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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눈물이 희망의 씨앗이 되어
히로시마행 비행기를 타며
작년 12월 4일 “전국 동시 증언집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김순악 할머니와 함께 히로시마행 비행기를 탔다. 그리고 2005년, 올해도 할머니들께서는 일분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고령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힘든 발걸음을 하셨다. 10월 22일에 있을 “일본군‘성노예’문제의 해결을 요구하는 일본 전국 동시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예천에 살고 계시는 김옥선 할머니와 함께 히로시마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작년에는 10개 도시였지만, 올해는 9개 도시에서 열리게 되었다. 도쿄, 카나가와, 미에, 쿄토, 오사카, 히로시마, 토치, 후코오카, 오키나와에서 개최되었으며, 한국, 대만, 필리핀에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께서 참석하셨고, 한국에서 다섯 분의 할머니들께서 참석을 하셨다.이용수 할머니께서도 ‘미에’에서 증언집회를 가졌다. 이렇게 동시 집회가 가능했던 것은 ‘나눔의 집’에 방문했던 일본 대학생들이 주축이 되어서, 살아 계시는 동안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지로 뭉쳐 작년에 이어서 올해도 이렇게 전국 동시 집회가 이뤄졌다.
히로시마에서 머물며
10월 20일 새벽부터 서둘러 예천 터미널에서 할머니를 만나 서울행 버스를 타고 두 시간 반을 달려 동서울터미널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은 후 리무진버스로 1시간 반을 달려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 탑승까지 몇 시간의 여유가 생기니 할머니께서는 안도의 한숨을 쉬셨다. 7시 10분, 히로시마 공항에 도착해서 마중 나오신 분들의 배웅을 받으며 숙소로 향했다. 피곤하셨는지 숙소에 도착해 씻으시고는 바로 주무셨다.
21일은 저녁 6시에 히로시마 시내에 있는 가톨릭회관에서 증언 집회가 있었다. 아침 식사가 양식이어서 할머니 입맛에는 맞지 않으셨나보다. 그래서 점심은 재일교포가 운영하는 한식집에서 먹었다. 오전에는 히로시마 시내를 가로지르는 강가로 산책을 했으며, 오후에는 민족학교를 방문하였다. 오늘 통역을 맡으실 서석희 선생님은 민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친다고 했다. 증언 집회 전에 서석희 선생님께서는 이런저런 대화를 하고나서는 통역에는 문제가 없다며 자신을 하셨다. 서석희 선생님께서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는 증언이 시작되기 전부터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할머니와 통역자가 같이 울먹이다
김옥선 할머니께서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증언하시는 게 이번이 처음이다. 하지만 할머니께서는 평소와 다르지 않은 목소리로 가슴에 묻어 두었던 한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증언을 시작하셨다. 차분한 목소리로 16세 때 끌려갔던 정황을 이야기했다. “벌써 트럭 안에는 15명이 타고 있었다. 나랑 정님이라는 친구가 타서 17명이 트럭을 타고 부산에 도착했다. 10명은 남양군도에, 나를 포함해서 7명은 최종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리고는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을 울분을 참으시면서 차근히 이야기를 하셨다. 100명이 넘는 군인들이 줄을 서 있었다. 라는 말에 통역자인 서석희 선생님께서는 자주 눈을 감으셨고, 목소리를 가다듬기도 했다. “100명을 받고 죽고, 목 메달에 죽고, 매 맞아 죽고..........” 할머니께서도 차마 말을 잊지 못하셨다. 결국 할머니와 정님이라는 친구 두 명 살았다. 그 곳에서 해방을 맞이했다. 할머니의 기억은 선명했다.
할머니께서는 연신 물을 마셨다. 또 얼마 전 고이즈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한 것에 대해 일갈을 가했다. “난 당신들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저는 잘못을 모르는 일본정부를 미워할 뿐입니다.” 그리고 몇 분간의 침묵을 거쳐 이야기를 이어가셨다. 한국에서 몇 번의 대수술과 어머니께서는 눈을 못 감으시고 돌아 가셨다며 할머니께서 몸짓으로도 표현하셨고, 통역 하시는 선생님께서는 그만 눈물 보이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좌석에서도 연신 훌쩍이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한 시간 반가량의 증언시간을 예상했으나, 50분가량의 증언을 하셨다. “8년 동안 당한 걸 생각하면 밤새도록 이야기해도 못한다.” 죽도록 고생해서 끌려갔다 왔는데 주의의 곱지 않은 시선 속에 있다. 너무 분해서 까무라친 적도 있다. 가톨릭 회관을 가득 채운 시민들의 힘찬 박수를 받으며 퇴장하셨다. 억누르지 못한 감정 때문에 할머니께서는 밖에서도 눈물을 보이셨다.
