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현재 진행형

16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8/03/15
    너무,나
    꿈꾸는나비
  2. 2008/01/06
    눈물겹지만 첫눈이었다
    꿈꾸는나비
  3. 2007/10/26
    40분 남았다
    꿈꾸는나비
  4. 2007/09/03
    열정에 반하여 열정을 만들어 갑니다
    꿈꾸는나비
  5. 2007/06/22
    내 삶은 운동이 되지 못했다
    꿈꾸는나비
  6. 2007/04/23
    대추리 완두콩을 심다(3)
    꿈꾸는나비
  7. 2007/02/20
    사진 정리하다가(3)
    꿈꾸는나비
  8. 2007/02/15
    연애 예감2(4)
    꿈꾸는나비
  9. 2007/02/13
    연애 예감1
    꿈꾸는나비
  10. 2007/01/13
    2006년 후반기 내 삶의 중심에 있었던 '농민장터'
    꿈꾸는나비

너무,나

자기만 생각하다 못해 이기적이고

 

아무 계획 없이 일 때려치우며

 

허풍이 빈말이 내 삶에 익숙해져 부메랑될 줄도 모르고

 

장가갈 나이에 엄마한테 돈 받아 연애질하고

 

간만에 애인랑 데이트하면서 한숨 쉬고, 인상 찌푸리고

 

배알도 없이 애인한테 잔소리를 듣고도

 

대책없이 웃고 있는

 

너무,

나 인것 같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눈물겹지만 첫눈이었다

눈물겹지만 첫 눈이다
- 대구에 올 첫눈을 생각하며

 

신경현

 

이 공장 저 공장 이력서 싸들고 찾아다니다
불꺼진 쓸쓸한 집으로 돌아오는 실업의 사내여
오랜 싸움속에서
희망 보다 한숨이 먼저 쌓이는 천막농성장이여
밤을 세워 일을 하다
깜빡 찾아오는 졸음에 젖어버린 작은공장 노동자여
가난을 피해 도망치듯 무한경쟁의 대한민국을 찾아온 이주노동자여
눈물겹지만 첫 눈이다
절망 보다 희망을 먼저 껴입지 않으면
결코 겨울을 날 수없는 사람들에게
첫 눈은,
첫 눈이 내리는 잠시만큼은
눈물겹지만 축복이다
눈물겹지만 사랑이다
서럽지만 왠지 따스하다


눈물겹지만 첫눈이었다

 

토요일 일 마치고 돌아와 그래도 토요일은 밤이 좋은데, 이곳에서 얼굴보며 술 한잔 걸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문자를 보내고, 전화를 했지만 한잔 걸칠 수 있는 기회가 꽝이 되었다. 한겨레 기사가 생각나 동보서적으로 가서 80년대산 등단 작가의 등단기를 셔터문 내릴 때까지 다 읽고 나와서 피시방에 앉아 그날 대구를 생각한다. 눈물겹지만 그리움이다.

 

부산으로 내려간 이유 중 하나가 제 발걸음으로는 집구석에 들어 가기 싫어서 구릉이 담 넘어가듯 이종사촌 형들의 등에 떠밀려 억지스럽지만 집구석에 가끔씩은 갈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 잔정이라곤 전혀 없던 피붙이, 그 아들도 그대로 이어받아 억지스레 찾아간 엄마. 점심을 같이 먹을 요량이었지만 가시방석처럼 느껴져 얼굴만 보고는 칼바람처럼 뒤돌아 섰다. 후회로 대구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눈물겹지만 집구석이었다.

 

동대구역에 도착해서 녹평으로 향하던 버스 정류장에서 첫눈을 맞고는 눈물을 겨우 참으며 경현이 형에게 전화했다. "형, 눈물겹지만 첫눈이네요" 변비 앓듯 하지 말고 쑥쑥 쾌변을 보듯 글을 쓰게 하기 위해 가끔씩 전화해서 푸짐한 안주에 소주 걸치고는 집까지 가서 문청이던 한창 때의 이야기와 몇 권의 책을 챙겨주던 경현이 형. 첫눈을 보니 형이 생각났다. 그리고 홍철 형이불렀다던 그 노래도 듣고 싶었다.

