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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나간 느긋함

  • 등록일
    2004/12/27 03:15
  • 수정일
    2004/12/27 03:15

* 이 글은 시와님의 [<하울의 움직이는 성>] 에 관련된 글입니다.

하야오의 위대함은
거대하게 포장하지 않는 겸손하고 간명한 가르침, 결코 오버하지 않는 우아한 판타즘이야 말로, 헐리웃의 유수한 대작이 결코 범접하지 못하는 내공이다.

호사가들은 한때 열렬한 사회주의였으나, 현실 사회주의에 환멸과 좌절을 느낀 비판적 낭만적 사회주의자의 영혼이라고 칭하곤 한다.

나는 약간 다르게 생각하는데, 그는 근대주의자이다. 그의 모든 에니의 시대적 배경이 20세기 초반의 풍경이라는 사실은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19세기말 근대화를 겪은 일본에서 증기기관차의 검은 연기와 엄청난 굉음, 하늘을 나는 비행기는 자유의지의 상징이자 그것자체가 마법이었을 터이다.

하지만 제국주의전쟁과 핵무기는 기계문명이 만들어낸 환타즘과 자유의지의 이미지를 파시즘과 파멸의 이미지와 아주 오묘하게 겹쳐져 있다. 이 중첩되고 모순된 이미지를 그는 늘 그려내왔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도 역시 그렇다. 그의 이런 그림은 여전히 아름답고 위압적이다.

 

 

뭐 이런 이야기를 꺼낼려고 글을 시작한 것은 아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하야오의 큰 미덕은 탁월한 이야기꾼이라는 점이다. 그의 이야기에는 군더더기가 없다. 가르치려하지 않고, 이야기한다. 아니 그린다는 표현이 더 좋을 듯 싶다. 더욱 감탄스러운 점은 군더더기 없는 그러나 풍성하게 이야기를 그린다. 그 풍성함은 사물과 자연을 깊이 관찰한 사람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자연빛 풍성한 상상력의 결과이다. 그의 상상력을 사랑함으로, 그가 사랑하는 가치와 반대하는 세상(전쟁과 제국주의)을 가슴에 품어준다. 그의 작품중에도, 도토로와 센과 치이로를 가장 좋아하는 이유이다.


하지만,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는 이런 미덕이 많이 회손된 것같아 맘이 아프다. 하야오의 이야기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서로 늘 하나의 이야기속에 모여있었다. 하지만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는 도통 그런것에 관심이 없어보였다. 더구나 마지막 반전은 너무 간결해서 실망스러울 따름이다. 그런 이야기는 이제 네멋대로 생각하라는 듯이. 오히려 소피라는 여성을 통해 나이를 먹은 자의 노회한 지혜와 변덕을 즐기것이 즐거웠던 모양이다. 나에게는 이런 노회함을 옹호해야 할 이유가 없다.
나는 아직 그런 느긋함보다, 그가 내게 보여주었던 자연빛 상상력 가득한 이야기가 그리웠다.

 

아! 굳이 트랙백을 건 이유는 ^^

"비관적 세계에 대한 낙관적 성찰"이라는 말이 맘에 들어서였습니다.

가끔, 전 하야오가 돌아가신 김현 선생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하곤 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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