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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눈물이 희망의 씨앗이 되어

할머니의 눈물이 희망의 씨앗이 되어


히로시마행 비행기를 타며
작년 12월 4일 “전국 동시 증언집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김순악 할머니와 함께 히로시마행 비행기를 탔다. 그리고 2005년, 올해도 할머니들께서는 일분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고령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힘든 발걸음을 하셨다. 10월 22일에 있을 “일본군‘성노예’문제의 해결을 요구하는 일본 전국 동시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예천에 살고 계시는 김옥선 할머니와 함께 히로시마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작년에는 10개 도시였지만, 올해는 9개 도시에서 열리게 되었다. 도쿄, 카나가와, 미에, 쿄토, 오사카, 히로시마, 토치, 후코오카, 오키나와에서 개최되었으며, 한국, 대만, 필리핀에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께서 참석하셨고, 한국에서 다섯 분의 할머니들께서 참석을 하셨다.이용수 할머니께서도 ‘미에’에서 증언집회를 가졌다. 이렇게 동시 집회가 가능했던 것은 ‘나눔의 집’에 방문했던 일본 대학생들이 주축이 되어서, 살아 계시는 동안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지로 뭉쳐 작년에 이어서 올해도 이렇게 전국 동시 집회가 이뤄졌다.

 

히로시마에서 머물며
10월 20일 새벽부터 서둘러 예천 터미널에서 할머니를 만나 서울행 버스를 타고 두 시간 반을 달려 동서울터미널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은 후 리무진버스로 1시간 반을 달려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 탑승까지 몇 시간의 여유가 생기니 할머니께서는 안도의 한숨을 쉬셨다. 7시 10분, 히로시마 공항에 도착해서 마중 나오신 분들의 배웅을 받으며 숙소로 향했다. 피곤하셨는지 숙소에 도착해 씻으시고는 바로 주무셨다.
21일은 저녁 6시에 히로시마 시내에 있는 가톨릭회관에서 증언 집회가 있었다. 아침 식사가 양식이어서 할머니 입맛에는 맞지 않으셨나보다. 그래서 점심은 재일교포가 운영하는 한식집에서 먹었다. 오전에는 히로시마 시내를 가로지르는 강가로 산책을 했으며, 오후에는 민족학교를 방문하였다. 오늘 통역을 맡으실 서석희 선생님은 민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친다고 했다. 증언 집회 전에 서석희 선생님께서는 이런저런 대화를 하고나서는 통역에는 문제가 없다며 자신을 하셨다. 서석희 선생님께서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는 증언이 시작되기 전부터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할머니와 통역자가 같이 울먹이다
김옥선 할머니께서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증언하시는 게 이번이 처음이다. 하지만 할머니께서는 평소와 다르지 않은 목소리로 가슴에 묻어 두었던 한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증언을 시작하셨다. 차분한 목소리로 16세 때 끌려갔던 정황을 이야기했다. “벌써 트럭 안에는 15명이 타고 있었다. 나랑 정님이라는 친구가 타서 17명이 트럭을 타고 부산에 도착했다. 10명은 남양군도에, 나를 포함해서 7명은 최종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리고는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을 울분을 참으시면서 차근히 이야기를 하셨다. 100명이 넘는 군인들이 줄을 서 있었다. 라는 말에 통역자인 서석희 선생님께서는 자주 눈을 감으셨고, 목소리를 가다듬기도 했다. “100명을 받고 죽고, 목 메달에 죽고, 매 맞아 죽고..........” 할머니께서도 차마 말을 잊지 못하셨다. 결국 할머니와 정님이라는 친구 두 명 살았다. 그 곳에서 해방을 맞이했다. 할머니의 기억은 선명했다.
할머니께서는 연신 물을 마셨다. 또 얼마 전 고이즈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한 것에 대해 일갈을 가했다. “난 당신들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저는 잘못을 모르는 일본정부를 미워할 뿐입니다.” 그리고 몇 분간의 침묵을 거쳐 이야기를 이어가셨다. 한국에서 몇 번의 대수술과 어머니께서는 눈을 못 감으시고 돌아 가셨다며 할머니께서 몸짓으로도 표현하셨고, 통역 하시는 선생님께서는 그만 눈물 보이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좌석에서도 연신 훌쩍이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한 시간 반가량의 증언시간을 예상했으나, 50분가량의 증언을 하셨다. “8년 동안 당한 걸 생각하면 밤새도록 이야기해도 못한다.” 죽도록 고생해서 끌려갔다 왔는데 주의의 곱지 않은 시선 속에 있다. 너무 분해서 까무라친 적도 있다. 가톨릭 회관을 가득 채운 시민들의 힘찬 박수를 받으며 퇴장하셨다. 억누르지 못한 감정 때문에 할머니께서는 밖에서도 눈물을 보이셨다.

