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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포를 지우고 싶다

그 공포를 지우고 싶다

-5월 4일 대추분교에서 이 정권의 끝을 보다

 

48시간을 꽉 채우고, ‘즉결심판 출석통지서’를 들고 유치장을 나왔다. 함께 연행되었던 동지에게 담배를 빌려 경찰서 현관에서 피웠다. 젠장할 비 때문에 갈 길을 더 머뭇거리게 했다. 연행이 되지 않았더라면 일부러 올리는 없을 분당에서 대구행 버스를 기다렸다. 저녁에 도착해 대백 앞 민주광장에서 열린 ‘평택 강제집행규탄 촛불집회’에 참가했다. 걱정해주신 선배들에게 인사도 드렸고, 아비규환의 대추분교의 모습이 담긴 선전물을 시민에게 건네주었다.

 

막걸리 몇 잔으로 나의 생활로 돌아 왔다. 며칠이 지났고, 4시간 거리의 평택이 딴나라처럼 잊혀 지는 듯 했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무덤덤해진 건지 연행과 유치장의 경험으로 의연해진 건지 나답지 않게 분노가 표출되지 않았다. 나의 술버릇으로 봐도 한 번쯤은 억병에 취해 실수가 나올 법 한데 그렇지 않았다. 면회를 온 선배가 보낸 메일을 보고서는 차츰 그 진의를 알 수 있었다.

 

조서 꾸미면서 국가와 개인의 관계나 사법체계의 힘을 피부로 느꼈을 꺼라 생각한다. 조지오웰은 이 경험을 위해 일부러 경범죄를 짓기도 했다는데 너는 어쩌면 가장 저렴한 댓가로 값진 경험을 한지도 모른다. 훌륭한 작가나 활동을 위한 자양분을 얻은 걸로 생각해라, 축하한다. 시간이 지나면 아무것도 아닌 게 돼버리지만 지금의 떨리던 감정을 잘 기억해두었으면 좋겠다.

 



잊혀진 게 아니라 묻혀 있었던 것이다. 나의 분노가 거대한 국가의 힘으로 눌려 있었던 것이다. 찍 소리 못하게 만드는 공포가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 것이다. 여느 평범한 아저씨였을 형사들은 조서를 꾸미며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정당한 법집행인 걸 아느냐, 국회에서 통과되고 합법적인 절차로 인한 국책사업인걸 아느냐, 불법집회 사실을 아느냐? 앵무새처럼 형사들은 각자에게 물었다. 스스로 정당한 저항이라 생각하면서 근데 무엇 때문에 묵비권을 행사하느냐 당당하다면 정당하게 말하라! 라면 오히려 기세등등했다.

 

국가의 위임을 받아 조사관으로서 충실히 임무 수행을 하고 있지만 왠지 말싸움만 하다가 끝날 평행선 같은 조사가 공명정대한 조사였는지 궁금했다. 타이핑한 조서를 확인하라며 문서를 내밀었다. 나의 말은 이미 나의 말이 아니었다. 조사관이 얻고자 했던 답을 얻기 위해 조목조목 묻고 또 물었고, 그 정답만 기재 되어 있었다. 그래서 난 이런 식의 조사라면 다시 질문을 해줄 것을 요청했으며 묵비권으로 응하겠다고 했다.

순순히 질문에 응했던 나에게 조금 전에 커피와 담배를 웃으면서 전해주던 얼굴이 금방 굳어 버렸다. 신경질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내가 윽박지르면서 조사했냐고 반문했다. 묵비권으로 벌써 처리를 다 했던 경찰은 아쉬워하며 한 건 할 수 있었네 하는 둥 직업 경찰 본연의 임무로 탈바꿈한 모습을 보고 말았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터라 귀찮았는지 더 이상 묻지도 않고 조서 꾸미기를 끝냈다.

 

반신반의했던 국방부의 대화가 결국 속임수로 끝나고 말았다. 지역의 청년․학생들로 긴급하게 조직을 하여 5월 3일 밤 11시를 넘겨 대추초교에 도착했다. 새벽 4시의 결의대회를 앞두고는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운동장에 모인 많은 수많은 대오를 보고는 나름대로 안심을 하였다. 하지만 이 생각도 단박에 깨지고 말았다. 여명이 트기 전에 미군기지 안 도로에는 끝도 없이 전경버스와 장비를 실은 화물차량, 군용차가 물 밀릴 듯이 들어오고 있었다. 여명이 트고는 배치가 다 되었는지 움직일 명령만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신문사 기자들은 헬멧을 쓰고는 어딘가를 뛰어 다니고, 방송국 아나운서는 첫 방송을 위해 멘트 연습에 열중이었다. 마치 이라크 전쟁 발발을 알리는 미사일이 목표물을 명중하며 아나운서의 상세한 설명으로 생중계를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다. 방송국의 첫 방송과 함께 악어 입을 벌리듯 미군기지의 문은 열리고 새카만 전경들이 밀고 들어 왔다. 내리 쪽에서는 순식간에 밀려 학교 근처까지 들어 왔고, 학교 정문 쪽에서도 밀려 연좌 농성으로 전경을 막아내고 있었다.

 

나는 학교 뒤편에서 대치 중인 대오 후미에서 함께 했다. 이 순간부터 정말 보지 말아야할 것과 이 자리가 아니었으면 못 봤을 그래서 더 더욱 두 눈 부릅뜨고 봐야 할 것들을 확인했다. 학교 뒤편에 아직도 엄연히 생활을 하고 있는 주택이 있는데도 골목에, 옥상에, 틈이라는 틈은 전경들로 가득 메우고 있었다. 아침 한술도 겨우 떴을 시간, 정말 코미디 같은 상황을 난 보았다. 방패와 죽봉으로 일촉즉발의 순간 대문이 열리더니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교복 입은 남학생이 대치상황을 보고는 어리둥절함과 빽빽한 사람들로 학교 갈 길이 사라져버린 대문 앞에서 멈칫거리다 집으로 들어가며 대문을 닫을 수밖에 없는 참담한 모습을 보고 말았다.