 

아무리 술을 먹어도 취하지 않는 날이 있다. 내게 안 좋은 술버릇 중 하나가 기절해서 자는 걸 즐기는 것이다. 요즘은 아예 그럴 질 않고, 사람을 만나 수다 떨고 싶어 술을 찾는다 그러다 마실 사람 없으면 이 악물고 참는다. 한 일주일 참으면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는 것 일까. 아니다 보고싶은 사람과 함께 마시니 취할 시간이 없었던 것 같다. 낮술부터 시작된 2007년 마지막 날. 한잔 걸치고 잠시라도 잘 생각이었다. 뜨거운 몸으로 안달 난 남녀사이도 이럴까. 무슨 할 이야기가 그리 많았을까. 집에 와서 와인에 병맥주까지, 또 맥주를 마셨다. 너무 행복했다. 딱 세상이, 내 삶이 이 기분이었으면.

 

앞으로 영원히 있어야 할 산, 앞산. 술로 시작된 2008년, 앞산에서 시작된 무자년. 기억하자. 패배로 기억될지라도, 기억하다 용량 초과로 터져버리거나 미쳐버리더라도 살아남자 그리고 기억하자 또 싸우자. 잠시 대구를 떠나 있어도. 이런 생각들로 함께 한 상수리 나무와 함께 서 있었다. 잠시 공간앞산달빛에서 몸을 녹이는 동안 난 취하기 위해 부지런히 술을 마셨지만 부질없는 짓, 술만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간에 있던 기타가 눈에 들어온 사람들끼리 자연스러운 노래가 흘러 나왔다. 조만간 땅과자유 회원들 반은 기타를 보물 1호로 지정할 것 같은 느낌으로 기타에 대한 예찬과 투덜거림이 양념으로 들어간 노래를 본능적으로 난 엠피쓰리에 녹음하고 있었다. 홍철형의 노래를 마침내 듣고는 난 너무나 대책없이 감상적이어서 탈이야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눈물 젖은 박수를 쳤다.

 

이등병 백일휴가 복귀하듯 부산행 기차 안에서 녹음되어 있던 노래와 웃음소리 그리운 목소리를 들어면서

눈물겹지만 첫눈이다
눈물겹지만 내 삶이다
눈물겹지만 앞산이다
눈물겹지만 땅과자유다
눈물겹지만 대구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40분 남았다

40분 뒤면 난 노동하러 가야한다. 어제부터 아! 욱쀅에서 청소를 시작했다. 무작정 했다. 머리에 잡생각이 많이 생겨 도저히 백수로 보내다간 맛탱이 갈 것 같아서. 나에게 주문한다. 난 청소노동자다 라고. 간만에 땀을 흘리고 일하니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것 같았다. 물론 이 기분이 언제까지 갈지는 미지수다.

 

갈피를 못 잡아 우유부단하게도 물리치지 못 했던 같이 일하자는 제안. 선뜻 응하기도 하고, 미지근하게 웃어 넘기기도 했다. 근데 사실 중요한 건 내가 막연하게 귀농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게 너무 먼 이야기처럼 느껴졌으며, 그래서인지 더 더욱 공중에 떠 있는 상태였다.

 

사춘기 시절 정말 죽을 똥, 살 똥 꿈을 가꿔가던 게 미대 진학 실패로 사라진 채 그저 살아왔다. 물론 운동을 만나 열정을 알 수 있었지만, 그게 꿈은 아니었다. 근데 나에게 꿈이 생겼다. 예전에도 어렴풋이 꿈꾸다 접고 또 꾸곤 했지만, 가슴에 묵직하게 다가온 건 처음이다. 물론 이것도 꼼수이긴 하나, 어쨌던 한 1년 정도는 죽을 똥, 살 똥 하고 싶어졌다.