 

히로시마대학교에서
그렇게 할머니의 생애 첫 번째의 공개 증언이 마무리 되었다. 저녁을 드시고는 곧장 숙소로 향했다. 피곤하실 텐데도 다 하지 못하신 이야기를 새벽이 다 가도록 가이드를 맡은 다니구찌 교꼬와 저에게 쉴새없이 하셨다. 어느 정도 속이 풀렸는지 곤히 주무셨다.
22일 토요일 2시, 히로시마대학교  중앙 도서관 라이브러리 홀에서 개최되는 “일본군 ‘성노예’문제의 해결을 요구하는 일본 전국 동시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히로시마 대학교로 출발하였다. 이날 9개 일본 도시에서 동시에 열린다. 도쿄, 카나가와, 미에, 쿄토, 오사카, 히로시마, 코치, 후쿠오카, 오키나와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피를 토하며 외칠 것이다. 망언을 일삼는 그 땅에서 거짓의 실상이 낱낱이 증언으로 밝혀 질 것이다. 비록 지상파 방송사의 카메라나 지역 신문사 기자의 플래시가 없다 하여도 진실은 묻혀지지 않을 것이다. 일당백의 각오로 앉아서 묵묵히 듣고 있는 일본의 양심이 있는 사람들이 있기에. 잊지 않을 것이다. 가슴을 치며, 울음을 참으며 증언을 하셨던 김옥선 할머니를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작넌에 이어 올해도 기획과 총괄을 맡았던 히로시마 대학생인 가도다 나오꼬씨의 사회로 시작되었다. 할머니 증언 전에 저희 단체 소식지에 일본에서 보내는 편지라고 해서 고정연재를 하고 계시는 츠즈키 스미에 선생님의 기조 강연이 있었다. 2시를 조금 넘겨 할머니의 증언은 전날보다 안정된 모습으로 시작되었다. 중국에서 유학 온 김춘미씨의 통역으로 진행되었다. 어제 했던 증언하고 다르지 않았다. 다를 수가 없다. 어찌 다를 수가 있겠는가. 몸으로 기억하고 있는 끔찍한 각인텐데. “못 받는다고 모진 매타작에 죽더라도 한마디 하고 죽어야지 하는 심정으로 우리나라 빼고 우리를 끌고 와서 노예로 부려먹어도 한계가 있지 않느냐 너는 도독놈이다.”라고 하니 더 때렸다며 끝끝내 울먹이는 목소리로 분한 심정을 토로했다. 그리고 이 말도 잊지 않으시고 하셨다. “일본이 이렇게 부자나라가 된 가치가 뭐 있나?, 우리 때문에 이렇게 사는 데 사과도 없고, 배상도 없이 말이지.” 할머니께서는 참지 못한 서러움과 분통 때문이신지 결국 탁자에 엎드려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렇게 증언을 마치시고는 계속 눈물을 흘렸다. 어제는 안 드셨던 우황청심환을 마셨다. 그제서야 안정을 되찾는 것 같았다.

 

슬픔은 흘러야 한다
할머니께서는 증언이 끝나고 도서관 의자에 앉아 계셨는데 할머니의 증언을 들었던 유학생 두 명이 할머니 곁으로 왔다. 경북대에서 교환학생으로 온지 얼마 안 된 여학생이었다. 할머니 손을 잡고는 눈시울 붉어질 때까지 울었다. 왜 진작 알지 못 했던가 제 가슴을 치듯이 말했다. “할머니 죄송해요” 그렇게 10분을 있었다. 할머니께서 학생들이 이렇게 일본까지 공부하러 왔으니 열심해라며 당부의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꼭 잊지 않겠다며 제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보겠다고 했다. 그렇게 약속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번 집회를 준비했던 히로시마 대학생이 직접 장만한 음식이 차려진 뒷풀이 장소로 옮겼다. 정성껏 차려 준 음식을 먹고는 홈스테이를 하게 된 숙소로 옮겼다. 다음 날 차려주신 아침밥을 먹고 인천행 비행기를 탔다.
할머니와 동행을 하면서 틈틈이 읽을 요량으로 최근에 나온 책을 챙겨갔다. 분쟁지역을 다니며 피스저널리즘에 고민을 하고 있는 윤정은 기자의 책이다. 106일간 이라크 지역의 슬픔을 담담히 담아 낸 “슬픔은 흘러야 한다”이다. 할머니가 겪어야만 했던 태평양 전쟁이나 현재 이라크 전쟁이나 전쟁은 모든 걸 파괴한다. 그 파괴는 현재 진행형이다. 그리고 이런 구절이 있었다. 이 두장을 끝으로 남기고 싶다.
“어쩌면 그 친구가 너에게 기대했던 것은 고통을 해결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고통스런 자리에 함께 있어 주는 것, 그것뿐이었는지도 모른다. 남의 고통을 고치겠다고 덤벼들지 않는 일, 그냥 그 사람의 고통의 가장자리에 공손하게 가만히 서있는 일.”
“우리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이 현실 앞에서 진정으로 슬픔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누군가가 고통당하는 데도 고개를 돌려버리고, 슬픈 것을 보고도 슬퍼하지 않는 우리의 잔인한 모습에 진정 슬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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