 

학교를 못 가게 만드는 전경과 군인이 중학생의 등교쯤은 아무 상관없을 것이고 국방부와 이 나라 정부는 중학생의 등교쯤은 ‘전략적 유연성’ 앞에서는 눈곱만큼의 가치도 않을 것이다. 학교를 가지 못했을 그 학생은 이 세상이 과연 어떻게 보였을까. 그리고 그 모습을 평생 어떤 무게로 짊어지고 살아갈까. 새내기인 듯한 대학생의 발언은 욕으로 시작해서 욕으로 끝났다. 어떤 장광설, 어떤 논리적인 발언보다도 더 현실인 것이다. 직파한 논을 무자비하게 짓밟고 온 전경과 군인들을 눈에 앞에 두고서 욕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설명되겠는가

 

주민들이 만들어주신 주먹밥을 먹고는 몇 시간도 못 되어 운동장을 내어주고는 학교 2층으로 몰리게 되었다. 죽을 수 도 있겠구나. 그래서 살기 위해 학교로 올라가게 되었다. 체험해보지는 못했지만 순간적으로 건국대와 연세대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갔다. 2층으로 올라가는 동안 앞에서 들리는 비명과 군홧발 소리, 전경들의 방패소리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공포 그 자체였다. 더 이상 갈 곳 없는 학교 2층. 계속 들려오는 소리들.

 

그 공포를 어찌 할지 몰라서 한동안 연락을 하지 않았던 평상시라면 몇 번을 망설였을 사람들에게 무작정 전화를 돌렸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을 설명하며 지역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부탁드렸다. 300명가량의 인원이 2층을 가득 메웠다. 몇 시간의 진정국면으로 접어들면서 운동장을 가득 메운 전경들과 용역들을 보았고, 하늘로는 태극기가 선명히 보이는 헬기로 철조망을 묶고는 쉴 새 없이 나르고 있었다. 2층에서 보이는 내리 쪽의 들판에는 위에는 주황색 체육복을 입은 군인들이 철조망을 치고 있는 모습들이 보였다.

 

3월 말 나는 함께 활동하고 있는 ‘땅과자유’ 회원들과 평택으로 농활을 가게 되었다. 그날 나는 도두리 쪽에서 일손을 돕게 되었다. 오줌 눌 곳도 없는 끝도 보이지 않는 너른 그 땅을 전쟁을 치룰 미군의 기지로 내준다는 말인가. 팽성대책위 사무실에 붙어 있던 “쌀은 생명을 살리지만, 무기는 생명을 죽입니다.” 가 자꾸 생각날 수밖에 없었다. 그날 함께했던 회원들은 하나 같이 입을 모았다. ‘평택을 생각하며, 평택을 지키는 것이라면 함께 싸우자’ 그래서인지 ‘땅과자유’ 회원들은 일명 대추리병이라 불리는 병에 전염병 돌 듯 돌아 아파하고 있다. 그날 고생했다면 챙겨주신 흑미 다섯 포를 나누어 먹었다. 내가 먹었던 그 흑미가 이제는 철조망을 치고 있는 군인들의 군홧발에 의해 다시는 맛보지 못하게 되었다.

 

열린우리당의 임종인의원의 방문으로 기자들만 날뛰는 상황을 창문으로 보면서 정말 살의를 느끼게 만들었던 잔인한 장면을 눈물을 참으면서 보고 말았다. 공룡 같은 포크레인의 삽날은 아름드리 나무를 순식간에 부셔버렸다. 어찌 저럴 수가 있나! 주민이자 이 학교의 소사이시던 할아버지께서 옮겨 심으면서 몇 십 년을 정성껏 키운 나무를 단 몇 분 만에 부셔버리는 저들도 집에서 한 가정의 아비일 것이며 자식들과 꽃을 키운다고 화분을 놔두지 않았을까. 그 광경을 같이 보고 있던 학생이 말했다. “옮겨라도 심지.”

 

옮겨 심지 않는 저들은 또 다시 방패와 곤봉을 앞세워 2층을 올라오고 말았다. 1분도 못 견디고 우리는 교실에 몰려 스크럼을 짜고 구호를 외쳤다. 굵직한 목소리로 구호를 외쳤던 노동자의 구호는 아직도 잊지 못하겠다. 오월 광주는 끝나지 않았다. 바로 이곳이 오월 광주였다. ‘오월의 노래’가 현재 진행형인 걸을 함께 부르며 느끼고 말았다. 그렇게 난 전경들의 의해 들려져 나갔다. 어떤 소식도 접할 수 없었던 난 5월 6일자 신문의 일면에 나와 있던 사진을 보고 또 다시 눈물을 참아야만 했다. 대추초교는 없어지고 잔해더미에 꽂혀 있는 깃발의 ‘평화’

 

학교를 가지 못했을 중학생과 수 십 년 된 아름드리 나무의 최후를 잊지 못한다. 마지막까지 스크럼을 짜고 노무현 정권의 끝을 절대 잊지 말고 기억하자며 구호를 외쳤던 처음 보는 동지를 잊지 못 한다. 나에게 즉결심판으로 벌금을 물리고 국가의 안보 또는 어떤 법적 근거를 내밀어도 2006년 5월 평택을 잊지 못한다. 결코 잊을 수가 없다.

노무현 정권의 끝을 보게 된 것은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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