 

그 1년의 삶을 위해 최소한 비용을 청소노동으로 청춘을 유예시키려고 한다. 혹시 로또 광풍처럼, 공무원 고시 열풍처럼 내가 망상에 허우적 거리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1년쯤은 괜찮지 않을까 싶다. 장정일이가 스무 살 언저리에 느꼈던 것들을 내 식으로 당당히 말하고 싶다.

 

 "나만의 공간에서 글을 쓸 수 있는 노트북과 카메라를 가지고, 일마치면 내가 쓰고자 하는 글을 후회없이 쓰는 것, 그 나머지 시간은 내가 보고 싶은 책 후회없이 보고 땅과자유 활동에 함께 하고 가끔씩 막걸리 한 잔 하는 것"

 

1년 동안만이라도. 남들은 적금통장에, 청첩장 돌리는 나이가 될지라도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열정에 반하여 열정을 만들어 갑니다

[홈에버 1인시위 17일차] 열정에 반하여 열정을 만들어 갑니다




산위에서 부는 바람 서늘한 바람
그 바람은 좋은 바람 고마운 바람
여름에 나무꾼이 나무를 할때
이마의 흐른 땀을 씻어준대요

강가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
그 바람은 좋은 바람 고마운 바람
사공이 배를 젓다 잠이 들어도
저 혼자 나룻배를 저어 간대요

-동요 산위에서 부는 바람


산위가 아니기에, 폭염 주의보가 내려지는 대구이기에 당연히 이런 바람은 없다. 6월 22일 한미FTA 전면무효 대구경북 총궐기대회 행진하면서 따가운 햇볕 맞으며 숨이 턱 막힐 때 이마의 땀과 한미FTA로 인해 착취와 억압의 구조가 더욱 공공히 될 먹구름을 몰아낼 시원한 바람을 기대했었다. 분명 평생을 농사꾼으로 살아오신 할머니께서 명아주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걸어가시는 모습을 보며 우리에게는 시원한 바람이며 저들에게 치명타가 될 칼바람이 필요했다. 그 바람은 무서운 바람이다.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 밑바닥부터 끓어오는 것이며 목숨을 잃고, 바치면서 만들진 바람이다. 이 바람을 만들어가는 열정이 어느덧 나에게 와 있었다. 그게 ‘심바람’이라 불러도 상관없을 것을 같다.

고백하자면, 항상 미온적, 소극적 당원이었다. 물론 당에 대한, 당원으로 확고한 신념이 없었기에 더욱 그러 했을 것이다. 우정에 기초한 당원이랄까. 딱히 도움이 될게 없지만 당비라도 열심히 내야지에서 당이 왜 이건 안 하느냐, 이래서 당이 싫어 등등 주체가 되지 못한 체 속으로 불평불평만 하고 뒤죽박죽이었다. 하지만 한미FTA 저지 투쟁 속에서 그 거리는 좁혀졌다. 한미FTA 저지 투쟁 속에서 항상 함께했던 민주노동당이 점점 나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투쟁으로서 감동을 만들어 내었으며, 그 감동은 분명 사람을 움직였다. 얼마 전 입당한 정태인 당원이 그 예일 것이다. 비정규법에 맞선 노동자들의 투쟁에 가운데 서 있는 뉴코아-홈에버 노동자들과 함께 하고 ‘전태일과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에서 일어나는 모든 차별에 저항한다면 난 민주노동당 당원으로서 함께 길을 갈 것이다.




