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담배를 맛있게 피우시는 할매 [2004.10]

담배를 맛있게 피우시는 할매

 

 

일요일에 찾아뵙기로 약속해 놓고는 그만 깜박하고 지키지 못 했다. 여전히 약속에 대해서는 개념이 없는 놈이다. 많이 기다렸을텐데. 사무실에서 전화를 건다.


“할매, 사무실 총각입니더”
“그래, 와 안 오노! 심심해 죽겠다”
“할매 목소리가 와 그리 힘이 없습니꺼?”
“니를 못 봐서 그런갑다”
“조만간에 찾아 갈께예”
“그래, 알았다. 꼭 온나이”


그렇게 수화기를 놓았다. 전화기를 계속 쳐다보게 된다. 이게 아닌데 싶다. 스스로에게 짜증이 나서 대낮부터 소주 생각이 난다.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에서 이제 겨우 수습 닦지를 뗀 새내기이다. 대구․경북 지역의 일본군‘위안부’ 피해할머니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치유해 드리기 위해 노력하는 대구에 있는 단체이다. 대구지역에는 9분, 경북지역에는 12분이 생존해 계신다. 아직도 새내기 활동가 있지만, 할머니 앞에서는 어리광도 피우고, 따라주시는 술을 잘도 받아 마신다. 아직까지 경북의 할머니들의 다 만나보지는 못 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다섯 달 동안 내 마음을 빼앗겨 버린 할머니가 있다. 최근 두 번이나 입원을 하셨던 김분선 할머니다.


폐렴으로 사무실 근처 병원에 입원하셨다. 갑갑하다며 이른 아침에 집에 가버리고, 의사 선생님 몰래 화장실 가서 담배 피고는 태연스레 앉아 있는 말썽꾸리기(?) 할머니다. 두 번째 입원 때는 방광암까지 발견되었다. 의사 선생님의 부탁에도 그냥 퇴원을 하셨다. 지금은 상인동의 임대아파트가 아닌 올케분의 식당 방에서 지내신다. 간호 해 줄 사람도 없거니와 혼자서 외로워 못 지낸다며 상인동에 있는 옷가지를 옮겨 놨다.


할매는 나만 보면 손을 잡으신다. 물론 지팡이 대용인 것도 있겠지만, 꼭 잡으시는 쭈글쭈글한 손으로 따스함이 전해온다. 갈 때까지 놓아주지 않으신다. 사람의 품이 그리워서 일 것이다. 할매는 화투, 담배, 술, 꽃을 사랑한다. 1년 전만해도 노인정에 나가 화투를 쳤다. 하루가 시작되는 아침이면 어김없이 화투로 그날의 점을 보곤 했는데, 요즘은 기력이 떨어져 화투를 안 친다고 했다. 건강식 만들기를 회원들과 하고 잡채와 갈비찜을 들고 찾아 갔던 선배는 할매의 강력한 권유에 못 이겨 소주 한 병을 사이좋게 나누어 마셨다고 했다. 여든이 넘으신 그것도 병을 달고 사시는 할매가 얼마나 마시고 싶을까. 담배 때문에 폐렴을 앓고 있는데 아직도 못 끊고 있는 걸 보면 두말 하면 잔소리다.


이렇게 된 연유는 15살에 잡혀가 악몽 같은 위안부 생활에서 비롯된 것이다. 남자를 받지 않는다는 이유로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내리치는 매질에 안 받을 수 없었다. 속에 화딱지가 나서 그 때 담배를 배웠다 한다. 그 때 배운 담배라 지금은 끊으려고 해도 끊지 못한다고 했다. 겨우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그저 남들 사는 만큼 살 수가 있었을까. 할매는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다. “그것 다 기억하면 나는 죽는다.” 라는 말씀으로도 알 수 있을 것이다. 할매 가슴 저 밑에 숨겨져 있는 시꺼먼 눈물이 항상 웃음꽃이 피어 있는 얼굴에서도 엿볼 수 있다. 할매는 눈물보다 웃음이 많으신 편이다. 어린애처럼 티 없이 웃음을 달고 다니신다. “예쁘다”, “곱다”라는 말을 들을 때면 활짝 핀 목련꽃 같다.


근데 요즘은 그렇지 못 하다. 모든 게 귀찮다며 밥도 거의 못 드시고, 담배만 태우시고, TV도 그저 바라볼 뿐이다. 그나마 낙이라면 자원활동가들이 찾아가는 날만 기다리시는 것 같다. 언젠가 혼자 찾아가 점심을 같이 먹고, 낮잠의 달콤함을 못 이겨 할매 방에서 잠만 자다 온 적도 있다. 그래도 좋아하신다. 더 자고 가라고, 좀 더 있다 가라고 한다. 말벗이 아니더라도 같이 있어 주길 바랄 뿐이다. 혼자가 너무 싫으신 거다.


진정으로 할머니를 위하는 게 뭔지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게 쉽지 않다. 이런 저런 모임에, 한잔 하자던 술이 이미 새벽이고, 이런 내가 참 위선적이다. 억병에 취해 자취방에 들어오면 취기를 이기지 못 해 별의 별 상상을 다 한다. 물론 그것도 스스로의 만족이고, 다음 날 술 깨면 머리만 아플 뿐이다. 분을 삭이지 못하는 상태는 거짓이 아니다. 완전 무장으로 외통부와 일본대사관을 쳐들갈까 아니면 할매의 양자로 입양되어 아주 징그럽게 싸워 볼까. 그러다 제 풀에 지쳐 할머니들의 일상이 담겨 있는 사진자료집을 편다.


분선 할매만 담배를 물고 있는 사진이다. 아마 할매는 사랑하는 담배를 끝내 끊지 못 하실 것이다. 곁에서 할매의 말할 수 없는 모든 아픔과도 함께한 애인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가슴 속에 응어리 져있는 한을 담배 연기로 조금씩 내보는지도 모른다. 높은 자리에 계신 분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네들께서도 담배와 술, 화투, 꽃을 사랑하시지요. 당연한 질문을 왜 하냐구요. 아! 요즘은 웰빙바람에 몸관리를 하면서 술과 담배를 즐기신다구요. 그렇지요. 똑같은 인간인데 어찌 그 좋은 것을 마다하겠습니까. 화투는 돈 자랑을 위해, 꽃은 세컨드를 위해 사랑하신다구요. 어쨌던 사랑하시는 건 다르지 않네요. 헌데, 당신네들의 담배와 할매의 담배의 차이는 아시나요.


----------------------------

*[삶이보이는 창] 2004년 10.11월호에 실린 저의 글을 옮겼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