히로시마대학교에서
그렇게 할머니의 생애 첫 번째의 공개 증언이 마무리 되었다. 저녁을 드시고는 곧장 숙소로 향했다. 피곤하실 텐데도 다 하지 못하신 이야기를 새벽이 다 가도록 가이드를 맡은 다니구찌 교꼬와 저에게 쉴새없이 하셨다. 어느 정도 속이 풀렸는지 곤히 주무셨다.
22일 토요일 2시, 히로시마대학교 중앙 도서관 라이브러리 홀에서 개최되는 “일본군 ‘성노예’문제의 해결을 요구하는 일본 전국 동시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히로시마 대학교로 출발하였다. 이날 9개 일본 도시에서 동시에 열린다. 도쿄, 카나가와, 미에, 쿄토, 오사카, 히로시마, 코치, 후쿠오카, 오키나와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피를 토하며 외칠 것이다. 망언을 일삼는 그 땅에서 거짓의 실상이 낱낱이 증언으로 밝혀 질 것이다. 비록 지상파 방송사의 카메라나 지역 신문사 기자의 플래시가 없다 하여도 진실은 묻혀지지 않을 것이다. 일당백의 각오로 앉아서 묵묵히 듣고 있는 일본의 양심이 있는 사람들이 있기에. 잊지 않을 것이다. 가슴을 치며, 울음을 참으며 증언을 하셨던 김옥선 할머니를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작넌에 이어 올해도 기획과 총괄을 맡았던 히로시마 대학생인 가도다 나오꼬씨의 사회로 시작되었다. 할머니 증언 전에 저희 단체 소식지에 일본에서 보내는 편지라고 해서 고정연재를 하고 계시는 츠즈키 스미에 선생님의 기조 강연이 있었다. 2시를 조금 넘겨 할머니의 증언은 전날보다 안정된 모습으로 시작되었다. 중국에서 유학 온 김춘미씨의 통역으로 진행되었다. 어제 했던 증언하고 다르지 않았다. 다를 수가 없다. 어찌 다를 수가 있겠는가. 몸으로 기억하고 있는 끔찍한 각인텐데. “못 받는다고 모진 매타작에 죽더라도 한마디 하고 죽어야지 하는 심정으로 우리나라 빼고 우리를 끌고 와서 노예로 부려먹어도 한계가 있지 않느냐 너는 도독놈이다.”라고 하니 더 때렸다며 끝끝내 울먹이는 목소리로 분한 심정을 토로했다. 그리고 이 말도 잊지 않으시고 하셨다. “일본이 이렇게 부자나라가 된 가치가 뭐 있나?, 우리 때문에 이렇게 사는 데 사과도 없고, 배상도 없이 말이지.” 할머니께서는 참지 못한 서러움과 분통 때문이신지 결국 탁자에 엎드려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렇게 증언을 마치시고는 계속 눈물을 흘렸다. 어제는 안 드셨던 우황청심환을 마셨다. 그제서야 안정을 되찾는 것 같았다.
슬픔은 흘러야 한다
할머니께서는 증언이 끝나고 도서관 의자에 앉아 계셨는데 할머니의 증언을 들었던 유학생 두 명이 할머니 곁으로 왔다. 경북대에서 교환학생으로 온지 얼마 안 된 여학생이었다. 할머니 손을 잡고는 눈시울 붉어질 때까지 울었다. 왜 진작 알지 못 했던가 제 가슴을 치듯이 말했다. “할머니 죄송해요” 그렇게 10분을 있었다. 할머니께서 학생들이 이렇게 일본까지 공부하러 왔으니 열심해라며 당부의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꼭 잊지 않겠다며 제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보겠다고 했다. 그렇게 약속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번 집회를 준비했던 히로시마 대학생이 직접 장만한 음식이 차려진 뒷풀이 장소로 옮겼다. 정성껏 차려 준 음식을 먹고는 홈스테이를 하게 된 숙소로 옮겼다. 다음 날 차려주신 아침밥을 먹고 인천행 비행기를 탔다.
할머니와 동행을 하면서 틈틈이 읽을 요량으로 최근에 나온 책을 챙겨갔다. 분쟁지역을 다니며 피스저널리즘에 고민을 하고 있는 윤정은 기자의 책이다. 106일간 이라크 지역의 슬픔을 담담히 담아 낸 “슬픔은 흘러야 한다”이다. 할머니가 겪어야만 했던 태평양 전쟁이나 현재 이라크 전쟁이나 전쟁은 모든 걸 파괴한다. 그 파괴는 현재 진행형이다. 그리고 이런 구절이 있었다. 이 두장을 끝으로 남기고 싶다.
“어쩌면 그 친구가 너에게 기대했던 것은 고통을 해결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고통스런 자리에 함께 있어 주는 것, 그것뿐이었는지도 모른다. 남의 고통을 고치겠다고 덤벼들지 않는 일, 그냥 그 사람의 고통의 가장자리에 공손하게 가만히 서있는 일.”
“우리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이 현실 앞에서 진정으로 슬픔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누군가가 고통당하는 데도 고개를 돌려버리고, 슬픈 것을 보고도 슬퍼하지 않는 우리의 잔인한 모습에 진정 슬퍼해야 한다.”