그래서 섰다. 더러운 자본과 그에 기생하는 정권에 의해 여성노동자들이 끌려나오는 그날을 기억하고 잊지 않기 위해서. ‘심상정을 지지하는 민주노동당 당원’의 릴레이 1인 시위가 17일차인 오늘, 새삼스럽지만 스스로에게 질문해 본다. ‘피켓 들고 서 있는다고 악덕기업이 좀 덜 악덕한 기업으로 변하기라도 하나, 가지도 말고 사지도 말자 라고 하지만 스스럼없이 출입문으로 들어가 한 보따리씩 들고 나오는 사람들이 홈에버에 안 갈까.’

확실히 말 할 수 있는 건, 난 절대 안 사고, 절대 안 간다. 그리고 17일차 동안 릴레이 1인 시위를 한 당원들도 안 간다. 앞으로 1인시위할 당원도 안 간다. 대선후보가 결정되면 이 1인 시위도 끝날 것이다. 하지만 단발성으로 끝나는 김빠지는 행동이 아닐 것이며, 이 열정으로 또 다시 투쟁 속으로 뛰어 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당당히 민주노동당 당원의 이름으로, 신명나고 시원한 바람을 만들어가는 열정으로.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내 삶은 운동이 되지 못했다

간만에 열린 땅과자유 학교에서 “내 삶과 운동을 위한 성찰”을 주제로 공부했다. 예습이 부족했던 것 같았다. 작년에는 스스로 열의를 가지고 공부를 했는데, 시와 노래를 준비도 못 했고, 주제가 내게는 진부했던가 별 고민이 없었다. 다함께 읽고 이야기 하면서 갈피를 못 잡는 생각들이 떠올랐다.

 

추려보면 ‘난 가난한 삶을 살고 있나? 가난한 삶을 어떻게 내 삶으로 소화해낼 것인가 그래서 어떻게 살 것인가’, ‘내게 가난한 삶은 과연 무엇인가, 그래서 나만 그렇게 살면 되는 것인가’, ‘나는 운동을 하고 있는 건가’ 뭐 그런 생각이 지금껏 계속 들었다.

 

백수 생활을 청산하고 ‘신천에스파스’ 라는 사업에 함께 하면서 우여곡절과 불화에 스트레스를 받으며 최저 임금 받는 노동자이지만 그 돈 받기도 참 힘들구나 싶었다. 처음 가졌던 꿈인 도시농업에 준하는 계획 또는 귀농 직전의 몸 다지기와 운동이 아닌 생활로서 대중과 만나는 첫 직장이라 그 속에서의 기대와 설렘이 분명 있었다.

 

하지만 일개 삽질하는 노동자로 강등되면서 노동 조건의 심각성이 인식되기 시작했다. 내가 너무 까탈스럽나 싶기도 하며 NGO단체의 프로젝트 사업이지만 이건 좀 아니다라는 생각에 노동 상담도 받으며 노동기본권에 대해 공부를 해야겠다는 현실이 눈앞에 떨어졌다. 나의 인생 설계와 다른 방향으로 전이되었다.

 

그 속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의기투합하여 문제 인식을 공유하며 함께 이야기 했고, 책임자와 면담도 했다. 그 사람들과 함께하는 데 모든 걸 집중했다. 그래서 집회나 다른 행사나 모임에 소홀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 함께 했던 한 여인에게서 사랑을 받기도 했으면 연애도 했다. 그리고 많이 다르다는 것에 쿨하게 웃으면서 예전의 나로 돌아왔다. 그 찰나에 함께 했던 동료들은 떠났다. 노조 설립은 아니더라도 그에 대응하는 뭔가를 막 시작하려 순간 맥이 풀려 버렸다. 이 모든 게 한 달 안에 일어났다. 급여명세서가 나오는 직장을 정리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출근하고 퇴근한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던 연애가 끝나면서 많이 반성하게 되었다. 그 속에서 다시 나의 삶과 운동을 생각되었다. 행복했던 기억 속에서 서로 많이 싸웠다. 박노해의 시 「이불을 꿰매면서」를 편지로 보내며 나의 행동은 그렇지 않을 것처럼 말했으나 결국 이불호청을 꿰매며 찌른 바늘의 각성은 의식으로만 존재했던 것을 뒤늦게 알고 말았다. 머리 속에서만 존재하고 입으로만 바른 소리하고는 행동은 전혀 다른 나를 새삼스럽게 보고 말았다. 결국 골방에서 혼자 책만 본 게 아닌가 싶었다.

