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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시장에서 웃다

서문시장에서 웃다

 

2년 가까이 일하던 사무실에서 그리 멀리 않은 곳에 있던 서문시장을 개인적인 일로 찾은 적은 없었다. 배낭 매듭이 터진 채 2년 동안 제대로 사용도 못하고 놔둔 것을 1박 2일이 산행 약속이 잡히고서야 발걸음을 뗄 수 있었다. 가방 수선 집이 있다는 정도의 귀동냥으로, 대목장으로 인산인해일 텐데도 이런 사정은 개의치 않고 그저 내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서문시장으로 갔다. 발품을 많이 팔아야 할 줄 알았지만 쉽게 가방 수선집을 찾았다.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고 했다. 일단 맡겨 놓고는 사람 구경할 요량으로 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생각만치 붐비지는 않았다. 건어물전에는 활기가 넘쳐났다. 선물 세트가 진열되어 있는 곳도 마찬가지였다. 칼국수, 수제비로 요기를 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시장에 오면 알 수 없는 힘이 생긴다. 가끔은 시장에 가고 싶을 때가 있다. 돈을 들고 뭘 사러가기 보다는 살아있다는 것을 보고 싶어서. 뚜렷한 목적 없이 마냥 걸으며 보고 있으니 이 시간에 이렇게 시간을 보내도 되나 일중독 비슷한 걱정이 밀려왔다. 그것도 잠시 지금의 기분을 만끽하고 싶었다. 오후 햇살 받으며 분잡한 시장을 걷는 이 기분, 정말 오랜만이었다. 잠시지만 내가 지금 행복하구나라고 느껴졌다.

 

엄마가 시장가는 날이면 기다렸다가 같이 가겠다고 생떼를 부리면서 함께 가면 엄마랑 같이 걷는 시장은 아주 풍족했다. 엄마랑 쪼그려 앉아 떡을 사먹거나, 보리밥집에 가서 집에서 먹는 반찬과 별반 다르지 않는 반찬에 아주 맛있게 먹었다. 그럼 엄마는 누가 보면 집에서 굶긴 줄 알겠다며 혀를 끌끌 찼다. 보리밥 주인 할머니께서는 어린애가 보리밥이 입맛에 맞지 않을 텐데 잘 먹네 라며 웃으셨다. 이런 기억들이 남아 있어서인지 백화점보다는 시장이 좋다. 화려한 불빛 아래 가격표 보기가 무서울 품목이 진열된 백화점에 가면 나의 허름한 옷의 터진 소매와 옷깃에 낀 때가 들통 날까봐 불안한 게 사실이다. 홈플러스나 이마트도 매한가지다. 시장은 전혀 그런 걱정 없이 낮술에 불콰한 얼굴로도 걷을 수도 있다.

 

포목점을 지나면서는 겨울용 이불이 없다는 사실이 막 떠올라 주춤거리며 이것저것을 보았다. 일 마치면 술 마시기 바쁘고, 주말은 그저 늘어지게 잠잘 뿐, 그 생활의 반복. 맹탕한 나를 스스로가 좀 더 챙긴다면 이번 겨울에는 따뜻하게 이불을 덮고 잘 수 있을 것이다. 서문시장에서 내가 좀 사람답게 살아야할 건더기를 만들었다. 조금 전에 지나친 양말 세트가 진열된 곳을 다시 찾았다. 항상 빚만 진 것 같았던 2년 가까이 일했던 사무실을 지척에 두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더구나 추석 아닌가. 사람 구실하기 위해 양말 세트를 10개 샀다. 예쁜 것으로 고르기 위해 망설이기도 했다. 내내 인사 제대로 못 드리고 나와 할머니께, 사무국 일꾼한테 마음이 쓰였는데 차차 갚을 요량으로 더디지만 제대로 하자.

 

단단히 꿰맨 빈 배낭을 메고는 양말을 담은 봉지를 들고 사무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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