‘이남이’에서 ‘하나코’가 된 ‘훈’ 할머니
「일본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한번도 소리질러보지 못한 훈 할머니, 켜켜이 쌓인 분노를. 침묵을 강요한 세상에, 언제까지든 숨어있기를 바라던 세상에 말한다. 그들이 끌고 가 꽁꽁 감추어두었던 어쩌면 그대로 영원히 사라져 주기를 바랐을 ‘나’, ‘지금 여기 있다’고.」(본문 인용)
2005년은 해방 60주년, 그러나 올해 들어서 벌써 네 분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일본의 진심어린 사죄의 말 한마디 못 듣고 생애를 마감하셨습니다. 눈을 감는 그날까지 일본의 작태는 묵묵부답으로 생존자 할머니들이 빨리 생을 마감하기를 바라면서, 불난 집에 부채질하듯이 망언을 일삼고 있었습니다. 대구 상인동에 거주하시던 김분선 할머니께서 2005년 1월 10일 눈을 감으셨습니다.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 시민모임>에서 활동하면서 제일 먼저 저를 반겨주시던 김분선 할머니를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비통한 마음은 아직도 제 가슴 한 구석에 남아있습니다. 항상 저의 손을 꽉 잡고는 놓아주지 않던 할머니의 따뜻한 손이 자꾸 생각납니다. 해방 60주년이라. 그래서 기쁘신가요. 저는 자꾸 슬퍼집니다. 저의 슬픔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항상 그랬지, 냄비처럼 끓었다 식었지 않았던가 하지만 작년 이맘때쯤이죠. ‘이승연사건’을 물어본다면 어렴풋이 기억하시거나 아님 모를 수도 있으시겠죠. 또 지난 해 9월에는 서울대 경제학부 이영훈 교수가 TV에서 정신대가 조선총독부의 강제동원이 아니라 한국인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뤄진 상업적 공창이었다는 요지의 망언은 기억하시겠죠. 모를 수도 있죠. 당장 내 발등에 떨어진 졸업과 취업이 더 중요하니까요. 하지만 감히 제가 부탁을 드리지요.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잊지 마시고, 당신들이 생을 마감할 때까지 기억해주세요. 할머니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우째. 니들은 가만히 있노!” 잘 기억해보세요. 97년 6월 13일 캄보디아 신문 ‘프놈펜 포스트’에 놀란 만한 기사가 하나 실렸습니다. 1943년 일제에 의해 캄보디아에 위안부로 끌려간 한국 여성이 수도 프놈펜 북쪽 교외의 한 마을에 생존해 있다는 놀라운 소식이었습니다. 한국일보가 다음날 이를 특종으로 보도했고 나라 전체에 알려졌습니다. 바로 훈 할머니의 이야기입니다. 이제야 기억하시겠죠.
하나코가 되어야 했던, 훈 할머니가 되어야 했던 이남이
올해가 훈 할머니가 돌아가신지 4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훈 할머니가 한국을 찾을 때처럼 언론의 관심은 없지만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 시민모임>에서는 희미해져가는 기억과 자료를 모아 「버려진 조선의 처녀들」(아름다운 사람들)을 작년에 펴냈습니다.
할머니의 어릴 적 이름은 이남이입니다. 달거리도 시작하기 전인 열여섯 나이로 강제로 끌려간 곳은 싱가포르. 그곳에서 붙여진 이름이 하나코였습니다. 이남이라는 이름은 버려진 채로 오직 하나코로만 불려졌습니다. 캄보디아 프놈펜으로 옮겨지면서 하나코에서 다시 훈 할머니로 살아야만 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기가 누구인가를 말하지 않아야 했습니다.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이름 이남이. 그렇게 이남이는 지워져갔습니다.
까만 뿔테의 두꺼운 안경, 짧은 머리, 훈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책으로였습니다. 이미 할머니를 놓쳐 버린 후였습니다. 무거운 마음으로 다가서면서 오히려 저의 그런 마음 때문인지 할머니의 마음만 더 불편하게 만들어 놓은 것 같습니다. 그저 외할머니한테 했던 것처럼 어리광도 부리고, 수다도 떨고 그렇게 다가가야 했었는데. “할머니 죄송해요” 다시 만난다면 그렇게 할게요.
책 표지의 할머니 얼굴을 다시 봤더니 보살님 얼굴입니다. 미간 위의 돋아난 점이 부처님의 그것과 꼭 닮았습니다. 당신께서 스쳐간 곳, 당신에게 눈물과 상처만을 안겨준 한국, 일본, 타이완, 싱가포르, 사이공, 캄보디아. 슬픈 아시아, 그 아픈 역사를 온몸으로 받아 안아 힘없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 그러나 당신께서는 오히려 우리의 상처를 보듬어 주듯 따뜻한 손을 내밀고 있습니다.