 

사랑하는 사람하고도 소통을 못 하는 내가 어찌 대중을 조직하고 민중을 말하는지 부끄럽기 짝이 없다. 2년 넘게 생활했던 8만원짜리 자취방을 도망치듯 나온 것도 어쩌면 가난한 삶을 이야기하기에는 나의 머리와 몸은 따로 인 것 같다. 찜통 같은 자취방을 떠나와 에어컨 나오는 고시원에서 머무는 나. 결국 나의 삶도 원룸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내 꿈인 땅에 뿌리내리는 일에 대해서는 가꿔가고 있다. 그게 어떤 방향을 튈지는 모를 일이지만. 땅에 뿌리내린다고 해서 모든 게 해결되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소음에 진저리나는 이곳에서도 분명 당장 해야 할 일과 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그 사람과 함께 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함께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 꿈이 느리게 천천히 가지만은 땅에 뿌리내릴 것이다 라는 나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 전제 조건은 원룸과 에어컨이 내 삶에서 이별하는 순간일 것이다. 나의 생각이 너무 진부하고 식상하고 또 머리 속에만 있는 것인가? 사랑을 잃고 내 삶의 길이 흐릿하지만 권정생 선생님과 김종철 선생님의 말이 깊숙이 박혀 있다

 

“가난한 삶을 우리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 승용차를 버리고 30평 아파트를 반으로 줄이는 길뿐이다. 그래야만 석유 전쟁에 파병을 안 해도 떳떳할 수 있다.”

 

“가난한 삶과 비참한 삶은 구별되어야합니다. 10년, 20년 옷 한 벌로 지내고 누더기가 되어도 신념이 있고 사상이 있으면 위엄이 있고 아름답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대추리 완두콩을 심다

마리아에게 부탁했던 완두콩을 한 움큼 얻어 받았다. 나에게 있어 그냥 완두콩이 아니였다.

완두콩을 심기에는 늦은 감이 있지만 정성스레 심었다. 마치 애인을 만나러 가듯

설레이며 완두콩을 들고 텃밭으로 향했다.

"기억하기 위해 싸운다."

하지만 함께 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항상 마음 한켠이 무겁다.

마지막 촛불행사도 참석하지 못 했다. 그래서인지 지킴들이 부른 노래를 매일 듣고 있다.

"기억하기 위해 심었다. 씨앗을 받아 내년에도, 영원히 심을 것이다. 완두콩만은 꼭."

"대추리 도두리 황새울은 영원하다"

일단 네 고랑만 심었다. 이 소중한 씨앗을 다른 분께도 나눠 드려야 할 것 같았다.

 

작년 팔공산에서 시작되었던 텃밭농사가 올해는 내 방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곳으로

이사를 했다. 영숙선배가 없었다면 가난한 청춘의 꿈은 항상 꿈만 꾸고 있을텐데.

이렇게 텃밭농사를 지을 수 있어서 좋다. 더욱이 대추리 완두콩을 심을 수 있어서. 

평화시장에서 고추 모종도 사와 심었다.

 

이번주 토요일은 지주대를 세우고, 고추랑 오이, 쑥갓, 상추도 심어야 할 것 같다.

수확물을 거둬 집밥을 그리워하는 자취생들과 나누 먹어야 겠다.

 

"농사를 지으면 평화가 옵니다"

 

 *엎어지면 코 닿을 곳. 주말마다 나의 열정을 쏟아 부을 작정이다.

