불편할 것 같지 않다. 게다가 덮고 잘 얇은 담요며 생수 한병, 빵 2개까지 제공된다. 훌륭하다.

 

태국의 고속도로는 말이 고속도로지 남한의 국도와 다를 바 없다. 도로가 도로변의 집들과 직접 연결되어 있고, 오토바이도 다니고 심지어 무단횡단도 가능하다. 가는 도중 3군데의 휴게소에서 쉬었는데 우리의 시골 버스터미널 같은 곳이다. 말도 안 통하고 뭘 먹을지도 모르겠고 답답했다. 내가 탄 심야의 버스는 근 5시간을 평지만 내달렸다. 5시간 동안의 평지라... 태국은 확실히 자연의 축복을 받은 나라다.

 

새벽 5시 30분에 메솟에 도착했다. 예정시간보다 1시간을 일찍 도착한 것이어서 사방은 아직 어두컴컴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여러대의 오토바이 택시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에서 같이 내린 승객들은 하나둘씩 마중나온 친지들 혹은 오토바이 택시기사들의 차에 실려 어디론가 흩어지는데 그 넓고 어두컴컴한 공터에 나 혼자만 남았다. 아니, 세상 모르게 퍼져 자는 삐쩍 마른 개 5마리와 손님을 싣지 못해 계속 기다리게 된 6명의 기사와 나 뿐이었다. 사방이 어두운 새벽 5시 반에 부찌에게 전화를 거는 건 예의가 아니라 싶어 동이 틀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 시간이 왜 이리도 긴지 애꿋은 담배만 축냈다. 버마와 태국의 국경도시 메솟은 모든 것이 적막하고 평온해 보였다. 최소한 그때까지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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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출발하기까지

이번 여행은 확고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오자 너무나 많은 것들이 변했다. 늘상 주위에서 보는 사람들은 나와는 가진 생각들이 너무나 달랐고 난 숨이 막혔다. 그 때부터 여기저기 쑤시고 다녔던 것 같은데, TV에서 우연히 버마의 상황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고 인터넷을 통해 만원계라는 조그만 모임이 있다는 걸 알았다. 아시아에 있는 여러 활동가들에게 계원들이 월 1만원씩 송금하는 것이 주활동인만큼 특별히 직접적으로 뛰는 것도 아니고, 그리 큰 부담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가입을 한 때에는 우리가 지원하는 활동가 부찌(Bo Kyi)가 성공회대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간 직후였다. 들은 바에 의하면 계원들은 그 일 때문에 실로 놀랄만한 열성으로 추가계비를 거두고 직장에 휴가까지 내어가며 부찌를 안내하는 일을 자원했다. 때문에 그 사업이 끝난 후 계원들은 진이 다 빠져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계원들의 관심과 열성을 다시 환기시킨다는 차원에서 계원들끼리 부찌가 활동하고 있는 메솟을 방문해 보자는 제안이 나왔고 이번 추석을 D-Day로 잡았던 거다.

 

나로서는 해외여행의 경험이 전무해서인지 호기심이 일기도 했고, 내 첫 해외여행이 단순히 즐기는 여행이 아니라 뭔가 의미있는 것으로 채워지길 바라는 마음에 동참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같이 가기로 했던 2명의 계원 중 휴가일정이 바뀐 1명이 먼저 메솟을 방문하게 되었고, 또 다른 한명은 사정상 휴가를 아예 못 가게 되어버려 나 혼자 남겨지게 되었다. 나는 여름휴가를 추석연휴에 붙여 사용하게 해 달라고 팀장에게 미리 양해를 구해놓은 상태여서 그냥 예정대로 진행할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이 버마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강렬한 활동에의 욕구마자 없던 내가 추석에 혼자 태국여행을 가게 된 전말이다. 가기 전 한참을 망설였다. 가서 무슨 말을 어떻게 하냐는 걱정에서부터, 돈도 없는데 내 인생에 무슨 해외여행이냐 그냥 편하게 집에서 쉬자는 현실과의 타협까지 별의별 생각을 다 했다. 가기 전 부찌에게 e-mail을 보냈는데, 그는 너무나도 간단히 “환영한다. 빨리 와라” 이랬다. -_-;; 그러니 더 아니갈 수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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