‘나’, 지금 여기 있다
매주 수요일이면 일본대사관 앞에서 수요시위가 있습니다. 시작한지 14년이라는 세월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2월 23일로 645회째를 맞이하였습니다. 기록을 갱신하기 위해서도, 기네스북에 오르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일본 정부는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부인을 하고, 한국 정부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거동이 불편하신 고령인 할머들께서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수요일이면 일본대사관으로 향합니다.
현재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된 할머니들이 215명입니다. 일제강점하 강제로 끌려갔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기억한다면 등록된 피해자는 빙산의 일각일 뿐입니다. 전쟁터에서 또는 병으로, 무관심으로 생을 마감했던 분들이 훨씬 많습니다. 지금까지 89명이 돌아가셨습니다. 현재 생존 할머니들은 126명입니다. 이 숫자는 생의 마감을 기다리는 번호표가 아닙니다. 결코 착각하지 마세요. 여러분의 가슴 한 켠에 훈 할머니가 남아 있길 바랍니다.
대구대 신문 2005. 3. 2(수)
비타민을 들고 할머니 집을 찾았다.
집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는 도중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봄비가 내렸다.
경대로 가서, 자전거 파킹시켜놓고, 우산을 빌려서 할머니 집까지 쉬엄쉬엄 걸어갔다.
예상치 못했던 봄비로 괜히 분위기 잡으며 발품을 팔았다.
할머니집에 도착해서, 비타민은 하루에 한 알씩 먹는다고 이야기했다.
영수는 어제와서 자고 갔다고 했다.
스위스가는 날짜를 일러주었고,
유선방송을 끊어버렸다고해서, 정규 채널이 잘 잡히는지 확인을 했다.
유선이 없어도 정규방송은 깔끔히 잘 나왔다.
테레비를 켜놓고는 이야기를 하다가,
드라마에 푹 빠져 한 시간을 남짓있었다.
할머니께서 강냉이 박상을 꺼내주셨다.
강냉이를 하나 둘씩 먹고는 있는데, 할머니께서
나보고
"귓볼이 하나도 없노?"라고 물었다.
그래서 거울을 보니, 정말 귓볼이 없었다. 할머니는 귓볼이 많은데.
귀걸이를 해서 귓볼을 키우라고 하셨다.ㅋㅋ
이참에 귀걸이를 할지, 깊이 고민해봐야 겠다.
그리고 양손을 봐주셨다.
"귓볼하고 눈매를 보면 성깔 있겠는데, 손보니까 괜찮네"
사실, 내가 신경질적인게 사실인데, 그래도 괜찮다 하니 조금은 희망적이다.^^
역시 자기의 성깔이 외모에 묻어나는 걸 느꼈다.
착하게 살아야지.
드라마가 끝나면서 일어났다.
사무실에 가지고 가라며, 고추장과 무말랭이를 챙겨주셨다.
넉넉함을 느꼈다.
내친김에 그냥 할매집에서 내 방까지 봄비를 벗삼아 또 걸었다.
담배를 맛있게 피우시는 할매
일요일에 찾아뵙기로 약속해 놓고는 그만 깜박하고 지키지 못 했다. 여전히 약속에 대해서는 개념이 없는 놈이다. 많이 기다렸을텐데. 사무실에서 전화를 건다.
“할매, 사무실 총각입니더”
“그래, 와 안 오노! 심심해 죽겠다”
“할매 목소리가 와 그리 힘이 없습니꺼?”
“니를 못 봐서 그런갑다”
“조만간에 찾아 갈께예”
“그래, 알았다. 꼭 온나이”
그렇게 수화기를 놓았다. 전화기를 계속 쳐다보게 된다. 이게 아닌데 싶다. 스스로에게 짜증이 나서 대낮부터 소주 생각이 난다.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에서 이제 겨우 수습 닦지를 뗀 새내기이다. 대구․경북 지역의 일본군‘위안부’ 피해할머니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치유해 드리기 위해 노력하는 대구에 있는 단체이다. 대구지역에는 9분, 경북지역에는 12분이 생존해 계신다. 아직도 새내기 활동가 있지만, 할머니 앞에서는 어리광도 피우고, 따라주시는 술을 잘도 받아 마신다. 아직까지 경북의 할머니들의 다 만나보지는 못 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다섯 달 동안 내 마음을 빼앗겨 버린 할머니가 있다. 최근 두 번이나 입원을 하셨던 김분선 할머니다.
폐렴으로 사무실 근처 병원에 입원하셨다. 갑갑하다며 이른 아침에 집에 가버리고, 의사 선생님 몰래 화장실 가서 담배 피고는 태연스레 앉아 있는 말썽꾸리기(?) 할머니다. 두 번째 입원 때는 방광암까지 발견되었다. 의사 선생님의 부탁에도 그냥 퇴원을 하셨다. 지금은 상인동의 임대아파트가 아닌 올케분의 식당 방에서 지내신다. 간호 해 줄 사람도 없거니와 혼자서 외로워 못 지낸다며 상인동에 있는 옷가지를 옮겨 놨다.