 

 *대추리 완두콩을 심었다. 대추분교, 황새울, 지킴이 숙소... 대추리 도두리 모든 것이 열매로 맺힐 것이다

 

 *밥상에 오를 아삭아삭한 고추를 생각하니 입맛이 돈다. 나눠 먹어야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사진 정리하다가

게으름으로 인해 2006년의 상반기 나의 모든 것이었던 '텃밭 농사'를 이제사 정리를 하게 되었다. 백수로 시작된 2006년 봄, 서툴지만 소꿉장난 같은 텃밭을 가꾸고 싶어 수소문하다가 참여연대 동구주민회에서 팔공산 자락에 텃밭 농사를 시작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동구주민회에 있는 선배를 찾아갔다.

 

<주말농사 텃밭가꾸기> 새책도 들고와서 선배랑 함께 하기로 했다. 불로시장에서 상추씨, 쑥갓씨, 고추모종, 오이모종, 호박모종, 가지모종을 사들고는 밭을 일구고는 심었다. 처음 시작하는 농사 치고는 욕심을 부렸다. 땅은 무한정 있는 곳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뭔가를 계속 심고 싶었다.  고구마, 자두가 챙겨준 대추리산 옥수수씨, 동현선배가 챙겨준 검은 콩, 자취방 주인 어머니께서 챙쳐주신 파, 정구지를 얻어서 무작정 심었다. 물 주고 김 맬 것을 생각도 못하고는 욕심껏 심었다.

 

팔공산 자락에 있지만 차를 가지고 가지 않으면 불편하다. 그만큼 깊은 산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야생동물로 인해 농사를 짓기에는 힘들다는 점도 있다. 고구마, 콩은 심는 그 순간 동물들의 먹잇감인 것이다. 한여름 땡볕에도 자전거로 왔다갔다 했다. 1시간 거리를. 근데 문제는 그렇게 준비를 하고 가지만 가는 동안 힘을 소진한 터라 물주고 김매다 보면 지쳐서 그만하고는 김밥 까먹고 돌아왔다. 텃밭농사 보다는 소풍에 가까운 것 같았다. 그 때도 그랬지만 자전거를 타고 밭에 애인이 있다고 생각하고 페달을 힘껏 밟는 것, 즐거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행복했다.

 

장마철이 지나고는 밭을 찾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작정하고 함께 농사를 짓던 선배들과 찾았다. 그 새 달맞이꽃 밭으로 변신해 있었다. 한숨 크게 함 쉬고는 낫질 반쯤하다가 힘들어서 그만하고 맛있는 밥 먹었다. 손바닥만 했던 나의 밭에서 상추, 쑥갓, 고추는 여러번 거둬 주위 사람들과 나눠 먹었고, 끝에 얻은 수확물은 오이 몇 개, 단호박 1개, 가지 몇 개를 땅과자유 식구들에게 자랑했다^^;;

 

올해도 이 기분을 이어가기 위해, 좀 더 가깝고,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밭을 구하고 있는 중이다. 작년에 행복했는데 올해도 행복하려고 한다. 작년 보다는 어설프고 서툰 밭 가꾸기가 줄어 들길~

 

-머리 털 나고 처음 내 입으로 들어갈 작물을 심었다.



 -씨부리기를 하며 반신반의 했는데 이렇게 고개를 내밀었다. 쑥갓

 

 -뭐지?

 

 -주인집 어머니께서 주셨던 씨앗으로 이렇게 자랐다. 파

 

 -단호박, 거름을 듬뿍 주지 못했지만 이렇게 자랐다.

 

 -장마 지나고 나서 달맞이꽃 밭으로 변신해 있었다. 누가 몰래 와서 씨앗을 뿌렸나보다.

