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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이’에서 ‘하나코’가 된 ‘훈’ 할머니

‘이남이’에서 ‘하나코’가 된 ‘훈’ 할머니

 

「일본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한번도 소리질러보지 못한 훈 할머니, 켜켜이 쌓인 분노를. 침묵을 강요한 세상에, 언제까지든 숨어있기를 바라던 세상에 말한다. 그들이 끌고 가 꽁꽁 감추어두었던 어쩌면 그대로 영원히 사라져 주기를 바랐을 ‘나’, ‘지금 여기 있다’고.」(본문 인용)


2005년은 해방 60주년, 그러나 올해 들어서 벌써 네 분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일본의 진심어린 사죄의 말 한마디 못 듣고 생애를 마감하셨습니다. 눈을 감는 그날까지 일본의 작태는 묵묵부답으로 생존자 할머니들이 빨리 생을 마감하기를 바라면서, 불난 집에 부채질하듯이 망언을 일삼고 있었습니다. 대구 상인동에 거주하시던 김분선 할머니께서 2005년 1월 10일 눈을 감으셨습니다.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 시민모임>에서 활동하면서 제일 먼저 저를 반겨주시던 김분선 할머니를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비통한 마음은 아직도 제 가슴 한 구석에 남아있습니다. 항상 저의 손을 꽉 잡고는 놓아주지 않던 할머니의 따뜻한 손이 자꾸 생각납니다. 해방 60주년이라. 그래서 기쁘신가요. 저는 자꾸 슬퍼집니다. 저의 슬픔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항상 그랬지, 냄비처럼 끓었다 식었지 않았던가 하지만 작년 이맘때쯤이죠. ‘이승연사건’을 물어본다면 어렴풋이 기억하시거나 아님 모를 수도 있으시겠죠. 또 지난 해 9월에는 서울대 경제학부 이영훈 교수가 TV에서 정신대가 조선총독부의 강제동원이 아니라 한국인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뤄진 상업적 공창이었다는 요지의 망언은 기억하시겠죠. 모를 수도 있죠. 당장 내 발등에 떨어진 졸업과 취업이 더 중요하니까요. 하지만 감히 제가 부탁을 드리지요.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잊지 마시고, 당신들이 생을 마감할 때까지 기억해주세요. 할머니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우째. 니들은 가만히 있노!” 잘 기억해보세요. 97년 6월 13일 캄보디아 신문 ‘프놈펜 포스트’에 놀란 만한 기사가 하나 실렸습니다. 1943년 일제에 의해 캄보디아에 위안부로 끌려간 한국 여성이 수도 프놈펜 북쪽 교외의 한 마을에 생존해 있다는 놀라운 소식이었습니다. 한국일보가 다음날 이를 특종으로 보도했고 나라 전체에 알려졌습니다. 바로 훈 할머니의 이야기입니다. 이제야 기억하시겠죠.

 

하나코가 되어야 했던, 훈 할머니가 되어야 했던 이남이
올해가 훈 할머니가 돌아가신지 4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훈 할머니가 한국을 찾을 때처럼 언론의 관심은 없지만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 시민모임>에서는 희미해져가는 기억과 자료를 모아 「버려진 조선의 처녀들」(아름다운 사람들)을 작년에 펴냈습니다.
할머니의 어릴 적 이름은 이남이입니다. 달거리도 시작하기 전인 열여섯 나이로 강제로 끌려간 곳은 싱가포르. 그곳에서 붙여진 이름이 하나코였습니다. 이남이라는 이름은 버려진 채로 오직 하나코로만 불려졌습니다. 캄보디아 프놈펜으로 옮겨지면서 하나코에서 다시 훈 할머니로 살아야만 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기가 누구인가를 말하지 않아야 했습니다.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이름 이남이. 그렇게 이남이는 지워져갔습니다.

 

까만 뿔테의 두꺼운 안경, 짧은 머리, 훈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책으로였습니다. 이미 할머니를 놓쳐 버린 후였습니다. 무거운 마음으로 다가서면서 오히려 저의 그런 마음 때문인지 할머니의 마음만 더 불편하게 만들어 놓은 것 같습니다. 그저 외할머니한테 했던 것처럼 어리광도 부리고, 수다도 떨고 그렇게 다가가야 했었는데. “할머니 죄송해요” 다시 만난다면 그렇게 할게요.
책 표지의 할머니 얼굴을 다시 봤더니 보살님 얼굴입니다. 미간 위의 돋아난 점이 부처님의 그것과 꼭 닮았습니다. 당신께서 스쳐간 곳, 당신에게 눈물과 상처만을 안겨준 한국, 일본, 타이완, 싱가포르, 사이공, 캄보디아. 슬픈 아시아, 그 아픈 역사를 온몸으로 받아 안아 힘없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 그러나 당신께서는 오히려 우리의 상처를 보듬어 주듯 따뜻한 손을 내밀고 있습니다.

 

‘나’, 지금 여기 있다
매주 수요일이면 일본대사관 앞에서 수요시위가 있습니다. 시작한지 14년이라는 세월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2월 23일로 645회째를 맞이하였습니다. 기록을 갱신하기 위해서도, 기네스북에 오르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일본 정부는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부인을 하고, 한국 정부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거동이 불편하신 고령인 할머들께서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수요일이면 일본대사관으로 향합니다.

현재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된 할머니들이 215명입니다. 일제강점하 강제로 끌려갔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기억한다면 등록된 피해자는 빙산의 일각일 뿐입니다. 전쟁터에서 또는 병으로, 무관심으로 생을 마감했던 분들이 훨씬 많습니다. 지금까지 89명이 돌아가셨습니다. 현재 생존 할머니들은 126명입니다. 이 숫자는 생의 마감을 기다리는 번호표가 아닙니다. 결코 착각하지 마세요. 여러분의 가슴 한 켠에 훈 할머니가 남아 있길 바랍니다.

 

대구대 신문 2005. 3. 2(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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