할매는 나만 보면 손을 잡으신다. 물론 지팡이 대용인 것도 있겠지만, 꼭 잡으시는 쭈글쭈글한 손으로 따스함이 전해온다. 갈 때까지 놓아주지 않으신다. 사람의 품이 그리워서 일 것이다. 할매는 화투, 담배, 술, 꽃을 사랑한다. 1년 전만해도 노인정에 나가 화투를 쳤다. 하루가 시작되는 아침이면 어김없이 화투로 그날의 점을 보곤 했는데, 요즘은 기력이 떨어져 화투를 안 친다고 했다. 건강식 만들기를 회원들과 하고 잡채와 갈비찜을 들고 찾아 갔던 선배는 할매의 강력한 권유에 못 이겨 소주 한 병을 사이좋게 나누어 마셨다고 했다. 여든이 넘으신 그것도 병을 달고 사시는 할매가 얼마나 마시고 싶을까. 담배 때문에 폐렴을 앓고 있는데 아직도 못 끊고 있는 걸 보면 두말 하면 잔소리다.
이렇게 된 연유는 15살에 잡혀가 악몽 같은 위안부 생활에서 비롯된 것이다. 남자를 받지 않는다는 이유로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내리치는 매질에 안 받을 수 없었다. 속에 화딱지가 나서 그 때 담배를 배웠다 한다. 그 때 배운 담배라 지금은 끊으려고 해도 끊지 못한다고 했다. 겨우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그저 남들 사는 만큼 살 수가 있었을까. 할매는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다. “그것 다 기억하면 나는 죽는다.” 라는 말씀으로도 알 수 있을 것이다. 할매 가슴 저 밑에 숨겨져 있는 시꺼먼 눈물이 항상 웃음꽃이 피어 있는 얼굴에서도 엿볼 수 있다. 할매는 눈물보다 웃음이 많으신 편이다. 어린애처럼 티 없이 웃음을 달고 다니신다. “예쁘다”, “곱다”라는 말을 들을 때면 활짝 핀 목련꽃 같다.
근데 요즘은 그렇지 못 하다. 모든 게 귀찮다며 밥도 거의 못 드시고, 담배만 태우시고, TV도 그저 바라볼 뿐이다. 그나마 낙이라면 자원활동가들이 찾아가는 날만 기다리시는 것 같다. 언젠가 혼자 찾아가 점심을 같이 먹고, 낮잠의 달콤함을 못 이겨 할매 방에서 잠만 자다 온 적도 있다. 그래도 좋아하신다. 더 자고 가라고, 좀 더 있다 가라고 한다. 말벗이 아니더라도 같이 있어 주길 바랄 뿐이다. 혼자가 너무 싫으신 거다.
진정으로 할머니를 위하는 게 뭔지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게 쉽지 않다. 이런 저런 모임에, 한잔 하자던 술이 이미 새벽이고, 이런 내가 참 위선적이다. 억병에 취해 자취방에 들어오면 취기를 이기지 못 해 별의 별 상상을 다 한다. 물론 그것도 스스로의 만족이고, 다음 날 술 깨면 머리만 아플 뿐이다. 분을 삭이지 못하는 상태는 거짓이 아니다. 완전 무장으로 외통부와 일본대사관을 쳐들갈까 아니면 할매의 양자로 입양되어 아주 징그럽게 싸워 볼까. 그러다 제 풀에 지쳐 할머니들의 일상이 담겨 있는 사진자료집을 편다.
분선 할매만 담배를 물고 있는 사진이다. 아마 할매는 사랑하는 담배를 끝내 끊지 못 하실 것이다. 곁에서 할매의 말할 수 없는 모든 아픔과도 함께한 애인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가슴 속에 응어리 져있는 한을 담배 연기로 조금씩 내보는지도 모른다. 높은 자리에 계신 분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네들께서도 담배와 술, 화투, 꽃을 사랑하시지요. 당연한 질문을 왜 하냐구요. 아! 요즘은 웰빙바람에 몸관리를 하면서 술과 담배를 즐기신다구요. 그렇지요. 똑같은 인간인데 어찌 그 좋은 것을 마다하겠습니까. 화투는 돈 자랑을 위해, 꽃은 세컨드를 위해 사랑하신다구요. 어쨌던 사랑하시는 건 다르지 않네요. 헌데, 당신네들의 담배와 할매의 담배의 차이는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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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보이는 창] 2004년 10.11월호에 실린 저의 글을 옮겼습니다.