 

-달맞이꽃 밭에서 찾아낸 달개비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연애 예감2

오늘은 울고 싶다
근데 울지 않고 있다
오늘은 취하고 싶다
근데 아무리 마셔도 말똥말똥

 

어제 문자메세지에 반신반의 했지만 그 말에 취했다
오늘이 발렌타인데이란다, 그래서 만나는 거라
선배가 웃음기 띄며 궁금해 했다
등달아 나도 그랬다

 

친절한 그대는 저녁밥을 찜닭으로 같이 먹으면서
많이 먹지 않는다고 타박했고
맛있는 커피를 마셨다
주춤거리며 잇지 못 한 말,
단박에 느낌이 왔다

 

간만에 찾아온 추위 속을 걸었다
체념 모드로 말했다
충격 흡수 된다며

 

수많은 말들
기억한다
각인,
웃었다
그리고 씩씩했다

 

현실, 그게 지금의 스물 아홉, 여덟
내 삶이다

끝이 아니라고
내 모든 열정을 쏟아 붓고자 다짐했지만
오늘은 무너진다, 끝내 소통의 부재

 

그 동안의 불면증이 오늘로써
증명된다
불안한 그 예감은, 어김없었다
오늘은 푹 자고 싶다

 

평택 지킴이들은 깡소주에 권주가를 부른다는데
난, 너무 간사하며 개인적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연애 예감1

온종일 그것도 모자라 잠자리에서도 그대를 생각했다.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에 잠을 깨고는 욕들어 먹을 각오하고 방에 쳐박혀 있으면서도,

유쾌하지 못한 뉴스를 접하면서도,

불확실한 내 삶 앞에서라도 그대를 생각했다.

 

불면증,

오늘은 편히 잠을 자고 싶다.

잠을 잘 수 없다.

그대 때문에 잘 수 없다면 믿을 수 있을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6년 후반기 내 삶의 중심에 있었던 '농민장터'

2006년 후반기 내 삶의 중심에 있었던 '농민장터'

 

늦게 장터 정산을 끝내며, 나도 정리를 해야할 것 같았다.

말끔히 정리된 로드맵이나 장터 취지의 휘황찬란  선배의 글에 주눅이 든 건지 농민장터에 관한 글은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 같다. 6개월 가량을 함께하며 보낸 시간들인데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니 조금은 아쉽고, 섭섭하다.

 

2006년 7월 21일부터 10월 27일까지 매주 금요일 농민장터를 열었다.

경북지역의 10여개의 시군 농민회 소속 생산자들의 물품을 직접 들고와서 장사꾼의 잇속이 아닌 농민의 똥줄타는 심정으로 장터에 참여했을 것이다. 대구공업대학 운동장에서, 대구MBC 앞마당에서, 수성구민운동장 주차장에서, 북구 관음운동장에서, 경북대 운동장에서 총 14차례를 열었다.

 

찜통 더위의 땡볕을 받으며 시작해서 느닷없이 내리는 비를 원망하기도 했고, 금요일마다 일기예보는 '비' 라해서 항상 걱정을 했으며 떨이를 하고 싶어도 어느덧 짧아지 해를 끝으로 대장정의 장터도 파장을 했다.  풀어내자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뒤죽박죽이겠지만 어디 이것 뿐일까. 근데 말자. 내 속만 터지고 후회스러울 뿐 일 것이다.

 

이것 하나만은 확실히 얻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 순전히 내 개인적인 수준과 느낌이겠지만. 금호의 힘이라 일컫는 영천의 연사부장님은 항상 사무국의 운영을 걱정해하며 배즙을 먹어라며 몇 박스씩 챙겨주셨고,  성주의 사무국장님,  안동의 형님들, 경산의 호균선배, 고령의 고시생 같았던 농민분, 의성의 자부심과 한미FTA 저지에 역설이시던 어르신들, 장터 식당의 주인이셨던 상주 여농의 조직부장은 항상 덤으로 부침개 또는 묵을 주셨다. 생각난다. 다시 장터 실무를 보기는 싫지만, 지금 생각나는 사람들은 보고 싶다. 항상 소주가 뒤따라다녔던 장터, 다같이 모여 소주 한잔하고 싶다. 집회 현장에서 말고.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