출입국관리소에서
따스한 봄날의 햇볕 맞으며
대구 출입국 관리소 마당에
퍼질고 앉았다
섬진강 줄기의
어느 한적한 곳에서
둘이 손 잡고
따스한 봄날을 맞이하고 싶다
스물 다섯
생애 처음 연애질을 꿈꾸는데
세상은 배가 아픈가보다
도망치고 싶다
세상을 뒤로하고
둘이서 도망치고 싶다
소설같은 연애를 하고 싶다
소장 면담이 길어질 모양이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투쟁가로
아직은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으로
연애질 한번 실컷해야 할 판이다
이거라도
목숨걸고 해야한다면
죽도록 연애질하고 싶다
꿈같은 따스한 봄날
출입국관리소 마당에서
낮잠이라도 한판 때리고 싶다
세상을 사랑한
죄가 큰 것 같다
따스한 햇살 받으며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앞에
대낮부터 소주가 생각난다
아! 이렇게
또 봄날은 가는가
술을 먹기 시작해서 지금껏 온전한 모습일 때가 없었다.
짐승에 가까운 모습으로 개판치기가 전부였다.
치유할 수 없는 일도 있었다.
손목에 상처가 첫번째 일 것이다.
죽을때까지 엄마와 내 가슴에 아픔으로 남아 있을거다.
끔찍한 일이다.
결국 그렇게 밖에 표현을 못 했던 나.
그 뒤로 자숙의 시간을 보냈지만, 어찌 그 버릇이 쉽게 없어질까
어엿한 성인이라고 보겠지만,
나약함과 실수 투성인 지금의 나.
인정하기가 싫지만 그게 내 모습이다.
그 이후로 술 먹고 획을 그을 만한 사건들은 없었지만
자그만한 일들은 많을 것이다.
고스란히 내 가슴 속에 남아
왜 그랬을까라면 자책을 하면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유머도 없고, 어눌한 말투, 고집쟁이, 깊이없는 무게로 분위기 잡기 등등 완전히 사회 부적응자로 남는 지름길에 놓인 나.
하지만 지금의 길에서 어쨌든 걸어가야 한다.
힘들고 버겁다.
하지만 혼자이지 않는가.
밀양을 내려가지 않기로 마음 먹고,
피붙이들과 연을 끊은지 1년이 다 되어간다.
정말 지긋지긋한 나의 집구석이다.
사실은 도망친거다.
다시는 그곳으로 가고 싶지 않다.
이 모든 상황들이 복합적으로 내 속에서 가위눌리듯 내재되어 있다.
잠자리에 들기가 무섭게 악몽에 시달린다.
내 유일한 안식처인 내 방.
내 방에서 있으면 하루에 한마디도 못 할때가 많다.
내 혼자이니까,
가끔 손전화기가 있지만, 꼭 그런 날은 침묵을 지킨다.
그래서 요즘 더 말투가 어눌해진다.
이유는 분명할 것이다.
사랑받고 싶어서 일게다.
술에 취하는 날이면 자주 필름이 끊긴다.
그런 날은 꼭 사고를 친다.
무의식 중 아니면 숨겨놨던 말들을 퍼붓는다.
맨 정신으로 말 한마디도 안 하던 내가 달변가처럼 말을 한다.
그리곤 고스란히 그 화살이 되돌아온다.
어떤 변명과 용서로도 힘든 실수.
그 실수가 또 나에게는 상처로 되돌아 온다.
왜 이럴까
오직 알 수있는 건
내 마음은 격렬한 분노뿐이란 것.
그 누구도 이해해주지 못한다.
이해 받길 원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러면 안된다는 사실.
나의 장애의 끝은 어디일까
고백
2주를 정신없이 준비하고 맞이한 행사를 끝내고
일상으로 돌아간 동지를 뒤로 하고
골방에 쳐 박혀 깡소주를 마신다
무얼하지
빚쟁이 독촉하듯이
친구는 니 담배 값이라도 벌어야 할 것 아니냐고
거지 선언을 하고 싶을 정도로 닦달한다
모르겠다
아무것도 모르겠다
내 꿈이 무엇이었는지
내가 왜 사는지
지금 누군가를 몰래 애간장 녹이며 좋아하는 이유도
한심하다
나를 미치게 하는 건
솔직히
탄핵도, 반전도, 평화도, 민주주의도 아닌 것 같다
그래, 운동에 모든 걸 걸고 들어 왔지만
일용할 양식이 없어 빌붙어 살지만
미치기 직전의 봄날 앞에,
따스하게 피어있는 개나리가
활짝 핀 목련에 마음을 빼앗겨 땡땡이 쳤다던 준희형의
그런 봄날에
이 무슨 짓인가
아무나 좋다
나를 좋아한다면
뜨겁게 연애하고 싶다
나 같은 놈은 운동 팔아 연애 할 놈이라고
욕해도 좋다
‘사랑은 사치다. 사랑은 없다’
억병에 취해
호언장담 하지만
거짓말인 게 술 깬 다음 날이면
들통 나고 만다
봄 소풍가고 싶다
남녀 구분 없음,
학력 구분 없음,
이력서, 자기소개서, 주민등록본 1통 절대 필요 없음
하지만 뜨겁게 이 봄날을 사랑할 사람이라면 됨
에라, X같은 인생
이것도 안 되면
민중과 격렬하게 연애하리라
이 망할 놈의 봄날을 박살내리라
일본의 과거 청산을 요구하는 국제연대협의회 서울대회의 숨은 이야기
5월 20일부터 23일까지 열리는 이번 대회를 치루기 위해서 전날 용수 할매와 분이 할매와 같이 먼저 서울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수습 닦지를 떼기도 전에 이런 큰 대회를 맞이하는 게 부담스러웠다. 그래도 부딪쳐야 하는 일이라면 망설이지 말고 헤딩하자. 서울로 가는 기차 안에서 촌닭의 다짐은 다져지고 있었다.
608차 정기수요시위에 참가했다. 일장기가 펄럭이기는 일본대사관 앞에서 할머니들과 바위처럼을 부르며 결의를 다졌다.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대회 사무국인 교과서운동본부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은 대회 준비로 아주 분주했다. 등달아 나도 바쁜척하게 되었다. 이름표를 정리하고 서울여성프라자로 옮길 비품을 체크하고 한숨 돌렸다. 처음 보는 사무국 사람들과 제대로 통성명 할 짬도 없이 일은 바빴다.
4일 동안 대회가 열릴 장소인 서울여성프라자에 도착했다. 숙소에 짐을 풀고 바로 임시 사무국이 설치되었다. 곧바로 사무국의 일꾼들이 다 모여 회의가 시작되었다. 처음부터 일을 해온 게 아니니 조금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진정한 활동가로서 성장하기 위해 나에게 필요한 게 있을거라 믿고 피가 되고 살이 될 소스를 꼼꼼히 필기했다. 몇 시간 동안의 회의가 끝나고 나의 임무를 재확인하면서 자정을 훨씬 넘기고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드디어 3박4일의 대장정이 시작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몰래 숨어서 달콤한 잠이라도 잤으면 하는 유혹을 떨치기가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하나라도 놓기 싫다는 욕심 때문에 힘에 부치지만 끝까지 하려고 했다.
첫날 아침부터 로비에서 전시물 설치에 정신을 빼앗겼고, 오후에는 기자회견장 접수대에서, 저녁에는 환영만찬 세팅에 그리고 다음날 개회식장 세팅에 힘을 다 빼고서야 숙소로 향할 수 있었다. 그리고 숙소에서는 당일 평가회의가 기다리고 있었다. 교과서운동본부의 최형우 선배, 나눔의 집에 있었던 변상철 선배와 같이 일하고 난 뒤 담배 한 대 피는 맛도 꽤 괜찮았던 것 같았다.
둘째날은 개회식장 무대 대기실에서 우리 국장님의 지시에 따라 순조로운 진행을 위해 조금은 긴장한 채로 움직였다. 개회식과 기조발표가 끝난 뒤 피해자 증언이 있었다. 통역기를 귀에 꽂은 채로 움직였다.
중국에서 오신 강근복 할아버지의 남경대학살 증언은 끔찍했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일본병사는 어머니를 강간하려다 반항하니 총으로 쏘았고, 11살의 둘째 누나를 강간하려다 도망치니 붙잡혀 군도로 머리부터 반으로 쪼갰습니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증언을 겨우 마쳤다. 소름이 끼쳤다. 필린핀에서 오신 암모니타 할머니의 말은 한반도에 살고 있는 내가 부끄러웠다. 증언 말미에 분단된 한반도에서 서로 싸우지 말고 제발 함께 살았으면 좋겠다는 당부를 하셨다.
북측에서 오신 리상옥 할머니의 증언은 치가 떨렸다. 죽어서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사죄를 받아낼 것이다 라며 울분을 터트려 대회장 내를 숙연하게 했다. 통역기로 들었지만 겨우겨우 분을 삭이면서 원활한 대회 진행을 위해 회의장을 지켰다. 자정까지 다음 날 있을 분과토론 준비 자료를 정리했다.
셋째날은 행사장 준비를 다 하고, 사진 찍으러 4개의 분과토론장을 오가며 바쁜 척을 했다. 국포모(국적포기 필요없는 나라만들기 모임)의 짱인 보나선배와 정희선배와 우리의 요구를 담은 문구를 옷에 달고 다녔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보니 밥 때를 놓쳐 형우선배가 사주신 밥을 얻어먹기도 했다. 공식 행사 끝을 알리는 폐회식에서 강만길 선생님의 정곡을 찌르는 폐회사는 강렬했다. “일본인들은 과거청산을 위한 투쟁을 얼마만큼 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일본의 양심세력은 대단히 귀중하지만 우리의 눈에는 하나의 ‘장식품’으로 보인다”라고 지적했다.
환송만찬장으로 옮겨 조금은 맘 편히 저녁을 먹었다. 북측의 계성훈 서기장의 노래 솜씨는 정말로 가수 뺨치는 솜씨였다. 선배들의 제안으로 즉석으로 몸짓과 노래를 맞춰가며 한판 놀 준비를 했다. 떨리는 마음 진정시키기 위해 소주잔을 들이키기도 했다. 기다리던 우리의 차례가 왔다. 반갑습니다와 서울에서 평양까지를 마음껏 부르며 흔들었다. 업된 기분을 숙소로 돌아와 시원한 맥주로 식혔다.
마지막 날 난 총련분들과 함께 서울 나들이 함께 하게 되었다. 덕분에 촌닭 서울 구경 확실하게 하는 기분이었다. 버스로 눈요기를 하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내려 나보다 더 많이 아시는 총련분의 설명을 들었다. 무식은 죄가 아니라고 했지만 많이 부끄러웠다. 나들이를 마치고 남북교류회장으로 옮겼다.
대구행으로 가는 막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아쉬웠다. 같이 뒤에서 일을 했던 선배들과 짧았던 시간이었지만 소중한 만남이었다. 자료집 인사말에 보면 “피해자에게 ‘위로와 격려’를, 활동가에게 ‘연대와 교류’를 이라는 문구가 있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이 말은 맞는 것 같다. 활동가에 ‘연대와 교류’를, 풀어서 말하자면 이 투쟁이 있어서 함께할 동지를 만났다 라는 것이다.
어떤 대회, 행사나 그렇지만 실무를 보는 활동가에게는 회의장 앉아 필기를 하며 발언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발로 뛰며 가슴으로 느끼는 것이라 믿는다. 투쟁의 깊이를 더 해가는 공부는 골방에서 집중과 반성으로 하면 충분하다고 본다. 하여튼 나에게 있어서 이번 대회는 보이지 않는 성장을 가져다주었다. 쌓이고 쌓이면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투사가 되리라 믿는다.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를 가르쳐 준 이번 대회가 그저 고마울 뿐이다.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 시민모임7월 소식지에서 옮김>
새내기의 첫마음
4월 19일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사무실에 첫 발을 내디디고 3주가 지난 지금 짧다면 짧은 시간이고, 길다면 긴 시간 속에서 제 스스로도 놀랄 만큼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첫 출근 전날 밤, 얼마나 잘 할 수 있을까 라며 불안과 걱정 속에서 잠을 청했습니다. 근데 그것도 잠시 후원의 밤 준비에, 전반적인 분위기 파악에, 텅 비어 있는 머리 속에 뭔가를 하나 둘씩 채워 넣다보니 정리되지 않은 채 3주가 후딱 지나가버렸습니다.
요즘은 불안과 걱정보다는 야물게 하기 위해 의욕에 차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쉽게 지치지 않기 위해서 호흡 조절도 하면서 하나 둘씩 배워나가고 있습니다. 후원의 밤 때 일손을 거들어 주었던 이영환씨와 박강유성씨, 끊임없이 격려와 조언을 해주시던 열성 회원님들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무실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란 극히 작은 것 같았습니다. 하나 둘 모여 이루어지고, 이뤄 낸 모습에 더 열심히 하고 싶은 맘뿐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할머니들의 말벗이 되어드리는 재가자원봉사자들의 마음 씀씀이를 새삼스레 다시 한번 더 소중함을 느꼈습니다.
어버이날 전날에는 카네이션을 들고 박정희 간사님과 같이 할머니 댁을 찾아갔습니다. 사진으로, 글로 보았던 느낌과 어찌 비교를 할 수 있을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카메라 셔터 눌리듯 내 눈에 담을 수 있는 건 다 담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분명 제 가슴 한 곳에서 아려오는 것을 느끼고 말았습니다. 항상 감성적으로 받아들이는 저의 단점이기도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제 가슴에 무언가는 새겨졌습니다. 저는 고졸 출신이라서 새터가 무엇인지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있어서 3주는 새내기의 새로운 배움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항상 신문으로, 텔레비전으로 접했던 그래서 저의 삶에 많이 떨어져 있던 일들이 이제는 어느덧 저의 살갗에 와 닿아있는 걸 느꼈습니다. 게을리 했던 근현대사 공부도 다시 시작해야함을 느끼며, 확실한 실무자가 되기 위해 컴퓨터공부와 일어 공부도 끊임없이 할 것입니다. 제대로 된 쌈닭이 되기 위해 배짱 또한 키워 나갈 것 입니다. 그리고 건방진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할머니들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같이 할 수 있다면 같이 하고 싶습니다. 얼마나 버틸지도 모르면서 그런 큰 포부를 밝히냐고 걱정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불합리함 속에서 상식이라곤 존재하지 않는 시대에 있는 사람이면 이 정도의 말은 나약한 표현이라 생각됩니다. 아직도 민주적이지 못한 위정자와 가진 자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모든 문제들 앞에 너무나 미약한 존재임을 알고 있습니다. 새내기의 가슴 속에서 뜨거움으로 차 있습니다. 문제 해결의 첫 출발은 격렬한 분노에 시작되어 진다는 그 말을 아직도 믿습니다. 지금도 격렬한 분노는 유효하다고 봅니다.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5월 소식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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